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악장 2화
"아직도 그대로군요."
앞뜰의 땅에서 네 개의 성신석을 꺼낸 시즈는 허리에 메어있던 주머니를 끌렀다. 또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백만
타로운의 가치를 지닌 돌멩이가 그 안으로 굴러들었다.
"시즈, 마치 떠날 사람같아."
의아한 표정으로 아리에가 말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본 아이처럼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불안하게 중얼거리는 모
습이 귀엽게 느껴져 시즈는 하나 남은 손을 뻗어서 그녀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온화하면서도 따스한 기운이
피부를 흐른다.
예전이었다면 반대였을 상황, 시즈는 실베니아를 떠나기 시작하면서 변화했다. 처음에는 팔을 잃은 충격 때문이라고
다들 생각했다. 하지만 사랑하는 이는 연인의 변화에 예민하다고 하지 않는가. 아리에는 시즈의 변화가 본질적으로
다른 종류임을 알고 있었다.
젠티아는 시즈가 좀더 진정한 바람의 음유술사가 되어간다고 말했지만 아리에는 오히려 불안했다.
'바람은 잡을 수 없는 존재‥.'
시즈가 어디론가 떠나버릴 거라는 생각을 하자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세이탄으로 돌아온 이후 많은 학자
들이 소문을 듣고 방문하고 갔지만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즈는 그런 기색을 조금도 비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리에? 왜 그래요?"
"아무 것도 아니야. 시즈, 왜 지금까지는 그냥 두었던 성신석을 꺼내는 거야?"
"간단해요‥. 이제는 필요해졌으니까요."
그는 이해할 수 없자 삐친 표정을 짓는 아리에를 손가락으로 달래며 말을 이었다.
"바람이 전해주고 있어요. 여기서 멀지 않은 곳의 이야기를‥. 곧 있으면 알게 될 거에요. 사람들이 올 테니까요."
시즈의 말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예언처럼 그가 말한 다음 날, 제플론에서는 사람을 보내왔던 것이다. 사절의 자
격으로 찾아온 자는 시즈에게도 어느 정도 안면이 있는 인물이었다.
"세이서스 후작 각하‥."
"시호트 자작 각하, 난 작위를 허락한 일이 없습니다."
살풋이 미소를 지으면서도 시즈는 단호하게 말했고 시호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마땅찮은 이'이라고 불러드리겠습니다. 확실히 이 쪽이 더 어울리는 군요."
녹색의 정장을 즐겨 입어 녹색의 자작이라고 불리는 그는 동경하고 선망했던 '마땅찮은 시즈'와의 재회에 진심으로
기뻐하는지 온통 웃음꽃이었다.
"아리에, 보를레스를 좀 불러 주시겠어요? 그리고 수도로 갈 차비를 해주세요. 옷은 모두 검은 옷으로‥."
시호트 자작이 성의 전갈을 알리기도 전에 시즈가 아리에에게 말했다. 물론 사절이 왔으니 성으로 와달라는 뜻이겠
지만 시호트는 한순간 유리 같이 투명한 눈동자 깊은 곳에서 시즈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많이 변하셨군요."
"그런가요? 팔이 하나만 없어도 겉보기에 달라진다고들 하더군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은은하게 퍼지는 미소를 보면서 시호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외모가 아니었다. 전의 시즈는 형태를 갖추고 있던, 물
병에 갖혀 있던 물이라고 치면 지금의 시즈는 바다를 대하는 듯 했다. 어디에도 있으면서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그래, 이 사람은 바람 같다.'
"우리는 이제 그를 떠나 보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레이모하의 곁에서‥."
장내는 침묵의 도가니였다. 입을 열고 있는 사람은 오직 사제 뿐, 장내의 사람들은 모두 두 손을 꼭 쥐고 사자(死
者)를 위한 기도에 열중했다.
로바메트 공작의 죽음에 이어 환기(環期) 4762년을 역사가들에게 중요한 해로 자리 매김 시킨 크레오드 페노스톨멘
자작의 장례식이 시작됐다. 로바메트 공작이 죽은 지 겨우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
막 장례식장에 도착했을 때 아리에와 보를레스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바로 얼마 전까지 흉폭한 마법과 뒷통수를 치
는 전략으로 그들을 괴롭히던 소년, 로길드 페노스톨멘이 당장이라도 안아주고 싶은 애처로운 표정으로 서있었던
것이다. 시즈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소년에게 고개를 숙이며 위로를 보냈고 둘은 마치 사전에 계획이라도 짰던
모양인지 몇 마디를 자연스럽게 주고받았다. 어딜 봐서도 조문객과 유가족의 모습이었다.
'누가 저걸 보고 얼마 전까지 검을 겨누고 싸우던 사람들이라고 생각할까?'
관이 매장될 때까지 시즈는 로길드의 곁에 서서 걸었다. 로길드가 쉬지 않고 중얼대는 말을 듣고 고개를 연신 끄덕
이며 가끔씩 위로의 말을 했다.
'가식이야.'라고 생각하면서도 로길드의 마음은 꼬아져있던 실이 풀리듯 풀려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시즈는 진심으
로 그를 위로한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윽고 주니퍼 가지가 태워지고 조문객들을 대표하여 엘시크의 국왕 리페른 에도린이 한 송이의 장미를 페노스톨멘
자작의 가슴에 살며시 놓아두자 관의 뚜껑이 닫혔다.
한 사람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원한을 떠나서 왠지 모를 슬픔이 찾아온다. 관이 지하로 숨고 흙이 위를 덮
었을 때야 로길드의 푸른 눈동자는 한 줄기 가는 물줄기를 흘려보냈다.
"나는 '역사의 고리'와 잡았던 손을 놓겠습니다."
밤이 되어 장례의식이 끝나고 조문객들도 모두 돌아갈 무렵, 로길드는 입을 열었다. 의문을 갖을만도 하것만 시즈는
질문도,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뒤에서 궁금해 못 참겠다는 표정의 아리에와 보를레스를 생각해서인지 로길드
는 말을 이었다.
"소중했던 한 사람이 사라지고 나니‥. 지금까지 해왔던 일이 바보같이 느껴지는 군요. 이렇게 사라질 거면서 할아
버지는 역사라는, 개인으로써는 느껴지지도 않을 굴레를 생각하면 자신의 시간을 보내야 했던 걸까요?"
소년의 질문은 처음부터 대답을 원하는 게 아니었다. 이미 그는 답을 가지고 있는 듯 했으니까. 그걸 알기에 시즈는
눈을 감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등을 돌렸다.
그 때였다.
"세이서스 경."
"폐하!"
경악성을 지른 것은 보를레스였다. 이미 갔으리라고 생각했던 국왕이 수풀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니‥. 백색거성
베르니우스의 시종과 기사들이 지금쯤 얼마나 고생할지 눈에 선했다. 한심하다는 눈빛을 눈치챘는지 리페른은 눈썹
을 찌푸리고 말했다.
"이렇게 하라고 알려준 것은 로길드야. 그렇지 않았다면 시종들의 족쇄같은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지."
도대체 어떤 방법을 알려준 걸까? 일국의 국왕 전신에는 흙과 풀이 군데군데 붙어있었다. 어린애를 돌보는 어른처
럼 로길드는 그의 몸에서 흙을 털어주고 뒤로 물러섰다.
"그럼 폐하, 전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그래, 로길드. 어서 가서 쉬어."
조문객들을 일일이 상대했던 로길드는 리페른의 허락이 떨어지자 피곤한 걸음으로 사라졌다. 잠시 그의 등을 바라
보던 리페른은 풀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대들도 앉게. 할 얘기가 조금 길어질 듯 하니까."
"황공하옵니다."
시즈 일행은 그의 눈치를 보며 무릎을 꿇고 앉았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오히려 신경에 거슬렸는지 리페른은 말했
다.
"그냥 편히 앉으라니까."
"그래도 되겠습니까?"
시즈의 온화한 말투는 완곡했지만 행동은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를 연상시켰다. 말릴 사이도 없이 시즈는
털썩 주저앉았던 것이다. 아리에와 보를레스는 당황했지만 할 수 없이 쭈뼛거리며 다리를 펴고 앉았다.
"시호트 자작의 이야기를 들었네. 그는 '마땅찮은 시즈는 현자의 눈으로 모든 것을 읽고 있습니다.'라고 하더군. 만
약 시즈, 그대의 예전 모습을 회상하면 반신반의하네만 지금의 모습을 보니 정말로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군."
"약간 고생한 흔적이 몸에 남아서 그런가봅니다."
"머리칼이 희어지고 팔이 잘린 정도에 약간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면 곤란하네. 나 같이 평범한 고민은 바보같이 느
껴지지 않나."
"죄송합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고 싱긋 웃었다. 타인들의 눈에는 둘다 비슷한 미소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상은 아
니었다.
'부담스럽다.'
리페른은 눈동자처럼 시릴 정도로 순수한 시즈의 미소가 부러웠다. 그는 시즈에 대한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자의든
아니든 간에 헤트라임크의 목은 리페른의 명령에 따라서 잘렸다. 헤트라임크 뿐인가? 사라진 시즈의 팔도 당시부터
이어온 휴우증의 결과였다.
그런데도 밝게 웃고 있다. 역사가들이 '봄의 혈사'라고 이름 붙였던 일을 시즈는 잊고 있는 걸까? 어느 쪽이던지 시
즈의 정신적 수양은 범인을 뛰어 넘었다고 판단되었다. 아니, 그래야 했다. 국왕이라는 위치의 운명이 소년에게 참
으로 뻔뻔스러운 말을 하도록 시켰으니까.
"시즈, 이 나라를 떠나주게."
"‥‥."
생글생글 웃던 리페른이 꺼낸 한 마디. 머리 속에서 해석을 마치자 보를레스는 벌떡 일어났다. 검을 뽑지 않은 것은
모국의 지배자에게 남은 마지막 충의와 예의일 것이다.
"당신이 그런 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보를레스‥. 실베니아에서 광풍의 검사라는 별명을 얻었다더군. 축하하네."
"시끄러워! 당신은 내 말에 대답해야 한다! 지금 이 자리에 썩어빠진 엘시크의 근위기사단이 버티고 있다고 해도 상
황은 다르지 않을 거야!"
이래서 무식한 사람은 화나게 하면 안 되는 것이다. 보를레스는 당장이라도 리페른의 목을 비틀어버릴 듯 으르렁거
렸고 시즈는 말릴 생각도 않고 조용히 리페른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직 아리에만 괜히 보를레스를 데려왔다는 후회
로 식은땀을 흘렸다.
"대답하지, 광풍의 검사. 내 대답은 '아니다.'야. 나는 세이서스 경에게 부탁할 자격이 없지. 하지만 해야만 해. 세이
서스 경이라면 내 입장을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경을 주축으로 한 귀족들과 왕권을 옹호하는 귀족들의 세력 다툼
이 시작되려 한다면 믿겠는가?"
"시즈가 권력 다툼 따위에 눈이나 깜짝할 것 같아?"
"나도 알아. 나도 안다고. 하지만 귀족들은 속이 좁지. 언제나 거지보다도 불안에 떨어대지. 그렇기에 경의 존재가
내게는 부담스러운 거네."
"왜 이런 자리를 마련하신 거죠?"
보를레스의 질문에 대한 답이 끝나자 이번에는 아리에가 물었다.
"역시 귀족들과 학자들이 반발할 테니까."
"어떻게 보면 치사하군요."
"인정한다. 자아‥ '마땅찮은 시즈', 그대도 대답을 해라."
시즈는 대화가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렇잖아도 북쪽으로 떠나볼까 생각했습니다. 이미 엘시크에는 뜻을 버렸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