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200)

                                               -8-

멜도아 강은 대부분의 영토가 평원인 엘시크에 있어서 젖줄이나 다름없었다. 구불구불한 

강의 지류가 실핏줄처럼 토지에 생명을 불어넣었으며, 평원을 비옥한 농토로 탈바꿈시켰

다. 엘시크의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멜도아를 신성시했으며, 수 많은 음유시인

들은 그 고마움과 아름다움을 시로 기리곤 했다. 그런 멜도아와 노트르 평원을 중심으로 가

장 먼저 나라를 일으켰지만 많은 침략의 주요대상국이 되었던 엘시크는 산지가 거의 없어 

방어하기에 매우 불리한 지형적 조건을 극복해야 했다. 다른 나라에 비해 불필요할 정도로 

두텁고 높은 성벽이 바로 그것이었는데, 특히 수도인 제플론은 외성벽과 더불어 왕성 또한 

거대하기로 유명했다. 또 벽돌 하나하나가 상아빛을 발하는 웅장하면서도 성스럽기까지 한 

왕성을 가리켜 엘시크의 사람들은 자랑스러움을 담아서 〈백석 거성 베르니우스〉라고 지

어불렀다. 

베르니우스는 자신의 몸체를 촉촉하게 적셔오는 달빛을 받으며 놀라 잠에서 깨어난 아이

처럼 우유빛을 발했다. 

「크으으윽!!」하는 신음 소리가 제플론의 중앙광장에서 세워져있는 레이모하의 신전에서 

끊이지 않고 있었다. 침상에 엎드려 연신 비명과도 같은 신음 소리를 토해내는 청년을 헤모 

사제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아직 멀었나!? 왜 이렇게 신관이 없는 거지?」 

「죄송하지만 모두 잠들어 있을 시간입니다. 침착하십시오, 헤모 사제님. 이제 곧 신관들

이 도착할 것입니다.」 

빙그레 웃으며 달래는 사제의 얼굴이 그렇게 가증스러워 보일 수가 없었다. 그의 멱살을 

찢어지도록 잡아당긴 헤모는 살기어린 눈동자를 사제의 눈에 가까이 마주치며 거대한 바위

를 유리판에 끌고가는 듯한 쇳소리가 담긴 음성으로 말했다. 

「당장 자고 있는 신관 중 신성술이 가능한 모든 녀석들을 깨워서 1 분 내로 끌고 와라! 

지.금.당.장!!」 

성투사의 화산같은 살기가 담긴 시선을 평범한 사제가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문을 

열고 그를 던져버린 헤모는 벽에 기대며 주저앉아 버렸다. 전쟁에서는 적들은 개미처럼 뭉

개버리는 그의 팔과 다리가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오. 레이모하시여. 그는 지금 지옥에 가서도 느껴보지 못할 고통을 견지고 있습니다. 그 

댓가로라도 시체가 되어도 시즈를 살려줘야 할 겁니다.」 

헤모에게 내던져졌던 사제는 정말로 1분도 되지 않아서 10명이 넘는 신관들을 데리고 왔

다. 눈가에 눈물자국이 남은 것으로 보아서 그가 울며불며 사정하고 다녔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으음…!」 

침상 위의 널부러진 시즈를 본 신관들은 깊게 깔린 침음성을 내뱉았다. 차라리 죽는 나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등은 어떤 맹수의 공격을 받아서 맨손으로 뜯어낸 두부처럼 처참하게 

뜯겨있었고 뼈는 조각조각나서 흩어져있었다. 온몸은 어떤 독으로 인한 중독증상으로 보랏

빛을 띄고 있었고, 그들이 지켜보는 순간에도 계속 손가락과 발가락은 검게 썩어 들어갔다. 

신관들 중에 흰 수염을 깨끗하게 기른 노인의 손을 헤모는 붙들고 고개를 숙였다. 

「어떤 일이 있어도 살려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하는 그의 음성이 떨리고 있었다. 노년

의 신관은 인자한 미소를 따뜻하게 지으며 헤모의 어깨를 툭툭 하고 치고는 주위의 신관들

을 돌아보며 말했다. 

「지금부터 3명씩 조를 나눈다. 한 조는 정화의 법을, 두번째 조는 치료의 법을, 마지막 조

는 생명의 법을 쓴다. 난 우선 흩어진 뼈와 내장을 맞추겠다.」 

「크아아아악! 으으으으!!」 

「허어! 반응이 너무 좋군. 헤모 사제, 이리 와서 환자의 어깨를 누르게. 절대로 움직이게 

해선 안돼. 그리고 거기! 울지 말고 이리와서 다리 잡아. 그래 좋아. 시작한다.」 

「다,당신들 모두 죽여버리겠어. 으아아악! 으헉흐헉! 크으아아아!」 

「아! 깜빡 잊었군. 재갈 물려.」하자 신관 중 누군가가 신복을 대충 찢더니 시즈의 입을 

벌리고 쑤셔넣었다. 아무래도 단잠을 깨운 보복이 아닌가 싶었다. 

「헤모 사제, 이러는 원인을 아는가?」하고 물으면서도 노신관이 쉬지 않고 손을 놀렸다. 

주름진 이마에 땀이 방울방울 맺혔다. 

「정신을 잃게 하지않기 위해 클러드낫을 썼습니다.」 

「허허, 고통에 기절하지 않은 게 신기하군.」 

헤모의 말에 신성술을 쓰는 신관들의 몸이 움찔했다. 앞에 쓰러져있는 청년이 느끼는 고통

이 얼마나 굉장한지 익히 들어왔던 것이다. 뼈를 맞추자, 두 신관이 얼른 다가와 등뼈에 치

료의 법과 생명의 법을 썼다. 등뼈는 이미 부서지는 순간, 신경이 끊겨서 치료시킨다고 해

도 움직일 수 없는 무생물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생명의 법으로 다시 생명을 불어넣어야 

했던 것이다. 

「이제 장만 맞추면 되는 군. 이보시게,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했으니 조금만 참게나. 자

네는 고생이 크니 낙도 꽤나 클거야.」 

「으으으으읍!」 

아무리 좋은 말도 시즈에게는 들려오지 않았다. 말 그대로 죽고 싶은 고통이었다. 그의 눈

에서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헤모가 시즈의 얼굴에서 얼굴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내 잘못이야. 내가 그 때 넋을 놓지만 않았어도….」 

성투사인 그에게 케워크는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니었다. 시즈가 걱정되었던 헤모는 상

처를 감수하면서 달려들어 한 마리의 목뼈를 부러뜨리고 달려드는 다른 케워크의 두개골을 

발꿈치로 찍어서 뭉개버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보았다. 빛줄기와도 같은 섬광. 

검이 아닌 빛만이 잔상으로 남아있는 가운데 다시 한번 섬광은 폭발하며 케워크의 배를 갈

랐다. 적은 동작이었지만 깨끗한 동작과 빛살과도 같은 검의 빠르기, 그리고 극도의 단조로

움이 구현해낸 검술은 지금까지 보아왔던 그 어떤 검술보다 화려하게 느껴졌다. 

「빌어먹을! 그렇다고 넋을 잃다니!」 

「그렇게 자괴심을 갖을 것 없네. 자네라고 해도 실수할 때가 있는 거야. 그리고 이 청년은 

살아날 테니까.」 

실컷 시즈의 뱃 속을 주물거리던 노신관이 피에 젖은 손을 꺼내며 처진 음성으로 주변 신

관들을 훑어보았다. 믿음섟인 그의 눈이 감기며 뒤로 물러섰다. 

「부탁하네.」하는 그의 말과 동시에 시즈는 신관들의 손에서 내뿜어지는 오색의 빛깔에 

휩싸였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청년의 얼굴에 평온함이 돌아오고 그의 손발에 홍조가 일기 

시작했다. 땀을 비처럼 흘려대는 신관들의 얼굴에 미소가 어리고 동시에 신성술을 걷음과 

동시에 빛이 사라졌다. 몇 몇의 신관들은 뒤로 물러서면서 동시에 중얼거렸다. 

「이제는 자는 거야.」 

조금이라도 더 자기 위해서 전력을 다해 신성술을 썼던 것이다. 우르르 하고 몰려가는 그

들의 얼굴에는 방금까지 치료했던 환자에 대한 걱정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어이없는 표정

으로 입을 벌리고 있는 헤모를 향해 노신관이 껄껄 웃으며 어깨를 다독거렸다. 

「그들도 피곤해서 그러니 이해하게. 그리고 이 환자는 아직도 안정이 필요하네. 하루는 

요양해야 될거야.」 

끄덕이는 헤모의 시선은 이미 잠든 시즈의 얼굴을 향해 있었다. 애처롭게 흘려낸 눈물도 

인식하지 못한 채 시즈는 달콤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한 가지 묻고 싶군. 헤모 사제, 당신은 사람을 여러 번 죽여본 적이 있는 성투사가 아닌

가? 그런 자네가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무리한 방법까지 쓰다니…. 이해할 수 없군.」 

헤모는 쓴웃음을 지으며 인자한 눈빛을 띈 채 자신을 바라보는 노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자신의 것이 아닌 의지에 의해 일을 행했다고 해도 그 책임이 행한 자에게 없는 것은 아

닌 것처럼 말입니다. 전 전쟁이나 전투에서 교단을 수호하기 위해 사람을 죽이고 고통으로 

몰아넣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아니라면 전 제가 지운 생명의 무게를 쓰러지는 이들에게 건

네야합니다.」 

의지에 빛나고 있었다. 그렇게 느낀 노신관은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그 미소에 헤모

는 마주 미소지었다. 확신에 찬 미소를…. 

「그렇지 않다면 전 제가 거두어드린 생명의 무게에 짓눌려 버릴 테니까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