74. 귀환(1)
회사 생활에 찌든 회사원.
등교하는 학생.
철컹-철컹-
규칙적인 소리가 울려퍼지는 지하철 객실 안.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한 여인이 주먹을 불끈 쥐며, 각오를 다졌다.
이 여인의 이름은 강희나.
오늘 있을 현장 실습에 앞서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엄청나게 커졌네.’
강희나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문 너머 풍경으로 향한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였다. 햇살은 눈 부실 정도 쨍했으며, 풍요롭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고요했다.
그런 강희나의 눈을 사로잡는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원래라면 남산타워가 우뚝 솟아 있어야 할 산으로 거대한 나무가 비대한 위용을 내뿜는다.
저 나무는 5년 전, 격변과 함께 자라난 세계수였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손바닥 한 뼘 정도로 작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렇게 멀리서 봐도 가깝게 느껴질 정도로 거대했다.
“누나, 나 이제 내려.”
강희나가 세계수를 보며, 감상에 잠긴 그때, 강희나의 아래에서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희나의 허리춤에 오는 작은 키. 똘망똘망하게 생긴 남자아이가 고개를 빼꼼 들어 올리곤, 강희나의 상의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오늘 시험 있다고 했지? 잘하고 와.”
이 아이의 이름은 오유성.
5년 전, 오빠가 실종된 그 날. 격변으로 모든 것을 잃은 아이였다.
강희나는 오유성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씨익 웃어 보였다.
“으악! 누, 누나나 잘해. 괜히 사고 치지 말고. 난 간다!”
오유성이 강희나의 손길을 질색하며, 열린 전철 문 너머로 달려 나간다.
“씩씩하네.”
강희나는 그런 오유성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말투가 약간 건방지지만 나쁜 아이는 아니다.
찌이잉-
당장 지금 온 메시지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유성이]
-괜히 잘하려고 나대지 말고, 눈치껏 뒤에서 따라다녀, 실습 때 사고가 자주 난다더라. 이건 참고 영상이니까. 가면서 봐.
[링크]
툴툴거리며 나간 것 치곤 걱정 가득한 메시지이지 않은가.
‘짜식, 귀엽긴.’
강희나는 피식 실소를 내뱉으며 링크를 클릭했다.
이미 저 영상은 수십 번도 넘게 본 자료였지만, 복습해서 나쁠 건 없었다.
-반갑습니다. 너튜브 친구들. 오늘은 게이트 클리어에 있어 서포터가 취해야 할 역할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영상 너머로 우람한 사내가 설명을 시작한다.
-서포터는 말 그대로 헌터가 게이트 공략에 전념할 수 있도록 서포팅을 하는 포지션을 맡습니다.
강희나는 헌터 사관학교에서 서포터를 희망하는 학생이었다.
수업을 통해 교육을 받은 세월만 무려 1년.
영상속 내용은 학교에서 수백번도 더 연습한 내용이었다.
‘보니까 괜히 더 떨리니네.’
하지만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오늘 하는 실기 실습은, 연습이 아닌 실제로 게이트를 들어가는 일이었으니까.
‘진짜 레벨도 오르나?’
강희나는 어느샌가 난 자리에 앉아, 허공을 조작했다.
띠링-
[상태창을 불러옵니다.]
5년 전 격변이라는 사건이 일어나도 몇몇 사람들에게 신비한 능력이 부여됐다.
강희나 역시 그 대상자였다.
다만, 아쉬운 게 있다면.
띠링-
[강희나]
레벨: 1
HP: 40/40
MP: 3/3
스태미나: 2/2
생명력: 4
정신력: 3
지구력: 2
근력: 2
기량: 6
체력: 4
지력: 8
감각: 3
행운: 10
비루할 정도로 능력치가 초라하다는 것이다. 거기다 각성자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특성 또한 아쉬웠다.
특성: 포르투나의 축복
[포르투나의 축복]
종류: 특성
등급: S
효과
-행운의 효율이 비약적으로 상승합니다.
남들은 바위도 부수고 하늘도 날아다니는 마당에 강희나의 특성은 고작 운이 좋아지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불만은 없었다.
저 특성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격변으로 괴물들이 쏟아져 내리던 그 지옥 속에서 엄마와 희나는 부상하나 없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 밖에도 건널목에 도착하면 바로 파랑 불로 바뀐다던가, 복권에 자주 당첨된다거나 하는 등, 소소한 행운이 그녀의 뒤를 따라다녔다.
강희나가 자신의 상태를 살피며 앞날을 그리던 그때였다.
찌이이잉-
핸드폰으로 하나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고우림]
-내가 분명히 2시간 전까지, 실습 장소에 장비 옮겨놓으라고 했던 것 같은데. 내 말이 우습보네. 이따가 보자 ^^
이번 실습을 같이 받는 팀의 조장, 고우림으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하아···”
강희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시간을 확인했다.
[AM 8:13]
실습은 10시에 시작된다.
장구류라면 최소 9시까지만 옮겨도 충분할 걸 왜 2시간 전에 미리 옮겨놓으라고 하는 건지.
아니 애초에 맥락부터 잘못되었다.
평범한 파티라면 실습에 앞서 다 같이 장비를 가지고 실습 장소에 갈테니까.
강희나는 알고 있었다.
고우림이 지금 말도 안 되는 부조리를 시키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한두 번도 아니고 어쩔 수 없지.’
강희나는 익숙하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며, 시선을 돌렸다.
[이번 역은 어린이대공원 어린이대공원역입니다.]
때마침 학교가 있는 목적지에 도착했고, 조금이라도 빨리 움직이기 위해 서희빈은 다급하게 뛰어갔다.
***
화르륵-
검은 불길이 치솟는다.
콰르릉-
하늘 위론 검은 먹구름이 가득했으며,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하던 도심은 타다 못해 백골이 된 시체로 꽉 들어차 있었다.
처벅-처벅-
우빈은 지옥의 중심을 걸으며, 배를 부여잡았다.
이 지옥이 시작되고 많은 시간이 흘렀다.
찌이잉-
[경매장을 이용하실 수 없습니다.]
경매장을 시작으로 사소한 작은 마을까지 전부 타버린 지금. 엘리드에서 먹을 걸 구할 수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배고팠다. 미친 듯한 갈증과 허기가 뇌를 후벼팠다.
물론, 먹을 게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지금도 시련의 고통에 허덕이고 있는 그 새끼들의 육체가 있지 않은가.
그걸 먹는다면 배고픔과 갈증을 동시에 해소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차라리 굶어 죽고 말지.’
우빈은 미간을 찌푸리며, 발걸음을 이어나갔다.
지금 우빈이 있는 장소는 메아로카의 도심의 중심이었다.
5대 왕국 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큰 왕국이라 그런지, 규모부터 남달랐다.
단순하게 보이는 집만 수천 채, 과거의 영광이 무색할 정도로 우뚝 솟은 성은 활활 불타올라 뼈대만이 남아있었다.
‘여기인가.’
우빈은 불길로 타버린 건물 중, 한 빌딩 앞에 섰다.
다른 건물과는 다르게 아직도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세이버의 사옥이었다.
분명, 이 지하실에 차주성이 십여 년간 모아온 아이템이 잠들어있다고 했다.
이미 복수라는 목적을 달성한 우빈에게 있어 아이템의 가치는 제로에 가까웠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지 않은가.
음식에 관련된 무언가가 잠들어있을지도.
우빈은 망설임 없이 지하실로 이동했다. 이철영의 기억을 엿봐서 그런지 어렵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다.
화르륵-
분명 지하 4층인데도 불구하고 검은 불길이 가득했다.
이철영의 기억에 따르면 적어도 수백 개 이상의 장비가 있어야 할 텐데. 지하실 내부는 텅텅 비어있었다.
바닥에 녹아내린 액체를 보아하니, 지옥 겁화의 화력을 이기지 못하고 타버린 듯싶었다.
그러나 전부 소실된 건 아니었다.
우빈의 시선이 한 장소로 향한다.
띠링-
[성검: 아클레이사+4]
종류: 대검
등급: S
내구력: 13/160
공격력: 8(+4)
근력:+3
기량:+5
체력:+1
룬석: [섬광] [정화] [심판]
효과
-빛 속성 생성.
-빛 속성 데미지 150% 증가.
-대상을 정화합니다.
어둠으로 가득한 방안으로 한 자루의 검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저 검뿐만이 아니었다.
각종 방어구와 무기 10여 개가 바닥에 떨어져 조금씩 빛을 잃고 있었다.
확인해보니, 전부 S급. 특유의 강도로 열기를 버티고 남아있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내구력을 보니, 이마저도 얼마 남지 않아 보였다.
‘없네.’
우빈은 무의식적으로 아이템을 챙기며, 고개를 저었다.
이 장소에 온 목적은 허기를 달래기 위해서이지 않은가. 그러나 어디에도 음식에 관련된 무언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정말 이대로 굶어 죽는 걸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까.
꼬르륵-
위가 스스로를 소화시킨 듯 쓰라린 고통이 배를 압박하던 그때였다.
-제발··· 그만··· 제발···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어둠 너머로 오싹한 흐느낌이 들려왔다.
‘뭐야?’
지옥 겁화가 엘리드 전역을 뒤덮은 시점으로 살아있는 생명체라고는 감염된 레이핀이 전부였다.
그런데 사람 목소리라니, 도대체 누구일까?
우빈은 소리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고, 볼 수 있었다.
화르륵-
검은 불길로 가득한 방의 중심. 한 생명체가 구속 장치에 얽매여 있었다.
끔찍한 외모였다.
피부와 근육이 전부 불타버려, 녹아내리는 플라스틱처럼 흐물거렸고, 눈알이 있어야 할 장소로부터 검은 액체가 흘러내렸다.
살아있다는 게 이상할 정도로 처참해 보였지만, 왜 살아있는지는 유추할 수 있었다.
-죽여 줘··· 제발··· 그만···
그 생명체의 명치 부근으로 강렬한 주황빛 광체가 반짝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발의 NPC인가.’
이철영의 기억을 미루어보아, 저 생명체는 곽정수가 납치해온 백발의 NPC였다.
감염된 김백청을 처치했을 당시, 정보도 안 떠오르던 물체에 시스템의 빛을 부여해 정현태를 쉽게 처리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막연하게 아드로스와 무슨 연관이 있겠거니 했는데, 저 모습을 보자 확실해졌다.
저 NPC는 아드로스와 어떤 연결점이 있는 존재는 모양이었다.
우빈은 고통스러워하는 NPC를 보며, 주머니 속 하나의 물건을 꺼냈다.
이세현에게 당한 과거 유주의 육신에서 추출한 주황빛 파편이었다.
안 그래도 이 물건 때문에 백발의 NPC를 찾아다니지 않았던가.
지금에 와선 아무런 의미가 없었지만, 문득 호기심이 들었다.
우빈은 무미건조한 표정을 지으며, 파편을 고통스러워하는 NPC에게 가져다 댔다.
엄지손톱 정도로 작은 결정이 심장처럼 쿵쾅거리는 핵과 툭 부딪친 그 순간이었다.
화아악-
작은 파편으로 강렬한 빛이 터져 나오는가 싶더니.
-허···억.
고통에 허덕이던 NPC의 육신이 불타 녹아내린다.
띠링-
[1번째 파편]
종류: 세계수의 파편
등급: EX
설명: 세계수의 원동력인 엘리드의 1번째 파편입니다. 7개의 파편으로 세계수의 힘을 되찾아 긴 모험의 여정을 끝내세요. 엘리드를 구한 영웅에겐 엘리드의 비보를 지급합니다.
‘파편···’
우빈은 시스템의 빛이 서린 파편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이미 파편이라 하면, 나인테일을 처치할 당시 하나 얻은 상태이지 않은가.
새롭지도 않았으며, 아무런 의미 없는 아이템이었다.
별생각 없이 무의식적으로 인벤토리에 아이템을 넣으려는데, 한가지 문구가 우빈을 사로잡았다.
[모험의 여정을 끝내세요.]
“끝낸다···.”
만약, 파편을 전부 모아, 여정을 끝내면 어떻게 될까. 다시 지구로 돌아갈 수 있다는 의미일까?
우빈 애초에 살고 싶다는 생각이 별로 없었다.
지금 이렇게 배고픔을 달래려는 이유 역시, 그 새끼들에게 최대한 많은 고통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기때문이었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릴 바엔 뭐라도 하는 게 좋아 보였다.
애초에 심심하기도 했고, 운 좋게 더 살 수 있다면 그 새끼들의 지옥이 더 길어질 테니까.
우빈은 오랜만에 느끼는 흥미로움에 미소를 지었고, 파편을 찾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
대학교 캠퍼스를 떠올리게 하는 건축 양식. 푸른 잔디와 세련된 화단.
여느 학교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이는 교내의 중심으로 거대한 수정체가 공중에 둥둥 떠다니며 강렬한 위용을 내뿜었다.
이 장소는 한국 헌터 사관학교.
강희나는 보급품을 지원받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평소와 다르게 교내는 한산했다.
어제부터 시작된 실습 위주의 교육 때문이었다. 아마 대부분이 게이트나 던전에 투입돼 실전 교육을 받고 있을 것이다.
이상할 정도로 고요한 침묵을 느끼며, 길을 걷고 있는데, 후웅- 퍽!
무언가가 날아와 강희나의 얼굴을 때렸다.
“뭐, 뭐야?!”
강희나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날아온 물체를 확인했다.
“돈?”
만 원짜리 지폐였다.
이런 경우가 자주 있었다. 당장, 오늘 아침만 하더라도 그렇다. 지하철 앞에서 지갑 하나를 주웠었다.
물론, 역무원에게 지갑을 맡기고 오긴 했다만, 이런 식으로 주인 없는 돈은 찾아주시는 건 매우 어려웠다.
오랜 경험으로 미루어보아, 주인을 찾아주는 건 불가능.
하지만 그냥 꿀꺽할 수는 없었다. 이 돈 역시 특성 때문에 들어온 행운의 결과물일 테니까.
‘어쩔 수 없지.’
강희나는 주머니 속에 돈을 넣은 뒤, 발걸음을 옮겼다.
한 3분을 걸었을까. 행정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보세요. 네? 김백청 헌터님이 아프셔서 오늘 참석을 못 하신다고요? 이러면 곤란한데. 잠시만요. 다시 연락드릴게요.”
“중곡 3동 게이트가 갑자기 소멸했다고요? 다른 게이트 찾아볼 테니까. 잠깐만 대기해주세요.”
행정실은 시끌벅적했다.
하긴 오늘의 실습은 2학년 전체가 진행하는 현장 실습이지 않은가. 이를 관리하는 행정실이 바쁜 건 당연했다.
강희나는 정신없는 와중 그나마 여유로워 보이는 여인에게 다가갔다.
그 여인은 강희나의 담당 교관인 윤지아였다.
“어? 희나야. 아프며 여긴 어쩐 일이야?”
강희나가 다가가자, 윤지아가 반갑게 말을 걸어왔다.
“네? 제가 아파요?”
“어. 괜찮아? 너랑 같은 조원인 애들이 왔다 갔었어. 너 아프다고 오늘 실습 참가 못 할 거 같다던데?”
“제가요?”
“어. 애들이 그러던데. 지금 막 보급실로 갔으니까. 가면 만날 수 있을 거야.”
“네. 이건 행정실 앞에서 주웠어요.”
강희나는 윤지아의 이해할 수 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아파? 왜 그런 말을···’
강희나는 고우림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애초에 여기까지 왔으면서 장비를 옮겨놓으라고 왜 시킨 것일까?
‘물어보면 알겠지.’
대충 무슨 의도인지 알 것 같았지만, 그래도 같은 반 친구이지 않은가.
앞으로 같이 실습도 해야 할 텐데, 좋게 좋게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하며 걷고 있는 그때였다.
“어머, 희나야.”
“응?”
등 뒤로부터 누군가가 강희나를 불러 세웠고,
“흡-”
강렬한 손길이 희나의 입을 압박하곤 어디론가 끌고 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