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9화 (169/200)

                                            45악장 4화

사실 보를레스도 별의 미궁에 잘못 발을 딛으면 헤맬 수밖에 없다. 그가 자연스럽게(?) 뒤뚱거리며 길을 안내할 수 

있는 배경에는 볼을 쓰다듬는 따스한 바람이 숨어있었다. 

'고맙다, 시즈.' 

사람들은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갈수록 두려워졌다. 음악회가 열릴 때마다 방문하는 마을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렇기에 그들은 앞사람이 생명줄이라도 되는 양 달라붙었다. 

"밀지 마!" 

"하지만 뒤에서 미는 걸요." 

소란스러운 것도 잠깐이었다. 보를레스가 거대한 덩치를 휙 돌리며 겁을 줬던 것이다. 

"별의 미궁에서 떠들면 몬스터들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이 곳의 몬스터들은 매우 크죠. 왠만한 기사들도  당하지 못

해요." 

"흥! 네가 제대로 된 기사들을 보지 못해서 그렇겠지." 

발끈한 유레민트의 수행기사가 말했다. 그는 귀족 출신의 기사였는데 미모의 엘프 학자, 유레민트를 좋아하여  출신

에도 불구하고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서 보도듣도 못한 팬더 한 마리가 나타나서 그가 꿈에서조차 흠모하

는 유레민트의 흰 손을 덥썩 잡은 것이다. 분노할 만 했다. 옆에서 기사의 동료가 맞장구를 쳤다. 

"하긴‥ 인형 옷이나 뒤집어쓴 광대가 진짜 검사를 보았겠어?" 

만약 그들이 글로디프리아에서 제뷔키어를 들고 싸우던 보를레스를 보았다면 당장에 바늘을 들어서 자신의 입을 꿰

매 버렸을 것이다. 낄낄대고 웃어대는 두 기사들과 수행원을 흘깃 보며 보를레스는 생각했다. 

'저들은 나의 모든 것을 아니지만 한 가지 모습을 보고 제멋대로 규정을 해버렸다. 그러나 사람들은 타인의 진실된 

모습은 얼마나 발견할 수 있는가? 그것은 부정적인 모습보다 결코 많을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함부로 판

단하지 않는 게 좋겠군.' 

하지만 그가 기분이 나빠한다고 느꼈을까? 그의 주름살을 목격한 유레민트는 커다란 나무 뿌리를 뛰어넘으며 지나

가는 말투로 말했다. 

"별의 미궁은 옛날부터 유명하죠. 사막은 생명이  살 수 없어 불모지가 되었지만 별의  미궁은 생명의 활동이 너무 

활발해서 인간이나 다른 종족이 살 수 없게 되었으니까요. 저희 엘프들도 원래부터  이 곳에서 살던 자들이 아니라

면 들어오기를 꺼린다는 숲이에요. 보를레스님의 충고를 귀담아 듣길 바래요." 

"하하핫! 유레민트님, 저희들을 믿으십시오." 

"예! 유레민트님, 적어도 발마즈님은 아스틴 궁정 기사들 중에서도 뛰어난 기사입니다. 걱정마십시오. 하하핫!" 

껄껄대는 웃음소리가 숲을 따라서 메아리쳤다. 

하하핫! 하하핫! 쿠하하핫! 쿠라라라! 쿠롸롸롸!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굵고 흉폭하게 들려오는 메아리에 기사들을 비롯한  일행은 흠칫했다.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보를레스가 말했다. 

"이런‥. 고케이소트의 잠을 깨운 모양이군요." 

"고케이소트? 고케이소트라면 전설상에 남아있는 호랑이잖아요? 크기만 5m에 달한다는‥. 실제로 존재했다는 말입

니까?" 

"호랑이뿐이 아니라 여기에서는 메뚜기도 사람보다 큽니다. 주위의 나무들을 보시면 이해가 가지 않습니까?" 

그제서야 아스틴에서 온 손님들은 이상한치 만큼 굵은 나무뿌리에서 천천히 줄기를 타고 올라갔다. 그들은 곧 얼마

나 위험한 곳에 발을 들여놓았는지 알았다. 어두운 데다가 앞만 보며 몰랐던 나무의 높이는 지켜든 등불의 빛이 닿

지도 않을 만큼 까마득했기 때문이다. 껄껄대던 입이 굳어버린 기사들을 보고 보를레스는 다시 한 번 말했다. 

"서두르는 게 좋겠습니다. 기사님들의 웃음소리에 잠을 깼다면 고케이소트는 절대로 우리를 그냥 두지 않을 테니까

요." 

"그, 그렇다면 당장 밖으로 나가는 게 안전하지 않은가! 유레민트님을 위험한 곳으로 모실 수는 없어." 

발마즈가 다급하게 말했다. 누가 위험한 사태를 유발시켰는지 전혀 모른다는 듯. 보를레스는 어둠에 비웃음을  숨기

고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저도 별의 미궁에서는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팬더 복장의 멱살 부분이 찢어질 듯 늘어났다. 하지만  가죽일 뿐 보를레스는 바위처럼 서서 발마즈를 노려보았다. 

가죽이 상할라 팬더가 손을 툭 치자 발마즈는 뒤로 벌렁 자빠졌다. 오뚜기처럼  벌떡 일어섰지만 이미 망신살은 뻗

칠 대로 뻗친 후, 그는 다시 소리쳤다. 

"이 광대 녀석을 그냥!" 

"쉿!" 

유레민트가 손가락을 입에 대고 바람소리를 냈다. 뿐만 아니라 모두가 발마즈를 노려보며 입에 손가락을 댔다. 

등불의 빛에 걸려 거대한 짐승의 그림자가 늘어지자 모두들 숨을 죽였다. 보를레스는  유레민트의 귀에 대고 쉴 새 

없이 소근댔다. 발마즈는 이가 갈릴 지경이었지만 워낙 시선이 많았음으로 잠자코 분노를 억눌렀다. 

'두고 보자! 이 팬더 녀석! 기회만 되면 아주 회를 쳐주마!' 

발마즈 마음 속의 외침을 보를레스가 들을 리가 없었다. 그는 빙긋 웃으며 '알겠나요?'하고 유레민트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바람을 따라가라는 말인가요? 약간 따뜻한 기운의?" 

"유레민트는 엘프니까 어렵지 않을 겁니다." 

유레민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보를레스가 속삭여 알려준 바람의 기운은 조금만 주의하면 잡아내기는 쉬웠다. 

"그럼 보를레스님은요?" 

"전 흉폭한 고양이 한 마리를 잠재우고 와야겠습니다. 지금은 아직 더 자야할 시간이니까요." 

"조심하세요." 

보를레스는 물끄러미 유레민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엘프로는 아스틴네글로드에서 유일하게 현자의 이름을 가

지고 있는 여성의 동공은 헤아리 없을 만큼 깊었다. 다만 그나마 그가 기뻤던  것은 그녀의 깊은 심연 속에서 걱정

이라는 감정이 일렁거렸다는 사실이었다. 

"그럼, 여러분은 유레민트님을 따라서 가주십시오." 

"도망치려는 거냐?" 

못마땅한 눈초리로 보를레스와 유레민트를 주시하던 발마즈가 그럴 줄 알았다는  어조로 말했다. 그의 손에는 어느 

새 장검이 빼들려 있었다. 

'저런, 저런‥.' 

로지 마을 사람들의 안색에 안타까움이 어렸다. 이유가 뭐든 간에 귀족이나 기사의 심기를 거슬려놓고 사지가 무사

하기는 힘들었다. 특히나 발마즈는 그들이 보기에도 보를레스에게 시비를 걸기 위한 틈을 잡고 있었다. 로지 주변에

서는 보를레스가 몬스터를 잡으며 명성을 떨쳤다고 해도 마법 왕궁의 정예 기사들을 당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어서 빌어야 해‥.'라는 주위의 시선을 배반하고 보를레스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한 걸음씩 걸어가 발마즈  앞에 

섰다. 

"네가 지금 날 비웃는 거냐?" 

번쩍 치켜든 발마즈의 장검이 가소롭게 빛났다. 분노로 가닥가닥 끊겨있는 동작이 보를레스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 

냉큼 날아든 보를레스의 수도(手刀)가 그의 목을 강타했다. 

"크윽!" 

"참으로 귀찮은 기사나리군." 

"죽고 싶은 거냐?" 

"어서 유레민트님이나 따라가십시오. 기사나리들, 별의미궁은 귀족들이라고 길을 따로 만들어주지 않는답니다." 

유레민트와 로지 사람들은 벌써 꽁무니만 보이고 있었다. 발마즈는 서둘러 뒤따라가며 뒤를  보고 한 마디 하는 것

을 잊지 않았다. 

"두고 보자!" 

그들마저도 사라지자 보를레스는 낄낄대고 웃었다. 

"시즈 녀석의 말투를 한 번 따라해 본 것뿐인데 정말 효과가 좋군. 그런데 시즈는 언제나 '전 정중하게 말하는 건데

요.'라는 우끼는 주장을 한다니까. 괜히 마땅찮은 사람으로 소문난 줄 아나." 

크르릉거리는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웃음을 멈춘 그는 조용히 팬더  복장에 숨겨져 있던 제뷔키어를 빼들었

다. 고케이소트의 잠을 깨운 이상 부딪이지 않고서는 저택까지 갈 수 없었다. 차라리 뒤에 남아서 뒤처리를 하는 방

향이 애꿎은 피해가 없으리라. 

자신 있게 자세를 잡은 보를레스였지만 어둠 속에서 광채의 개수를 세고 볼을 긁적였다. 

"한 마리가 아닌가? 도대체 몇 마리를 깨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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