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6화 (156/200)

                                            43악장 1화

환기(環期) 4762년 6월 3일. 

실베니아의 수도, 펴온의 궁전은 밤이 늦었지만 어느 때보다도 밝게 빛나고 있었다. 사람들이 속속 도착하고 서로에

게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여자들은 고상한 걸음걸이로 걸었으며 남자들은 턱을 위로 쳐들고 자신있게 서있었다. 

"시작되었나?" 

왕궁의 불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곳. 서쪽의 성곽 구석에 석상처럼 앉아있던 검은 그림자가 걸걸한 금속성으로 

말했다. 

"시작되었습니다. 실베니아 최고의 축제가‥." 

"이번에는 바보같이 나서지 않는 게 좋아, 노르벨." 

"가끔은 단독범행도 있어야 재미가 있는 겁니다. 이해 좀 해주시죠, 바스티너." 

바스티너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노르벨은 주절거리는 입을 조절하지  못하고 법의를 입은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어때요? 로진스. 음유시인들이 왔나요?" 

"그래‥. 대기(大氣)가 통째로 움직이고 있어. 느껴지지 않나? 그 뿐만이 아니야. 저 불꽃이 점점 강해지고 있어. 그

들의 제왕을 반기듯이 말이야. 흐흐흐흐‥흐하하하핫!" 

노르벨은 볼을 긁적거렸다. 그는 가끔 마법사길드를 염탐하는 어쌔신 친구들에게 광적인 마법사를 조심하라는 충고

를 들은 바가 있음으로 얼른 로진스에게서 멀어졌다. 그런 줄도 모르고 '광적인 마법사'는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빡―! 

"이제 좀 조용하군." 

"그래도 괜찮을까요? 노리스," 

"시끄러운 것보다 낫잖아. 시작할 때되면 깨우라고." 

"내가 말입니까?" 

"그럼 누가할까?" 

이를 내보이며 노리스가 위협을 하자 노르벨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이럴 일은  보통 가장 작은 로길드의 차지였

지만 그는 현재 없었다. 바크호도 소년 주군을 따라서 함께 사라진 상태였다. 

"에휴‥. 로길드는 무슨 일로 엘시크로 돌아간 겁니까? 츠바틴에게 물어봤죠?" 

"글쎄‥. 그의 조부(祖父)가 위독하다고 하더군." 

"로길드의 할아버지라면 크레오드 페노스놀멘 자작이지요? 실질적으로 '역사의  고리'를 이끌던 사람인데‥ 안타깝

군요." 

"글쎄‥." 

"그 놈의 글쎄 좀 그만해요." 

"그러지." 

"정말이지 상대하기 힘든 사람들뿐이라니까. 아아‥ 로길드 어서 돌아와서 너의 귀여운 미소를 내게 보여다오." 

자신은 정상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노르벨의 한탄이었다. 그는 조잘거리던 입을 다물기 싫던지 다른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있는 사내에게 다가갔다. 그 사내는 정말이지 컸다. 노리스보다도 한 뼘 이상은 큰  것 같았다. 이 정도의 거

구라면 백곰과 힘을 겨뤄 뒤지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노르벨은 생각했다. 

"2년 만의 제외가 되겠군요, 당신과는‥. 설마하니 레이모하 교단에서 당신을 보낼 줄이야. 정말 인연이 깊어요." 

사내는 눈을 감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방해를 받지 얼굴을 찌푸렸다. 

"좀 닥쳐주겠나? 명상이 방해가 되는 군." 

"그래십시오. 명상이라‥ 레이모하의 성투사들은 사람을 죽이기 전에 상대의  명복을 빈다고 하던데 사실인가 보군

요." 

"정말이지‥ 시끄럽군." 

화가 난 그가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그리고 노르벨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일련의 동작은 빠르지 않았지만 워낙 거

구이기 때문인지 노르벨은 피하지 못하고 잡히고 말았다. 여인들이 애완용 고양이를 드는 것처럼 사내는 가볍게 힘

을 주었고 노르벨의 발은 고양이 꼬리처럼 허공에서 바둥거렸다. 

"켁켁! 그만 놔줘요!" 

"귀찮게 말 걸지 않겠다고 약속해라." 

"그래요. 케엑! 약속할 테니까‥ 노리스, 나 좀 살려줘‥. 

"사제, 그만 하시오. 당신은 교황의 명령으로 우리를 돕기 위해 온거지 싸우러 온 게 아니지 않소?" 

"흥!" 

사제라고 불린 자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털었다. 노르벨은 구석으로  내동댕이쳐진 후에도 한동안 호흡곤란으로 거

친 기침을 토했다. 이내 기침이 잦아들자 그는 지치지도 않는지 투덜거렸다. 

"다들 난폭해." 

"너만 조용히 있으면 되잖나." 

"알았더고요.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에즈민처럼 시종 행세를 하는 건데‥." 

한숨을 내쉬고 노르벨은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데 뭔가 깔리는 게 있었다. 잘 보니 노리스에게 얻어맞고 기절한 로

진스. 비킬까 고민하던 그는 코웃음을 치고 다리를 쭉 폈다. 

"아‥ 편하다‥." 

"윽! 불편해!" 

"좀 참아요, 파마리나. 그렇게 치마를 걷고 걸으면 어떻해요?" 

"에구‥. 시어머니가 따로 없네. 그렇지만 안그러면 넘어질 것 같단 말야." 

파마리나는 시종일관 투덜거렸다. 아무리 궁전에 들어간다지만, 아무리 최고의 요리사들이 만든 음식들을 먹기 위해

서라지만 정말이지 허리 꽉 조이는 코르셋은 끔찍했다. 이래가지고 뱃 속에 잘 들어갈지 고민이었다. 

'조금 먹는 게 왜 숙녀의 미덕인가 했더니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잖아. 이럴  줄 알았으면 살이라도 빼둘 

걸. 난 역시 펑퍼짐한 옷이 좋다구. 때깔도 검은 게 좋아. 이건 너무 화려하잖아.' 

그녀와는 달리 아리에는 털을 다듬은 백조처럼 드레스가 아주 잘 어울렸다. 후에 연회장에서 일어날 전투를 대비하

여 너플거리지 않고 깔끔한 종류였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깨끗한 이미지를 돋보이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어서 들어가시죠." 

연회가 열리는 홀의 문이 열리자 귀족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천장에 달린 청광석과 거대한 샹들리에가 실베니아 궁

전의 사치도를 대신 평가해주고 있었다. 긴 테이블에는 촛불이 켜져서 이미 준비된 음식들은 더욱 먹음직스럽게 보

였다. 당장 뛰어가서 앉으려는 파마리나를 만류하고 돌아온 아리에가 무심결 몸을 떨었다. 주위에 삼엄하게  지키고 

선 근위병들이 보였다. 

'어쩌면 오늘 이 자리에서 죽게 될 지도‥.' 

그 때 누군가 손을 꼭 잡아주었다. 옆을 돌아보니 시즈가 불빛 때문인지 붉어진 얼굴로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은근

히 쑥스러움이 많은 청년. 아리에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자리에서 죽게 된다고 해도‥. 후회하지 않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