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악장 12화
넬피엘이 이유없이 시즈에게 동질감을 보이듯이 젠티아 또한 검사로서의 동질감을 보를레스에게서 느끼고 있었다.
나이 차이는 얼마 나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 불쑥 성장해버린 그의 실력은 젠티아도 흥분할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
다.
하지만 칭찬하기에는 입이 간지러운 지라 젠티아는 검을 돌려서 보를레스의 검을 쳐내고 말했다.
"갑옷이 좋긴 좋군."
보를레스는 대답하기는커녕 숨도 돌릴 시간도 없었다. 용병왕의 시미터까지 막아낸 그의 속도와 도둑발도 값싼 남
작의 검술 앞에서는 무력했다. 마치 멜첼에게 처음 훈련받던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9 - 2 - 4 - 1 로 간다!'
보를레스는 리듬을 정했다. 상대의 타이밍을 깨뜨리고 흐름을 돌리기 위하여 처음에는 빠르게 아홉 번을 휘두른다.
그 후에는 불규칙한 공격으로 방어의 맥을 끊어놓을 계획이었다.
"아다다다다다다!"
한 번에 아홉 번을 휘두르는 것은 보를레스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찰나같은 순간에 근육의 힘을 약즙 짜내듯이
짜내야 했다.
카가가가각! 그러나 한 호흡이 넘어갔을 때 그는 실수를 깨달았다. 지금까지의 공격으로만 봐도 젠티아의 검은 보를
레스의 속도에 뒤처지지 않았다. 오히려 압도할 정도였다. 헐떡거리는 보를레스와는 달리 젠티아는 여유롭게도 빙그
레 웃으며 말했다.
"그 갑옷은 뛰어나기는 하지만 역시 근육의 힘을 증폭시키기 때문에 피로는 더욱 빨리 오는 모양이야. 내가 보를레
스, 자네였다면 그렇게 힘을 빼기보다는 방어를 하면서 기회를 노렸을 거야. 뭐 지금은 소용없지만‥."
젠티아의 말처럼 보를레스는 속도와 힘에서는 밀리지 않았다. 다만 방법을 잘못 선택했을 뿐이었다. 사실 젠티아의
입장에서도 보를레스만큼 압박감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젠티아는 보를레스가 용병왕을 압도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
을 보였음을 알았기에 당연하게 생각했고 보를레스는 위와 같은 실력을 키웠음에도 불구하고 용병왕과는 달리 젠티
아가 틈을 보이지 않으니까 당황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모르고 있었다. 만약에 용병왕과의 결투에서 용병왕이 처음
부터 지금의 젠티아처럼 신중했더라면 보를레스는 결코 오래 버티지 못했을 것임을‥.
결국은 마음가짐의 차이인 것이다.
"진 사람이 마을에 가서 맥주 사오기로 하지."
"가, 갑자기 그런 게 어, 어딨습니까?"
"이기면 되는 게 아닌가? 마법의 갑옷까지 입었으면서!"
저택에서 시내까지는 30분 가까이 걸렸다. 게다가 맥주라면‥ 저택 안에도 있지 않은가? 그런대도 사오라는 것은
간단한 양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적어도 양어깨에 한 통씩은 져야 함이 분명할 것이다.
"아까 전에 집사한테 물어보니 맥주가 떨어진 모양이더라고. 적어도 세 통은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
추측이 끝나고 확신이 서자 보를레스의 검이 빨라졌다. 그야말로 젖 먹던 힘을 다해서 검을 폭우처럼 쏟아 붓자 젠
티아도 기세에 밀려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그를 위협하는 보를레스의 검에서는 희미한 빛깔의 광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오‥. 이제는 검에서까지 기운이 뻗여 나온단 말인가?"
"크아아아악!"
기합이 아니라 비명에 가까운 보를레스의 고함소리. 젠티아는 검을 막는 타이밍이 자꾸 어긋나고 있음을 눈치챘다.
그의 동공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확대됐다.
'그럴 리가‥ 난 1초에 열 번의 검을 휘두를 수 있다. 그런데 막는 타이밍이 어긋나다니‥.'
더욱 놀라운 사실은 보를레스가 그렇게 검을 내리쳐대면서도 규칙적인 보폭으로 한 걸음씩 내밀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약간의 실수라도 한다면 당장 머리가 쪼개져버릴 텐데. 젠티아는 용기가 바탕이 되었는지 아니면 무모함인지,
알 수 없는 보를레스의 검술에 혀를 찼다.
"그야말로 '담력 검술'이로구나."
젠티아 또한 '도둑발'을 익히고 있었다. 이미 예전부터 숙달되어 있었고 보를레스는 상대도 되지 않을 만큼 자연스
럽고 빨랐다. 하지만 보를레스처럼 자기보다 실력이 위인 상대의 검에 다가서지는 않았다. 아니, 없었다. 그의 검술
은 위험을 감수하는 힘의 검보다는 뛰어난 기교에 의지하고 있었다.
보를레스의 담력검에 견딜 수 없게 되자 젠티아는 천천히 그만의 기교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음!"
우선 보를레스와 동시에 검을 내리쳤다. 속도가 약간 느린 성음검은 제뷔키어의 검등을 정확하게 가격했다. 막 아래
에서 위로 방향이 바꾼 보를레스가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충격이었다.
부르르‥. 손목에서 어깨까지 타고 오르는 진동. 제뷔키어는 간신히 바닥에 떨궈지는 신세를 면했지만 분위기는 금
새 반전됐다. 현란한 검술에 보를레스는 왔던 걸음 다시 정신 없이 물러섰고 젠티아는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툭툭 스치는 듯 가볍게 부딪히는 성음검에 제뷔키어는 가느다란 나뭇가지처럼 도르르르 떨어댔다.
"어떻게 된 건가?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모양인데?"
"크윽!"
'실수였어. 걸음을 규칙적으로 하는 게 아니었다.'
제뷔키어의 속도가 너무 뛰어나 타이밍을 맞추기 힘들자 젠티아는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하여 보를레스의 걸음으로
타이밍을 대신한 것이다.
"이제 슬슬 끝내기로 하지. 너무 힘 빼면 내일 힘들어."
게다가 그도 슬슬 숨이 차고 있었다.
"어디 받아봐. 정신을 검에 집중하면 가능할 거야."
젠티아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성음검이 우웅하고 소리를 내며 은색의 섬광을 뿜어냈다. 검이 지나간 자리에 남겨지
는 흔적. 보를레스는 그것을 어딘가에서 경험한 일이 있었다.
'이건가?'
예전 용병왕이 흉내냈던 젠티아의 기술. 보를레스의 검에 서려있는 흐미한 광채와 비슷한 종류의 에너지라고 추측
되는 기운. 그러나 용병왕의 것보다 가늘었고 보를레스의 것보다 선명했다. 그렇다. 마치 성음검은 거미처럼 은색의
실을 뽑아내고 있었다.
"하아아아!"
보를레스도 뒤질 수 없다는 듯 기합성을 발(發)하며 검을 높게 치켜들었다. 그러자 제뷔키어에서도 강렬한 빛살이
쏟아졌고 때맞춰 보를레스는 혼신의 힘으로 내리쳤다.
콰릉! 콰드드드드득!
두 기운이 충돌할 때 터진 소리와 빛이 얼마나 크고 강렬했는지 멀리 마을에서도 보일 지경이었다. 아마도 마을에
서는 젠티아들이 있는 곳을 향해 이렇게 외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폭뢰! 폭뢰가 떨어졌어요!"
어쨌든 두 사람의 화려한 승부의 결과는 보를레스가 제뷔키어를 떨구는 것으로 끝났다. 제뷔키어가 그의 손을 떠나
땅에 푹하니 박혀있는 것에 비해 성음검이 허공에 남겨둔 은색의 실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투구를 내동댕이치다시피 벗으며 보를레스는 대자로 누웠다.
"대체 그건 뭡니까?"
"비밀이야. 내 밑천을 거덜낼 수야 없지. 하지만 대단해. 날 이정도까지 밀어붙이다니‥."
"마법의 갑옷까지 입었잖습니까. 다음에 또 부탁합니다."
"아아‥ 사양하겠어.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거든."
값싼 남작, 젠티아 드로안.
광풍의 검사, 보를레스 로만히데우그.
세일피어론아드 사상 최고의 검사로 대표되는 두 사람이 대결을 펼쳤다는 사실은 어떤 역사서에서도 찾아볼 수 없
다. 그러나 보를레스가 젠티아에게 시비(?)를 걸며 자주 대결을 신청했다고 알려지는 것으로 사람들은 값싼 남작이
광풍의 검사보다 조금 우위의 실력을 가지지 않았나 추측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