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화 (199/200)

                                      48악장 꿈들의 전쟁 3화

"여전히 화려하군요." 

시즈는 예전에 보았던 벨루온의 모습을 기억했다. 제플론이 고상함과 귀족들의 색으로 화려하다면 벨루온은 서민들

의 활발한 멋으로 아름다웠다. 유레민트는 자신이 칭찬을 받은 듯 얼굴을 붉히고 말했다. 

"시즈는 예전에 벨루온에 왔었지요." 

"얼마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시간은 참 많이 흘렀습니다." 

그가 감탄했던 '색지의 등'은 어김없이 아리에를 홀려놓았다. 몽롱하게 변한 눈동자를 되돌리는데는 꽤나 많은 시간

이 필요했다. 벨루온은 이것저것으로 가리지 않고 한 여인을 경탄으로 유도했다. 

"시즈, 저것 좀 봐." 

아리에의 손가락이 쉴 새 없이 주위의 허공을 찔러댔고  시즈는 어린아이 같은 그녀의 모습를 작게 미소를 피우고 

바라보았다. 

"우선은 피브드닌의 저택으로 가도록 하죠." 

지금까지는 여유를 부렸지만 벨루온에 들어온 이상 시간이 없었다. 사람의 시선이 많은 수도에서 이미 그리스는 그

들을 주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노르벨이라는 희대의 어쌔신이 있었으니까. 유레민트는 구경에 정신이 없는 아리에

의 팔을 억지로 끌었다. 

"유레민트, 힘이 왜 이렇게 쎄요오오∼" 

"후훗‥. 아리에는 연약해서 시즈의 사랑을 받을 거에요." 

"조금만 더 보고∼" 

건너편 골목으로 돌아가며 그녀의 목소리는 허공을 맴돌 뿐이었다. 

"오래간만이야." 

"네, 오랜만입니다." 

시즈와 피브드닌은 무척 간단하게 재회를  표현했다. 너무나 간단해서 보를레스는 '그걸로  끝이야?'라고 중얼댔다. 

어떻게 보면 두 사람은 전혀 반가워하지 않는 듯 싶었다. 그러나 그들은 인사할  때 서로의 표정과 눈을 통해 상당

한 대화를 오고 갔다. 

"츠바틴씨와 노리스씨도 오랜만입니다. 반갑군요." 

"반갑습니다." 

"유레민트도 제법 모험가처럼 변했어." 

"그런데 피브드닌, 왜 그렇게 위엄을 차리고 있죠?" 

콧수염을 가다듬으며 중후한 미소를 담고 있던 피브드닌의 안면 근육이  경련을 일으켰다. 유레민트답게 정곡을 날

카롭게 찌른 것이다. 그는 주위를 촉새눈을 뜨고 살피더니 주위의 사람들만 들을 수 있게 말했다. 

"위나가 시집을 곧 시집을 가야 되는데, 내가 위엄 있게 보이지 않으면 자기 체면이 안 선다는 군." 

그 말에 웃음을 터뜨린 일행을 피브드닌은 콧수염을 가다듬으며 거실로 안내했다. 예쁘게 차려입은 20대 가량의 시

녀가 다가와서 다소곳이 차를 준비했다. 시즈도 기억하고 있는 그녀는 피브드닌의 당돌한 시녀, 위나였다. 

"이제는 저도 노벨우잔산을 펴도 되겠지요?" 

"아직까지 벼르고 있었나보군. 위나, 저 친구를 기억하나?" 

시즈는 예전에 왔을 때, 담배를 피려다가 위나에게 손등을 맞은 일이 있었다. 위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의 얼굴

을 살폈다. 

"아!" 

그녀가 시즈를 기억한 것은 아니었다. 바로 옆에 있던 보를레스를 가리키고 반가운 듯이 인사를 했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하하, 오랜만입니다." 

"시종을 바꾸셨나봐요?" 

위나의 말에 보를레스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집이었다면 당장이라도 바닥을 굴렀을 정도로 

거침없이 웃었다. 그러자 위나는 당황하여 시즈를 유심히 살폈다. 

"그 때의 시종!" 

기대했던 소리가 터져 나오자 시즈는 아예  모든 것을 포기한 모습이었다. 노리스와 츠바틴마저  웃고 있는 상황이 

은근히 거슬렸다. 아리에가 참을 수 없다는 듯 눈꼬리를 올렸다. 

"시종이라니‥. 무례하군요." 

"예!? 하지만‥." 

아스틴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여인은 제 2 왕녀였다. 지금은 결혼하여 후작 부인이 되었지만, 이름높은 그녀의  미모

를 바라본 일이 있는 위나는 지금 화를 내며 일어선 여인 또한 그에  뒤지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 여인의 말

에 그녀는 당황하는 게 당연했다. 

위나는 조심스레 손님들을 살펴보았다. 다들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겁먹은 생쥐처럼 보들보들 떠는 그녀를 위해 피

브드닌이 대신 변명을 했다. 

"아리에, 너무 화내지 말라고. 모두 시즈가 옷을 제대로 입지 않은 탓이니까." 

"제 옷차림이 어디가 어떻다는 겁니까?" 

"시즈, 왼쪽 소매와 바지 뜯어졌고요, 주머니의 실밥이 새어나왔네요. 그리고‥" 

웃는 얼굴로 하나하나를 찔러대는 유레민트의 친절에 시즈는 고개를 떨궜다. 

"어쨌든‥. 위나도 이제 배웠겠지? 외모만 가지고 상대를 판단하는 게 얼마나 섣부른 짓인지?" 

"예‥에." 

시무룩하게 위나가 대답했다. 안쓰러워 보였는지 노리스가 그녀를 위로했다. 

"그렇게 기운 없을 것은 없어요. 희대의 대학자로 꼽혔던 '마땅찮은  시즈.'를 시종이라고 부른 사람은 그대밖에 없

으니까. 아가씨는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마땅찮은 시즈‥요!?" 

한 때, 죽었다고 알려진 엘시크 최고의  대학자, 시즈 세이서스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위나의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당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그녀를 달랜 것은 다름아닌 아리에였다. 화를 냈으면서 곧 웃으며 달래다니 그녀의  심성도 정말 이해하기 힘든 부

분이 많았다. 큰 벌이라도 받을까봐 훌쩍대는 시녀를 돌려보내고 시즈는 여유롭게 노벨우잔산 담배를 입에  물었다. 

금새 아리에의 불타는 눈빛에 밀려서 몇 모금 빨아보지도 못한 채 내려놓았지만‥. 

"흐음‥. 세일피어론아드 자체의 문제로군. 음유술사와 역사의 고리와의 관계를 넘어서서 말이야. 내 당장 사람들한

테 연락을 하겠네." 

대략의 이야기를 들은 피브드닌은 바로 펜을 휘갈겨서  한 장의 편지를 썼다. 한 명의 시종에게  그것을 전한 그는 

쇼파에 전신을 기대고 말했다. 

"이제 기다려보자고. 예상 의외의 지원군이 올지도 모르니까." 

피브드닌의 암시는 잘 맞는 편이었다. 시즈는 예상을 깨고 몰려온 사람들에게 반가움을 나타냈다. 

"파마리나, 블리세미트!" 

"난 작다고 보이지도 않는 건가?" 

"설마요, 토루반. 주인공은 가장 나중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가!? 그렇다면 내가 주인공이 아니란 소리군." 

토루반은 그렇게 말하며 그의 뒤에 서있는 주인공을 소개시켰다. 드워프의 억센 팔에 이끌려 한 청년이 엉거주춤하

게 들어왔다. 시즈는 어리숙한 모습이 남아있는 그가 어렴풋이 인상에 남아있음을 깨달았다. 

"데미노머 전하!?" 

"오, 오랜만이군, 시즈 세이서스." 

"왜 오신 거죠?" 

"아! 미안." 

바로 뒤돌아서는 그를 피브드닌은 얼른 붙잡았다. 돌아가겠다고 난리를 치는  그를 향해 토루반은 낄낄거리며 말했

다. 

"첫날밤은 잘 치뤘으면서 왕자는 아직도 어린애야." 

"국사(國師)!" 

뛰어난 현자답게(?) 토루반은 데미노머를 단숨에 되돌렸다. 벌게진  얼굴로 왕자는 뚜벅뚜벅 걸어와 토루반의 옆에 

섰다. 

"난 이제 국사의 직위는 벗었어. 언제까지 날 국사라고 부를 거요!? 왕자." 

"천진하다는 것도 일종의 장점이죠." 

유레민트가 빙긋이 웃었다. 다른 왕자들은 아스틴네글로드의 학자가 셋이나 모여있는 자리에서 감히 투정을 부리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데미노머는 학자들의 애정을 꽤나 받았다. 

"데미노머 전하는 내가 불렀네. 이번에는 국가의 힘이 필요할 정도로 중대한 일이니까." 

"네메이나의 눈치를 봐가면서 왔다고요. 한밤에 빠져나오는 게 쉬운 줄 아십니까?" 

"벌써부터 아내의 눈치를 본단 말인가? 그 스승의 제자가 아니랄까봐 토루반을 꼭 닮아가는 군." 

토루반이 인상을 팍 썼지만 피브드닌은 조금도 상관하지 않았다. 험악해지는  분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츠바틴과 로

진스가 현(現) 상황을 설명했다. 

몽충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들은 사람들은 경악에 빠져들었다. 

"언제 부화가 될지도 모른단 말입니까?" 

가장 정의감에 불타오른 것은 데미노머 왕자였다. 신혼이 몇 개월 되지 않아  요즘 매우 달콤한 하루하루를 보내야 

하는데 그런 모든 것을 파괴하려 하는 자들이 있다니 용서할 수 없었다. 

"빨리 잡아야지요! 내 당장 폐하께 말씀을 드려서!" 

"좀 잠자코 있어." 

토루반이 풀쩍 뛰어올라 호들갑스러운 그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제서야 어느 정도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데미노머

는 조용히 그들의 대화를 경청했다. 

그리스의 은신처에 대해서는 노리스와 츠바틴이 지도를 펼쳐놓고 작전을 짰다.  피브드닌이 끼어들 틈이 없을 정도

로 두 사람의 전략은 뛰어나서 개미라도 빠져나가지 못할 듯 싶었다. 하지만 자신 있어야 할 장본인들은 조금도 긴

장을 풀지 않았기에 다른 이들도 상대가 보통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바로 움직이도록 합시다."라는 말과 함께 피브드닌의 저택에서는 불이 꺼졌다. 

이윽고 더위를 식히러 나왔던 가족들도 들어가고 거리는 완전히 침묵에 빠졌다. 그 때, 은밀히 움직이는 한 떼의 무

리가 있었다. 그들은 느리지만 아주 정확하게 발걸음을 맞췄다. 수 많은 인물에게서 나는 기척이 아예 느껴지지 않

을 정도였다. 벨루온의 변두리에서 한 성을 둘러싼 무리들. 

구름에 가렸던 달이 얼굴을 드러내면서 무리들을 천천히 비췄다. 은백의 갑옷과 투구가 달빛아래 찬란히 빛나고 붉

은 망토가 여름 밤바람에 느긋하게 흔들렸다. 망토의 중앙에는 검과 깃털의 모양이 교차되어 수놓아져 있었다. 

이들이야말로 아스틴 근위기사단이었다. 통칭, '피닉스의 깃털'이라고  불리는 그들은 50여 명 밖에  되지 않았지만 

기사 왕국, 엘시크나 용병국, 카로안에서도 인정하는 최강의 무사집단이었다. 

조금의 흐트러짐 없이 진열을 맞춘 그들  사이로 데미노머 왕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뒤로는 시즈와 노리스를 

비롯한 일행과 아스틴네글로드의 학자들이 시립하고 있었다.  데미노머가 손을 높이 들고 천천히  내리자 피닉스의 

깃털들은 한꺼번에 고함을 질렀다. 

"성스러운 정화의 검을!" 

차례차례 저택으로 뛰어드는 모습이 믿음직스러웠다. 시즈는 어쩌면  이번 일이 쉽게 끝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이내 깨져버렸다. 

쨍그랑! 

집안 물품 중 뭔가가 박살이 나고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어우러졌다. 집안으로 들어갔던 기사들이 속속 밖으로 튀어

나오더니 소리쳤다. 

"들어가지 마라! 암살자가 숨어있다!" 

"암살자!?" 

"노르벨인가?"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이십은 넘었습니다." 

아스틴네글로드의 은자로 불리는 그리스의 저택은 상당히 컸다. 지상으로 보이는 것만 해도 4층은 되어 보였다.  대

저택는 암살자에게 살인을 위한 천혜의 지역이었다. 제 아무리 검술이 뛰어난 근위기사단도 순식간에 두 명이 목숨

을 잃었다. 

"이십!? 노르벨이 플로먼을 움직였군." 

"플로먼이라면 어쌔인의 종가(宗家)라고 불리는 자들 말입니까?" 

노리스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대답하자 데미노머는  입술을 줄끈 물었다. 피브드닌의 저택에서  역사의 고리라는 

이름이 나올 때부터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그의 아버지도 아스틴네글로드의  원탁 중 3인과 시즈 세이서스가 

들이닥쳐 하는 말에 위기를 느꼈는지 근위기사단마저 보내주었다. 아스틴 최고  기사들의 지원으로 잘 풀리던 상황

은 다시 골치아픈 변수에 휘말렸다. 

"그래도 방법이 없어." 

"두 명이 짝을 지어서 등을 맞대고 전진하도록 하십시오." 

용병술에 있어서는 노리스를 따라올 자가 없었다. 그의 말에 근위기사단장은 쾌재를 불렀다. 

"그 방법이 있군요. 당황해서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기사단장에 명령에 따라서 기사들은 두 명씩 등을 맞대고 긴장 어린 걸음을  집안으로 들여놓았다. 마치 게가 옆으

로 걷는 듯한 우스운 모습이었지만 보는 이들도 신중하기 그지없었다. 플로먼이 제 아무리 뛰어난 은신술을 가지고 

있다지만 앞만 보고 방어하는 기사들을 섣불리 공격하지는 못하리라. 실제로 저택 안에서는 몇 번 충돌음이 들려왔

지만 비명소리는 더 이상 없었다. 

"통로가 확보되었습니다." 

"좋아! 가자." 

노리스를 선두로 시즈 일행이 일렬로 복도를 따라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기사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벽 양쪽에 

서서 수상한 기색을 감시했다. 이미 몇몇의 플로먼은 잡혀서 바닥에 뉘여 있기도 했다. 

"지하 통로가 있을 거야." 

"연구실입니까?" 

"아니야. 그의 방이지." 

"집주인이 방을 지하에 두다니 이상한 취미군요." 

얘기를 하면서 그들은 주위를 조심조심 살폈다. 어쌔신이 숨어있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목숨이 날아간다. 시즈의 바

람으로도 기척을 잡을 수 없는 암살자, 플로먼. 방심은 금물이었다. 

끼익‥. 오래된 건물의 것처럼 문은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들이 들어선 곳은 커다란 방이었다. 중앙에는 한 사내가 뒷짐을 쥔 채 등을  돌리고 서 있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

다. 

"많이도 왔군." 

"노르벨‥." 

로진스가 날카로운 소리로 음성의 주인이 누군지 일러주었다. 음성의 주인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

다. 

"다들 무슨 볼일로 남의 저택에 침입하셨는지?" 

"몽충을 회수하기 위해서 왔다." 

"그렇다면 이미 늦었소. 로진스, 당신이라면 알겠지!? 곧 부화를 앞두고 있으니 이제 막을 수 없어." 

마치 원망하는 듯한 어조로 노르벨은 시즈들을 비웃었다. 

"그나저나 마법의 미치광이 로진스라면 나와 함게 세계의 파멸을 즐길 줄 알았는데‥. 서글프군요." 

"노르벨, 비켜! 우리는 그리스를 막아야 해!" 

"돌아가십시오, 츠바틴. 이미 몽충은 번식자에게 심어진 지 오래입니다. 부화만을 기다리고 있지요." 

"번식자의 꿈을 멈출 수 있다면‥." 

"피햇!" 

말을 하던 츠바틴을 노리스가 번개같이 붙잡고 날았다. 파팍!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는  단검이 깊숙이 박혔다. 노

르벨이 짐짓 놀란 듯 박수를 쳤다. 

"놀랍군요. 이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나의 암기를 피하다니, 과연 노리스입니다." 

사실 노리스는 암기를 보고 피한 게 아니었다. 다만 츠바틴이 말하던 도중  노르벨의 얼굴이 급격히 일그러지자 반

사적으로 움직인 것이었다. 식은땀이 주륵하고 등을 타고 흘렀다. 

"크흐흐흐‥." 

고개를 떨군 채 노르벨은 흐느끼듯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까지 악몽 같은 삶을 살아온 아이입니다. 그녀의 오빠로서 뭐 하나  지켜준 게 없지요. 그런데‥. 이제는 마지

막으로 꾸는 꿈조차도 빼앗으라고!?" 

"크윽!" 

살을 에이는 살기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보를레스는 전날 노리스가 말했던 게 거짓이 아니었음을 통감했다. 이 정도

라면 살기만으로도 사람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을 것이다. 

"네가 역적, 역사의 고리로구나!" 

멋 모르는 한 기사가 노르벨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는 적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까분 자가 어떤 결과를 맞

이하는지를 사람들에게 생생한 장면으로 가르쳐주고 난자되었다. 노르벨의 앞에서 잠시 멈칫한다 싶더니 수십 개로 

몸이 나뉘어 벽에 달라붙은 것이다. 

파마리나조차 얼굴을 찡그렸고 아리에는 아예 시즈의 등에 얼굴을 박았다. 

그들에게 히죽 웃어주며 노르벨은 방금 전 기사를 조각낸 단검 칼날을 옷에 닦았다. 

"난 여동생이 마지막 꿈을 꾸는 시간만큼은 지켜줄 생각이오." 

일행은 섣불리 나설 수 없었다. 배짱 좋은 보를레스조차 마른침을 집어삼켰다. 아니, 오히려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노르벨은 달려오던 기사를 강철 갑옷까지 통째로 잘라놓았다. 몸통만 수십 개로 분해된 걸로 볼 때, 잠깐동안 몇 번 

휘두른 정도가 아닐 것이다. 

'빠르다!' 

보를레스도 최대한 정신을 집중하여 내리친다면 비슷한 속도를 낼 수 있었다. 그러나 단 한 번 뿐, 노르벨처럼 연속

해서 내리치라고 한다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분명했다. 

스르릉‥. 

"첫 번째 주자는 노리스로군요. 좋아요. 모두 상대해드리죠. 하지만 내 뒤로 갈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요. 단도를 

머리에 박고 싶지 않다면." 

스르릉‥. 

"호오‥. 보를레스, 광풍의 검사도 함께 나서는 겁니까?" 

"당신에게는 못이길 것 같으니까. 나는 기사가 아니라 용병이다." 

보를레스는 노리스와 나란히 서서 제뷔키어를 곧추세웠다. 노리스는 자존심이 상했지만 실제로 노르벨을 이길 자신

이 없었다. 그도 묵묵히 검을 바로 잡았다. 희대의 두 검사가 동시에 검을  겨눴지만 노르벨의 웃음은 더 짙어졌다. 

그는 양손에 단도를 쥐고 자세를 취했다. 

"저건‥. 황혼의 송곳니‥." 

보통의 단도보다 긴 노르벨의 것을 보고 츠바틴이 침음성을 냈다. '황혼의 송곳니'라고 하면 붉은 검날을 가진 단도 

한 쌍이 세트로 짧은 무기 중에서는 유일하게 전설상의 무기에 속하는 보물이었다. 

"그래봤자 한 손은 느릴 게 분명해." 

"맞습니다." 

노르벨은 순순히 츠바틴의 말에 긍정의 대답을 했다. 다음 순간 그는 시즈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말을 덫붙였다. 

"참고로 말하자면 난 왼손 잡이랍니다." 

"이거 골치가 아프겠는데요‥." 

방금 전 기사를 베어버린 손은 오른손이었다. 강한 자를 만난 기쁨인지 두려움인지 보를레스와 노리스는 동시에 이

빨을 드러냈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더니 쾅하고 땅을 박차며 검을 내질렀다. 

촤라라라‥. 

'거, 거짓이 아니었군.' 

보를레스의 담력검술이 강하다면 노리스의 검은 동방의 검법을 전승하여 끊임없이 이어지는 무한(無限)의 검이었다. 

두 검술이 한꺼번에 공격을 하는데도 노르벨은 시종 여유를 부렸다. 방어만 할 뿐 공격을 하지 않는 것이다. 얕보였

다고 생각한 보를레스가 화륵 분노를 태웠다. 

"감히!" 

"윽!" 

표정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노르벨은 상당히 힘겨웠다. 한 사람씩 상대를  한다면 보를레스나 노리스는 그의 상대

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힘을 합치니 덧셈을 초월한 듯 싶었다. 그것은 보를레스나 노리스의 검술이 모두 

시간이 흐를수록 타격이 쌓여 가는 종류였기 때문이다. 

더 이상 안되겠다 싶은 그는 틈을 노려 뒤로 몸을 빼냈다. 그리고 보를레스에게 달려들었다. 

"미안하지만 먼저 죽어줘야겠어!" 

"실례합니다." 

노르벨이 움직인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지만 그 때를 놓치지 않고 둘 사이에  껴든 사람이 있었다. 시즈는 상황에도 

맞지 않게 음식점 여종업원 마냥 방긋 미소를 띄우고 노르벨의 앞을 가로막고 손을 내쳤다. 

시즈의 가벼운 손동작으로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는 노르벨이 아니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양손의 검을 최대

한 빨리 허공에 그은 후 뒤로 물러났다. 

파앙! 

"막았어!" 

굉음이 터지며 바람의 칼날이 산산조각 났다. 

"미스릴조차 베어버리는 바람의 검이라고 해도, 진공의 방패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지." 

장소가 한정되었다는 조건도 노르벨에게 유리했다. 그는 단도였지만  다른 이들은 모두 장검을 휘둘렀다. 그렇기에 

노리스와 보를레스가 제 실력을 발휘하기 힘든 것이다. 시즈도 마찬가지였다. 밖이었다면 폭풍이라도 일으킬 수  있

겠지만 집안에서는 무리였다. 

"광풍의 검사도, 마땅찮은 이도! 다들 별 거 아니군." 

방이 울려라 노르벨이 광소를 터뜨렸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한 가운데 츠바틴이 노리스에게 다가와서 속삭였다. 

"벽이 빈 것 같아. 아무래도 방이 이어진 모양인데, 로진스가 마법을 써야 하니까 시간을 끌어주게." 

슬쩍 돌아보자 로진스가 눈을 감고 열심히  주문을 중얼대고 있었다. 영창이 끝날 때까지  노르벨에게 들켜서는 안 

되겠지. 노리스가 바로 검으로 바닥을 후려갈겼다. 

"크합!" 

엄청난 힘이 지면에 쏟아지자 갈라진 돌덩이가 잔뜩  떠올랐다. 노리스는 그것들을 검집으로 후려갈겼다. 노르벨은 

그것을 받아치기보다 전부 피했다. 워낙 빨리 날아오는 암기라서 당황한 사람이라면 쳐냈을 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갈라진 돌을 고스란히 맞았을 것이다. 

"이런 것은 통하지 않아. 응!?" 

"통하리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검을 높이 치켜든 채 노리스가 중얼거렸다.  서있는 모습이 거인처럼 거대하게 느껴졌지만 검이  무거운 듯 힘겨워 

보였다. 

"붕(崩)!" 

동방검법에는 수많은 검의 기예(技藝)가 있다. 노리스는 기인(奇人)을 만나 여러 가지를 배웠지만 붕검 만큼은 자신

이 없었다. 그러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붕검이라고 하면 자르는 게 아니라 무너뜨리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내려치지도 않았는데 붕(崩)의 기운이 노르벨의 온몸을  옥죄였다.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도 없었다.  이 순간만큼은 

그에게 방안은 불리한 조건이 되어있었다. 노르벨이 발악하듯이 '황혼의 송곳니'를 내질렀다. 

"으아아아아앗!" 

지켜보는 사람들은 수십 개의 단도가 노리스의 검을 막는 환영을 보았다. 그래도 검은 묵묵히 떨어져 내렸다. 아주 

천천히 말이다. 노르벨과 노리스, 공수 양쪽 다 이마에서 땀을 주룩주룩 흘려댔다. 

보는 이들도 손에 땀을 쥐는 광경이었다. 

노리스의 눈가가 흠칫했다. 동시에 노르벨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더니 단도의  환영이 검을 밀치고 노리스를 덥쳤

다. 

"크으악!" 

"노리스!" 

보를레스가 달려갔으나 노리스는 한 팔을 잃어버린  후였다. 침통한 표정의 노리스를 내려다보며  노르벨은 한숨을 

푹 쉬었다. 

"과연, 대단하군. 노리스, 당신의 검만 뛰어났더라면‥ 상황은 반대가 되었을 거요." 

잘려나간 팔에 들린 검이 반쪽으로 쪼개져 있었다. 붕검으로서의 압력과 '황혼의 송곳니'가 초당 수십 번을  쳐대는 

충격에 견디지 못한 것이다. 

"모두 비켜!" 

다들 침울해 할 때, 로진스의 음성이 울려퍼졌다. 미리 신호를 받았던 시즈와 보를레스가 로진스의 뒤로 물러섰다. 

"소멸을 원하는 붉은 섬광!" 

콰르르르릉! 

로진스의 영창을 따라 화광(火光)이 노르벨을 삼켰다. 화광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벽 자체를 뚫고 나갔다. 어

디까지 나가는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엄청난 파괴력에 로진스는 스스로 놀랐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번에 찾아낸 금지주문인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 걸‥." 

"이 멍청아! 이런 광범위한 마법을 쓰다니 건물더미에 매장되고 싶어서 그래?" 

로진스의 목을 틀어쥐고 츠바틴이 소리쳤다. 그는 벽을 부술 마법을 사용하라고 했지만 설마 지하를 지탱하는 기둥

을 죄다 부숴버리는 마법이라고는 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서 갑시다." 

"아직‥은 안돼‥." 

연기에 쌓여서 비틀대는 인영이 남아있었다. 벽이 죄다 뚫려버렸는대도 노르벨은 살아남았던 것이다. 그러나 몰골은 

처참해서 온몸은 시뻘겋게 그을렸고 붉은 단도는 시커멓게 변해서 흰 김을 흘려댔다. 아직도 지글지글 살점이 타들

어 갔지만 그는 상관없다는 듯 자세를 취했다. 

탈진하다시피 했지만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은 의지에 시즈들은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노르벨‥. 그만 물러서. 자네는 잘 싸웠네." 

그 때, 노르벨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나서 옆에 섰다. 바로 플로먼의 가주가  계약을 마치기 위해 온 것이다. 하지만 

그로서도 아스틴의 인물이란 인물이 모인 무리를 막아낼 수는 없었다. 노르벨이 너무나 강한 것이다. 

그의 말을 인정하지 않고 노르벨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없‥ 크억!" 

"그렇다면 죽게." 

망설임없이 플로먼은 노르벨의 심장에 검을 박았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동작에 희생자는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동공이 벌어졌다. 천천히 쓰러지는 그를 내려다보며 플로먼이 차갑게 말했다. 

"무슨 일인가 했지. 몽충이라‥. 계약자의 비밀을 캐지 않는다지만‥ 이건 예외야. 갑시다, 여러분. 몽충이 부화되는 

걸 막아야지요." 

"‥‥." 

"뭐 하는 거요!? 세일피어론아드가 멸망하는 걸보고 있을 셈이오?" 

다그침이 있어서야 일행은 방을 나섰다. 그래도 다들 뭔가 석연찮게 노르벨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발을 떼었다. 

"크윽!" 

"조금만 참으세요." 

블리세미트가 응급처치를 한 덕에 심각한 지경은 아니었지만 노리스는 꽤나 상심했다. 검을 쓰던 팔이 잘렸으니 검

사로서 생명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그는 웃었다. 위로를 하는 보를레스에게 호기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자네한테는 안 져." 

"다행이군요." 

로진스의 마법 덕에 지하는 통로가 아니라 아예 홀이 되어있었다. 그을리고 녹아내린 흔적은 길게 이어져 있었는데 

어느 지점에 가서 부자연스럽게 끊겨있었다. 무엇이 막고 있길래 마법의 에너지는 더 이상 나가지 못한 것일까? 의

문은 금방 풀렸다. 

검은 로브가 너무나 잘 어울리는 남자, 그가 길을 막고 있었다. 넓은 공간에 가만히 서있었을 뿐이었지만 주변은 도

저히 지나갈 수 없는 공간으로 보였다. 뒤로는 상아 제단이 있었고 그 위에는  숲 속의 잠자는 공주처럼 한 여인이 

누워있었다. 

"그리스!" 

"오랜만이군, 츠바틴. 그 옆에 있는 사람은 로진스와 노리스가 아닌가. 노리스는 어쩌다가 팔이 없어진 거지? 참 불

쌍하게 됐구만‥. 쯧쯧‥!" 

"말장난할 시간이 없다. 그리스, 비켜라." 

"시간이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몽충이 부화하기까지는 아직도 몇 시간이나 남았네." 

"몇 시간!?" 

로진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반문했다. 몇 시간이라니‥.  하루밤만 더 자고 왔다면 세일피어론아드에는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났을 것이다. 그리스는 눈을 찡긋하고 그를 놀렸다. 

"너무 많이 남았지? 그러니까 그 시간동안 나와 놀아주는 게 어떤가?" 

"장난치지 마!" 

제뷔키어를 번개같이 빼들고 보를레스가 소리쳤다. 로진스의 등뒤에서 몸을  움츠리고 있다가 튀어나와서 순식간에 

그리스의 지척에 다다랐다. 

"호오‥ 빠르군. 자네가 바로 광풍의 검사인가?" 

그리스의 손가락이 푸른색으로 변한다 싶더니 마력구가  발사됐다. 빛의 궤적을 남기고 날아오는  마법의 에너지를 

무시하고 달려들며 보를레스가 외쳤다. 

"환상이다!" 

콰앙! 

그러나 당당하게 몸을 들이댔던 그는 당당하게 바닥을 굴렀다. 

"컥!" 

아무런 방어도 없이 들이댄 몸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블리세미트가 그를 부축하고 신성력을 사용해 치료했다.  한심

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리스가 말했다. 

"내 특기에 대해서 들었군. 하지만 처음부터 밑천을  사용하는 바보가 어디 있나? 마력구에 달려들다니 바보  같군. 

다음은 누구지? 한 번에 나가떨어지니 재미가 없어." 

"‥상대해주지." 

하고 두 사람이 계획이라도 짠 듯 동시에 나섰다. 파마리나와 로진스는 걸어나오다가 서로의 얼굴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리스는 어린아이처럼 박장대소하고 소리쳤다. 

"마법사와 마녀! 좋은 그룹이야." 

"쳇! 마녀 따위와 같은 부류로 취급하지마!" 

"나한테 진 주제에 뭐라고 떠드는 거야?" 

"잠깐 방심했을 뿐이라고!" 

으르렁대는 그들을 그리스는 절대 그룹이 아니라고 인정했다. 오해를 해서  미안하다는 사과를 하고서야 공격을 시

작하는 두 사람을 보며 그는 기가 막혔다. 

"마녀 따위가 흉내도 못낼 마법을 보여주지." 

"내가 할 소리라고!" 

"어둠의 구름에 쌓여 감춰진 위대한 힘이여! 끝없이 오래된 의지를 빌려 원하니‥ 지축을 흔드는 굉음과 함께 강림

하라!" 

"생명의 술로 만들어진 빙혈(氷血)의 창! 생명을 가진 것들 중 막을 것이 없어라!" 

로진스의 양손에 눈부신 전극이 끊임없이 지직대며 뭉쳐지더니 하나의 구(球)를 이루었다. 그에 뒤질 세라 파마리나

가 손가락을 물어 흘러나온 피가 창의 형태로 변했다. 두 사람은 두고 보자는 듯 상대를 째려보더니 동시에 마법의 

결정체를 던졌다. 

"흐음‥." 

타투는 모습은 어린애 같지만 마법에 담긴 힘만큼은 무시할 게 아니었다. 그리스는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력을 

느끼고 신음을 흘렸다. 우선 그는 반지를 빼서 던졌다. 이 간단한 행위에 로진스의 라이트닝 볼은 콰릉 하는 소리를 

끝으로 금속에 흡수됐다. 금속이 막강한 전기 에너지를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리기는 했으나 그리스에게는 털끝하나 

피해를 줄 수 없었다. 

뒤에 이어 그는 손가락을 물어 흐르는 피로 허공에 글씨를 썼다. 

"피는 피와 친하다." 

'벽'이라는 글씨였다. 피로 만들어진 창은 그리스가 만든 글자에 흡수되듯  빨려 들어갔다. 파마리나의 혈창은 조금

이라도 닿으면 몸속의 피가 엉겨붙는 무서운 주문이었다. 그러나 역시 그리스에게 피해를 입힐 수는 없었다. 

"간단하군. 이번엔 내 차례야. 내 뒤를 잘 봐. 이게 뭘로 보이나?" 

"개!?" 

언제부터 있었던 것일까? 파마리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작은 개 한 마리가  그리스의 뒤에서 귀여운 얼굴로 혀를 

낼름거렸다. 

"보면 안돼!" 

암시임을 눈치챈 츠바틴이 소리쳤지만 너무 늦었다. 파마리나의 눈에서 개는  천천히 사납고 거대한 늑대로 변하기 

시작했다. 홀 안이 온통 경악성과 신음성으로 가득찼다. 암시에 걸린 이들의 눈에 개는 점점 커져서 이제는 황소 만

한 늑대가 되어있었다. 

"이런!" 

벌써 근위기사 몇은 몸에서 피를 뿜어댔다. 

"어찌 된 거지?" 

그나마 아리에는 시즈가 팔을 들어 그녀의 눈을 가렸기에 무사했다. 아무 것도  없는데 사람들이 신음과 비명을 지

르며 피를 토하고 살이 갈라지는 광경이 무시무시하고 공포스러웠다. 

"호오‥. 과연 음유술사라는 건가? 분명히 암시의 매개체를 보았는데도 걸려들지 않다니.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

두 힘든 모양인데 어떻하지?" 

상처를 입은 보를레스와 노리스도 환상을 보는 듯 신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시즈가 츠바틴을 향해서 말했다. 

"암시를 없앨 방법이 없습니까?" 

"시전자가 푸는 방법, 그리고 시전자 자체를 없애는 방법. 두 가지야." 

말을 듣자마자 시즈는 달려나갔다. 그리스가 손가락으로 이상한 모양의 수인을 만드는 게 보였지만 멈추지  않았다. 

이제 바람의 칼날을 일으키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을 때, 땅이 불쑥 솟았다. 

"핫!" 

대끔 시즈는 바닥을 향해 손날을 내리그었다. 손을 따라서 일으켜진 바람이 땅을 강타하면 솟아나던 바위를 그대로 

박살냈다. 

"마염의 사자!" 

자세가 흐트러진 그를 흑사자가 덥쳤다. 그리스의 주문으로 그림자에서 기어 나온 암흑의 사자였다. 푸른 화염 입김

을 죽죽 뿜어내는 게 소름끼치는 모습이었지만 시즈는 아무렇지도 않게 뛰어들어서 그 중 한 마리한테만 바람의 공

격을 퍼부었다. 

"현혹되지 않는 군." 

그 동안 멀리 떨어진 그리스가 사태를  관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특기인 환상과 마법의  혼합이 깨졌지만 그는 

다급한 기색이 없었다. 흡족한 얼굴로 시즈가 말했다. 

"아무래도 통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렇군. 지금 확실히 알았어. 바람을 노래하는 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의지를 가지고 있군." 

"그렇다면 포기하시는 겁니까?" 

"무슨 소리지?" 

"그만 비켜주십시오." 

"이런‥. 뭔가 착각하나본데‥. 나에 대해서 츠바틴이 말해주지 않던가? 나는 '빛나는 무대의 주인'이지.  바람을 노

래하는 이여, 그대를 내 무대의 주인공으로 초대하지. 연극의 이름은 '방황'이네." 

말이 끝남과 시즈 주위의 광경이 어른거리더니 흐물흐물 녹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바닥까지도 녹아서 세상은 온통 

하얗게 변했다. 어떤 상황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나마 바닥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기에 다행이었다. 아니

었다면 암시로 인해 끝없이 추락했을지도 모른다. 

당황한 시즈의 귀로 그리스의 음성이 들렸다. 

"그대가 바람을 노래하듯, 나는 빛으로 무대를 만드네." 

"환상이‥." 

"안타깝게도 이것은 환상이 아니야. 사물이 빛의 색 중에서 무엇을 반사함으로 따라 인간의 눈이 그 색을 받아드리

는 거지. 나는 빛과 의지를 동조하는 음유술사. 사물에 어떤 색을 덫씌울지도 내 마음 대로지." 

"크윽!" 

"눈을 감은 건가? 좋은 생각이야." 

어차피 보이는 걸 믿을 수 없다면 눈을 감는 게 현혹되지 않는다. 시즈는 눈을 감고 방안의 사물을 느꼈다. 방안 공

기가 시즈의 의지를 따라서 움직이며 대신 사물의 위치를 가르쳐주었다. 

"바람의 힘을 사용한다라‥. 그것만으로는‥ 내 빛의 무대에서‥." 

"벗어날 수 없겠지요." 

시즈는 바람의 의지를 총동원하여 그리스가 있다고 생각되는 곳을 향해 날렸다. 바람의 칼날과 돌풍, 소용돌이가 쏟

아지는 압력으로 인해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사물을 내게 보이지 않게 했다면, 당신에게도 마찬가지겠지요?" 

그렇게 말하고 시즈는 눈을 번쩍 떴다. 그리스가 그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는  사물을 보이도록 빛을 조정했을 것

이다.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아주 잠시였지만 시즈의 눈에 사물이 정확하게  보였다. 당황한 그리스의 눈동자 동공

까지. 그 안에는 단숨에 돌진하는 자신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파바박! 

시즈의 손바닥에 압축되어 있던 회오리가 그리스의 복부에서 소용돌이쳤다. 하나의 토네이도가 주먹 정도로 모아져 

뿜어진 압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으아아아아아악!"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며 환상에 빠져있던 사람들이 제 정신을 차렸다. 잠시 멍하니  있던 그들은 이내 상황을 깨달

았다. 

"환상과 암시였군. 시즈, 네가 그를 죽였나?" 

피를 줄줄 흘렸지만 보를레스는 생기가 있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죽을 뻔 하다가 살아났으니 생기가 넘치

는 게 당연했다. 시즈는 그리스가 산산조각나며 터져버린 피의 홍수로 아예 목욕을 했다. 아리에가 수건으로 닦아주

려 했지만 그는 고개를 흔들어 거절하고 제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죽여야 하는 겁니까?" 

누워서 자고 있는 사람을 죽여야 하다니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것이 세일피어론아드를 구하는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 떨떠름하게 다들 보를레스를 째려보았다. 

"왜 접니까? 다른 사람이 찔러도 되잖아요!" 

"잠자코 검이나 들어." 

착 가라앉은 노리스의 음성에 그는 울며 겨자 먹기로  제뷔키어를 들었다. 성스러운 은의 금속, 미스릴로 만들어진 

제뷔키어를 비겁한 일격에 사용하다니 서글펐다. 검끝을 에즈민의 가슴을 겨누고 세운 채 부들부들 떠는 그에게 노

리스가 다시 소리쳤다. 

"빨리 죽여! 세일피어론아드에서 꿈이 없어지길 바라는 거냐?" 

"하, 하지만! 검이 더 이상 내려가질 않아요! 뭐에 막힌 듯이!" 

"뭐!? 설마‥ 으억!" 

로진스가 보를레스를 밀치고 제단에 손을 짚자마자 신음소리를 터뜨리며 무릎을 꿇었다. 

"로진스!" 

뚝뚝! 가슴에서 흘러나온 피가 땅을 물들였다. 그의 환부에 삐죽 튀어나온 것은 '황혼의 송곳니.'였다. 

"에‥즈민에게 손대지마!" 

"아직 살아있었군." 

"예, 예전에 에릭사를 훔쳐 마신 일이 있었지. 그 영향이다." 

아무리 성약, 에릭사의 생명력을 가졌다고 해도 노르벨은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  그가 마지막 

힘을 짜내어 로진스를 공격한 이유는 간단했다. 그리스가 에즈민에게 펼쳐놓은 방어의 주문을  풀 수 있는 자는 로

진스 뿐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내 동생의 꿈을 방해할 자는 없어‥." 

히죽하고 웃으며 노르벨은 완전히 눈을 감았다. 

"제기랄! 로진스, 눈을 떠라!" 

"파마리나, 방법이 없겠습니까?" 

맥박이 느껴지지 않는 로진스를 잡고 노리스와 츠바틴이 절규했고 시즈는  암울한 어조로 파마리나를 다그쳤다. 그

러나 파마리나는 힘없이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처음 보는 방식의 주문이에요. 아마도 이 제단 자체가 파괴할 수 없는 어떤 힘으로 보호받고  있는데‥. 주문의 매

개체를 파괴해야 해요." 

매개체를 찾기 쉬운 곳에 놔두었을 리가 없었다. 어쩌면 영원히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버렸을 지도 모른다. 

시즈가 바람의 의지를 사용하고, 보를레스가 제뷔키어의 날이 빠지도록 내리쳐도 소용없었다. 아스틴 왕궁에서 궁정 

마법사들이 총동원되었지만 제단의 방어주술을 푸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환기(環期) 4762년의 초가을‥. 아스틴의 수도, 제플론에서 한 여인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고 이어서 거대한 폭발

이 일어났다. 세일피어론아드의 모든 이에게 보였을 정도로 눈부신 섬광, 잠시 태양이 제플론에 내려앉은 듯 했다. 

그렇게 가을의 꿈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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