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1화 (171/200)

                                  45악장 행복에 고용됐습니다. 6화

"약혼‥? 그것도 왕자와‥?" 

삐에로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유레민트는 다시 한  번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조금 

전에 침을 흘린 이후에는 조심하려고 무척이나  애썼는데‥. 그 날따라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네메이나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삐에로에게 보냈다. 

하지만 삐에로는 미소의 의미를 절대 알아채지 못했다. 자신의 물음에 대한 무언의  긍정이라고 판단한 그는 한 마

디를 더했다. 

"어떤 왕자인지 불쌍하군." 

"네메이나는 현재 아스틴네글로드의 학자계열에 들어온 상태에요. 배우는 속도가 무척이나 빨라요. 곧  학자들 사이

에서도 인정을 받을 거에요. 물론 마땅찮은 시즈 정도는 될 수 없겠지만‥." 

"유레민트님께서 후견인으로 있는 이상 왕자의 배필로 손색이 없겠군요." 

시즈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3년 전, 산적 노릇을 하며 일그러진 표정을 짓고 있던 소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

의 앞에 앉아있었다. 

"데미노머는 실리미엔 에이아를 왕궁으로 불러오자고 했지만 아무래도 오지 않을 것 같더군요. 아니었다면 이런 시

골에 자리를 잡을 리가 없었을 테니까요." 

"용케도 찾아왔군요." 

"마음 속에 남아있는 미련을 지우고 싶더라고‥." 

머리를 긁적거리며 네메이나가 대답했다. 털털한 모습이 예전의 그녀와 다를 바가 없었지만 왠지 모를 쓸쓸함이 느

껴졌다. 배시시 웃는 아리에에게 눈을 향한 후 그녀는 말을 이었다. 

"잘 지워진 것 같아." 

마을 사람들을 로지로 데려다준 이후에도 그들은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앉아서 밤을 지샜다. 누군가는 자장가 같은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다른 이는 즐거운  이야기를 하면서 말이다. 새벽이 밝아오고 아스틴의  일행이 떠날 시간이 

다가왔을 때 아리에는 하품을 길게 하다가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는지 시즈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저것 좀 봐. 아핫!" 

"우, 웃지 말라고!" 

아리에가 재밌어 하는 것은 바로 보를레스였다. 삐에로의 품이 그리도 포근할  걸까? 그의 양옆에는 네메이나와 유

레민트, 두 여인이 편안한 표정으로 기댄 채 잠들어있었다. 가운데서 보를레스는 어쩌지도 못한 채 자세를 뻣뻣하게 

고정하고 행복하다면 행복한 경련을 눈가에 일으켰다. 

아침은 분주했다. 하지만 학자의 눈을 빠뜨리겠는가. 유레민트는 창고에 있던 자전거를 발견하고 호기심에 차서  물

었다. 

"이건 뭐죠? 안장과 바퀴가 있는 거로 봐서 타고 다니는 것 같은데‥." 

대답 대신 시즈는 보를레스에게 그녀를 태우고 집 앞을 한 바퀴 돌게 했다. 동그랗게 뜬눈으로 유레민트는 귀를 쫑

긋거리며 환호성을 작게 흘렸다. 

"와아‥." 

"조금 불편하지 않았나요? 원래는 저와 아리에가 타려고 만들어 둔 거라‥. 저희 다리가 좀 짧잖아요." 

"아니에요. 신기한 발상이군요. 페달을 밟아서 바퀴를 움직이다니‥." 

"운동도 되고 좋지요." 

다른 이들도 흥미로웠는지 하던 일을 멈추고 자전거만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웃음 섞인 한숨을 쉬며 시즈는 그들이 

한 번 타볼 수 있게 했다. 하지만 말을 타는 것과 자전거는 틀리다. 기사들도 중심을 못 잡아서 쓰러지기를 반복했

다. 오히려 조심성이 깊은 여자들이 금방 배웠다. 

"토루반이 전에 이런 말을 하신 적 있어요. '언젠가 시즈가 재미있는 걸 만들거야. 그러기 위해서 목제 다듬는 법을 

가르쳤으니까.'라고 하셨는데 소식을 들으면 무척 기뻐하시겠네요." 

"선견지명이네요." 

아리에의 말과 함께 여인들은 꺄르르 웃었다. 그에 비해서 한 번도 제대로 중심을 잡아보지 못한 남자들은 수풀 쪽

에서 아직도 자전거를 타고 발로 땅을 조금씩 밀어보고 있었다. 

"하루동안 잘 지냈어요. 가슴 떨리는  노래와 황홀해지는 춤, 그리고 행복해지는  웃음을 선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실리미엔 에이아!" 

유레민트가 내미는 손을 보를레스가 황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잡았다. 그녀의  얼굴도 살짝 붉어져 있었지만 고개

를 숙인 보를레스는 보지 못했다. 그 때, 시즈가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유레민트." 

"예?" 

"학자라는 일은 즐거우십니까?" 

"묻는 이유가 뭔가요?" 

유레민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묻는 의도를 모르겠다는 뜻이었다. 

"그냥‥ 당신이 쾌활하게 웃는 일이 없었던 것 같아서 말입니다. 3년 전에도 말이죠‥. 하지만 어제는 보았던 것 같

습니다." 

"그, 그랬나요?" 

아스틴네글로드 최고의 언변가 중 그녀가 말을 더듬는 경우는 드물었다.  어린애처럼 행동하는 그녀를 보는 시즈는 

은은한 미소가 떠올랐다. 

"실리미엔 에이아에 한 사람이 부족해서요‥. 알다시피 제가 한 팔이 없지 않습니까? 넬피앙을 연주해줄 사람이 필

요해요." 

그제서 유레민트를 비롯한 아스틴 사람들은 시즈가 말하는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유레민트를 포섭하려고 하는 것이

다. 기사단은 슬그머니 비웃었다. 아스틴네글로드에서도  일곱 현자로 이름높은 유레민트다. 겨우  방랑악단 사이에 

낄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시즈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는 듯 뻔뻔스럽게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금발의 머리카락에 길게 솟아오른 귀를  가진 여인의 넬피앙이 

아니라면‥ 춤을 추지 않을 것 같네요." 

말을 끝내고 나서 시즈는 보를레스에게 한 쪽 눈을 찡긋 했다. 유레민트가 조용히 돌아섰다. 

"정말인가요? 삐에로." 

"아, 예, 예!" 

아리에는 한 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한탄했다. '아, 예, 예.'라니 게다가 반쯤 굽힌 허리와 들지도 못하는 고개.  뒤돌

아선 유레민트와 보를레스의 모습은 한 마디로 주인과 시종 같았다. 유레민트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안 되요." 

"그, 그렇습니까?" 

이제는 어깨까지 처진 보를레스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영원히 잡을 수 없는 구름을 바라보는 눈으

로‥. 그 때, 갑자기 빙글 돌아서며 유레민트가 그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오랫동안 여행할 때는 적어도 아스틴네글로드에 보고를 해둬야 하거든요." 

그 때까지도 보를레스는 이해하지 못했다. 아스틴의  기사들이 왜 일그러진 표정을 하고 있고  시즈와 아리에가 왜 

키득거리는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하는 그의 얼굴을 손으로 꽉 잡아 고정하고 유레민트가 입술을 삐죽거

렸다. 

"말하는데 외면하는 게 어딨나요? 대신에 돌아오면 자전거 뒤에 꼭 태워줘야 해요." 

"예! 하하하‥ 하하하핫!" 

보를레스의 웃음소리는 통쾌하게 컸다. 별의 미궁 나무들이 흔들거릴 정도였다. 

실리미엔 에이아과 로지 마을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아스틴에서 왔던 이들은 다시 아스틴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아스틴 국경에 도착했을 때, 마중을 나온 이들이 있었다. 맨 앞에서 말을 타고 있던 청년은 네메이나의 눈에 

매우 익은 사람이었다. 그는 손을 활짝 펴서 인사하며 말했다. 

"다녀왔어?" 

"응!" 

"이제 나만한 사람이 없다는 걸 알겠지?"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시즈에 비하면 데미노머, 넌 아직도 어린애라고!" 

"또 그 소리네." 

만나자마자 티격태격 싸우는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유레민트에게 한  필의 말이 다가왔다. 콧수염을 화려하

게 키운 남자, 피브드닌이었다. 

"다녀왔나?" 

"그래요. 다녀왔죠. 하지만 다시 가봐야 되요. 피브드닌님이 좀 아스틴네글로드에 보고 해주세요. 유레민트는 한동안 

실리미엔 에이아를 따라다니겠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간단해요. 고용됐거든요.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삐에로에게‥." 

그렇게 말하고 유레민트는 말머리를 돌렸다. 승마 실력을 뽐내듯이 순식간에  지평선 넘어로 사라져 버리는 그녀를 

보며 피브드닌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저렇게 서둘러 가다니‥ 좋은 직장인가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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