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1화 (101/200)

                32 악장 이상은 작은 목표를 이루어갈 때 숨겨졌던 얼굴을 조금씩 드러낸다.

'낙엽이 떨어질 때 왜 우리는 들뜨게 되는가.  슬플 수도, 그리울 수도, 수학으로도 풀  수 없는 난잡하기 그지없는 

마음의 방황에‥.'

어제 방탕하게 술을 마시던 청년도 오늘이  되면 시인으로 만드는 가을은 대륙 중부에서  낙엽을 날려대고 있었다. 

아무리 아름다운 광경을 연출하는 신비의 계절이라지만 시즈는 가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음의 공황에 빠져버

리면 정말 허무해진다는 걸 알면서도 떨쳐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아직도 글로디프리아에 도착하려면 반나절은 더  있어야 합니다. 가는 길에 잠시 휴식을  취할 

여관에 말을 묶게 되면 좀 더 걸리겠지요."

시즈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절대로 마차 안으로 들어가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가 유일하게 가을을 

기다리게 하는 존재를 맛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바람. 서늘한 바람은 시즈를 또 다른 감정으로 들뜨게 

했다. 슬픔에 짓든 기억보다 그냥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으면 형체도 갖추지 않은 친구들이었지만 자신에게 하늘을 

나는 감각을 느끼게 해주었다. 조용히 눈을 감는 시즈를 보며  사론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미소를 지었다. 시즈가 

혼자 마차를 모는 자신 때문에 마부석에 계속 있는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게다가 마차 안의 분위기는 그리 들어가

라고 추천해주고 싶지 않았다.

한편, 아리에는 몸 구석구석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마차 안의 긴장에 숨을 죽이고 조용히 잠이  들어있었다. 쌕쌕거

리며 자는 모습이 너무나 부러운 보를레스였다. 현(現) 사태의 장본인들은  절대로 그의 심정을 이해 못하고 -안하

고-서로를 쏘아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벌써 하루는 찢어 죽일  듯한 눈빛으로 보낸 이들이었다. 드디어 피브드닌이 

말문을 열었다.

"토플레, 네 녀석이 여기에 있는 거지?"

"훗, 내가 여기에 있으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속 좁은  피브드닌. 요즘 제법 이름을 날리는 모양이던데, 그렇다

고 내게 '녀석'이라는 상스러운 호칭을 쓰다니 아스틴네글로드도 한물 간 모양이군."

"토루반. 고개 끄덕이지 마세요. 당신도 아스틴네글로드가 아닙니까? 토플레, 이 돈벌레야. 넌 카로안 용병국에서 기

생하고 있었지 않느냐! 난 네 녀석에게 기생 당하고 싶지 않아!"

생각만 해도 공포에 질린다는 표정으로 피브드닌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옆에 앉아있던 블리세미트조차 함께 떨릴 

정도로 격렬한 경련(?)이었다. 토플레는 피식 웃었다. 어쩐지 불길한 미소을 짓는 입술에서는 비비꼬인 표현들이 폭

주하기 시작했다.

"하핫! 피브드닌‥ 나도 눈이 있다네. 적어도 나올 게 약간이라도 있어야 기생을  하는 법이지. 내 토플레 피루스의 

여섯 자를 걸고 확신하고 예언하건데 피브드닌 자네는 쪼들리게 살아갈 운명이라고. 돈이 있을 턱이 없지, 으하하하

핫! 연구자금이나 매일 날려먹지 않나?"

흠칫! 토루반과 피브드닌의 움직임이 순간 경직됐다. 굳어진 얼굴피부를 억지로 풀어내려 노력하는 피브드닌이 안쓰

러웠는지 토플레는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자네는 왜 시즈를 따라다니는 거야? 글로디프리아는 아스틴네글로드와는 정반대 방향이란 거 모르나?"

"여, 연구할 게 있어서 따라다니는 거야."

피브드닌은 그렇게 말하며 옆에서 블리세미트가 만지작거리는 '이실리스의 펜던트'를 힐끔거렸다. 역시 신세가 처량

하게 느껴진 걸까? 한숨을 내쉰 그는 높아졌던 억양을 힘없이 죽였다.

"자네는 웬일로 힘든 여행길에 오른 거지?"

"나야 시즈의 전속 의사지. 그의 몸은 내가 아니면 진단할 수가 없어. 시즈는 몸을 함부로 써대서 내가 아주 고생이

라네."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시즈는 함부로 몸을 굴리고  토플레는 머리를 쥐어뜯는다. 진단만 해도 타로운의 금화를 

받을 수 있는 몸인데 일찍 죽어버리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그런 악독한 심보를  알 리가 없는 블리세미트는 토플레

가 실러오나가 내려주신 이 시대의 진정한  의사라고 인식해버렸다. 이후로 서로에게 틈틈이  심리공략전을 펼치던 

두 사람은 이내 곧 지쳤는지 잠들어버렸고 마차 안은 평화로워졌다. 

"그런데 글로디프리아라니‥ 도대체 무슨 일로 '값싼 남작'이 시즈를 부르는 건가?"

토루반은 조용해진 마차 안의 침묵이 싫은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바닥에 발이 닿지 않아서 엉덩이로 충격

을 모두 감수해야 했다.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대화라도 하며 정신을 다른 곳으로 분산시키고 싶었

다.

"아아‥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무래도 상당히 급한 모양입니다. 편지를 보시겠습니까?"

"흠흠‥ 그래도 괜찮겠나? 어디!"

토루반은 대륙에 이름 높은 음유시인이자 검사이며 또한 서민들의 선망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젠티아 드로안이 어떤 

글로 다급함을 표현했는지 눈을 크게 뜨고 편지를 펼쳤다.

"허허‥ 긴장하게 만드는 군."

편지는 기밀 문서라도 되는 양 몇 겹으로 접어져 있었다. 토루반은 편지의 종이재질에 금단현상이라도 있는지 손을 

부들부들 떨며 한 번 두 번씩 펼쳤다.  보았다! 그리고 굳었다! 편지의 내용은 딱  세 글자로 요약정리가 가능했다. 

허무감에 잠긴 목소리로 토루반은 더듬거리며 읽었다.

"당‥장‥ 와‥."

"하하하! 급하다는 게 글자 수에서부터 느껴지지 않습니까?"

"이, 이게 실베니아 최고의 음유시인 중 한 명이라는 젠티아 드로안의 편지란 말인가? 가,  간단한 안부인사조차 없

지 않은가!"

"그렇게 절규하실 필요 없습니다. 글을 쓸 시간도 촉박할 정도로 다급했을 수도 있어요."

과연 젠티아가 그럴 사람일까? 타인들에게 '값싼 남작'이라는 별난 호칭으로 불리며 욕실을 집무실로 쓰던 그는 현

재 무얼하고 있을까?

"각하! 정말 이러실 겁니까? 킬유시 공작께서는 지금 당신의 결정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하‥ 펠리언, 오늘따라 그대답지 않게 성급하군. 그렇게 발을 동동 구르지 말고 자리에 앉게. 적어도 내일까지는 

기다려야 할거야."

"각하!"

이 친구야. 난 검사라 귀가 굉장히 좋다고. 그렇게 소리 지르지 마. 그렇게  크게 맞장구를 쳐주고 싶었지만 젠티아

는 잠시 마음을 가라앉혔다. 펠리언의 급한 심정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그는 펠리언

이 가지고 온 킬유시 공작의 전언대로 행동할 생각이 눈꼽만치도 없었다. 젠티아가 망설이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펠

리언은 다시 언성을 높였다.

"각하, 유흥에 빠진 왕족입니다. 지금 곧 실베니아 최고의  축제가 일어날 시기를 맞아서 그들은 먹고 마실  준비로 

여념이 없습니다. 남작께서 한 마디만 해주신다면 누구도 거역하지 못할 겁니다. '값싼 남작'의 한 마디는 실베니아 

국민을 대변하는 대륙에서 가장 비싼 한 마디라는 말이 있습니다. 당신께서‥."

"그만 하세요, 펠리언. 정말 당신답지 않군요."

"데린 공주 전하‥."

"펠리언‥ 난 이제 공주가 아니에요. 후작 부인이라고 불러주겠어요?"

"그래도 킬유시 공작 전하의 따님이십니다. 공작의 영애은 공주. 어찌 불경하게 낮추어 부르겠습니까."

데린의 아미가 꿈틀하고 올라갔다. 펠리언이 은근히 젠티아의 작위가 낮다고 비꼬는 걸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실 

틀리지 않았다. 펠리언은 겨우 남작 주제에  강한 기사들을 거느리고 있다는 이유로 공작의  행동을 통제하고 말을 

번복하게 만드는 젠티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것보다 더  큰 이유도 있었지만‥. 화를 내려는 데린을 젠티아가 

말렸다.

"그만 해요, 데린. 그는 기사요. 주군에게 조금이라도 이로울 수 있도록 움직이는 기사. 더  이상 당신의 호위기사로 

생각하지 말아요."

"하지만 펠리언은 젠티아를‥."

"후우‥ 데린‥!?"

"네에‥."

아직 소녀 때의 성격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는지 발을 동동 구르던 데린은 젠티아가 한숨을 푹 내쉬고 조용히  이름

을 부르자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일 년 전의 데린만 생각하고 있던  펠리언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젠티아는 빙그

레 웃으며 말했다.

"그만하고 이리 와서 앉아요."

"네에‥."

고개를 숙이고 젠티아의 옆에 앉은 데린은 남편의 눈치를 살피며 책상에 놓여있는 오렌지의 껍질을 먹기 좋게 까기 

시작했다. 한 차례 그녀의 허리를 살짝 안았다가 놓은 젠티아는 아직 충격에서 벗어자니 못하고 굳어있는 펠리언에

게 말을 계속하라는 뜻으로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어 번 두들겼다.

"아! 죄송합니다. 각하께서 참여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서 킬유시 전하께서는 명분을 완벽하게 얻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결정 나는 것입니다."

"펠리언‥. 한 가지만 묻지. 자네는 전쟁이 과연 이 나라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제대로 된 정치를 위해서라면‥."

"흐음‥ 그렇다면 내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의 말에 펠리언과 데린이 동시에 흠칫했다. 그러나 데린은 곧 말없이 오렌지에  다시 손을 뻗었고 젠티아를 톡톡 

건드리며 먹기 좋게 까진 오렌지 알맹이를 건넸다. 잠시 말문이 막혀있던 펠리언은 오렌지를 낼름 받아먹는 젠티아

의 긴장기 없던 행동에 얼굴을 찌푸렸다. 비공식적이라고는 하나 공작의 사자(使者)를 맞는 태도란 말인가. 

"전하께서 실망하시겠지요. 뭐 사실 명분 때문에  그러시는 거지. 전력 상으로 밀리시는 게  아닙니다. 설마 장인을 

치시지는 않겠지요?"

"글세‥."

"그럼 그렇게 알고 돌아가겠습니다."

"아아‥ 곧 결정을 해서 사자를 보내도록 하겠네."

조용히 문을 닫고 펠리언은 방을 나왔다. 정말이지 '값싼 남작' 젠티아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위험

한 자였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는 실베니아를 실제로 지배하는 자. 그리고 그녀의 남편.

"변하셨더군‥ 하하핫."

얼마 전에 깨달은 사실이었다. 자신이 데린을 사랑하고 있었다는‥ 어이없는, 그리고 인정할 수 없는. 궁정기사라고

는 하지만 공주를 넘볼 수 있는 신분은 아니었다. 그래서  보냈는데 웃으며 더욱 웃으면서. 그러나 잊을 수가 없지 

않은가. 그녀의 곁에 앉아있을 남자를 질투하는 자신을 당장 불살라버리고 싶었다. 원하는 일을 할 수 없는 원인이

나 결론은 하나였다.

"내게는 권력이 없다."

글로디프리아를 나선 펠리언의 발걸음은 점점 속도를 더해갔다. 그리고 그는 시작된 한  걸음 한 걸음에 힘을 모으

고 훗날 실베니아를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괜찮을까요?"

"으음‥ 미안해요, 데린. 아무래도 실베니아는 한바탕 폭풍이 몰아닥칠 모양이오. 우리는 거기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아."

젠티아의 음성은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기에 데린은 그의 품으로 파고들며 눈을 꼭 감았다. 젠티아의 굳건한 팔이 

부드럽게 그녀를 감쌌다. 그 날 하늘에서는 보슬비가 내렸다.

"비가 내립니다. 사론, 서둘러주세요."

"예?"

이슬도 안맺혔는데 무슨 비? 사론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시즈를 돌아본 순간 마차 바퀴가 작은 바위에 부딪혔다.

쿵! 하고 마법에 걸린 것처럼 마차가 약간 날아올랐다가 쿵하고 다시 떨어졌다. 이중으로 충격을 받은 마차 안에서 

비명과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억! 으악!"

"크으‥ 사론! 마차 좀 똑바로 햇! 토루반, 괜찮아요?"

"‥‥."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다리가 짧은 토루반은 말도 못할 정도로 타격을 받은 게 분명했다. 사론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고 시즈는 볼을 긁적거렸다. 다시 마차 안이 조용해졌을 때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남동쪽 1km 앞에서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점점 불어오던  찬바람이 약해지는 걸로 보아서 약간이지만 따뜻한 기

류가 다가오고 있는 모양이에요. 그 속도가 빠르진 않으니 보슬비 정도겠지만 상당히 금방 멈추지는 않을 거 에요."

그의 설명을 들은 사론은 피브드닌의 호통을 들을 때보다 더욱 얼굴이 붉어졌다. 시즈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전

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역시 학자들은 알 수 없는 말만 한다니까.'하고 되뇌이며 자신을 위로하고 있을 

때, 피가 내리기 시작했다. 시즈의 말대로 뜨거워진 얼굴을 서서히 식혀주는 보슬비였다. 대단하다고 말하고 싶었지

만 또 알아듣기 힘든 대화가 될까봐 겁이 난 그는 잠시 보류해두기로 했다. 

"괜찮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여관이 바로 코앞이거든요. 마차를 묶고 비가 그칠 때까지 쉬어가도록 되요."

여관은 국경지대였으므로 제법 규모가 컸다. 자리에 앉아서 음식을 시키고 쉬고 있을 무렵, 식당 안의  공기는 시즈

에게 옆의 남자들이 속삭이는 소리를 가져다 주었다.

"알고 있나? 곧 반란이 일어날 거라는 군."

"호오‥ 반란이 말인가? 하긴‥ 요즘 왕궁은 하루에 한  번씩 연회를 연다고 하던데‥ 국가 재정이 바닥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겠어. 그래. 누가 주동‥할 것 같은가?"

"글세‥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이번 반란이 일어나면 백 장의 꽃잎이 끼어 들지 않겠느냐라는 소문이 있다네."

"백 장의 꽃잎이? 그들은 '값싼 남작' 수하의 기사단이 아닌가? 확실히 그들의 실력이 대단하다지만 '값싼  남작'은 

절대로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 자라고 알고 있는데‥."

"헛소문일지도 모르지. 그러나 실베니아의 중앙 귀족들에 대한 서민들의 불만이 점점 커져가고 있어. 이런  말이 있

잖나. '값싼 남작'의 한 마디는 서민들을 대변하는 가장 큰 한 마디다."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느라 음식이 나온 것도 몰랐던 모양이다. 아리에가 시즈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시즈? 음식 나왔어. 무슨 생각을 하느라 그렇게 멍해?"

"아, 아무 것도 아니에요."

"하긴‥ 시즈가 하는 생각은 온통 별 거 아니면서 어려운 생각뿐이지."

"보를레스는 생각하는 게 없으니까 그렇죠."

당황해서 성급히 먹기 시작하는 시즈에게 보를레스가 키득거렸고 아리에는  그런 보를레스을 쏘아댔다. 보를레스가 

울상이 되어 입술을 내밀고 수프를 주어 담자 다른 사람은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식사를 계속했다. 그런 와중에도 

시즈는 귀의 신경은 바로 뒤의 속삭임을 향하고 있었다.

"흠‥ 뭐야! 옆 테이블 시끄럽게. 어쨌든 실베니아 중앙의 귀족들은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단 말인가? 타국 사

람들까지 빤히 듣고 있는데‥."

"에끼! 이 사람아! 원래 정보는 자국이 더 듣기 힘들 수도 있는 거라고. 왜냐하면  자신에게 불리한 정보는 막기 때

문이지. 물론 그 나라에 있는 사람만큼 많은 정보를 타국인들이 알 수는 없지만 나쁜 정보는 더 밝을 수도 있다네."

"호오‥ 한 마디로 주동자가 실베니아의 정모망을 쥐고 있다고 보면 되겠군."

"그렇지. 재미있게 되었어. 소문이 사실이든 허무맹랑한 어린아이의 지껄임이었든 간에 실베니아가 시끄러워  질 거

야."

* * *

"어디‥ 변명 좀 들어볼까?"

사내의 단아한 미소가 노르벨을 향했다. '붉은 뱀의 사원'에 대한 일의 결과를 보고하려고 했던 노르벨은 조용히 입

을 다물고 쥐 죽은 듯 구석의 의자에 앉아 몸을 웅크렸다. 그가 예상하기에  사내의 손에 들려있는 글씨 빽빽한 종

이는 이번 임무에 대한 보고서였다. 이유는 사내의 눈가가 미약하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명탐정 노르

벨, 그런 추리력과 현재까지 남자를 보아온 경험으로 몸을 움츠리는 게 신상에 이롭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대

충 방어 준비를 한 그는 남자의 질문에 대답했다.

"마법사들이 영 시원찮게‥."

"결계가 쳐져있었다는 군."

"바스티너가 게으름을 피웠‥."

"보를레스라는 청년과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던데?"

사람이란 여러 명이 다른 이야기를 할 때 누구의 말을 믿을까? 그 말에 대해 사내는 명백하게 규정지을 수 있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전적과 경험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사내는 회상하기만 하면  되는 계산을 끝내고 임무를 실패

한 수하에 대한 징벌을 실시했다.

"도대체 뭘 한 거야! '고리의 신비' 수장이 함께 갔다고 해도 계획의 책임자는 네 녀석이 아닌가. 그런데 다른 사람

의 실수로 징벌을 회피하려고 하다니!"

"자, 잠깐!"

"뭐야? 또 다른 변명이라도 있나?"

"잘못했어요오∼."

용서 대신 날아온 것은 사람 머리만한  마력구였다. 유성처럼 꼬리를 끌며 폭사되는 마나  덩어리는 노르벨의 허리 

근처를 스치더니 벽에 부딪혔다.

"감히 피해!?"

그 다음에는 한 개가 아니었다. 사내의 분노에 따라 발동된 다섯 개의 마력구가 노르벨이 잃어 버렸던 엄마라도 되

는 양 달려들었다. 이번에도 역시 비명을 지르며 피하는 노르벨. 그는 절대로 방안을 족히 한달은 보수공사를 해야

할 정도로 만들어놓는 마력구에 맞고 의사에게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명탐정  노르벨도 눈치채지 못한 

게 있었으니. 피하면 피할수록 사내의 이마에서는 핏줄이 두들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떨어진 다과를 준비해 돌아가던 여인은 복도 저 편의 방에서 폭발음과 불꽃이 터져  나오는 걸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녀가 뛰어가니 방은 완전히 폐허가 되어있었다. 보수  기간은 1 개월이 아니라 3, 4개월로 다시  잡아졌다. 한 쪽 

벽이 완전히 날아가 버린 것이다. 구석에서 노르벨이 오른쪽 팔과 다리가 그슬린 채 벌벌 떨고 있는 게 보였다. 제

대로 맞았다가는 명백한 사망이었다. 한숨을 푹  내쉰 여인은 노르벨에게 다가가 입고 있던  가운을 벗어 덮어주고 

화로 식식거리는 사내에게 입을 열었다.

"당신답지 않아요. 지나간 일에 대해서 화를 내는 것은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해  대비를 하는 것에 비해 한 치의 영

양가도 없다고 말한 사람이 그대가 아니었나요?"

사내는 자신이 심했다고 생각했는지 뒤로 돌아서서 헛기침을 두 어번하고 자리에 앉았다. 책상을 뒤적거린 그는 치

료 물약을 꺼내 노르벨에게 던져주고 말했다.

"내가 너무 심했던 것 같군. 이미 지나간 일을 되돌릴 수는 없지.  흠흠, 현재 실베니아에서 또 다른 계획이 이루어

지고 있다는 거 알고 있겠지? 대륙이 고리의 힘에 움직이고 있다고는 하지만 '땅의 고동을 밟는 이'가 있는 실베니

아는 그 범위를 벗어난 지 오래야. 바람을 노래하는 이가 나타난 이상 그는 천천히 엎드려있던 땅에서 몸을 일으킬 

걸세. 그걸 막기 위해서는 이게 마지막 기회야. 아니라면 또 음유술사들과 역사의 고리는 대륙을 분쟁 속으로 몰아

가겠지. 그럴 수는 없네. 부탁이니 막아주게."

노르벨은 아직도 부들거리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좋아!'하고 쾌활하게  손뼉을 치며 

그에게 다가가 무언가를 건넸다.

"사실은 이번 임무를 성공하고 돌아오면 주려고 했지만‥. 뭐 지금까지 일을 해온 대가라고 생각하고 받게나."

묵직한 주머니, 형태로 보아서 분명히 화폐가 분명했다. 역사를 움직인다는 자가 동화를 보아서 건넬 리는  없고 은

화도 약간 부족ㅏ다. 역시 금화일 것이다. 감격하여 부복(俯伏)한 노르벨을 여인이 일으켜 세웠다. 

"이번에는 성공하기를 바래요. 이미 로진스님이 가 계시고‥ 엘시크에서 꼬마도 원조를 갔다고 하더군요. 둘과 협력

하면 윰유술사 하나 정도는 문제없을 거 에요."

* * *

- 산들이 붉게 물들고 잎이 떨어지고 눈에 잠식되어도 청솔만은 변하지 않으리.  동방에서 소나무를 칭송하는 불변

성이었다. 그러나 서방에도 자연은 아니지만 불변의 모습을 가지고 우두커니 고고한 현흑(玄黑)빛을 발하는 성이 있

으니 이름하여 '글로디프리아'.

"보를레스, 시인인 척 하지 말고 어서 들어가요."

파마리나의 질책으로 안으로 쫓겨 들어간 보를레스는 갑자기 누군가 덥썩 안는 걸 느끼고 흠칫했다.

'이 느낌은‥ 이 느낌은‥.'

절대로 남자가 아니다. 시즈처럼 자그마한 녀석이라면 몰라도 장대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의 남자라면 돋는 

닭살을 하루종일 긁어야할 만큼 사양지심(辭讓之心)이 일어나는 게 당연. 망설임 속에서 상대를 확인한 보를레스는 

오늘 하루의 운명을 원망했다.

"오랜만이군, 보를레스."

"나, 남작 각하아‥."

"목소리가 기어 들어가는 게 그리 반가워 보이지 않는 걸. 넌 다르겠지? '마땅찮은 시즈∼.' 키 좀 컸나했더니 여전

히 아담하군. 그리고‥ 아리에 양이라고 부르는 게 좋겠지? 귀여운 아가씨로군."

시즈와 아리에가 나란히 인사를 건넸고 젠티아의 시선은 뒤에서 멍하니 바라보는 손님들에게 넘어갔다. 흥미로움으

로 물든 그의 눈동자에 사람들은 점차 움츠러 들기 시작했다.

"하하하‥ 특이한 조합이 아닐 수 없군. 어서 오십시오. 마녀 파마리나 양과 아스틴네글로드의 여러분, 그리고‥."

그는 예상하지 못한 불청객이 둘이나 있다는 걸  알고 말을 흐렸다. 그러자 사람 좋은 미소를  만면 가득히 띄우며 

토플레가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안녕하십니까. 수 많은 수식어를 가지고 계시는 드로안 남작 각하. 시즈의 전속의사인 토플레라고 합니다. 그의 건

강을 책임지기 위하여 머나먼 이국까지 다리를 움직이고 있습니다."

"하하핫‥. 그것만으로도 진정한 의사로서 충분하겠군. 그럼 마지막 한 사람‥ 그대는 누군가요?"

"전 블리세미트라고 합니다. 사제입니다."

한 손으로 가슴의 펜던트를 꼭 쥐고 소년이 말했고 보를레스가 소년의 어깨를 두들기며 자랑스럽게 말을 더했다.

"붉은 뱀의 사원장님이시죠."

과거 여행으로 견문이 넓었던 젠티아는 그제야  소년의 복장이 고대 소레인 교단의 사제복이라는  걸 알아챘다. 한 

쪽 무릎을 꿇으며 블리세미트의 손에 입을 맞춘 그는 탄식했다.

"아아‥ 사원의 불행은 들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세상을 밝히고 있던 동료들의 죽음에 저 또한 애도를 표하

고 싶군요."

아무리 고대 소레인의 사제라고 해도 고작 열 다섯의 소년이었다. 젠티아는 블리세미트에게 입을 맞춘 게 아니라 '

역사의 고리'와의 싸움으로 죽어간 '사막의 신부'들에게 존경의 입맞춤을 받친 것이다.

"감사합니다, 남작 각하. 그들이 포도주에 취해서 답변하지 못할 게 조금 안타깝네요. 각하의 위명에 대해서 여기까

지 오는 동안 귀가 아프도록 들었습니다만 암울한 색의 성안에서 분주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는 것만  못하더군

요."

"하하하‥ 이 쪽은 나의 친구이자, 동료이지만 부하라고 우겨대는 마크렌서 자작이지."

"각하! 저는 우겨대는 게 아니라 당연한 정론을 펴고 있는 겁니다. 20 년이나 곁에 있었는데 주군으로 언제쯤  받아

주실 겁니까?"

"이 사람아. 20 년이나 곁에 있었으니까 겨우 부하 따위로 둘 수가 없는 거라니까. 제발 그만 좀 조르게."

덩치 큰 토클레우스가 젠티아에게 매달리는 광경은 보기에  미화적일 수는 없었지만 대신 웃음을 자아냈기 때문에 

시즈와 보를레스를 제외한 이들은 대단한 인물(?)을 만났다고 굳어있던 몸을 조금이나마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

었다. 그들이 웃음을 참고 있는데 쿡쿡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붉은 바탕에 검은 무늬로 장식된 드레스를 걸친 아

름다운 여인이 다가와서 시즈의 손을 잡고 빙긋 웃었다.

"검은 요새를 다스리는 두 어린애들이랍니다. 오랜만이에요, 대륙 제일의  명사, 시즈 세이서스. 아! 아스틴네글로드

의 원탁에 앉아있는 분들도 대륙 최고세요."

"그가 대륙 제일의 명사라는 사실은 여기 있는 사람 중 모르는 이가 없으니 옳은 말을 꺼내서 걱정할  필요는 없다

오."

"감사합니다. 아스틴의 국사(國師), 토루반."

눈처럼 흰 피부에 피어난 붉은 머리카락은 당장이라도 꺽고 싶을 만큼 유혹적이고 아름다웠다. 살짝 고개를 숙이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도 매혹적이라 아리에와 파마리나는  순간적으로 위축되는 걸 느꼈다. 특히  아리에는 여인의 

시즈를 대하는 태도가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주먹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눈치챈 걸까? 그녀는 갑자기 여인이 넌

지시 부드러운 미소를 던지자 당황했다.

"그대가 바로‥ 아리에 양이로군요. 아름다운 분이시네요."

"아, 아니에요. 아름다운 걸로 말하자면‥ 으음‥."

"전 데린이라고 해요. 아리에 양은 잘 모르시는  것 같네요? 자신이 얼마나 미인인지. 아!  파마리나 양도 미인이세

요."

그 때, 토클레우스와의 실랑이가 막 끝난 젠티아가 다가와 데린의 허리를 안으며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

"그래도 내게는 그대가 제일 아름답소, 데린."

"무, 무슨 짓이에요!? 사람들 앞에서! 이 능글맞은 아저씨야!"

"제대로 소개하지. 나의 사랑스러운 아내, 데린 킬유시. 침 흘리고 손 내밀어도 절대로 못 내 놓는다오."

과연 가을인가? 시즈는 그렇지 않아도 능글맞았던 '값싼 남작'이 가을을 맞아 더욱 닭살스럽게  한층 발전한 걸 느

꼈다. 사람들은 분명 가을에 대해 잘못 인식하고 있었다.

'누가 가을을 쓸쓸하고 건조한 계절이라고 했던가. 기름기로 흐늘흐늘한 계절이 틀림없거늘‥.'

그렇지 않아도 밖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가을하늘은 더 이상 시즈의 머리 속에서 높고 청량한 하늘로 기억되기 보

다 버터 구이로 녹아 내리는 하늘이라고 개정되었다.

"으음! 손님들을 이렇게 세워둬서는 곤란하지. 우선은 식사를 하자고. 그리고 축제를 즐겨야지!"

"각하! 일주일 전에도 심심하다고 축제를‥."

"오오‥ 토클레우스. 손님들이 오셨는데 그런 말이 나온단 말인가? 나의 친우이자 세기의 명사, 시즈 세이서스와 대

륙최고의 현자들인 아스틴네글로드의 일행들이 오셨는데!"

눈에 화염을 일으키며 격분하는 젠티아 드로안. 글로디프리아의 주민들은 성주님이 부드럽고 온화한 성격에 냉철하

기 이를 때 없는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고 칭송하지만‥. 블리세미트는 자신 있게 외칠 수 있었다.

'당신들은 속고 있어엇!'

"그렇군요. 각하의 뜻대로 하십시오."

이 막무가내 성주를 누가 말릴 것인가. 없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현재 시즈와 함께 온 소녀를  어떻게 꾸밀까 고민 

중이었다. 과연 취미생활이 고상한 부부였다. 토클레우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럼 이리들 따라오도록. 저녁때인데 식사를 해야지."

"젠티아, 전 아리에에게 옷을 좀 입혀서‥ 호호홋‥."

"아아‥ 그대의 취미는 뭍 남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지‥."

"이제 그만 좀 해욧!"

지고무상한 남편의 권위가 복부에 꽂힌 한 방으로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이것은 후일 아리에 작(作)의 '능글맞은 남

편 길들이기.' 간행의 기미를 예견하는 작은 힌트였지만 알아채는 이는 없었다. 고통스럽게 기침을 토해내는 젠티아

의 이마에 입을 맞춘 그녀는 여자들의 손을 꼭 쥐고 드레스가 가득할 방으로 도망쳤다.

"괜찮으십니까? 각하."

"자네들도 알아두게. '아내한테 얻어맞는 한 방은 가정의 평화를 가져올  밑거름이다.' 쿨∼럭! 하, 하지만 웬만하면 

아내는 펀치력을 시험해보고 고르게나."

절대로 괜찮지 않군. 시즈는 은근히 아리에가 걱정됐다. 데린에게 무얼 배워서 올지‥. '복부근육을 강화해야 겠어.'

라는 중얼거림과 함께 아픈 배를 쓰다듬으며 일어선 젠티아는 애써 담담한 목소리로 시즈 일행을 안내했다.

"이 드레스가 잘 어울릴 거야. 파마리나 좀 도와줄래요?"

"아‥ 응."

왜 시녀들을 시키지 않냐고 묻는다면 데린은 '취미 생활이에요.'라고 자신있게 말할 것이다. 그 정도로 그녀는 성을 

방문하는 여자 손님들을 꾸며서 남자들을 놀라게 하는 걸 즐겼다. 일종의 여자들만의 특권이랄까? 식사나 파티에서 

좀더 높은 권리를 가질 수 있게 미리 쳐놓는 일종의 미끼였지만 혹시 알아채는 남자들이 있다고 해도 어쩔 것인가? 

알아도 걸려들 수밖에 없는 유혹이 시작되었는데‥.

"다행이에요."

"예?"

"레소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 난 죽은 이보다는 살아있는 시즈를 걱정했답니다. 젠티아는 그가  자신을 능

가하는 마법적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그를 과대평가해도 난 잘 알아요. 시즈는  굉장히 순약한 성격이라는 

걸. 그래서 이번에 굉장히 기대했답니다. 그가 쓰러지지 않게 옆에 있어준 여인에 대해서‥."

"‥‥"

파마리나는 아리에가 조금씩 떨고 있다고 느꼈다. 아마도 데린의 이어질 말에 긴장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역시 시즈는 복 받은 녀석이야. 이렇게 귀여운 여자의 맘을 뺏다니‥.'

아니나 다를까 파마리나의 생각대로 데린은 격찬을 늘어놓았다. 그것도 꺄∼하는 기분좋은 비명과 함께.

"그렇데‥ 꺄∼ 설마하니 이렇게 아름다운 소녀라고는 생각도 못했지요. 물론 예전의 레소니도 아름다웠지만, 그 애

는 어렸거든요. 어떻게 생각하면 시즈는 참 여자 운이 많은 남자에요. 어쨌든 아리에는 시즈한테는 과분하다고요."

"아, 아니에요."

"아니라뇨? 뭐가요?"

아리에는 급히 입을 막았으나 데린은 이미 장난기 어린 눈동자로 반짝이고 있었다. 샹들리에의 반사광이 무색할 정

도였다. 파마리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이 여자도 남편에 절대로 뒤지지 않아‥.'

대륙에 이처럼 죽이 맞는 부부가 또 존재할까? 그녀는 골치가 아파왔다. 그들의 조상이  만나서 아이를 낳고 그 아

이가 다시 커서 아이를 낳고 그렇게 수십 번을 반복하여 태어난 아이들은 끔찍할 정도로 무에 가까운 확률이다. 거

기에서 다시 그 아이들의 성격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추리와 다시 인구에 따른 비슷한 성격의 남녀가 만날  확

률.

'크으‥ 거의 불가능하군.'

그러나 사랑이라는 감정과 정의는 수학적이나 연금술사적인 사고로는 내릴 수 없는 것. 사실은 얼마나 간단한 이야

기인지 결혼해보지 못한 이는 알지 못하리라. 

'부부는 닮아간다. 서로를 진정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늦는 걸‥."

침중한 얼굴로 젠티아는 중얼거렸다. 설마하니 드레스  룸에서 무슨 일을 당했으리라는 심려는  없었지만 기다리는 

손님들의 배에서 가끔씩 들려오는 뱃고동 소리에 괜히 미안해졌다.

"괜찮습니다. 남자들을 기다리게 하는 권리는 신이 부여한 여성들의 특권이니까요."

"후후훗‥ 역시 토클레우스는 매너가 있다니까‥. 자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아름다운 여인들을 소개할게요.  우선 

파마리나."

예로부터 마녀들은 사람을 유혹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고 전해진다. 이유는 마족과 계약할 때 일부는 몸을 계약조건

으로 걸 정도로 아름다웠기 때문인데 파마리나는 마족과 계약한 마녀는 아니었지만 하게 된다면 아마 마족이  거절

하지는 못할 것이다. 밤하늘을 연상시키는 검푸른 머리와 냉랭히 바다 물결처럼 청색 눈동자. 쏠리는 눈빛에 시장바

닥에 고등어가 된 기분을 느낀 파마리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폭렬 마법이라도 써댈 기세로 그녀가 소리쳤다.

"여자가 드레스 입은 거 첨 봐!?"

"파마리나가 아름다워서 그런 거니까 너무 그러지 말아요."

입술을 내밀고 불만을 표시하던 파마리나가 쿵쿵거리는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와서 자리에 앉자 데린은 이어서 손뼉

을 쳤다.

"다음은 아리에. 시즈, 기대하세요."

"데, 데린‥. 그러지 말아요."

여인은 옷에 따라 변하는 아름다운 카멜레온이라고 했던가? 누가 그랬는지는 알 수 없고 설사 카멜레온이 꽤나 징

그럽다고는 해도 표현 자체로서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어쨌든 여자는 변신의 천재라는 것이다. 아리에가 입은  드레

스는 데린처럼 화려하지도 파마리나처럼 깊게 파여 유혹적이지도 않았다. 가벼워 보이는 백색의 단조로운 드레스였

지만 그보다 그녀의 진정한 미(美)를 표현할 수 있는 의상이었다. 그럼에도 아리에의 겁먹은 표정과 조심스러운  발

걸음은 당장이라도 뛰어가 안아주고 싶을 만큼 남성들의 가슴을 자극했다. 인간 여자들에 대해서는 그리 관심이 없

는 토루반조차 멍하니 바라보았을 정도였다. 남자들의 눈을 잠시 멀게 만들어버린 소녀는 이미 여인의 자리에 다가

서 그 자체만으로도 유혹적이었다. 그녀는 발을 한 걸음씩  옮겨 시즈의 옆자리에 앉았다. 눈치를 넌지시 곁눈질로 

살피는 그녀 때문에 시즈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흠흠‥ 다들 아무리 음식이 맛있게 보인다고 해도 침을 흘리시면 곤란합니다. 오죽 배가 고프셨으면 저럴까? 젠티

아, 식사는요?"

자신의 남편조차도 넋이 나가자 데린은 새침한 표정으로 그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아니 후벼팠다고 하는 표현이 어

울릴 것이다. 잠시 젠티아의 표정이 오만가지로 일그러졌다가 돌아왔다. 익숙하기 때문인지 그는 손을 내밀며  손님

들에게 음식을 권했다.

"자아‥ 드십시다."

음식은 여전히 맛있었다. 시즈는 일 년 전의 추억과 현재가 겹쳐 보였다. 이 자리에는 다른 사람들이 앉아있고 그의 

옆자리에도 다른 이가 앉아있었지만 그녀가 떠오른다는 게 왠지 우스웠다. 

'잊어도 되는 걸까?'

"시즈, 안 먹어?"

"아, 아니에요. 먹을 겁니다. 아리에도 맛있게 먹어요."

"으응‥. 요즘 생각이 많아졌네. 특히 식사할 때‥."

"그, 그게‥."하고 시즈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돌렸다. 앵두처럼 빠알갛고 물기어린 눈동자가 가까이 다가왔다. 

"어디 아픈 게 아니야?"

접시의 수프보다도 달콤한 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말을 더듬거리는 시즈의 모습은 아리에로서는 처음보는 광경이었

기에 그녀는 신기하다는 듯 눈을 말똥거렸다. 토루반이 손뼉을 치며 웃어댔다.

"우하하하핫. 설마하니 아스틴네글로드의 원탁 앞에서도 떳떳이 자신의 생각을  외치던 명사, '마땅찮은 시즈'가 쑥

스러워서 말을 더듬거릴 줄이야."

아리에는 그제야 시즈가 얼굴이 토마토 소스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는 걸 알았다. 불빛 때문에 눈치채지 못한 것이

다. 덩달아 붉어지는 얼굴이 된 그들에게 젠티아는 잔을 들어서 외쳤다.

"홍조를 띈 두 사람을 위해!"

글로디프리아의 사람들은 일주일에도 놀았다고 하는데 지칠 줄도 몰랐다.  젠티아의 간단명료한 축제의사가 끝나자

마자 먹고 마시기 시작했는데 토클레우스는 '저들의 단순함이 이 곳을 지탱하고 있지 않은가.'하면서 이해할 수  없

다는 듯 술을 들이켰다.

"춤을 춰본 건 정말 오래간만이야."

"즐겁나요?"

시즈의 눈동자는 맑은 밤이면 달빛을 받아서 금빛으로 물든다. 정말로 수정이 변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리

에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2 년은 되었을 거야. 하지만 왕궁의 무도회와는 전혀 다른 걸. 이게 훨씬 마음에 들어."

젠티아와 데린이 일행을 이끌고 올라가서 무도회장이라고 소개한 곳은 어이없게도 성의 옥상이었다. 하지만 텁텁한 

빛깔을 내는 바닥이 궁전의 대리석바닥보다도 훨씬 고상하게 느껴지는 것은 별빛 때문일까? 아니면 달빛? 춤을 추

다보면 돌아가는 수많은 별빛에 넋을 잃게 된다. 성 아래에서는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축제의 음악소리가 아주 가녀

리게 들려오지만 춤을 추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음악이었다. 대신 사랑하는 이의 숨결이 느껴지지 않은가. 

"이 성은 정말 이상해."

아리에는 시즈의 어깨너머로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젠티아의 시종과 시녀들은 물론 마구간에

서 말을 돌보던 사람들까지 춤을 추고 있었다. 예전의 그녀였다면 아마도 불쾌해했을지도 몰랐다. 

'용병들과 생활해서 그런 걸까? 그러고 보면‥.'

시즈도 변했다지만 그녀 역시 변했다. 어쩌면 두 사람은  서로에게 자신의 성격을 줘버린 것처럼‥. 예전의 서로와 

닮아있었다.

"저기 시즈? 레소니를 생각해?"

허리를 감싼 시즈의 손에 약간 힘이 들어갔다. 그녀도 더욱 시즈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괜찮아. 잊을 수 없다는 걸 아니까‥. 하지만 한 가지만 묻고 싶어.  나를 레소니로 생각하는 게 아니지? 아리에로 

사랑하는 거지?"

올려다보는 붉은 눈동자가 눈물로 빛을 발한다. 잠시 멈춰서 시즈는 아리에를 힘껏 끌어당겼다. 그녀는 반항하지 않

고 시즈의 옷자락에 얼굴을 부비며 눈물을 닦았다. 망설이는 듯한 청년의 음성이 귀를 두드렸다.

"난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사랑이라는 감정도‥ 또 레소니를  대신하여 그대에게 기대고 싶은 것인지도. 그냥  뭐랄

까‥. 그녀에게 해줬던 것은 레소니만의 전유물처럼 느껴졌답니다. 그런데‥ 이렇게 춤을 추고 있잖아요? 꽤 쑥스럽

다고요. 그리고 지난번에는 입을 맞추기도 했고‥. 죄책감이 느껴지지만‥ 역시 감정에 충실하고 싶습니다. 이 두근

거림을 잊었다가 후회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를 위해 죽은 이들을 위해서 난  그들의 몫까지 자신있게 살아갈 거

니까요."

"어쩐지 궤변 같은데‥."

"뭐 어떻습니까. 세상은 궤변으로 가득차고 궤변으로 표현할 수 있으니까."

그들은 다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제는 경쾌한 왈츠였다.

"그래‥. 헤모가 자네들을 공격했군."

젠티아는 거칠게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헤라즈입니다."

보를레스는 예전에는 동료였고 현재는 마지막 적수인 성투사에게 굉장한 적의를 드러냈다. 일 년 전의 굴욕감은 생

각할 때마다 그를 투지와 살기로 감싸안았다. 그가 이빨을 드러내자 즐기던 사람들이 팽배하진 살기에 움찔하고 놀

라며 주위를 살폈다. 맹수가 노려보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토클레우스가 허리춤으로 손을 뻗는 걸 본 젠티아는 

호오∼하고 감탄했다.

'이 친구도 엄청나게 성장했군. 하지만‥.'

"자네도 강해졌군. 하지만 아직 그에게 미치지는 못해."

"알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된통 깨졌으니까요. 칠흑처럼 검고 둔탁해 보이는 갑옷과 검을 가진 자였습니다."

"호오‥ 정말로 '역사의 고리'가 움직이기 시작한 모양이군. 그는 바스티너라고  하지. 사람을 일컬는 게 아니라 갑

옷을 듯하네. 보통 어둠의 감옥이라고 하지. 어떻게? 라는 물음에 대답할 수는 없지만 전승되어 내려오고 있는 갑옷

이야. 입는 것만으로 오리하르콘이 박힌 검이 아닌 이상은 흠집도 내기 힘들 존재가 탄생하지."

젠티아는 뭐가 생각났는지 키득키득 웃음을 참지 못했다. 전혀 우스운 얘기를 듣지 못한 시즈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젠티아는 난간에 기대있는 사람들을 쳐다보고는 말을 이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번 전승자가 아마 여자라는 소문이 있더군."

"소문!?"

"정보의 바다를 달리는 자들에게는 소문이야. 일반인들에게는 극비지. 용사를 능가한다는 힘을 가진  바스티너가 여

자라‥. 알려지면 파란이 일 걸."

"이미 일고 있는데요."

블리세미트는 성벽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보를레스를 가리켰다. 그리고 한 마디 덫붙였다.

"어서 말리는 게 좋지 않을까요?"

"괜찮아. 이 곳 성벽은 특별히 단단한 돌로 만들어졌지. 흠집도 가지 않을 걸세. 어쨌든 이쯤에서 자네들을 부른 이

유를 말하기로 하지."

젠티아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자세를 고쳐잡자 사람들도 모두 긴장했다.  아리에는 피곤하다는 이유로 이미 내려

가고 없었다.

"아마도 짐작은 하고 있을 거야. 곧 반란이 일어날 걸세. 주동자는 나의 장인어른!"

! 눈들이 휘둥그레졌다. 토루반들이 침음성을 삼키는 만족스러운 반응을 보이자 젠티아는 '암 그래야지'라는 표정으

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분은 실력파지. 그리고 실용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계시지. 반란이 일어난다고 해도 서민들은 반대하는 이보다 

축가를 부르는 이가 더 많을 걸세.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현재의 반란을  부축이는 무리가 있는데 '역사의 고리'라

면 어떻게 하겠나?"

'역사의 고리' 이름이 나올 때마다 시즈의 주먹에는 땀이 찼다. 불리워질 때마다 희생자를 만들어내는 단체. 그들은 

무엇 때문에 피를 불러가며 일을 하는 걸까.

"그래서 뭘 해야 하죠?"

"간단하네. 이 편지를 가지고 킬유시 공작께 가게. '역사의 고리' 역시 날 주목하고 있을 거야.  어쩌면 이번 반란의 

목적이 날 제거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지. 그들은 방해꾼을 보낼테니 알아서 처리하고. 꼭 전하의 반란을 막을 필요

는 없네."

"편지가 공작께 가져가면 되는 겁니까?"

"그래. 내일 당장 이 곳에서 동쪽으로 떠나게. 대륙의 끝으로 가면 밀체 지방이 있어. 거기에 우리의 원조자가 있지. 

아마 시즈는 안면이 있는 사람일 거야. 그럼 부탁하네."

"노르벨, 얼굴에 기운이 없는데?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모양이지? 어쨌든 조용해서 좋은 걸."

바스티너는 고요한 하늘빛이 멋지다는 둥 하면서 노르벨의 속을 긁었다.  바득바득 이를 가는 노르벨이었지만 어쩌

겠는가. 바스티너의 갑옷에 흠집을 낼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지 않은 걸. 

'어, 언젠가는‥.'

그가 주먹을 쥐고 다짐을 할 때 한 소년이 다가왔다. 감청색의 물결같은 머리칼을 길게 휘날리며 다가온 소년은 방

긋 웃으며 노르벨에게 손을 내밀었다.

"당신이 바로 뛰어난 일처리로 유명한 노르벨 씨죠? 같이 일하게 돼서 기쁩니다."

'뛰어난', '유명한' 암울했던 노르벨의 마음 속에 두 수식어로 인해 밝게 빛났다. 소년의 손을 마구 흔들다 못해 끌

어안은 그는 껄껄대며 말했다.

"아아‥. 뛰어나거나 유명하다는 건 헛소문이지만 내가 노르벨이라는 것만은 분명하지. 그대가 바로  엘시크의 천재

라는 로길드로군, 과연 눈에서 총기가 흘러! 이번에 잘해보자고!"

단순하군. 옆에서 보고 있던 로진스는 소년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점차 비웃음으로 꼬아져가고 있다는 걸 알았다.

'과연‥ 내 이름과 비슷한 만큼 제법 실력은 있나보군.'

"도련님 어찌하여 그에게 말을 거셨습니까?"

로길드를 수행하는 기사가 물었다. 가문의 수장이 말하기를 노르벨은 주의해야 할 상대 중 하나라고 누누이 일렀던 

것이다. 그런데 소년은 겁 없이도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 접근했으니 후일의 행방이 미지의 방향이었다.

"바크호‥ 걱정 말아요. 어떤 사람인지 알아본 것뿐이니까. 할아버지의 말을  무시할 생각은 없어요. 바탕에 할아버

지의 말을 깔고 생각해보았을 때 노르벨이라는 사람은 틀림없이 무섭죠. 저런 연기를 할 수 있다니‥."

"솔직히 전 도련님께서 이번 계획에 자진해서 참여하신 이유도 모르겠습니다."

"하하‥ 간단해요. 그가 올 테니까요. 시즈 세이서스, 그가 말입니다. 경애하는 '마땅찮은 이'를 보고 싶어요."

하늘은 푸르고 그 아래로 배 한 척이 유유하게 파도를 넘었다. 돛에는 뫼비우스의 띠가 그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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