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5화 (155/200)

                                           42악장 12화

젠티아들이 녹초가 되어있을 무렵, 아리에는 시즈와의 데이트를 가벼운 마음으로 즐기고 있었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운하를 따라서 걷다가 벤치에 앉아서 조금 쉬면서 얘기를 나누기도 하고 사람들이 열심히 복구에 열을 올리는 모습

을 지켜보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보통 때와 별다를 것 없었지만 그래도 아리에는 좋았다. 이 순간만큼 시즈가 자신

만을 보고 있는 것이니까. 

팔을 꼭 잡고 있자 시즈는 약간 얼굴이 붉어진 상태로 곤란해하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상관없었다. 밝게 웃으며 걷

고 있는 아리에를 거리를 지나던 남자들과 상인들은 힐끔힐끔 쳐다봤다.  천진난만한 미소가 소녀를 더욱 아름답게 

만들었던 것이다. 

"시즈, 나 저거 먹고 싶은데‥." 

그녀는 뭔가를 발견하고 고양이처럼 커다란 눈을 반짝이면서  찻집 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차가운 과일 쥬스'라고 

크게 붙어 있었는데 6월이 되었으니 슬슬 팔리기 시작할 시기였다. 옆으로는  밖에 마련된 테이블마다 사람들이 삼

삼오오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아마도 아리에는  그 중에 한 꼬마 여자아이가 마시고 있는  과일 쥬스를 목격한 

모양이었다. 

"어서 오세요." 

안에 들어가니 귀엽게 생긴 웨이트리스가 달려와서 꾸벅 인사를 하고 빈 테이블로 안내했다. 

그리고 그들의 뒤를 이어 가게 안으로 들어서는 두 사람이 있었다. 웨이트리스의  안내를 거절하고 구석 자리로 들

어가서 앉은 그들은 사막의 나라 사람들처럼 머리를 두건으로 둘둘 말아 눈만  빼놓고는 내놓은 게 없었다. 아리에

가 그들을 보고 쿡쿡하고 웃었다. 

"후훗‥. 시즈, 저 사람들은 음식을 어떻게 먹을까?" 

"글쎄요. 아무래도 두건을 벗고 먹지 않을까요?" 

"‥‥." 

순간적으로 아리에는 시즈의 대답에 생각했다. 

'정말이지 재미없는 남자야.' 

그러나 시즈는 아리에의 질문에 신경쓸 정신이 없었을 뿐이었다. 그에게 맡겨진 한 장의 메뉴판. 아리에는 실베니아

의 문자를 몰랐기 때문에 그가 주문을 하기로 했는데‥. 

'뭐, 뭐 이렇게 이상한 이름들이 많은 거야?' 

음식이나 음료의 이름은 천차만별, 가지수도 수없이 많고 가게에 따라서 새로 개발한 종류도 있었다. 그러니 기껏해

야 놀아본 경험이라고는 낭아플에서 단 한 번이 전부인 그에게 메뉴판은 해독하기 어려운 고대문자의 석판 같았다. 

"시즈‥ 뭐해? 주문하지 않고!?" 

삐질‥ 삐질‥. 

"저, 저기 아리에?" 

"응!? 시즈, 더워? 왠 식은땀이지!?" 

눈치가 둔한 쪽은 아리에도 마찬가지. 주문을 기다리고 있던 웨이트리스는  시즈의 곤란함을 눈치채고 방긋 웃으며 

말했다. 

"손님, 주문하시기 힘드시면 제가 골라드릴까요?" 

"그, 그래주시겠습니까? 도대체 과일 쥬스 메뉴가 뭔가요?" 

"여기 있습니다. '아키시델몬'은 오렌지즙이고요, '라키하이나'는 사과, '도르크조니'는 포도, 그 아래로는 코코넛, 파

인애플, 딸기, 바나나가 있습니다." 

시즈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파인애플이랑 사과로 주세요. 

"다른 것은 뭐 필요한 게 있으신가요?" 

"과자도 주세요." 

아리에는 어린아이처럼 생글거리며 주문했다. 웨이트리스도 같이 생글거렸다. 

"계란과자가 있고요, 초콜렛이 첨가된 과자가 있습니다." 

"네? 초콜렛이 있어요? 초콜렛으로 할게요." 

"네, 감사합니다." 

어쩐지 어울리는 두 소녀. 웨이트리스가 주문 받은 음료와 과자를 가져다놓고 사라졌고 아리에는 우선 파인애플 쥬

스를 한모금 들이켰다. 

"맛있다! 과자도 맛있어!" 

시즈는 대답하는 대신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눈은 힐끔힐끔 주머니 속의  돈이 얼마나 되는지 살펴보고 있었

다. 

과자는 일, 이 백년 전만 해도 부유층의 산물이었다. 원료가 되는 설탕이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는 여

기저기에서 사탕수수를 키우고 도시에는 제과공장도 많이 생겨났고 값도 이제는 서민들이 즐길 수 있을만큼 인하되

었다. 하지만‥. 

그의 주머니를 위협하는 존재는 다름 아닌 초콜렛. 본래는 쓴맛의 음료지만 사람들은 바닐라를 첨가했다. 요즘에 와

서는 설탕을 적당량 넣었는데 그 맛에 실베니아의 왕족들은 완전히  매료되었던 적도 있었다. 현재까지도 제조자들 

이외에는 제조 과정을 알지 못하도록 함구령이 붙어 있는 초콜렛. 

오직 실베니아에서만, 국가 예산을 위하여 제조되고 있었다. 현재 방탕한 실베니아의 국정낭비를 충당할 수 있는 것

도 모두 초콜렛이 해외의 왕족들에게 엄청난  수요로 팔려나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실베니아의 여인들이 

시집갈 때 혼수품으로 싸간다는 초콜렛의 값이 적을 리 없었다. 

'초콜렛을 찻집에서 팔다니, 역시 수도인가?' 

감탄을 해보려 했지만 한탄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나마  해맑게 웃으며 좋아하는 아리에의 모습이 

시즈의 기분을 가볍게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 세이탄의 저택 앞에 엄청난 금액의 금화를 묻어두었었지‥.' 

순간 시즈의 뇌리에 2년 전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호수가에 자리잡은 아름다운 저택, 저녁때면 자신이 

부르던 노래와 과자를 먹기 위해 달려오던 아이들. 집에  돌아오면 해맑게 그를 맞이하던 레소니, 가끔씩 헛기침을 

하며 책을 들고 찾아오던 헤트라임크. 

'돌아‥갈까?' 

그와 비슷한 향수를 아리에 또한 느끼고 있었다. 그녀 또한 초콜렛이 엄청나게 비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금전 

감각이 전무하다시피 한 시즈보다는 용병단 세이서스의 재무당담이었던 그녀가 부담감이 더 컸다. 

봄의 혈사가 일어나기 전까지 그녀는 부족할 것 없는 랑쉐르 백작가의 영애였다. 꽤나 세력있는 가문이었기에 주변 

영지 사이에서는 왕족처럼 행세할 수 있었던 랑쉐르 백작가. 그런 가문의 권세도 어린 아리에 랑쉐르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형제가 없었던 그녀는 외로움에 언제나 무방비 상태였고 조금이라도 혼자 있는 시간을 줄여보기 위

해 많은 가정교사를 불렀다. 여자라고는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지식은 쌓여갔지만 그녀가 정작  바랬던 것은 얻지 

못했다. 언제나 우울함에 잠겨 아리에는 무표정해져갔고 아버지인 블테인은 그녀를 조금이라도 달래기 위해 가끔씩 

왕족들의 음료인 초콜렛을 사다주었다. 

'아버지‥. 천국에 가셨을까?' 

알 수 없었다. 지금에 와서 서민의 눈으로 바라본 귀족들은 그리 착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아버지 또한 다른 서민들

의 눈에 그렇게 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넓은 들판 푸른 잔디가 끝없이 깔려있는  자연의 카페트 위에 예술품같이 세워진 성곽.  위로는 랑쉐르가의 깃발이 

휘날리고 아래의 마을에서는 집집마다 연기가 솟아나는‥ 그리운 곳. 

'돌아‥ 갈까?' 

시즈와 아리에. 아픈 기억을 간직한 사람들의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가 떠올랐다. 

"으이구! 대체 언제까지 저럴 거지?" 

구석에서 한 여인이 쥬스의 빨대를 쭈욱  빨다가 짜증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시즈들의 뒤를  따라서 들어온 얼굴을 

둘둘 싸맸던 두 사람 중 하나였다. 그들은 구석에 들어와서 두건을 벗자 그 정체를 환히 드러냈는데 파마리나와 파

세닌이었다. 

아리에의 미소에 꿈에 취한 듯 파세닌은 빨대를 입에 문 채로 넋이 나간 상태였고 그나마 제대로(?) 정신이 박혀있

는 파마리나는 진도가 나가지 않는 시즈들의 데이트에 지루함을 느끼고 있었다. 

뭔가 재미있을 줄 알고 따라왔는데 아주아주 평범하다니!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자 그녀는 엄청나게 초초해하

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내가 나서서 도와주는 수밖에.' 

물고 있던 빨대를 손가락에 쥔 파마리나는 마법봉을 휘두르듯 가볍게 원을 그렸다. 

"꺅! 시즈!" 

들려오는 아리에의 상쾌한(?) 비명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쾌재를 불렀다. 

마법으로 시즈가 마시던 쥬스를 엎어 버린  것이다. 회상에 빠져있느라 멍하게 있었던 시즈는  피하지 못하고 옷을 

사과즙으로 물들였다. 그리고 아리에가 다가가서 더러워진 옷을 닦아주면서‥ 눈을 마주치고‥ 그대로‥. 뒤는 상상

에 맡긴다. 

마녀의 집에 있는 책이라고 해봤자 뭐겠는가? 마법서가 아니라면 삼류 로망스가 전부였다. 파마리나는 어릴 때부터 

쭉― 그런 종류를 봐온 턱에 그것이야말로 진실한 사랑의 과정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소금물에 절여진 것처럼  일그러졌다. 마침 테이블을 지나가던 웨이트리스가  자신이 건드린 

것인줄로 착각하고 당황하면서 시즈에게로 다가간 것이다. 그 모습에 파마리나는 당황했다. 

"안돼! 넌 아니야! 네가 아니라고!" 

연신 사과를 하며 아리에의 역할을 대신해버리는 웨이트리스. 끝까지 대신하지는 않았지만 충분한 방해임은 확실했

다. 파마리나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그러나 정작 방해를 받은 아리에는 물끄러미 시즈의 곤혹스러운 얼굴을 바라보다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래. 이번 기회에 시즈의 옷을 새로 사자." 

"네?" 

이내 시즈의 어깨가 절망한 사람처럼 축 처졌다. 여자들의 쇼핑이 얼마나 지루한지 그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성격 급한 남자들에게 있어서 고문이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방긋 웃으며  팔짱을 끼는 

아리에의 얼굴이 너무나도 귀여운 것을‥. 

"감사합니다." 

계산을 하고 두 연인이 가게 밖으로 나간 후, 파마리나들도 일어섰다. 아직도 파세닌은 아리에가 보여준  미소에 넋

이 빠져 헤롱거리고 있었다. 파마리나는 눈을 이리저리 굴려보다가 씨익 웃으며 남은 쥬스에 마법의 가루를 탔다. 

"내 계획을 방해하다니 어디 혼 좀 나라지." 

파마리나 일행이 나가고 웨이트리스는 거의 마시지 않은 쥬스를 바라보며 아까운 표정을 지었다. 

"어머‥. 거의 마시지 않은 게 아니라 아예 마시지 않았잖아? 참나, 음식 귀한 줄 모르는 손님이네‥." 

그리고 손을 뻗어 쥬스잔을 잡고‥. 

파마리나는 뒤에서 들려온 비명과 아우성에 어깨를 으쓱했다. 

"아후‥ 기분이 좀 풀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