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9화 (129/200)

                         40 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 다면‥. (22)

'하지만 영양실조로 몸이 약해진 사람한테 저런 반사신경이라니‥.' 

만약 자신이었다면 파세닌을 다치지 않게 제압하는 게 무리였을 거라고 블리세미트는 생각했다. 

"크아아아악!" 

파세닌은 고통스러운 고함을 질러대며 시즈와 넬피엘에게  반지의 번개를 마구 분출했다. 보통  마법무구의 장점은 

주문의 영창이 없어도 된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마법에 통달한 두 사람도 쉽게 다가가지 못하고 피하기에 바빴다. 

"시즈, 빨리 제압해요!" 

아리에는 주의 깊게 파세닌의 모습을 눈여겨보다가 그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외쳤다. 원래 심상치 않았지

만 그의 얼굴에는 점점 힘줄이 불거지며 흉측하게 변해가는 게 아리에의 말이 아니어도 시즈는 긴장했다. 

"다가갈 수가 없어." 

안되겠다고 생각했는지 넬피엘이 피하는 것을 그만 두고 허공에 마법의 원을 그려 현자의 검을 끄집어냈다. 그리고 

번개를 하나하나 튕겨내기 시작했다. 넬피엘이 휘두르는 순간 남겨지는 붉은 빛의 잔재는 마법의 힘이 담겨져 있는

지 그의 앞에 가볍게 원을 그리는 동작만으로도 황금빛은 이리저리 튕겨나갔다. 

"으악! 이쪽으로 튕겨내지마!" 

파마리나가 비명을 질렀지만 넬피엘은 그냥 뒤를 힐끔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천천히 앞으로 발을 옮기는 넬피엘을 

피해 파세닌은 뒷걸음질했다. 

"조금만 더 빨리!" 

파세닌이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키자 시즈와 넬피엘을 제외한 일행은 손에  땀을 쥐었다. 무표정한 넬피엘도 눈썹을 

찌푸렸다. 

"크악! 크아악!" 

"알았어! 저 반지는 사용자의 생명력을 격발시켜서 마법으로 변조시키는 거야. 빨리 중단시키지 않으면 생명력이 고

갈되서 손쓸 수가 없어!" 

파마리나가 급하게 외친 순간 이미 로바메트의 아들은 꿈에서나 나오는 악귀처럼 온몸이 시뻘겋게 타오르는 형상이 

되어있었다. 곧 온몸이 터져 버릴 파세닌의 모습을 상상하며 파마리나는 눈을 꽉 감았다. 

하지만 피비가 내리는 끔찍한 상상은 현실화되지  않았다. 파세닌의 몸이 한계에 달해 경직되자  바람을 타고 그의 

옆으로 뛰어든 시즈가 순식간에 반지 낀 손목을 잘라버린 것이다. 

털썩! 

"파마리나, 어서 지혈을!" 

"네, 네!" 

파세닌은 그를 조종하고 있던 반지가 몸에서 떨어지자  쓰러졌고 시즈가 외치는 소리에 파마리나가 다급히 달려왔

다. 마녀들의 뛰어난 지혈제가 팔에 뿌려졌고 재빨리 오두막으로 옮겨지자 블리세미트가 생명술을 시작했다. 

로바메트가 초조하게 기다리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금방 나무집 밖으로 나오는  블리세미트와 파마리나가 

지친 표정으로 걸어나오자 그는 묘한 불안감을 느끼고 정신없이 달려들었다. 

"어떤가?" 

"괜찮습니다. 팔도 잘린 단면이 깨끗하고 파마리나의 약이 워낙 뛰어나서 한 달 정도면 나을 겁니다." 

시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이 팔을 잘랐다지만 아무래도 찔리는 게 없지는 않았다. 다치게 하지 않

고 제압하겠다고 했으니까. 

"그런데 한 가지 물어볼 점이 있네. 자네들은 내가 마법에 걸린 것은 눈치를 챘으면서 내 아들 놈에 대해서는 눈치

채지 못했나?" 

"전하의 성격은 드로안 남작이 알고 있었기에 눈치챌 수 있었던 겁니다. 공자 전하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니 

이상한 점도 느낄 수 없었지요." 

"그게 아니야, 블리세미트." 

파마리나는 그토록 마법에 뛰어난 넬피엘이 최면 마법의 잔재를 알아채지 못했던 진실을 꺼냈다. 역사의 고리는 처

음부터 파세닌으로 하여금 로바메트를 죽일 생각이었다. 파세닌의 암시는 아마도  로바메트의 음성을 듣는 순간 풀

리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로바메트 일가의 두 사람을 일시에 죽이는 일거양득을 얻으려고 했겠지. 만약 대사

제 이상의 치료능력을 가진 블리세미트가 없었다면 그들의 계획은 맞아떨어졌을 것이다. 

"허허‥ 나도 앞으로 할 일이 만만치 않지만 그들과 싸워야 할 자네들이 더 걱정이로군." 

시즈는 미소를 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로바메트의 어조는 마치 자기들을 칭찬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고

개를 돌린 그는 느긋한 어조로 물었다. 

"아리에는요?" 

"옆에서 간호하고 있어. 전하도 들어가 보세요. 이제 곧 깨어날 겁니다." 

"그, 그러지!" 

"블리세미트, 괜찮아? 쉬는 게 좋겠어." 

파마리나의 염려스러운 음성을 듣고 나서야 시즈는 블리세미트가 기진맥진했다는 걸 알았다. 거의 탈진하다시피 헐

떡이는 모습이 그가 얼마나 신성력을 쏟아 부었는지 알만 했다. 로바메트의 앞에서는 그에게 부담감을 주지 않으려

고 정신력으로 몸을 지탱했던 것이다. 

"좀 쉬어요. 바보 같이 순수한 사제." 

어느 새 다가왔는지 시즈가 블리세미트의 시야를 손으로 가렸다. 얼마나  피곤했는지 어린 사제는 암흑의 평온함에 

정신이 함몰되어가는 걸 느꼈다. 

"그만 둬. 번갈아 가면서 누울 셈이야?" 

따뜻하지만 그러면서도 건조하지 않은 바람이 블리세미트를 감싸안자 파마리나가 투덜댔다. 

"괜찮아요. 이 정도는‥. 그런데 들어가봐야 되지 않아?" 

"예?" 

"파세닌이라는 남자, 씻겨보니 꽤 미남이던데? 생긴 게  바람둥이 기질이 넘쳐나는 것 같더라고. 뭐 그렇지  않아도 

아리에 정도라면 다들 탐낼 걸." 

"하하‥." 

시즈는 어색하게 웃었다. 솔직히 지금까지 용병 식당에서 있으면서 아리에는 남자들의 찝쩍거림을 상당히 받았었다. 

물론 그녀의 손에서 날아간 단도가 그들의 정신상태를 간호해주었지만 가끔 상대가 수로 밀고 나올 때는 시즈와 보

를레스도 가세했다. 연약하게 보여도 여장부인 아리에였다. 시즈는 자신의 연인보다는 혹시나 그녀를 귀찮게 할지도 

모를 불쌍한 남자를 걱정하며 말끝을 흐렸다. 

"설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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