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8화 (128/200)

                         40 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 다면‥. (20)

"도대체 왜 일까?" 

넬피엘들은 파이얼 로바메트 공작이 일러준 대로 그의 아들이 감금되어 있다는 저택의 지하감옥 입구에 들어와  있

었다.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시즈는 고개를 저으며 벽에 기대섰다. 기운이 빠진 듯 흘러나오는 물음은 넬피엘들의 

다리를 잡기에 충분했다. 시즈의 추상적인 물음이 뭘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도 같은 의문이 뇌리를 

계속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냉정한 마음을 유지하는 사람은 넬피엘이 전부였다. 

"어쩔 수 없다. 몇 번이나 말했다. 우리에게 길은 하나 뿐이라고."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미끼를 통해 적을 불러들였을 때는 적을 섬멸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경비병조차 세워두질 않았어요." 

언제나 온화하게 미소를 짓던 시즈는 주먹으로 벽을 치며 짜증을 냈다. 그는 손가락으로 누군가 앉아있었을 탁자를 

가리켰다. 

"이것을 보십시오. 그들이 앉아있었던 게 분명한  이 탁자의 먼지는 지하감옥이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다는 말과 

부합되지 않아요. 다른 부분에는 있는 손쓸 수 없을 정도의 먼지가 이 탁자에는 없습니다." 

넬피엘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시즈는 뛰어난 통찰력과 추리력을 가지고 있었고, 궤를 달리하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지만 아직 경험이 부족했다. 

'아마도 저 탁자를 놓아둔 까닭은 우리가 알아내 주기를 바랬던  거로군. 자신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나는 것

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야.' 

이런 일은 벌써 몇 번이나 이어지고 있었다. 츠바틴은 이쪽의 움직임을 눈감고서도 예측하고 있을 것이다. 그에 비

해서 시즈 일행은 알면서도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점점 우리는 실행하는 행동력을 잃어갈 거다. 어떤 게 옳은 일인지 판단할 수 없게 될 거야. 이미 시즈는 걸려들었

어. 나도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이런 순간만큼은 자신에게 긴 시간이 물려 내려온 게 다행이기도 했다. 적어도  그 시간에 포함된 여유까지도 넬피

엘은 가지고 있었으니까. 

"시즈, 녀석들의 진짜 목적은 우리가 아니다. 바로 역사가  멈춰있도록 붙들어놓는 것이지. 우리는 목적을 방해하기 

때문에 그들로서는 지나쳐야 할 과정이 된 거야.  우리는 지금 그들의 목적과 상관없는 자리에 와  있다고 보면 된

다." 

"‥그들이 쓸데없는 행동으로 우리를 미로로 보냈다는 뜻인가요?" 

블리세미트가 조용히 말했다. 그의 음성은 지하에서 울리듯 일행의 마음 속에서도 웅웅 울렸다. 넬피엘은 고개를 저

었다. 

"그건 아닐 것이다. 우리는 그들보다 한 걸음 늦었기에 문이 닫혔다는 거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들보다 빨리 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닙니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역사의 고리를 없애버리면 되지." 

시즈는 머리를 숙였다. 음유술사는 악당이 아니다. 적어도 정의를 표명한다면 보복도, 선공도 힘들다. 게다가 결정적

으로 시즈는 성격적으로 온화했다. 보복, 공격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이 물음은 실베니아를 구하고 나서 생각하기로  하자. 우리는 뛰어들어야 할 곳이 있으니까.  그게 불길 속이라도. 

우리는 강하지 않은가." 

시즈는 걸음을 옮기는 넬피엘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확실히 넬피엘의 걸음에는 힘이 있었다. 

'나도 조금은 걸음에 힘을 주자. 조금은 당당해지자. 그게 끌려가는 걸음이라고 해도‥.' 

보통 한 사람이 강해진다면 다른 사람도 강해질 수 있는 매개체가 되는 게  바로 동료였다. 시즈는 이 세상에서 가

장 믿음직한 동료의 등을 바라보며 가슴을 폈다. 

"파세닌! 당신이 파세닌 로바메트요?" 

"그, 그렇소. 당신들은 누구요‥." 

예상은 했지만 일행이 목표했던 존재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영양실조라는 것만 제외하면 양호한 상태였다. 시즈들

은 기뻐했다. 아무리 역사의 고리의 참모, 츠바틴의 손에서 놀아다고 있다고 해도, 그들은 한 아버지에게 귀중한 보

물을 찾아줄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순수한 기쁨조차도 츠바틴에게 이용당할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파세닌! 파세닌! 대답하거라." 

"아버지이십니까?" 

로바메트는 아들을 보자 호들갑을 떨었지만 시즈들은 파세닌이 겨우 영양실조라는 걸 알고 있었음으로 웃음을 지었

다. 로바메트의 아들은 오늘 저녁식사만 제대로 먹어도 어느 정도는 회복될 것이다. 

'둘만 있게 해줄까?'라는 생각을 다들 자리를 피하려할 때였다. 

"크윽!" 

"아버지‥." 

아버지가 아들을 껴안는 순간 로바메트의 등뒤로 왈칵하고 핏줄기가  솟아올랐다. 혼비백산한 블리세미트가 번개같

이 달려들어 파세닌을 걷어찼다. 힘없이 뒤로 넘어질 듯 하던 파세닌은 땅에 손을 집고 한바퀴를 돌아서 착지했다. 

거친 움직임이 마치 야수를 연상케 했다. 손가락에 낀 반지에서 파직파직하며 전극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파세닌 자신의 머리카락까지 위로 솟아올랐다. 

"어떻게 된 거야?" 

"최면 마법이에요." 

블리세미트가 파세닌의 반지에서 뿜어져 나온 번개를 피하며 외쳤다. 

"크윽!" 

"정신차리세요, 전하. 파마리나 도와줘요." 

파마리나가 재빨리 마법을 방어하는 공간 마법을 펼쳐 번개를 튕겨냈다. 

"이, 이게 어떻게‥. 쿨럭!" 

"말하지 마십시오, 전하." 

내장의 절반이 번개에 감전되어 타들어 있었지만 로바메트는 그보다 심적인 충격이 더한 것 같았다. 피를 토해나면

서도 블리세미트를 뿌리치며 파세닌을 돌아보려고 했다. 그의 아들은 충혈된  눈으로 두 음유술사를 노려보며 대치

하고 있었다. 

"마법에 걸린 거에요." 

"다치지 않게 잡을 수 있겠지? 자네들의 실력이라면?" 

블리세미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개인적인 전투능력에 있는 한 누구보다도 강한 넬피엘과 시즈였다. 고작 마법의  반

지 하나로는 그들의 털끝도 다치게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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