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악장 6화
아까 전까지 홀이 있던 곳에서는 아직도 싸움이 한창이었다. 다들 여기저기가 피투성이에 엉망진창으로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그들의 전투는 여전히 격렬했다.
"크앗!"
헤라즈에게서 이미 완갑은 날아간지 오래였다. 피로 얼룩진 손으로 망치질하듯 시즈를 내리쳤다. 지친 쪽은 어느 쪽
이나 마찬가지. 시즈는 옆으로 굴렀다. 에릭사에서 넘쳐나는 에너지가 받쳐줄 수 있을 정도의 한계를 지난 지 오래
였다. 체력이 남아있었다면 가볍게 피했을 시즈가 바닥을 구른다는 것이 그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그의 오른족
눈 위는 길게 찢어져서 피가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헤라즈는 계속 오른쪽으로 돌아가며 시즈를 공격했다.
그렇다고 무작정 공격할 수는 없었다. 시즈가 혼신의 힘을 다해서 휘두르는 동방예도에서는 바람의 마나가 섞여서
신성강화법이고 뭐고 간에 완전히 잘라버리는 진공의 검기가 발휘되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극과 극을 달리고 있었다. 빠르고 무거운 헤라즈가 급소 부위마다 내지르는 강력한 주먹에 맞았다간 시
즈는 숨 한 번도 더 못 쉬고 절명이었다.
헤라즈도 시즈의 진공 검기를 막아내던 완갑이 부서진 이후로는 신성강화법은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두 사람의
검기와 권이 펼쳐질 때마다 모래바람과 굉음이 자욱하게 피어났다.
"나는 지지 않는다! 나에게 죽어간 사람들의 생명이 날 지탱하고 있어! 나는 생명의 무게를 알고 있다! 시즈, 너는
과연 알고 있는가? 너의 목숨이 내가 지고 있는 생명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가아!"
그의 절규가 섞인 주먹은 유성처럼 떨어져 내렸다.
콰앙! 쾅!
시즈는 검을 휘두를 시간도 없이 뒤로 연신 쫓겼다. 물결처럼 부드러운 그의 움직임도 이미 헤라즈는 파악한 후였
기 때문에 공격범위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다시 날아오는 거대한 주먹. 더 이상 피할 곳은 남아있지 않았다.
위기일발의 순간! 시즈의 투명한 눈에 헤라즈의 주먹이 가득 차 올랐다. 푸른 신성력을 눈이 시리도록 머금고 있는
힘의 덩어리. 시즈는 뒤로 펄쩍 뛰며 주먹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파아앗!
진공의 검파가 일어났다. 그러나 헤라즈는 피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힘이 다시 한 번 격돌했다.
쾅!
힘의 우세가 누가 쓰러지는가로 판가름난다고 친다면 둘의 대결은 시즈의 패배였다. 그는 쓰러지는 정도가 아니라
뒤에 지고 있던 벽을 부수고 날아가서 바닥에 떨어졌다.
"컥! 쿨럭! 쿨럭!"
시즈는 고통스러움에 땅을 마구 구르며 피를 쏟았다. 피에는 하얀 내장의 조각마저도 섞여있었다. 한동안 몸부림치
던 그는 몸을 일으키려고 땅의 손을 집다가 다시 넘어졌다.
"크‥."
양손의 손가락이 기괴하게 비틀려져 있었다. 땅을 집을 수도 없을 만큼. 시즈는 안간힘을 쓰면서 일어났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헤라즈는 주먹에 박혀있는 동방예도를 뽑아서 던졌다. 동방예도는 충돌할 때의 강도를 감당하
지 못했는지 반으로 쪼개져 있었다.
챙! 하는 소리와 함께 검날은 예도의 손잡이가 있는 자리 옆에 나뒹굴렀다.
진공검기는 허공을 가를 때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헤라즈의 주먹에는 영향을 입힐 수 없었다. 대신에 헤라즈
의 전신에는 진공의 소용돌이로 인한 상처가 쉴 새 없이 피를 뿜어내고 있었다. 피로 목욕을 한 듯한 모습이었다.
"승부는 끝난 것 같군. 또 하나의 생명을 지게 되는 거야. 너무 슬퍼하지 말게, 시즈. 자네말고도 내가 지어야 할 무
게는 아주 무거워서 자네의 생명을 지게 되어도 별 차이가 안 날 테니까."
그 말이 그의 진심인지 농담인지 알 수 없었지만 시즈는 농담으로 생각하는지 빙그레 웃었다.
"죽음을 두고 웃을 수 있다니‥. 성투사로서의 예의로 고통 없이 보내주마."
헤라즈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시즈는 천천히 자신의 검이 떨어진 곳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헤라즈가 던진 검
날의 잡았다. 손가락이 죄다 부러진 상태였음으로 손바닥을 벌리고 양 손목으로 잡았다.
"오시죠, 헤모 사제. 레이모하의 충실한 종이여‥. 제 생명의 무게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서있기도 힘들어 보이는 모습으로 시즈는 헤라즈를 불렀다. 광폭한 곰처럼 달려온 거구의 성투사는 피가 줄줄 흘러
내리는 주먹을 다시 한 번 쥐었다.
"그래. 레이모하의 곁으로 보내주마! 시즈!"
콰릉!
헤라즈의 주먹이 공기를 갈기갈기 찢었다. 그 소리만으로 시즈는 날아가 버릴 것 같이 서있었다. 피에 물들어 붉게
변한 눈동자만이 상대의 공격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너무도 연약해 보이는 왼팔을 들어올렸다. 왼팔이라면 그 어떤 공격이라도 막아낼 수 있다는 듯 자연스럽게‥.
그 때는 막 블리세미트가 막 도착한 시간이었다. 시즈가 피를 닦은 걸레 같은 꼴로 헤라즈에게 마지막 저항을 하는
광경이 보였다. 그러나 검도 제대로 쥘 수 없는 몸으로 어떻게 하겠단 말인가. 소년은 놀라서 외쳤다.
"시즈님! 안돼에에!"
그러나 너무 늦은 후의 일이었다. 사정없이 시즈의 왼팔을 뭉게 버린 헤라즈의 주먹은 목표의 엽구리에 정확하게
박혔다. 날아가는 시즈의 모습이 마치 끈이 풀려버린 연처럼 자유롭게 보였다.
블리세미트는 다람쥐처럼 달려가서 떨어지는 그를 잡았다. 파마리나 때와는 차원이 틀린 상처에 소년 사제는 시즈
가 죽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
"시즈님! 시즈님!"
"크윽! 쿨럭!"
"시즈님!"
"브, 블리세미트‥. 왔군요‥. 조, 좀‥ 일으켜‥ 주겠어‥요?"
죽어 가는 사람의 청은 거절을 못하는 법이다. 블리세미트가 조심스럽게 일으키자 시즈는 부러진 뼈들로 인하여 신
경이 자극 받고 고통스러워 가늘게 신음소리를 냈다.
"으음‥. 헤, 헤모 사제‥님."
은백의 머리마저 피로 변색된 시즈가 부른 상대는 선 상태로 고개를 숙인 채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듣고 있지 않
던, 듣고 있던 시즈는 이미 피로 눈이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피를 쿨록쿨록 뿜으면서도 말을 이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 쿨럭! 있습니다‥. 다시‥는 사랑하지 않겠다고 맹‥ 세‥ 했으면서도 또! 생겨버
렸습니다‥ 쿨럭쿨럭! 하, 하지만 그렇기에 죽을 수가 없‥습니다. 내‥ 생명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헤, 헤모 사제님‥. 죽은 자‥들은, 콜록! 사랑을 나‥눌 수 없‥고 우정‥을 나눌 치, 친‥구조차 없습니다. 진‥정
으로 마음을 짓누르는 흥분과 상처르을‥ 그들은‥ 느낄 수 어, 없습니다‥. 죽은 자의 생명과‥ 살아있는 자의‥
생명은 틀립니다‥. 저는 장담할 수 이, 있‥습니다. 헤, 헤모 사제님‥을 묶고 있는 수많은 생명의 잔재보다 제가
가‥진 생명의 무게가 더 무겁다는 것을‥.
그렇습니다‥. 제 생명은 사랑과 우정으로 인해 무겁습니다‥."
"‥‥."
헤라즈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언제부터일까? 호랑이처럼 험상궂던 그가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은‥. 블리세미트
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보였으니까.
"시즈, 그는‥."
"됐습니다. 말하지 말아주세요."
시즈 또한 알고 있었다.
왼팔이 헤라즈의 공격을 막아내며 잠시나마 시간을 번 순간 그는 바람의 의지를 일으켰다. 공중에서 빙글빙글하고
드릴처럼 회전하는 검날. 팔과 옆구리가 일그러지는 고통 속에서 시즈의 발은 예도 뒷부분을 정확하게 밀었다. 발끝
으로 검이 사람을 베는 감각이 전해지자 그는 사르르 눈을 감았다.
블리세미트가 열성적으로 신성력을 쏟아 부은 덕분인지 시즈는 혼자의 힘으로 천천히 일어섰다. 눈물이 흐르자 피
도 씻겨나가 천천히 시야가 보이고 있었다.
"시즈, 아직은 안됩니다."
블리세미트의 만류에도 시즈는 멈추지 않았다. 왼팔을 덜렁거리며 걸음을 계속한 그는 헤라즈를 은은한 미소를 지
으며 올려다보았다. 그것은 헤라즈가 짓고 있는 표정과 비슷했다. 둘은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미소로 서로를 대하
고 있었다.
"헤모‥. 나도, 나도 말입니다. 헤모처럼 다른 사람을 죽이고 얻은 생명의 무게가 있습니다. 하, 하지만 이토록 무겁
게 느껴지기는, 이토록 힘들기는‥."
고개를 젓는 시즈는 말을 맺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피와 함께 흘러나오는 눈물을‥.
"블리세미트‥ 부탁합니다. 기도를‥."
소년 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심장에 꽂혀있는 예도의 반조각을 뽑아내자 한 줄기의 핏줄기가 그의 사제복을 적혔
다. 동시에 헤라즈는 무너졌다. 조심스럽게 받은 블리세미트는 거대한 몸을 천천히 눕혔다.
그리고 경건하게 기도를 올렸다.
"이 세상을 주관하는 신들이여‥."
기도가 끝났을 때 시즈의 입에서는 한숨처럼 작은 음률이 흘러나왔다.
그대여‥ 생명의 무게에 눌린 자여‥.
당신을 받쳐주는 사랑을 왜 알지 못했나요.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그대를 알았던 나는 슬프기만 합니다.
그대여‥ 순수하여 고통스러웠던 사람이여‥.
이제 그만 무거워하지 말아요.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고 가볍게‥
쾌활한 웃음을 짓듯 가볍게‥.
하늘을 나는 그대의 모습을 그린 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