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악장 5화
한 입에 거구의 보를레스를 삼킬 수 있는 고케이소트는 상대하기 어려운 동물이었다. 적어도 별의 미궁에 자리를
잡을 무렵, 보를레스는 고케이소트 한 마리를 상대하는 것만으로 절절맸다. 보를레스의 담력검술은 인간의 리듬을
뛰어넘는 것이었지만 호랑이의 순간적인 순발력과 파괴력은 인간에 비할 게 아니었다. 하지만 위의 문장에서는 적.
어.도.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현재 보를레스의 실력은 실베니아에서의 그와 비교하면 상당한 차이가 있었으니까.
"크와‥!"
가장 앞에 있던 한 마리는 포효를 마치기 전에 이미 머리가 반으로 갈라졌다. 방금 전의 일격은 바위도 말끔하게
반으로 갈라놓을 검이었으니 호랑이 머리가 단단해봤자 소용없었다. 먹이감이라고 생각했던 존재가 움직이는 기척
이 느껴졌을 때 이미 동료가 죽어버리자 다른 한 녀석은 당황했다.
먹이사슬의 관계가 바뀌었는지 보를레스가 고케이소트에게 뛰어들었다. 이번에도 기척을 느꼈을 때는 옆구리 근처
에 긴 자상이 남은 후였다. 동물 본연의 감각이 없었다면 허리를 기준으로 정확하게 잘라졌을 것이다.
"크르르‥."
꽁무니를 감추는 게 좋다. 고케이소트는 땅으로 피한 즉시 나무 뒤로 피했다.
"안되지! 네가 돌아가면 무리가 단체로 몰려올 수도 있거든."
제뷔키어에서 흰색의 아지랑이가 피어났다. 그리고 고케이소트가 숨은 나무 앞에 보를레스가 도착했을 때 아지랑이
는 눈부시게 달아오르며 제뷔키어를 감쌌다.
"하앗!"
소리는 없었지만 검광이 남았다. 몇 개인지 셀 수도 없는 섬광이 앞에 아무 것도 없었다는 양 나무를 통과해서 길
게 뻗어나갔다.
"흠, 아직 부족해. 이래서는 젠티아의 사일린-검기술(劍氣術)-을 뚫을 수 없어."
그의 눈에는 거대하기만 나무가 검을 든 젠티아로 보였던 모양이다. 상대로 취급받지 못한 고케이소트는 이미 피를
철철 흘리며 바닥에 누워있었다.
"보를레스, 늦었군요. 걱정했습니다."
"이런‥. 내가 언제부터 시즈에게 걱정을 끼칠 정도로 못미더웠지?"
"그럼 언제 미더운 적은 있었습니까?"
확실히 시즈의 말투는 은근히 마땅찮은 기운을 풍긴다. 보를레스는 숲에서 했던 흉내가 원조의 반도 따르지 못했음
을 깨달으며 이를 갈았다.
"아직 시작하지 않은 모양이로군."
"보를레스가 없는데 시작할 수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엥!?"
그 때, 분장을 끝낸 아리에가 천사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들어왔다. 흰옷에 안이 비치는 흰 가운을 입을 그녀의 아
름다운 모습에 시즈가 미소를 지었다.
"보를레스, 왔네!?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어."
아리에는 손에 색다른 의복을 입고 있었다. 그녀가 입으면 제법 우스꽝스럽게 보일 복장에 보를레스는 턱을 쓰다듬
으며 물었다.
"그걸 입을 거야? 색다른 복장이네. 특별한 손님이 오셔서 그런가?"
"아니, 입을 게 아니라 입힐 건데‥."
왠지 불길한 한 마디였다. 아리에는 삐에로의 복장을 보를레스에게 건네며 덫붙였다.
"어서 입어. 특별한 손님이 오셨잖아!?"
보를레스의 눈꼬리가 바르르 떨렸다.
시즈 일행이 사는 나무 오두막의 뒷문은 등장무대로 하기에 딱 알맞다. 원래 목적도 무대용이었으니까. 커다란 뒷문
에 조금 밀리며 울긋불긋한 복장과 화장을 한 거구의 삐에로가 빠져나왔을 때, 앉아있던 관객들은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핫!"
네메이나는 사내의 얼굴을 손가락질하며 한 손으로 입을 막고 부들거렸다. 유레민트에게 교육을 받으면서 숙녀의
몸가짐을 단정히 가꾼 그녀였지만 과거 함께 지냈던 보를레스의 망가진 모습은 참기 힘들었다. 결국 그녀는 웃음을
터뜨리며 외쳤다.
"대체 그게 뭐야?"
보를레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공연이 시작하면 그는 완전히 삐에로가 되기 때문이다. 다른 무언가를 되기 위해 집중
하는 정신은 검술에 있어서도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었다. 삐에로가 덩치에 안맞게 낑낑대며 문을 열자 다시 한 번
폭소가 일었다. 하지만 잠시였을 뿐, 은백의 머리를 날리며 나타난 시즈와, 백색의 옷을 입은 흑발의 소녀가 등장하
자 좌중은 바람소리도 없이 고요해졌다.
디리링‥.
바위 위에 오른 시즈가 넬피앙을 건드릴 때마다 아리에는 그의 손가락에 반응하듯이 산들산들 춤췄다. 때로는 인형
처럼‥ 때로는 바람냄새 풍기며 흔들리는 잔디의 한 가닥처럼‥. 유레민트는 손등으로 네메이나의 턱에 문질렀다.
손에는 손수건이 걸려있었다.
"침 흘리지 말아요, 네메이나."
"아!"
아리에의 춤이 끝나고 나서도 사람들은 여운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그들의 동결을 깬 것은 다름 아닌 삐에로였다.
허리춤에서 분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검을 꺼낸 삐에로는 검을 하늘 높이 지켜들고 과장된 움직임으로 춤을 췄다.
"와하하하핫! 완전히 뒤뚱뒤뚱이로군. 저렇게 웃긴 칼춤은 처음이야!"
"조용히 있어!"
"아니, 왜 그러십니까? 발마즈님. 혹시 삐에로가 무례했기 때문에 기분이 안 좋으셨던 게 아직도 앙금이 남으신 모
양이군요. 잠시 후에 저희들이 나서서 혼을 내주겠습니다."
발마즈는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삐에로를 바라보았다. 과장되었던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검술이 이
어지고 있음을 알아챈 기사는 오직 그 뿐이었다. 다른 이들은 보고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삐에로의 검술은 상승의
기술이었다.
'저 칼춤 앞에서 난 한 호흡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과장되었던 삐에로의 춤도 시즈의 넬피앙 곡조가 부드럽게 바뀜에 따라서 변화했다. 물결치듯 날쌔면서도 한없이
부드럽다. 검 끝을 따라 가다보면 동선의 화려함에 넋을 잃는다. 네메이나는 얼른 손수건을 유레민트에게 내밀었다.
"유레민트, 침 닦아요."
"아!? 네!? 아! 네."
뒤늦게 놀라 화들짝 손수건으로 입가를 훔치는 유레민트의 얼굴은 때이른 단풍처럼 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