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악장 7화
성에는 글르디프리아의 군사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역사의 고리는 이미 싸움의 방향이 패배로 기울었다는
걸 알고 하나 둘씩 쓰러진 사람을 짊어진 채 사라져 갔다.
벽에 기대여 몸을 지탱한 젠티아가 비슷한 상태의 펠리언에게 말했다.
"펠리언. 그만 포기해. 이미 끝났다."
"그런 것 같군."
젠티아는 승자의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만 두게. 자네는 충분히 했어. 설마하니 대륙에 내가 전력으로 싸워서 죽일 수 없는 자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자네, 역사의 고리에게 세뇌 당한 게 아니지?"
"그렇소. 오히려 그들을 이용했지. 아버지는 나에게 말하곤 했소. '기사라면 마지막 뜻을 위하여 힘을 숨겨라. 숨길
수 있을 때까지.' 지금이 마지막 뜻이었어. 내가 낼 수 있는 모든 힘을 냈는데도‥ 하하하! 당신의 말대로야. 끝난
거지."
그렇게 말하고 펠리언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멀리에서 데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젠티아‥!"
"데린!"
그녀에게 달려가려던 젠티아는 슬쩍 펠리언을 바라보았다. 펠리언은 파리를 쫓듯 손을 휙휙 흔들며 말했다.
"어서 가보시오."
"자네는 어쩔 생각인가?"
"죽기는 싫으니 도망가야겠지."
"그렇군. 그럼‥ 잘 가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 젠티아는 데린에게 달려갔다. 어이가 없어진 펠리언은 맥이 풀려 너털웃음만 세어 나왔다.
"하하‥ 역적한테 잘 가라면서 손을 흔들다니 정말이지‥."
그는 일어나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젠티아에게 이미 언질을 받아서일까? 아무도 반란의 주동자가 걸어가는데 잡
지 않았다. 사라지는 펠리언을 바라보며 데린은 한 번 눈물을 훔쳤다. 그러나 잠시였을 뿐 그녀는 웃으며 사랑하는
이의 품에 안겼다.
다른 사람들도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블리세미트는 피투성이가 된 시즈를 부축하면서 들어섰는데 이미 레스난과
함께 도착해있던 아리에는 그가 죽기라도 한 듯이 달려들었다.
"시즈! 괜찮은 거야?"
"괜찮아요. 블리세미트가 치료술을 행해준 덕에‥."
보를레스는 시체처럼 눈을 뜨지 않는 파마리나를 어깨에 지고 왔다. 그가 가까이 올 때마다 코 고는 소리가 진동을
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젠티아는 데린을 안고 로바메크 공작에게 말했다. 로바메트 공작은 그의 어깨를 두들기고 대답했다.
"우리의 생각대로 국왕 폐하 역시 암시에 걸려있었네. 지금 마나이츠님께서 주문을 파해하고 계시네. 지금쯤 다 되
었을 거야."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나이츠가 국왕과 기사들을 데리고 들어서고 있었다. 사람들이 무릎을 꿇으며 절을 했고 파이
론 3세는 근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는 페르베이안 백작에게 들었네. 킬유시 공작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에 대해서도. 사건이 이 정도까지 되었는데
무엇을 탓하겠는가. 모두 짐의 부덕이라 생각하고 있네‥."
"황공하옵니다."
파이론 3세는 왕궁을 박살내놓은 사람들을 면죄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감격한 젠티아들이 고개를 숙였다. 그 때
로바메트는 뭔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고 시즈들에게 물었다.
"자네들, 혹시 내 아들놈을 보지 못했나?"
"이 사람을 찾는 거에요?"
그의 물음에 대답한 사람은 한 소녀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자 그녀는 천사처럼 귀여운 용모로 살짝 미소를 지
었다. 로바메트는 그녀를 본 기억이 났다. 이를 갈면서 그는 검을 빼어들었다.
"이 요물!"
에즈민. 수많은 사람들에게 암시와 최면 마법을 걸었던 장본인. 그녀는 방긋 웃으며 손바닥을 내밀었다.
"다가오지 말아요. 이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어요?"
"파세닌!"
그녀의 발 밑에는 20대 정도의 청년이 발가벗겨진 채 업드려 있었다. 눈물이 줄줄 흐르는 거의 등은 온통 칼자국으
로 가득했다. 로바메트는 궁전만큼이나 난장판이 된 아들의 모습에 어찌할 줄 몰랐다.
에즈민은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귀여운 표정으로 고민을 하는 듯 했다.
"오늘은 저희가 진 것 같아요. 노리스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고 저희 오빠도 그렇게 말했으니‥. 할 수 없죠."
"그렇다면 어서 그를 내놔라."
젠티아는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에즈민은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냥은 싫은데요."
"그럼 뭘 원하는 거냐!?"
"어머! 무서워요. 제가 겁을 먹어서 다리에 힘이 들어가면 어쩌죠?"
에즈민의 하이힐은 정확하게 파세닌의 목을 누르고 있었다. 만약 마음을 먹고 힘을 준다면 목뼈가 남아나지 않음을
깨달은 젠티아는 분을 삼키며 입을 다물었다.
침묵 상태가 된 장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에즈민은 깔깔대며 웃었다.
땅그랑.
"이건 뭔가?"
로바메트는 에즈민이 단검을 던진 의미를 물었다.
"국왕을 찌르세요. 그럼 당신의 아들을 풀어드리죠. 그 안에는 상처가 회복되지 않는 독이 있어요. 꼬마 사제의 뛰
어난 신성력이라고 해도 살릴 수 없을 걸요."
파이론 3세와 파세닌을 번갈아 보기를 몇 번‥. 로바메트 공작은 망설이듯 부들거리는 손으로 단검을 잡았다. 독이
고루 발라져있는지 보랏빛이 은은히 검신에 돌고 있는 단검.
참담한 모습이 되어있는 아들. 그리고 이 나라의 국왕이자 그의 주군인 파이론 3세. 로바메트 공작은 천천히 파이론
3세에게 다가갔다.
국왕도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이미 체념한 표정이었다.
"로바메트, 미안하네. 그대의 기대에 난 언제나 미치지 못했지. 나의 아들로 하여금 뛰어난 군주가 되도록 도와주
게."
"그런 말씀 마십시오, 폐하. 앞으로 뛰어난 군주가 되어주시면 됩니다. 그러기 전에 마지막으로 제가 남기는 마지막
시를 봐주십시오."
'무슨 말인가?'하고 파이론 3세가 생각할 때 로바메트 공작은 망설임 없이 단검으로 오른손의 손가락을 잘랐다. 툭
하고 떨어지는 한 마디 신체의 일부. 아픔과 동시에 독이 퍼져감을 느꼈지만 로바메트 공작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단검을 에즈민에게 던졌다.
"무슨 짓이죠? 아들이 죽어도 상관없다는 건가요?"
그녀의 말도 로바메트 공작은 염두에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파이론 3세를 보고 말했다.
"폐하는 예전부터 절 오른팔이라고 말하시곤 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물론이지. 아직도 그대는 나의 오른팔이네."
"감사합니다. 정말로 폐하께서 소신을 팔이 아니라 손가락 중 하나라고 생각해 주신다면 봐주십시오."
로바메트 공작은 독으로 인해 시커멓게 변한 피로 그나마 깨끗하게 보이는 테이블 보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다면‥.
저 허공의 크기를 알 수 없는 구름성 같이 거대한 뜻을‥.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다면‥.
저 바다의 몰아치는 파도처럼 끝없는 열정으로‥.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다면‥.
영원히 기억될 노래를 남기리라.
끝없이 기억될 의미를‥
로바메트 공작은 시를 끝맺지 못하고 엎어졌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아버지이‥!"
파세닌은 목을 짓누르는 무게를 잊어버리고 벌떡 일어섰다. 사실 에즈민은 로바메트 공작이 죽음을 결심하고 손가
락을 잘랐을 때부터 파세닌이 인질의 가치를 상실했음을 알고 도망친 상태였다.
하지만 파세닌은 그것 따위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달려가서 아버지의 시신을 들고 흔들며 그는 오직 울부짖을
뿐이었다.
"아버지‥."
* * *
실베니아의 공작, 파이얼 로바메트의 장례식이 환기(環期) 4762년 6월 5일에 있었다.
당시의 전략가들과 정치가들은 입을 모아서 그가 숨질 때 실베니아에서 피어나기를 기다리던 꽃들은 모든 향기를
잃었다고 말했다.
실베니아의 국왕 잉그리겔 파이론 3세는 반란 세력에게 오히려 절을 하고 그 동안의 폭정에 대해 용서를 빌었고 반
란군들과 신민들 또한 감격하여 함께 절을 했다고 전해진다.
또 진정으로 국가의 위협이 되는 세력으로 '역사의 고리'를 규정하여 다른 국가에도 그 존재의 위험성을 알렸다.
실베니아가 국가적인 위험을 겪으면서 몇몇 사람이 부각되었다. 젠티아 드로안은 글로디프리아에서 소속을 중앙으
로 옮기면서 '값싼 남작'에서 '비싼 남작'이 되었다.
용병왕을 맡아서 밀리지 않고 싸운 보를레스는 용병국에서 '광풍의 검사'라는 이름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또 마법사
들 중에서는 새로운 주자로 마나이츠 페르베이안의 마지막 제자인 '넬피엘 세로스'가 떠올랐다.
그리고 최대의 이슈는 뭐니뭐니 해도 '마땅찮은 시즈'가 살아있다는 내용이었다. 특히 엘시크에서는 학자들이 반란
이라도 일으킬 것처럼 왕궁 앞에 모여서 시즈 세이서스의 직위 복귀를 상소(上訴)했다. 그동안 학자들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왕실에서는 세이어스가(家)의 반란 사실을 뒷받침할 증거를 보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들 떠났군."
젠티아는 성 위에서 머리를 긁적거리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곧 데린을 꼭 껴안으며 말했다.
"하긴 둘이 되어서 좋긴 하다!"
"흠흠!"
뒤에서 킬유시 공작이 헛기침을 해댔다.
시즈와 아리에, 보를레스는 다시 그들의 나라인 엘시크로 돌아갔다. 엘시크의 학자 뿐 아니라 아스틴 네글로드 등
여러 학문기관에서 넣는 압력을 결국 왕실은 받아들인 것이다. 레스난 또한 그들을 따라나섰다.
글로디프리아의 재정을 상단의 300%라는 엄청난 적자를 감수하며 도왔던 카이젤은 실베니아의 재무담당 부서에 정
식으로 임명되었다. 마크렌서 자작은 좋은 재정자원이 없어졌다고 입맛을 다시며 '백 장의 꽃잎'과 함께 글로디프리
아로 돌아갔다.
넬피엘은 마나이츠와 함께 여행을 떠났다. 무엇을 찾느냐는 젠티아의 물음에 얼굴을 붉히며 대답을 안하는 걸로 보
아서는 뻔했다. 게다가 마나이츠가 제자 며느리를 찾느다고 했으니.
파마리나는 특이하게도 성직자인 블리세미트와 파티를 짰다. 둘은 아무래도 아스틴으로 가서 토루반과 피브드닌의
연구를 도울 생각인 듯 했다.
파세닌 로바메트는 국가에서 아버지의 작위를 그대로 물려주었지만 거절하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소문에는 반란의
주동자인 펠리언를 찾아서 그에게 창술을 배운다고 했다.
마지막은 바로 페스튼이었다. 레스난과 아리에에게 제압 당했던 그는 반란의 죄를 '역사의 고리'에 의한 세뇌 때문
으로 규정하고 사작의 작위와 중앙 기사단의 군기담당감사관이 되었다. 이름뿐인 귀족이었지만 기사들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는 대만족이었다.
국왕에게 작위를 받는 자리에서 페스튼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진작 이랬음 오죽 좋아!?"
그러자 국왕인 파이론 3세도 웃으며 말했다.
"진작은 아니라도 이렇게 되었으니 오죽 좋은가!"
천장이 없는 왕궁의 홀로 햇살이 밝게 비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