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200)

                                               -6-

세상을 감싸줄 것 같은 달빛도 잎을 넓힌 채 몸을 맞닿고 그들만의 행복함에 젖어있는 나

무들의 겉표면만 맴돌 뿐이었다. 고요 속에 잠들어있는 어둠이면서 숲 만이 가진 어둠은 어

딘지 모르게 슬픔에 요동치는 심해처럼 불안한 느낌을 자아냈다. 수도 제플린을 향하여 부

지런히 발걸음을 옮기는 우람한 근육의 사내도 역시 숲의 불안하도록 고요한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지, 몸을 부르르 떨며 쥐고있는 횃불의 몸부림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을 

벗어나고자 힘이 부치는지 가끔 흰 연기를 치익치익 일으키며 꺼질 듯이 타고 있었다. 

「누구이십니까?」 

갑자기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사제 헤모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키가 2m에 달하는 장

신인 그가 흠칫거리며 물러선다는 것은 어찌보면 우스운 일이었다. 횃불은 앞으로 내밀며 

살펴보니, 20살이 약간 넘어보이는 남자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향하고 있었다. 단정해보이

는 외모에 입술은 호감을 주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는데, 그는 귀족적인 외모와는 다르게 매

우 허름한 복장을 걸치고 있었다. 청년은 초가을에 입기에는 너무나도 두터워보이는 짙은 

회색 바지를, 상의는 회색 셔츠에 갈색 조끼를 받쳐입었는데 옷마다 끝부분이 튿어진 실밥

으로 털보숭이를 이룰 정도였다. 가방과 음유시인들이 애용하는 악기, 넬피앙을 함께 둘러

맨 채, 땅을 뚫고나온 거대한 나무 뿌리에 고요히 앉아있는 모습은 귀없는 엘프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봐! 거,거,거어기! 사람인가?」 

「후훗…. 저를 향하여 말하는 것이 맞다면….」 

청년은 헤모의 굵은 목소리가 물결처럼 떨리는 것이 우스운지 한층 짙은 미소를 지었다. 

한숨을 놓은 헤모는 방금 전까지 몸을 감싸고 있던 두려움을 한꺼번에 떨쳐버리려는 듯 호

탕하게 웃으면 말했다. 

「아하하하핫! 괜히 놀랐구만…. 모닥불이라도 켜놓고 앉아있지 좀 그러나? 젊은 사람이 

유령흉내를 내다니, 이것 보라고! 내 심장이 신의 부름을 받은 것처럼 뛰고 있구만!」 

「죄송합니다. 부싯돌이 없어서요….」하고 청년은 겸연쩍은 표정을 짓고는 다시 물었다. 

「사제이신 모양이지요?」 

「그렇다네. 자애로우신 〈레이모하〉의 천한 종, 헤모라고 하네.」 

청년은 어둠조차 알게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엘시크의 국신(國神)인 레이모하를 섬기는 

사제라면 적어도 귀족과 같은 대우를 받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권위있는 종, 헤모는 

나뭇잎과 잔가지들을 긁어모아 횃불로 불을 붙였다. 서서히 불꽃이 이글거리기 시작하자 

그는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어떤가? 숲의 어둠을 밝히며 타오르는 모닥불! 한 여름 밤의 낭만이 아닌가!」 

「너무나 흔한 낭만이죠. 저는 〈시즈〉라고 합니다.」 

「시즈! 참 재미있는 이름이로군. 자네, 〈시즈〉가 고대어로 무슨 뜻인지 아는가?」 

청년는 고개를 저으며 궁금한 시선으로 헤모를 바라보았다. 사제는 그 시선에 만족했는지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시즈는 고대어로 〈마땅찮은〉이라는 뜻일세. 자네는 이름을 참 재미있게 지었어. 하하

하! 마땅찮은 시즈.」 

시즈는 잠시 생각해보더니 빙그레 웃었다. 의외로 그는 〈마땅찮은 시즈〉라는 말을 마음

에 들어하고 있었다. 갑자기 생각난 듯 근육질의 사제는 시즈의 감긴 눈을 바라보며 물었

다. 

「장님인 것 같은데…. 어떻게 숲을 헤매고 있는 거지?」 

「장님이 아니니까요.」 

그렇게 말하자마자 청년의 감긴 눈꺼플이 천천히 올라갔다. 그는 모닥불빛에 눈이 무셔 한

동안 눈을 연신 깜박거렸다. 호수처럼 가라앉은 검은 눈동자는 숲의 암흑과 안정된 대치를 

이루며 헤모를 바라보았다. 

「왜 눈을 안 뜬거지?」하고 헤모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묻자 시즈는 겸연적으면서도 은

은한 미소를 띄웠다. 

「눈이 부시니까요.」 

헤모의 견고한 상체가 순간 비틀거렸다. 흥분한 그는 시즈에게 다가가 한 주먹 쥐어 박으

려고 했지만, 시즈의 다음 말은 그의 팔을 내리눌렀다. 시즈는 가방에서 고풍스런 책을 꺼

내여 펼치며 말했다. 

「게다가 귀찮은 짐승들이 돌아다닙니다.」 

「귀찮은 짐승? 그것이 눈을 뜨는 것과 무슨 상관이지?」 

「동물이 밤에 안광을 내뿜는 것처럼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쉽게 마주치게 되

거든요.」 

「그렇다면 왜 내가 모닥불을 피우는 것을 말리지 않은 거지?」 

헤모의 말에 시즈는 호수처럼 잔잔한 미소를 띄우며 그를 바라보았다. 

「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폴포즈 마을을 떠난 후에 한번도 펼치지 못했거든요. 성기사와 

비교되는 성투사가 제 앞에 버티고 있는데, 뭐 어떻습니까.」 

시즈가 폴포즈를 떠난지 4달 남짓, 그 동안 그는 많은 것이 변해있었다. 시즈가 폴포즈를 

떠난 궁극적인 목적은 원래있던 세계와 현재 그가 발을 딛은 세상과의 연관성을 알기 위함, 

그리고 자신이 〈판타지 세계〉라고 지칭하는 세계에서 살아갈 지식을 얻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모든 것의 기반에는 자유를 얻은 청년의 폭발한 호기심이 깔렸었다. 

〈어느 국가에나 모든 지식은 수도로 귀결되는 법이지.〉라는 누가 했을지도 모를 말을 절

대불변의 법칙인 양, 머리에 새긴 용감한 청년은 수도를 목적지로 삼고 기다긴 여행을 시작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절대적인 약점이 있었다. 초절정의 방향감각을 자랑하는 방향치라

는 점이 그것이었다. 한국에서 가장 증오스러워하는 장소가 출구가 많은 지하철역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시즈에게 지도란 아래도 못 닦는 휴지조각에 불과했다. 청년이 믿는 것은 

나침반과 튼튼한 체력이었으니, 왜소한 몸에 비해 야성적인 성격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가 지나가는 곳에는 꼭 옆구리를 벌레가 뜯어먹은 것과 같은 모습을 한 나무들이 하나씩 

남아있었는데, 그것은 시즈가 목검으로 1000번을 후려친 흔적이었다. 엘프들이 보았다면 

롱 보우를 머리에 겨누고 쫓아올 일이었지만, 시즈에게는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나 다름

없었다. 한국에서 배웠던 무술은 늑대들의 저녁식사 전 유희거리에 불과했고, 자신의 광택 

뺀질나는 검이 늑대의 이쑤시개로 전락했을지 모를 경험 이후, 시즈의 신변보호를 위한 몸

부림은 시작되었다.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여주는 바람 또한, 입이 터져라 〈불어라!〉했지

만 고작 사람을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서게 하는 세기 이상은 움직이지 않았다. 〈수도에 도

착하면 질릴만큼 책을 읽는 거야.〉하던 생각은 이미 머리에서 사라진지 오래였다. 발이 닿

는 마을에서 영지의 치안대원이나 경비대원들을 붙잡고 검술을 배웠고, 장의사를 쫓아다니

면서 시체를 꿰매고 끌어안고하며 약초에 대한 지식들을 배워갔다. 현재의 장소까지 오면

서 4달이라는 시간이 걸린 것은 어쩌면 짧은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 시즈에게조차 분명 앞에 앉아있는 헤모라는 사제는 경외의 대상이었다. 사제라는 그

는 거구에도 불구하고 가까이 올 때까지 시즈는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청년은 4달의 고

된 여행만큼이나 들은 풍문도 꽤나 쌓여있었고, 헤모가 그들 교단을 수호하기 위한 공포스

런 3대 전쟁용 전투집단의 일원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헤모는 자신의 정체를 들킨 

것이 그렇게 놀라운 일도 아니라는 듯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흠…. 그런데 묻고 싶은 것이 있네. 시즈 정도의 사내가 마땅찮아하는 짐승이 무엇인

가?」 

「그들은 늑대입니다. 하지만 덩치는 사자만큼이나 큽니다.」 

「케워크!! 케워크로군! 그것들이 쫓고 있다는 건가?」하고 헤모가 경악을 토해내자, 시즈

는 피식하고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들고 있던 일기장을 내려놓으며 대신 그는 동방대륙

에서 흔히 쓰는 긴 예도를 손에 쥐고 일어섰다. 

「아니요. 쫓고 있지 않습니다. 이미 쫓아와서 노리고 있죠.」 

대답이라도 하듯 멀리 떨어진 수풀 사이로 섬뜩한 안광을 번들거리는 존재가 모습을 하나

씩 모습을 드러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