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2화 (102/200)

                              33 악장 상식을 무시할 정도의 믿음으로 (1)

가을‥ 대륙의 중부지방은 이 계절이 되면 어디에서나 광범위하게 찾아오는 엘로그라토의 전령을 만날 수 있다. 지

역마다 약간의 강약이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약간씩은 모래바람을 맞는다. 사람들은 지평선  건너에서 찾아온 

추운 겨울의 상징으로 여기기에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역시 눈에 들어가면 따갑

고, 그래서 앞을 보기 어렵다는 단순한 이유였다.

"후우‥ 속 썩이는 바람이구나. 이래서는 돛을 조정하기가 쉽지 않은데‥. 알 수 없는 게 꼭 그 사람 같군."

이제 막 청년의 티가 나기 시작하는 흑발의 미소년은 모래 바람에도 불구하고 선착장의 화물에 걸터앉아  흰수염고

래 두 마리는 합쳐놓은 만큼 거대한 배를 점검하는 선원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청색의 고급스러운 천이 돋

보이는 상인 복장을 입은 그는 한 손에 어떤 사항이 가득 적혀있는 양피지와 배를 번갈아 가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곧 드로안 남작님이 말씀하신 사람들이 올텐데‥ 요즘 너무 부리신단 말야."

투덜거리면서도 그의 얼굴은 기대에 차있었다. 젠티아가 '능력 좋은 친구들이니까 함께 여행을 해보는 게 장가하는

데 도움이 될 거다.'라고 말했으니 아마도 보통 사람들은 아닐 것이다. 젠티아는 상관으로이나 성주로서는 관대해도 

인물을 보는 시점에 있어는 꽤나 깐깐한 인물이니‥. 생각에 잠겨있는 그에게 선원 복장의 한 사내가 뛰어왔다.

"파엘라스 님. 길드에 웬 사람들이 이번에 떠날 배를 찾는다면서 왔습니다만‥."

"으음‥ 왔군."

소년은 양피지를 다시 훑어본 후 심호흡을 하며 들뜬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약간 홍조를 띄운 얼굴을 진지하

게 굳히며 말했다.

"가지."

동방에서 들여오는 호피와 사슴의 머리가 우아하게(?) 장식된 방은 누가 봐도 호화스러웠다. 젠티아의 말대로 밀체

지방에 도착한 시즈 일행은 긴장 속에서 엄청난 갑부일 게 분명한 원조자의 행차를 기다리고 있을 때 말소리가  들

려왔다.

"그들은?"

"집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지. 네가 말하던 사람들이 틀림없는 모양이더군."

보를레스는 수염을 기른 현자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연륜의 상인인 줄 알았던 원조자의 인상이 깨어지는 걸 느꼈다. 

음성이 스물도 넘지 않은 앳된 티가 엿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목소리라니‥.

"엇!?"

"윽!?"

그래도 일행을 따라 원조자에 대한 인사를 하려고 일어선 보를레스, 그는 막 문을 젖히고 들어온 상대와 눈을 마주

치고 기묘한 발성을 시도했다. 일행이 그들의 침묵을 의아하게 여길 때, 시즈가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고 손을 내

밀었다.

"오랜만이군요. 카이젤 파엘라스."

"음‥."

카이젤은 대답 대신 침음성을 내뱉으며 시즈가 내민 손을 잡았다.  보를레스가 일어서던 자세 그대로 엉거주춤하게 

다가왔다. 

"설마하니 그 때 함께 여행하던 꼬맹이일 줄이야."

"누가 꼬맹이라는 거야!?"

굳건하던 산 정상이 화산처럼 폭발하듯 소년은 울컥했다. 파마리나가 옆에서 키득거리며 지켜보다가 끼어 들었다.

"꼬맹이잖아."

여기서 밝히지만 파마리나는 키가 컸다. 아리에는 물론이고  시즈도 그녀보다 작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귀여움을 배가시키도록 작은 키를 가진 미소년은 그녀를 올려봐야 했다. 상대를 씹어먹을 듯 얼굴을 일그러뜨린 카

이젤을 처음 일행을 안내했던 사내가 말렸다.

"그만하지. 오랜만에 만난 동료인 듯한데 완전히 원수처럼 느껴지잖아."

그러고 보니 첫 대면인 사람이 더욱 많은데 실례를 했군. 카이젤은 실수를 깨닫고 시종을 불렀다.

"식사를 준비해 두도록. 손님들께서 먼길을 오시느라 시장하실 테니."

잠시 후 테이블에 둘러앉아 시즈 일행이 소개를 마치자. 카이젤이 충격을 받은 것은 심란함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

토록 다양한 사람들의 파티는 듣도 보도 못했기 때문이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아스틴네글로드에, 배척을  받

는 마녀, 고대 소레인 교단의 '사막의 신부'와 왠지 신용할 수 없는 의사까지. 그만큼 이번 사태가 중요하다는, 실제

와는 상관없는 추리를 해버린 카이젤은 모험이 즐겁겠다는 생각에 눈을 빛냈다.

"배는 이미 준비해두었습니다. 당금 실베니아의 사태가 시급하다는 것은 알고 계시겠죠?"

"전혀."

도리도리도리. 착 가라앉은 어조로 분위기를 맞추던 소년의 입에서 별안간 푸웃하고 와인이 줄줄 흘러내렸다. '우리

는 아무 것도 몰라요.'라는 듯한 표정들이 양옆으로 번갈아가는 동작에 대하여 '드로안 남작은 뭘  한거지?'라고 묻

고 싶었다. 

"우리는 서신을 킬유시 공작께 전하라는 말을 들었을 뿐입니다. 현재의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내용을 모릅니다."

"후우‥ 그렇다면 잘 들어보시죠."

카이젤의 설명에 따르면 실베니아는 언제 전쟁의 불길에 휩싸일지 예측할 수 없는 위험한 상황이라고 했다. 그나마 

방아쇠를 쥔 손가락을 제어할 수 있는 드로안 남작이 나서지 않고 있어서 늦춰지고 있다지만 그의 그림자가 드리운 

것만으로 셀베이나의 고름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피를 내서라도 짜내야 할 상황에 와 있었다. 

"나도 드로안 남작의 생각은 읽을 수 없습니다.  저 역시 반란, 아니 혁명에 동의의  표를 던지고 싶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믿어봐야지요. 민중의 귀족이라는 그를‥. 값싸다지만 가장 소중한 귀족인 그를 말입니다."

보를레스는 갑자기 젠티아가 부러워졌다. 또 실베니아의 서민들도 부러웠다. 그는 믿을 수 있는 자가 있다‥ 믿어주

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믿을 수 있는 사람. 그의 갈색 눈동자가 시즈의 서늘한 머리카락을 향했다. 

'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하지만 그는 날 믿고 있을까?'

그와 여행과 모험을, 생사(生死)의 갈림길을 함께  선택한지도 벌써 1년하고 반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확신 못했다. 

그러나 좀더 시간이 흐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결과 어떻든 간에 자신은 그를 마음 속의 주군의 성좌(星座)에 올려

놓은 지 오래였다. 

"보를레스, 보를레스!"

"으‥ 응!?"

"들으셨습니까?"

쏘아보는 카이젤의 입가에 송곳니가 살기가 맺히자  보를레스는 섬뜩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밀체  지방의 사람들은 

다른 지역에 비해 송곳니가 많이 발달했는데 때문에 늑대인간의 후예가 아닌가라는 설까지 나돌았다. 

"흠흠‥ 그래서 실베니아는 불씨가 떨어지면 폭발하는 상황에 와있는 겁니다."

"하지만 드로안 남작을 무시하고도 내란(內亂)을 일으킨다면 그의 서신이 무슨 소용이 있겠소? 오히려 불씨만 떨어

뜨리는 게 아니겠소?"

"과연‥ 아스틴네글로드의 현자이십니다. 저희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식적인 전략의  예상을 무시

할 만큼 드로안 남작을 믿는 거지요.  이번에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예정은  내일 바로 출발이니 준비를 해주십시

오."

                              33 악장 상식을 무시할 정도의 믿음으로 (2)

대륙의 중앙 엘시크, 수도에서 남서부로 한 달가량 걸으면 도착할 수 있는 작은 영지, 심벌튼에는 이미 갑옷에 온통 

광택이 번졌음에도 불구하고 헝겊으로 문지르는 걸 멈추지 않는 사내가 있었다. 얼굴에는 듬성듬성 난 수염에 고릴

라처럼 거대한 덩치와는 다르게 갑옷을 매만지는 손길은 섬세한 그에게 뜨거운 김이 솟는 컵이 내밀어졌다. 

"어제 새벽에 밀체 지방에 심어둔 밀정에게서 재미있는 정보가 들어왔어. '마땅찮은 시즈'가 살아있다는군." 

"음‥." 

잠시 손질을 멈춘 사내가 컵을 받자 이번에는 나뭇잎을 빻은 가루통이 내밀어졌다.  알아서 양을 조절하라는 뜻 같

았다. 

"됐어. 음‥ 좋군. 난 물을 데운 것만으로 충분해." 

"언제 봐도 취향이 특이하군." 

"음‥ 그래서?" 

"그래서라니‥ 전에 '고리의 신비'에서 알려주기를 '마땅찮은  시즈'가 '바람을 노래하는 이'라고 하지  않았나? 즉 

우리의 상대가 나타났다는 거지." 

털썩하고 의자에 차를 건넨 또 다른 사내가 엉덩이를 깔았다. 대체적으로 밝은  색상의 의복으로 맞춰 입은 모습이 

깔끔하게 느껴지는 그는 기분이 좋은 듯 어조가 쾌활했다. 

"어지간히 지루했나보군. 지난번 '풍암의 사막'에서는 동료들이 패퇴(敗退)를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더니‥. 덕분

에 수장인 나한테만 위에서 조잘거리지 않나." 

"이보게, 노리스. '고리의 신비'의 수장이라면 충분히 책사의 역할도 할 수 있었을 거라고. 그가 별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나라고 별 수 있었겠나? 아마도 그는 그저 책임을 회피하고 싶어서 우리를 직무 유기라는 이유로 판 것뿐

이라고." 

"대륙을 통틀어 최고의 기사단의 행동을 결정짓는 녀석이 저런 말이나 해대다니‥. 뭐 나도 마찬가지이기는 하군." 

"갈 텐가?" 

"음‥. 이 곳도 꽤나 정들었지만 할 수 없지." 

노리스가 갑옷을 착용하다가 보니 밝은 옷의 사내는 여장(旅裝)을 챙기다말고 무슨 생각에 빠져있었다. 가끔씩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 친구의 버릇 같은 행동이었지만 호기심을 참을 수는 없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나?" 

"자네, 그 녀석을 잊었냐? 2년 전쯤 우리를 상당히 골 썩혔던 꼬마. 이름이 시즈라고 했었지? 생각이 나서  하는 말

이지만 평범한 청년은 아니었어." 

"나도 잘 기억하고 있지. 망연자실했던 친구. 설마‥." 

둘은 서로를 잠시 바라보며 침묵에 빠졌다. 그리고‥. 

"아하하하하하!"하고 동시에 웃음을 터뜨린 그들은 서로에게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다시 한번 그런 말도 안 되는 추측을 하게 만들면 뒤통수 골수만 뽑아놓을 테다." 

"내가 할 소리야." 

아침이었다. 그들이 열어젖히는 문소리에 놀란 새가 푸드득하고 도망친 것은‥. 시즈는 아직 엘시크의 작은  마을에

서 진정한 전쟁을 예고하는 시작이 새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 * * 

"우웨에에에에엑!" 

"웁! 우웨에에엑!" 

"쿨럭! 쿨럭!" 

참 보기 민망한 광경이었다. 걸쭉한‥ 액체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고체도 아닌  것이 배 전방향에서 바다에 출렁출

렁 빠져드는 모습은. 그걸 아래서 받아먹는 물고기들은 소화시킬 것도 없는 완벽한 영양물질에 환호하며 파티를 열 

지경이었지만 위에서 보는 이나 토해내는 사람은 고역이었다. 

"차, 차라리! 우웨에에에엑! 마, 마차를 타고 가아‥ 우웨에에엑!" 

"토액질에 전념하시지요." 

카이젤은 코를 찌르는 냄새에도 불구하고 토루반을 들어올려 배 난간에 부축하고 등을 두들기고 있었다. 커다란 파

도가 한번씩 뱃전을 때릴 때마다 시큼한 냄새를 풍기는 묘한 색상의 물질을 뿜어냄과 동시에 말을 해대는 토루반의 

모습은 절대로 추천하지 못할 것이었으므로 그는 간단한 충고를 건네고 힘차게 등을 두들겼다. 그래서일까? 토루반

은 이중적인 고통에 시달리는 듯 했다. 

"서북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심하긴 하군요." 

전멸이었다. 시즈의 일행 중에 태연하게 여행을 하는 사람은 지팡이에 앉아있는 파마리나가 유일했다. 시즈는  아리

에를 토닥이면서도 안색이 창백했고 보를레스 또한 뱃 속의 내용물이 오르락 내리락거리긴 마찬가지였다. 블리세미

트 같은 경우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지 '오‥ 실러오나시여‥. 저에게 어찌 이런 시련을‥.'이라고 연신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들도 땅의 종족인 드워프보다 심하지는 않았다. 땅에서 발이  떨어지면 힘들어하는 게 드워프였지만 아스

틴에서 국사(國師)를 맡았던 토루반은 마차를 제법 타고 다녔기 때문에 그나마 땅에서 떨어져도 참을 수 있었던 것

이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배와 육지와는 엄연히 다르거늘. 정신도 못 차리는 토루반의 옆에서는 피브드닌과 토플

레가 사이좋게 서로의 등을 두들기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의사 같으니. 의사라는 녀석이 다른  사람들 치료는 못할망정 배멀미에 죽어가고 있다니! 우웨에에에

엑!" 

"네 녀석이나 잘해, 쿨럭! 옷에 묻었잖아. 세계적인 학자라는 사람이 토액이나 옷에 묻히는 건가? 설마 냄새 풍기는 

예술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아니겠지?" 

어쩌면 그들은 서로가 상대에게 멀미를 더욱 유발하는 존재가 되고 있는지도 몰랐다. 

육지에서 온 일행은 뱃사람들이 보기에 안쓰러울 정도로 배멀미를 해댔지만 그 정도로 현재의 바다는 들쑥날쑥이었

다. 선단을 이끌고 해상 무역을 이끌기 시작한 카이젤도  경험하기 힘든 바다였다. 조금만 더 심하다면 폭풍이라고 

지칭해도 틀리지 않을 정도였다. 

"아직 몇 일은 더 가야할 터인데‥ 이래서야‥. 도대체 각하는 무엇 때문에 뱃길로 가라고 하신 거지?" 

                              33 악장 상식을 무시할 정도의 믿음으로 (3)

"믿을 수 있겠소? 밀정의 보고에 따르면  그들은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가능할까

요?"

지도를 흘러내리는 로길드의 손가락을 따라 사람들의 눈이 이동했다. 그것들은 모두 불신에 가득 차 있었다. 만족스

러운 반응에 박수를 쳐 능숙하게 주의를 모은 소년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현재 서북 방향에서 불어닥치는 바람을 고려할 때 음유술사의 일행이 배를 이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혹시라도 모르지. 그들이 예측을 뒤엎고 뱃길을 선택할지‥."

"일행 중에 드워프가 있다고 하더군요."

로진스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뱃사람들조차 꺼리는 강풍이 바다에 불어닥치고 있었다. 하물며 드워프는 인간처럼 

배에 발을 들여놓는 것과 죽음을 동일시하는 종족이었고 누구나 아는 상식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배에 오른 것은 사실이다. 거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거지?"

유리와 쇠를 긁어대는 듯한 음성이 묵빛의 철투 속에서 흘러나왔다.  자리하는 존재감만으로 사방을 압도하는 바스

티너였다. 그는 쓸데없는 시비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학자이며 지략가라고 지칭되는 이들의 결론을 듣고  행동에 

옮길지 아닐지 생각하고 싶었다. 어두운 투구 속에서 발산되는 눈빛은 마치 밤에 사람들을 놀래키는 귀신불같아 로

길드는 찔끔하고 대답을 서둘렀다.

"어쩌면 정말로 바다를 통해 남부(南部)로 향할 생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마땅찮

은 시즈'나 아스틴네글로드의 현자들이 인식하지 못했을 리가 없지요. 자신들의 상태일 테니 말입니다. 유인책이 아

니라면 그들이 어째서 이런 행로를 택했는지 저로서는 도저히 예측하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은 이런 바람 속에서 바다를 이길 수 없을 거라는 사실입니다."

왠지 자신없는 어조의 로길드가 자리에 앉음을 끝으로 그들은 고민에 빠졌다. 음유술사들은 세일피어론아드 자체의 

의지라고 볼 수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에게  유리한 조건은 수(數) 뿐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나마 상대가 

뿔뿔이 흩어져있을 때 머리를 총동원하여 각개격파를 해야 했다. 그러나 적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고 있으니 

어찌할 것인가. 로길드는 머리를 감싸쥐고 중얼거렸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겁니까? 시즈 세이서스."

"도대체 어떻게 하려는 건가?"

그의 목소리는 임종을 맞이한 자처럼 힘이 없었다. 그가 건강하기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토루반임을 염두에 둘 

때 위의 설명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 배멀미 속에서 탈수(脫水)와 탈진의 과정을 넘어  탈

혼(脫魂)을 상태에 도달해있었다. 

"지금 어디까지 와 있습니까?"

지친 것은 다들 마찬가지였다. 시즈는 그렇지 않아도 희던 얼굴이 은은하게 푸른 빛깔이 감돌아 애처롭기까지 했다. 

바다에 익숙한 카이젤도 고통스러운 안색을 감추지 못하고 힘든 기색으로 말했다.

"목적지인 낭아플까지는 아직도 일주일은 십여 일은 넘게 남았지."

그렇게 말하는 게 미안한지 카이젤은 고개를 숙였다. 알고 보니 토액질의 기미가 있어서였지만. 

"아직 멀었군요. 우리는 훨씬 더 많은 고생을 해야겠습니다."

"잠깐! 각하께서는 배를 타고 낭아플로 가라고 하셨지만 꼭 배를 이용하라고는 말하지 않으셨어. 무슨 생각이신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의 사정을 아신다면 분명‥."

카이젤은 희미한 시즈의 미소에 말을 멈추었다. 미간 사이를 찌푸리며 그는 물었다.

"알고 있나? 그 생각을?"

일행은 그 순간에도 물고기들에게 먹이를 토해주기에 바쁘면서도 제법 진지한 분위기를 만들며 시즈의 대답을 재촉

했다. 어쩌면 삶의 투쟁심까지 섟여있을 듯한 시선에 청년은 어설프게 웃었다. 대답을 듣고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

일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이번 내란(內亂)에 '역사의 고리'가 연관되었다는 사실은 다들 알고 계시겠죠? 그들의 정보망은 대륙 전체의  쥐구

멍까지 통해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글로디프리아에서 마지막 밤, 저는 남작님께 말했습니다."

-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그들의 눈을 어떻게 피할지‥. 젠티아는 보셨습니까? 좀 전에 날아오르던 검은 비둘기를?

- 훗‥ 나도 모르겠군. 자네가 어떻게  그 조류의 종류까지 구별했는지‥. 전에는 눈이  그리 좋지 않았던 것 같은

데‥.

- 장난치지 마시죠.

- 내가 보기에는 자네가 장난치는 것처럼 보이는 군. 현자라는 말을 듣는 사람이 말이야. 간단하지 않은가? 누군가

의 예측을 벗어나고 싶으면 그 누군가의 예상에 벗어나는 짓을 하면 되는 거야.

- 어떤 식으로 말인가?

- 자네는 자필한 소설에서는 그리도 기상천외한  생각들을 해놓고선도 이런 때는 머리를  돌릴 줄 모른단 말인가? 

기상천외라는 말은 간단한 거야. 내 손에 잡히는 이 허공과 저기 먼 하늘과 다를 게 무엇이 있는가? 그렇다면 기상

천외란 무엇이겠는가? 내 손에 잡히지만 않는다면 기상천외라고 말할 수 있는 거겠지. 생각도 마찬가지일세. 그들의 

생각에서 약간만 비켜나게 해보게. 혹시 아는가? 자네가 생각하기에는 조금일지  몰라도 상대방이 느끼기에는 거대

한 압력으로 느껴질 걸지 말이야.

"무슨 뜻인지?"

토플레는 그를 비롯한 일행의 운명(?)이 달린 일이었기에 금화를 세어갈 때처럼 진지했다. 대답을 한 사람은 죽어가

던 토루반이었다.

"현재의 진행은 눈을 피하기 위한 기상천외한 행동이라는 뜻이라네, 쿨럭! 시즈, 말해보게. 자네들의 생각이  무엇인

지."

드워프 최고의 현자라는 말에 부끄럽지 않게 토루반은 이미 눈치채고 있는 듯 했다. 다만 자신의 예상이 맞지 않기

를 바라고 있을 뿐이었다. 불안해하는 그에게 시즈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을 때 피브드닌이 토하다말

고 얼굴을 들었다.

"이미 우리에게 남은 일은 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육지로 나가는 일 뿐이야. 혹시라도 편안한 상황이었다면 모

르지만 지금은 다른 도리가 없어."

"맞는 말이지요.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심지어는 '역사의 고리'까지도‥."

모두가 심상치 않게 올라가는 시즈의 입꼬리를 따라서 불안도가 상승했다. 점점 그가  내뱉을 말을 듣지 않기 위해 

귀를 막고 싶었다.

"맞아요. 그런 겁니다. 우리는 견딜 수 없어야 할 고통에 앞으로도 많은 시간 시달려야 합니다."

"하지만‥."

"피브드닌이라면 어디에 매복을 두겠습니까?"

어느 새 가져온 걸까? 카이젤이 펼쳐든 지도의 어느 부분을 피브드닌은  손가락으로 하나 둘씩 찍어나갔다. 대륙의 

동부와 낭아플의 주위였다.

"아마도 우리가 육지로 이동수단을 바꿀 거라 예측되는 대륙 동부의 요충지와 항구 낭아플의  항구지점인 남부지점

이겠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도중하차라는 예상을 뒤엎고 낭아플, 아니 낭아플을 넘어서‥."

시즈는 힘있게 낭아플에서 서쪽으로 약간 떨어진 마을을 가리켰다.

"이 곳까지는 가서 육지에 발을 딛어야 합니다."

그가 주장하는 방법은 간단하면서도 힘든, 별로 찬성하고 싶지 않았다. 절망하는 토루반의 어깨를 두들기며  시즈는 

말했다.

"가끔은 상식을 무시할 정도의 믿음으로 걸어갈 때도 있는 게 아닐까요? 토루반께서는 고작 종족의  특성에 묶이실 

겁니까?"

                              33 악장 상식을 무시할 정도의 믿음으로 (4)

"우엑!"

제법 호기있게 마음을 가다듬은 시즈들이었지만 그 호기가 뱃속까지 영향을  미치진 못했다. 아리에와 토플레를 비

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배멀미에 익숙해질 무렵- 그나마 전에 비해 심하지 않다는 것뿐이다. -끝내는 시즈와 카이

젤이 구토 그룹에 끼어 들면서 선체는 바람을 이겨내려는 선원들의 고함과 시즈 일행의 구토음과 함께 항해를 계속

하게 되었다.

"말은 좋았지만 직접 경험하게 되니 나머지 일주일을 어떻게 견뎌야 할지 막막하군요."

"낭아플이 일주일이야. 네가 지적한 마을까지는 심여일 이상 걸린다고."

고민에 빠져있던 시즈는 옆에 와 앉는 카이젤의 한 마디에 두 손을 들어버렸다.

"드로안 남작님이 생각하셨다는 방법이라는 게 정말이야?"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시즈. 주군을 갈아치우리라 카이젤이 생각할 때였다. 그의 검푸른 눈동자에서 동공이  범위

를 확장했다.

"무슨 일이에요? 카이젤."

카이젤의 얼굴에서 놀라움 외에도 두려움과 경계를 감지하고 시즈가 벌떡 일어섰다. 예도를 급히 뽑아 카이젤의 시

선이 향하는 곳을 향해 전투자세를 잡는 그의 머리 속은 낭패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고리에 대해서만 생각했지, 바다 본연의 위험에 대해서는 잊고 있었어.'

"잠깐, 잠깐! 그 칼 좀 치워 줘. 무서워서 올라갈 수가 없잖아."

바다 속에서 앳된 목소리가 들려온다면 믿겠는가? 시즈로서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출처까지 정확하게 고개를 빠끔

히 내밀었으니까 말이다. 배 난간에 매달리는 게 힘든지 잔뜩 주름이 진 출처를 보고 카이젤이 중얼거렸다.

"머메이드? 인어인가?"

전설 속의 이름 높은 상인들이 겪었다는  모험담에나 등장하는 인어. 특히 노래로 선원을  유혹한다는 소문을 가진 

종족인 세이렌이나 머메이드의 음성은 맑은 물방울이 떨어지는 듯 명확하고  깨끗했다. 숲의 마법 종족이 엘프라면 

인어는 물의 마법 종족이었기 때문에 현재의 등장 또한 매우  화려했다. 휘날리는 물보라는 모래바람이 물어닥치는 

배경과 어울리지 않게도 옷으로 변하며 배에 발을 딛는 인어를 감쌌다. 카이젤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인간이라

는 종족이 얼마나 포악하고 악독한지를 아는 그들은 폭풍이 일 때가 아니면 수면 밖으로 고개를 내미는 일이  드물

었는데 이번에는 오히려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청색의 머리에서 물을  털은 소녀를 향해 카이젤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너, 넌 인어가 아닌가?"

"‥‥뭐에요? 당신은 보고도 모르는 건가요? 다시 한 번 꼬리를 보여드릴까요?"

은근히 흰 피부를 노출시키는 흰색의 잠옷차림은 그녀에게 잘 어울렸지만 발끈하여 발을 굴러대는 성격은 영  아니

었다. 스물 살이 조금 부족해 보이는 그녀는 누구나 혹할 아름다움을 지녔기 때문에 물갈퀴 같은 귀만 아니라면 귀

엽다고 봐줄 수는 있었다.

무언해진 카이젤을 대신하여 시즈가 얼른 말했다.

"그의 말은 어째서 당신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냐는 뜻입니다. 보통 인어들은 인간들에게 모습을 잘 보이지 않

는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그러자 소녀는 얼굴을 찡그리며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나타내고 고개를 휙  돌렸다.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간접적이

고 노골적인 표현이었다.

"흥! 난 피가 까맣다는 인간과는 얘기하고 싶지 않아. 단순히 말을 나누더라도 정령의 기운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한 피를 가진 인간이 좋다고."

시즈가 살펴본 소녀는 인어답게 신기했다. 마법으로 창조한 옷감은 물이 변한 것인데도  물 한 방울 떨어지지 않았

다. 그나마 토루반이나 유레민트로 이종족(異種族)에 대해  익숙해진 시즈였지만 귀의 물갈퀴에는 이질적인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봐! 인간. 뭘 그렇게 쳐다보는 거야!?"

시즈는 어쩔 수 없이 어깨를 으쓱하며 뒤로 물러섰다. 피가 검다니 멋진 주입교육이 아닐 수 없군. 

"그만해. 그가 풀이한 그대로야. 왜 내 질문에 답하지 않는 거지?"

"인어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말하지 말라고요. 성체가 되면 우리는 완전한 자유에요. 별다른 위험이  없는 한 누구

도 성체의 일을 간섭할 수 없어요."

인어는 혀를 길게 내밀었다. 약올리려는 의도 같았지만 불쌍히도 그녀의  모습은 악의적으로 바라보기에는 너무 귀

여웠다. 굳어버린 카이젤을 두고 볼 수 없었는지 시즈가 다시 나섰다.

"내가 책에서 읽기로는 인어의 성체를 알아보는 방법은 꼬리 끝에 황금색 비늘이라더군요. 인간으로 변화하면 왼쪽 

엄지발가락이 황금색‥."

그의 늘어지는 목소리와 함께 두 남자의 눈이 자연스럽게 인어 소녀의 몸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방금 전에 토

한 주제에 입맛까지 다셔대는 카이젤은 소녀에게 공포심을 유발시켰다.

"자, 잠깐! 다가오지 마.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그만둬!"

"훗‥."

잔인하게도 카이젤은 아직 소녀의 감성을 지니고  있을 여인의 치마를 들추는 행위를 실행에  옮겼다. 그리고 발을 

꼬며 감추려는 소녀에게 미소를 지었다.

"은색이야. 아직 성인은 아니로군. 자아‥ 무리에서 걱정하기 전에 어서 돌아가라."

"싫어! 부탁이야. 난 육지로 나가고 싶다고. 이런 바람이 아니면 수면으로 나올 수도 없고, 

또 폭풍 속에 항해를 하는 바보같은 인간들이 또 있을 리도 없어. 게다가 정령의 냄새까지 나는 사람도 있는 걸!"

"웬지 기분이 나쁜데‥."

"그렇죠?"

                              33 악장 상식을 무시할 정도의 믿음으로 (5)

그들은 현재의 감정뿐이 아니라 불청객의 부탁에 대한 대답까지 모은 듯 했다. 그러나 그 때였다. 

철썩! 

"윽!" 

갑자기 밀려온 큰 파도에 선체가 흔들거리자 그들은 속이 울렁거리는 걸 느꼈다. 결과는 지금까지와 같았다. 

"우웩!" 

"아하! 당신들, 바다에 익숙하지 못한 거군요." 

"아, 아니얏! 우욱!"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일행 중에서 시즈와 카이젤은 가장 비위가 강한 편에 속했으니까. 재미있다는 듯 두 사람을 구

경하던 인어 소녀는 좋은 생각이 났는지 박수를 치고 입을 열었다. 

"이봐, 이봐. 이러면 어때요? 당신들이 날 육지로 데려다준다면 나는 마법을 사용해서 이 배가  흔들리지 않고 육지

에 도달하게 해주겠어요." 

"괜찮습니다. 우리는 상식을 무시할 정도의 믿음으로‥ 우웩!" 

"이봐. 그러다가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어. 바다에서 탈수를 겪게 되는 게 인간에게 얼마나 위험한지 알아?"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 거지?" 

"이봐요. 인어라고 너무 얕보지 말아요. 우리도 독서같은 문화 생활은 즐긴다고요." 

그녀는 시즈와 카이젤에게 말투까지 철저히 구별하며 반박하고 답변했다. 두  인간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에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솔직히 매슥거리는 복부를 기준으로 볼 때 그녀의 제안은 너무나도 매혹적이었다. 그

러나 일행이 해야하는 일은 관광업이 아니었다. 또 그녀가 인어라는 게 알려지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눈에 불을 

밝히고 덤벼들지 모를 일이었다. 

"무슨 일이죠? 앗!" 

밖이 소란스럽자 선실에서 쉬고 있던 아리에와  일행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두운 밤에도 인어  소녀의 흰 피부는 

잘 보여서 아리에는 놀란 음성을 냈다. 

"흠‥. 인어로군. 게다가 아주 순수한‥. 게다가‥ 음‥ 아직 성(性)이 확정되지 않았어." 

인어는 머리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흠칫했다. 예상도 못했지만 무엇보다 바다 수면을 타고 흐르는 빙하처럼 냉기

가 흘렀기 때문이다. 옷자락을 움켜쥐고 소녀는 뒤로 물러섰다. 

"당신은 마녀(魔女)로군요. 그것도 아주 강한‥. 어머니가 마녀의 곁에는 가지 말라고 했어요." 

"당연하지. 너희들은 우리들의 실험 재료거든." 

피식 웃는 파마리나의 미소가 소녀에게 얼마나 공포스러웠는지는 미지수다. 다만 카이젤의 팔을 잡고 그 뒤로 몸을 

숨겼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사악한 마녀는 마치 먹이를 눈앞에 두고 탐색하는 맹수처럼 부들부들 떨어대는 소녀

의 주위를 돌아보았다. 

"특히 인어 중에서도 희귀한 양성체는 말이야. 그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고 해." 

"나, 나, 나, 그만 갈래요." 

그녀는 바다로 돌아갈 수 없었다. 토플레가 그녀를 굳건히 붙잡았으니까. 눈은 마치 그 주위가 밝아올 정도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소녀, 아니 소녀처럼 보이는 인어가 양성체다라는 말이로군. 호오‥ 호오‥." 

"놔줘요!" 

인어 소녀는 후회했다. 난간에 서있던 두 사람의 기운만 느꼈을 뿐, 선실 안에서 그녀를 실험재료로  생각하는 마녀

와 의사가 버티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한 것이다. 눈물마저 글썽이는 소녀에게 마음이 흔들린 아리에가 사악한 

인간들을 밀치고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그만 해요. 그렇지 않아도 인간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을 텐데‥ 완전히 '인간은 인어의 원수야'라고 가르칠 셈인

가요?" 

"그래그래. 그만들 하게. 배에 올라온 손님이 아닌가." 

"토루반‥ 들어가서 더 쉬고 계시지 왜 나오셨습니까?" 

"아니야. 누워있어도 어차피 흔들리는 게 온몸으로 느껴진다네. 그나저나 세람류 중에 바다의 종족을 만나는  건 오

랜만이로군. 반갑네, 인어 아가씨. 하지만 곧 헤어져야 겠군. 토플레, 어서 놔주지 않고 뭐 하는 거요? 회라도 뜰 생

각인가?" 

토플레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실제로 회라도 떠볼 생각이었던 것이다. 인어의 고기는 그야말로 황금의  가치라

지 않는가. 비늘은 장식품이며 심장은 불로장수의 힘이 있다고 한다. 그의 눈에 인어 소녀의 몸은 금덩이로 비추고 

있었다. 손을 싹싹 비비며 토루반에게 다가간 의사는 배멀미에 고통스러워하는  환자를 걱정하는 마음을 가득히 심

어 말을 건넸다. 

"인어는 바다를 조종하는 힘이 있다고 합니다. 특히 순수하기로 이름높은 양성의 인어는 그 힘이 뛰어나 이 고물같

은 배의 승선감을 아스틴네글로드의 고급 마차의 것으로 바꿔놓을 수  있습니다. 어르신께서는 인어들과 안면도 있

으시니 양해를 구하고‥." 

토루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마차도 그에게는 불편했지만 그래도 폭풍 속에서 요동하는 배보다는 수 백배는 나

았다. 토루반의 기대를 눈치챈 토플레는 내심 쾌재를 부르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인어들에게 양해를 구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육지 정도까지만 가서 놓아주면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를 괴

롭히는 사막의 전령은 그 때까지도 세차게 몰아대고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바다에 놓아주기만 하면 누구도 그녀를 

잡지 못할 겁니다. 우리는 그냥 편안한 승선감을 위해!" 

'위해!'라고 토루반은 함께 외칠 뻔했다. 천천히 고개를 드는 그의 표정은 많은 변화를 겪고 있었다. 우선 흠흠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그 동안의 위액이 목을 망가뜨려놓았기 때문이다. 

"자네의 이름은 무엇이지?" 

"레스난 호린." 

"이 친구들이 자네를 강제로 잡았을 리는 없고‥ 무슨 일로 이 배에 오른 건가?" 

레스난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색이 헬쓱한 드워프 노인은 이야기가 통한 것 같았고 드워프는 인간처럼 인어를 먹지

도, 팔지도 않는다고 알았기 때문이다. 마지막 승부수를  띄웠다.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목소리는 최대한 흔들리

게, 그야말로 애처로워 고개를 돌리도록 그녀는 육지로 가고 싶은 감정을  토로했다. 잘빠진 미녀(?)가 자신의 키에 

허리 정도인 난쟁이에게 안겨 우는 모습은 정말 심금을 긁어놓았다. 체력이 다 빠져버린 토루반으로서는 그녀의 무

게는 가빴다. 

"걱정 말거라. 우리가 너를 데리고 가주마. 그, 그런데 좀 떨어지거라." 

바람으로 인해 귀가 밝은 시즈는 토플레와 토루반의 밀담을 듣고 있었다. 설마하니 토루반이 실행에 옮기리라고 생

각지도 못했는데‥ 시즈는 그에게 다가가려다가 그만두었다. 토루반은 삶을 향한 절실한 의지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토루반의 배멀미 없는 안락한 바다여행이라는 바램은 순조롭게 이루어져갔다. 그가 얼마나 만족했는지는 선실 속에 

울리는 웃음소리로 쉽게 알아챌 수 있다. 선원들도 현재의 상황이 돛을 조종하지 않고 주위를 살폈다. 

"아하하핫! 과연 대단하군. 인어의 마력이란‥. 세람류를 통틀어서 마력이 가장  강한 종족은 인어라더니‥ 틀린 말

이 아니었어." 

레스난은 울상이었다. 바람이 너무 강하여 동물들로 하여금 배를 고정시키거나 끄는 것 정도로는 배의 요동을 멈출 

수가 없었다. 결국 그녀는 북극 중에서도 심연의 바다에 산다는 백색 고래의  아가미 가루에 바닷물을 섞어서 후―

하고 불었다. 인어 소녀의 손에서 일어난 거품은 점점 거대해지면서 배를 완전히  감쌌고 그녀의 울음이 배인 주문

에 따라 배는 수면으로 파고들었다. 수면 아래는 아기가 엄마의 자궁에 있을 때처럼 편안하기 그지없었다. 다만 백

색 고래의 아가미 가루는 드래곤에 비례하는 수명이 다한 지 하루 내에 꺼내 제조해야 하기 때문에 보물 중에 보물

이었다. 

'괜찮아. 육지로 나가는 댓가라면 이 정도는 싼 거지.' 

"이거 먹어볼래?" 

가장 먼저 친해진 사람은 아리에였다. 비록  하루 밖에는 되지 않았지만 그녀는 누군든지  끌어들이는 매력을 지닌 

이였다. 처음에는 경계했던 레스난도 아리에가 자주 건네는 빵과 과자에 결국 넘어가 버렸다. 

"딱딱해." 

"그래?" 

"하지만 맛있어." 

아리에는 알지 못했다. 새 친구가 얼마나 많은 위험 속에 갖혀있는지를‥. 그저 토루반과 토플레와 파마리나의 열변

(熱辯)에 시즈를 비롯한 다른 이들이 제압 당했다는 것만 눈치챘을 뿐이다. 설마하니 그들이 귀여운 레스난을  가르

고 잘라서 굽고 삶은 후 먹고 바를 생각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느끼지 못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그 때까지도 토루반의 소박한(?) 바램은 누구의 침범도 받지 않는 순조로운 항해를 계속하고 

있었다. 

                              33 악장 상식을 무시할 정도의 믿음으로 (6)

"그만둬요. 난 돌아가지 않을 거 에요."

아리에는 귓가를 찌르는 악에 마친 외침에 잠이 깼다. 멀미를 느끼지 않으니  지금까지는 지쳐서 정신을 끈을 놓았

던 것과는 다르게 포근한 수면을 취할 수 있었다. 달콤한 꿈을 누가 깨웠는지 궁금한 그녀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

다.

"무슨 일이야?"

"아리에? 왜 더 자지 않고 나왔어요? 피곤했을 텐데‥."

"밖이 소란스러워서. 잠이 안 와."

소동의 범인이 아닌데도 시즈는 미안한지 아리에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따스한 바람이 불어오는 듯 하여 

그가 잠의 마법을 쓴다고 생각하고 아리에는 고개를 번뜩 들었다. 

"인어의 무리가 레스난을 찾으러 온 모양이에요. 지금 토루반, 토플레들과 대화 중이에요."

웃으면서 전하는 시즈의 말과는 달리 아리에의 눈에는 전혀 그들이 대화한다고 보이지  않았다. 귀가 아플 만큼 소

리를 지르는 인어들과 그 가운데서 도끼까지 빼든 토루반을 어떻게  오붓한 대화의 일종으로 판단하겠는가. 그녀는 

시즈의 시력이 좋아졌는지 의심이 생겼다.

한 편, 토루반은 도무지 얘기가 통하지 않는 인어무리들에게 짜증이 솟기 시작했다. 토플레는 지치지도 않고 설득을 

계속했고 레스난은 부모로 보이는 인어에게 육지로 가고 싶은 욕망을 호소했지만 인어들은 요지부동이었다.

드워프 사상 유례없이 온화한 심성과 냉철한 이성을 지닌 토루반이었지만 며칠 간의 멀미는 이미 드워프의  본성으

로 돌려놓은지 오래였다. 도끼를 빼어든 그는 옆에서 소리를 빽빽 지르는 인어 소녀(?)를 끌어당겼다.

"너부터 조용히 좀 해! 그리고 당신들도! 자아‥ 이 꼬마가 다치는 게 보기 싫으면 어서 비켜. 딸래미, 아니 어쨌든 

자식이 날도 안 선 도끼날에 회쳐지는 게 보기 싫으면 어서!"

무기를 잘 다루는 드워프의 입장에서 날이 안 섰다는 말이 나오지 인어들의 눈에는 도끼는 얼음장보다도 차가울 듯

한 날을 시퍼렇게 세우고 있었다. 레스난도 갑작스럽게 목에 느껴진 섬뜩함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바다는 고요해졌다. 가끔씩 부드럽게 지나가는 어류들만이 시간이 멈춰있지 않다는 걸 말해주었다. 그럴수록 토루반

의 배틀엑스를 쥔 손을 힘을 더해갔고 레스난은 애절한 울음을 터뜨렸다. 이윽고  배를 막았던 인어들은 하나 둘씩 

비켜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돌고래들처럼 웅웅거리는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듣는 것만으로 

눈물이 나올 듯이 애절했다. 

"흑‥ 흑흑."

"그만 울게나.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 다리를 붙잡는 갈고리를 끊어버린 거라고 생각하게."

그렇게 말했지만 토루반은 일행과 자신의 평안을 위해 그녀를 희생시켰다는  생각이 들자 죄책감이 들었다. 아스틴 

네글로드, 대륙에서도 현자라는 이름을 지닐 자격이 있는 걸까라는 자괴심이 그를 괴롭혔다. 어쩌면 레스난이  울음

을 멈추지 않아서 더욱 그런지도 몰랐다. 끝내 그녀가 울음을  멈추기보다는 대성통곡을 하자 토루반은 시무룩해져 

선실로 들어가버렸다. 카이젤이 얼굴을 찌푸리고 레스난에게 걸어왔다.

"그렇게 슬프다면 돌아가라. 이제는 배멀미보다 네 울음 소리가 더 견디기 힘들다. 그렇게 슬퍼할 거라면 왜 육지를 

그리워했지? 돌아가면 될 게 아닌가. 어서 돌아가 버려라."

등을 돌리는 그의 눈에 시즈가 미소를 짓는 모습이 들어왔다. 아마 그  또한 카이젤처럼 말하고 싶었지만 레스난이 

상처를 입을까봐 말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젠티아의 말로는 제법 냉정해졌다고  하더니, 나약한 심성이  그대로군. 그 특유의  바보 같은 분위기는 없어졌지

만‥.'

감정을 알 수 없는 유리 눈동자 때문인지도 몰랐다. 현자라고 이름 높았을  때보다 현재가 오히려 현자의 분위기를 

풍겼다.

"시즈? 왜 그렇게 웃고 있어?"

카이젤이 모습을 감춘 후 아리에가 물었다. 

"카이젤의 말이 재미가 있어서요. 누구에게나 하는 말이니까요. 고통스럽고, 슬프고 견디기 힘들면 돌아가라. 누구에

게나 통용되는 말이죠. 상식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말을 들으면  대부분 오기를 부리는 모양이에요. 저

렇게 말이죠."

'저렇게'라는 대명사가 굳은 표정을 짓고 있는 인어, 레스난이라는 것은 아리에도 쉽게 알았다. 때는 밤이었다. 어둡

게 일렁이는 바다 속에서 올려다보는 별빛이 이리저리 흩날리는 살구꽃 같은 밤,  또 한 사람이 상식을 무시하면서 

일어서고 있었다. 

"어쩌면 모든 생물은 누구나 조금씩은 상식을 무시하면서 미래를 열어가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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