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0화 (200/200)

                                     49악장 노래는 마법이 되어

제플론에 태양이 떨어졌다고 착각한 날밤, 한 노인은 꿈을 꿨다. 하늘에서 태양의 피처럼 붉은 내리고 그걸 맞은 사

람들의 몸이 썩어 가는 꿈이었다. 

다음 날, 꿈은 실현되었다. 

"으아아악!" 

"내 손이‥! 내 손이 썩어가고 있어‥." 

실베니아에서 치과 의사를 하고 있던 한 청년은 사람들의 이빨이 모두 썩어서 그들의 이빨을 뽑아주며 떼돈을 버는 

꿈을 꾸웠다. 다음 날, 병원에 충치를 치료하기  위한 사람들이 몰려들었지만 그는 치료를 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자신의 이빨도 모두 썩어버렸기 때문이다. 

어떤 곳은 강둑이 터지고, 때아닌 해일이 해변을 덮쳤다. 

평화롭던 산골에 갑자기 몬스터 무리가 수도 없이 밀려들었다. 하루 전, 마을의 한 아이는 용사놀이를 하던 꿈을 꿨

다. 

드래곤이 둥지를 벗어나서 도시를 파괴하고 어디선가 마왕이 나타났다. 

모두들, 꿈을 두려워했다. 상상도 하지말고 말도 하지 않고 그들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러나 공포심은 그들에게 

또 다른 꿈을 만들어주었다. 

망연자실‥. 

현재 시즈의 상황이 그러했다. 그의 주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누워 있었다. 죽었다?  아니다. 모두 잠을 자고 있는 

것이다. 그 안에는 코마저 골아대는 사람도 있었다.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괴로운 듯 식은땀을 흘려대고 있

다는 것이다. 

"아리에‥. 일어나 봐요. 일어나요." 

"으음‥." 

시즈는 아리에를 잡고 마구 흔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고통에 찬 신음 소리만을  흘릴 뿐, 눈을 뜨지 않았다. 에즈민

이 빛으로 화해 사라진 날로부터 4일이 지났다. 

그동안 사람들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잠만을 자고 있었다. 몽충의 악몽이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는지 손가락이 천

천히 보랏빛을 띄고 있었다. 조금만 더 지나면 시커멓게 썩겠지만 그보다 먼저 아사할 가능성이 컸다. 

"어, 어떻게 하면‥." 

시즈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도움을 청하러 밖으로 나가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그를 제외하고 세상은 모두 침묵에 

빠져있었다. 

하루가 또 지나갔다. 

"방법이 있을 거야! 방법이!" 

다시 하루가‥. 

시즈는 미친 듯이 츠바틴과 들췄던 역사의 고리  자료를 다시 뒤졌다. 한 자라도 빠질까봐 그의  눈은 뻘건 핏발이 

서있었다. 뒤로 잔뜩 산을 이룬 문서들은 이미 그의 시선이 지나간 것들이었다. 

"없어! 없어! 없다고!" 

비틀비틀‥. 문서더미 속을 빠져나와 지도를 펼쳤다. 

"다음이 마지막인가?" 

깨끗한 빛을 잃고 흐릿하게 변한 눈동자가 하늘을 향했다. 저토록 하늘은 맑지만  꿈속에 있는 사람들은 과연 무슨 

하늘을 보고 있을까? 발걸음을 옮길 때, 거대한 고동처럼 땅이 울었다. 

콰르릉! 

"윽! 뭐지!?" 

일주일에 가깝도록 먹지도, 자지도 못한 시즈는  탈진상태였다.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에릭사의 기운이었다. 

비틀거리다가 엉덩이를 거칠게 바닥에 부딪히고 데굴데굴 굴렀다. 

"시즈‥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냐?" 

호쾌하면서도 무거운 음성. 시즈는 귀에 익다는 사실보다는 자신말고도 잠들지 않은 이가 있다는 사실에 기뻐서 고

개를 번쩍 들었다. 

짜악! 

"여기서 뭘 하고 있냐고 물었다!" 

힘줄이 불쑥 돋은 팔이 굳게 시즈의 회색 옷깃을 쥐고 들어올렸다. 

"제, 젠티아." 

"멍청한 녀석!" 

땅에 시즈를 패대기친 젠티아는 역사의 고리의 자료실을 슬쩍 쳐다봤다. 

"그래도 포기를 하지는 않았던 모양이군. 하지만‥." 

퍼억! 

"쿨럭!" 

"방법을 잘못 택했어." 

전력을 다해 때린 모양이었다. 시즈는 들어간 것도 없는 위의 애꿎은 소화액만 토해냈다. 

젠티아는 먼길을 와서인지 망토며, 머리며 완전히 먼지 투성이였다. 깔끔하던 갈색의 머리 빛은 온데간데없었다. 

"지금 벨루온에 다녀오는 길이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대충 알겠더군. 그렇다면 당장 내게 왔어야 하지 않나!? 내

가 그렇게 못미더워 보였느냐?" 

"그게 아닙니다. 젠티아, 날 제외하고는 모두 잠이 들었다고 생각을‥. 쿨럭!" 

"한 마디로 내가 이상한 꿈의 주술에 걸릴 거라고 생각했다는 소리잖냐." 

이죽거리며 주먹을 한 방 더 시즈의 옆구리에 박아준 젠티아는 품에서 몇 개의 음식을 던졌다. 

"먹어라. 그래가지고는 네가 먼저 죽겠구나." 

"이것은‥." 

"오다가 주웠다." 

말이 주웠다지 아무 곳에나 들어가서 가져왔을 것이다. 도둑질을  가릴 시간이 없었다. 우선은 살고 봐야 사람들을 

깨울 수도 있지 않겠는가. 

"우선 지금 상황에 대해서 좀 알려다오." 

시즈는 우선 중요한 상황만 간추려 그에게 말했다. 듣고난 젠티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구나." 

글로디프리아의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을 때, 젠티아는 영문을 몰랐음으로 당황한 게 당연했다. 하지만  서

쪽에서 보였던 빛과 관계가 있다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당장에 길을 떠나온 것이다. 꿈을 꾸는 생물은 죄다 잠

이 들었기에 직접 걷고 뛸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빛이 일어날 때 진동의 발원지를 땅으로부터 느꼈다

는 사실이다. 벨루온에 도착해보니 발원지에는 역사의 고리와 시즈 일행이 뒤섞여 누워있었다. 

절대로 혼숙 여관은 아니었으니 잠자는 주술에 빠진 게 분명하다고 판단한 젠티아는 땅의 고동으로 시즈의  기척을 

찾았다. 모두 잠들어서 땅을 걷고 있는 사람이라고는 시즈가 전부일 것이다. 예상대로 그는 남쪽 멀리에서 한 기척

을 발견했고 서둘러 달려왔다. 

"그게 정말입니까?" 

역사의 고리 일원들도 방법이 없다고 했던 몽충의 처치법을 젠티아가 알고 있다니. 시즈는 신에게 감사했다. 눈물마

저 글썽거리는 그를 데리고 젠티아는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나도 모른다‥." 

"네!?" 

"땅의 고동을 따라서 걷고 있는 거야."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시즈는 잠자코 뒤를 따랐다. 음유술사들이 모두 그렇듯 젠티아의 능력도 범상한 것은 아니라

는 믿음으로. 꼬박 하루를 걸어서 젠티아는 멈췄다. 그것만으로도 체력이 떨어졌던 시즈는 강행군이었다. 털썩 주저

앉은 그는 젠티아에게 물었다. 

"여기서 어떻게 하라는 뜻입니까? 여기는 바닷가잖습니까?" 

"고동을 따라서 오기는 했는데‥." 

"바닷가에서 뭘 하냐고요!" 

"정말 시끄럽군. 넌 바람을 노래하는 이니까 당연히 노래를 해야지." 

"네!?" 

"저걸 봐라." 

젠티아는 손가락을 들어서 바다를 가리켰다. 푸른 물결이 철렁대며 모래사장을 쓰는 걸 힐끔 바라본 시즈는 퉁명스

레 말했다. 

"바다잖아요! 바다에서 노래를 부른다고 누가 들어준답니까?" 

"바보녀석아. 네 말대로 몽충이라는 것은 감염자의 꿈을 악몽으로 변화시킨다면. 그건 즉 자기 자신의  의지와 싸워

야 된다는 뜻이다. 네 노래에는 사람들에게 기운을 주는 힘이 있어." 

"그렇지만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할지‥." 

"악보가 눈앞에 있지 않느냐." 

"악보요?" 

시즈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러자 젠티아는 바다를 보며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쿵! 쿵! 

처음에는 무작정 구르는 것처럼 느껴지던 젠티아의 다리에는 어떤 박자가 숨겨져 있음을 이내 시즈는 깨달았다. 그

도 천천히 젠티아와 같은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악보‥." 

조그맣게 중얼대는 시즈의 말에 젠티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것이 바로‥ 파도의 악보다." 

"그렇다면‥." 

"아릴이야. 아릴이 파도의 악보를 그리고 있는 거지." 

확실히 파도는 인정한 간격을 두고 정확하게 시즈의 발을 적셨다. 뜨거운 태양을 한 순간 잊을 만큼 시원했다. 머리

까지 상쾌해지는 것 같았다. 시즈의 눈동자가 한결 맑아졌다. 

"대충 알아볼 수 있겠습니다. 어떤 노래를 말하고 있는 것인지‥." 

"다행이군. 그것도 못 알아본다면 한 대 때려주려고 했다." 

"이제 맞는 것은 사양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군요." 

"뭐지?" 

젠티아는 우선 주먹을 쥐어 보이며 물었다. 

"이 파도에서는 곡을 느낄 수 있지만 박자가 너무 어렵습니다. 제대로 부를 수 있을지‥." 

"흐음‥. 내가 도와주지." 

젠티아는 성음검을 검집에서 끌어냈다. 그리고 검집에 조금 바닷물을 채우고 다시 검을 반쯤 검집에 집어넣었다. 

"원래 바닷물로 하면 검에 좋지 않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시간이 없지." 

바위에 걸터앉아서 무릎에 성음검을 올려놓고 젠티아는 품에 있던 단검으로 성음검의 검집을 살짝 때렸다. 

우웅‥. 

맑은 종소리와 비슷한 울림이 넓게 퍼져 나왔다. 때를 같이하여 젠티아는 반쯤 뽑았던 검을 천천히 집어넣었다. 

우우웅‥. 

"소리가‥." 

"이게 바로 성음검의 정체지" 

검을 어느 정도 뽑고 있느냐에 따라서 울림의 소리가 틀렸다. 이로써 무기가 하나의 악기로 변모된 것이다. 

젠티아는 살짝살짝 단검으로 검집을 치며 파도의 악보를 따라 성음검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가슴을 떨리게 만드는 

울림이 시즈의 가슴속까지 스며들고 있었다. 눈을 감고 가만히 검의 노래를 음미하던 시즈도 입을 벌렸다. 

버틸 수 없다고 생각했나요 

스러져 가는 의식이 무겁게 느껴졌나요. 

구름에 스며드는 바람처럼 

그대의 마음 속을 유영할 수 있다면 

슬픈 꿈, 아픈 꿈 함께 꿀 텐데‥. 

같은 희망을 꿀 수 없어도 

노래할 수는 있답니다. 

작게 입술을 오무려 휘파람을 불어도 좋아요. 

그대 숨소리의 또 다른 발견에 

날아갈 듯 상쾌할 테니‥. 

미소를 지어봐요. 

기쁨의 선율이 펼쳐질 테니‥. 

이제 그만 일어나 노래하고 춤을 추어요. 

너무나 낡아버린 악보를 펼치고 

어딘가 망가져 버린 악기를 들고서. 

그래도 함께라면 아름답게 느껴지겠죠. 

시즈의 노래는 당장이라도 뛰어들고 싶은 맑은 호수 같았다. 부르는 자신조차 이미  온통 젖었는지 그는 입가에 은

은하게 청량한 미소를 내보였다. 발끝에 닿는 바다의 리듬에 맞춰서 은백의 머리카락이 하늘거렸다. 

청년은 바람을 노래하는 이였다. 그의 노래는 바람처럼 세일피어론다 전역으로 서서히 불었다. 엘로고라토의 전령에 

섞여 귓가를 때렸고, 별의 미궁을 따라서 메아리치다가 글로디프리아의 성안을 맴돌기도 했다. 

"노래 소리‥." 

"그가 바람을 노래하기 시작했군요. 파도의 생명이 깃든 악보를 따라서‥." 

"그래. 젠티아가 도와주었겠지. 그는 성질이 급해서 당장에 달려갔을 테니까." 

검붉은 머리카락의 소년(?)이 중얼거리자 물에서 참방대던 여인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바닷물로 머리카락을 만든 

건지 윤기가 흐르는 청은발의 머리카락을 한 번 휘젖자 묻어있던 물이 촤륵하고 흩어졌다. 

그리고는 옷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그대로 소년에게 안겼다. 

"저, 저기‥! 아릴!" 

"왜요!?" 

갸웃하고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여인의 시선에 소년의 얼굴은 단숨에  화르륵 달아올랐다. 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은 못하고 더듬거렸다. 

"아, 아냐‥." 

"후훗‥. 넬피엘, 바람을 노래하는 이가 노래를 시작했으니 춤을 추려고 그러는 거죠?" 

"으‥응!" 

키득키득 웃으며 여인은 그에게서 떨어지려다가 문득 무슨 생각이 났는지 말했다. 

"키스해주면 떨어질게요." 

"엑!?" 

안절부절한 소년의 마음을 무시한 채 여인은 냉큼 눈을 감았다. 뾰족이 내밀어진 입술이 유혹적이었다. 세상의 멸망

이 닥쳐왔는데 애정행각이나 벌이고 있다니, 젠티아가 보았다면 성음검을 휘둘러댈 모습이었다. 

쪽! 

부들부들 떨며 소년의 입술이 여인의 것에 닿자 여인은 방긋 웃으며 멀리  떨어졌다. 손까지 흔들며 격려하는 그녀

는, 인간이 모두 멸망하던 말던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아직도 홍조가 그대로 남은 소년은 한숨을  푹 내쉬고 바람을 따라서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불꽃의 

춤을 추는 이들이 4000년에 걸쳐서 기다렸던 바람의 노래였다. 

"세일피어론아드의 대기 전체에 노래가 퍼져있다. 이게 바람을 노래하는 이의 진실된 능력인가?" 

바람의 상쾌함과 한 청년의 온기가 동시에  전해져온다. 파도의 악보를 보고 대지의 고동에  맞추어 불러진 바람의 

노래가 소년의 팔을 들어올린다. 그와 때를 맞추어 손이 올라가고 손가락 사이에서 불꽃이 튀었다. 

불꽃의 춤이 시작되었다. 

소년은 전신에서 터져 버릴 듯한 빛을 거세게 내뿜고 열을 토해냈다. 반대편인 세일피어론아드의 서쪽 끝에서도 보

일 환한 불빛이었다. 

"불꽃의 춤도 시작되었군." 

젠티아는 낮인데도 불구하고 초신성처럼 밝게 빛나는 동쪽의 불을 보았다.  멀리 있어서인지 그저 반짝이는 정도였

지만 노래에 따라서 밝았다가 조금 어두워졌다가 무슨 신호를  보내는 것만 같았다. 바다나, 큰 호수에 가본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등대로군. 사람의 마음을 밝히는 등대‥." 

불꽃은 생명력의 상징과도 같다. 소년의 춤은 활기와 용기를 뜻하며 움직임의 아름다움마저도 표현했다. 일종의  기

원인 동시에 의지인 것이다. 

생명의 기원인 바다의 악보‥. 

생명의 맥박을 전하는 땅의 고동‥. 

그리고 생명을 퍼뜨리는 바람의 노래‥. 

용기와 활기를 확인하는 불꽃의 춤. 

이로써 음유술사들의 의지가 하나를 위해, 모두를 향해 울려 퍼졌다. 그들은 말하고 있었다. 

'일어나라. 그리고 노래하고 춤을 춰라.' 

노래는 강력한 마법보다도 사람의 마음 속에 깊이 닿았다. 

문득 눈물로 얼룩진 눈가가 부르르 떨리더니 한 소녀가 발딱 일어났다. 머리  속에는 아직도 악몽이 떠돌았지만 귓

가에 흘려든 노랫소리는 가슴까지 따스하게 감싸주었다. 고개를 돌려서 주위를 둘러보던 아이는 창밖을 보았다. 

"와아‥!" 

멀리, 아주 멀리서 불꽃놀이를 하는 모양이었다. 춤을 추듯이 타오르는 불꽃은 아주 큰 모닥불처럼도 보였다. 

불꽃은 소멸의 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아름다운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불꽃은 소녀의 마음을 누르고 있던 

악몽마저도 소멸시킬 수 있었다. 

넋을 잃고 불꽃을 바라보던 소녀는 바람에 섞인 노래를 흥얼대기 시작했다. 가만히  그녀의 어깨에 크고 따스한 손

이 올려졌다. 

"아빠‥."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저걸 봐요, 아빠. 아주 큰 불꽃놀이를 하나봐." 

"그렇구나. 아주 예쁜 걸‥!" 

하나둘 일어난 사람들이 악몽을 잊고 불꽃을 바라보았다. 조금씩 바람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여

기저기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춤을 추는 이들도 생겼다. 

대륙에서 노래를 계속 커져갔다. 모두의 목소리가 하나가 되었을 때는 마치 세일피어론아드가 노래를 부르는 것 같

았다. 대지도, 바다도, 바람도, 심지어는 작은 새들과, 생명이 타오르는 모든 것들도. 

어느 덧, 노래가 끝나고 동쪽 저 편에서 타오르던 불꽃도 사그라질 때, 차분한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알고 있습니까? 

의지가 바로 마법이라는 것을? 

힘들게 외워서 주절대는 주문도 

사실은 그대의 강한 의지를 표현하기 위한 것임을‥. 

그대는 아십니까? 

세상에서 마법에 가장 유리한 종족은‥ 

엘프도, 드워프도, 드래곤도 아닌 

바로 인간이라는 것을‥. 

가장 감정에 풍부하고 희노애락에 자유로운 

바로 우리의 의지야말로 

세계를 바꿀 신비한 마법이 되는 것입니다. 

노래하십시오. 

그대의 의지와 신념에 숲이 울고 바다가 춤을 추도록‥. 

세상은 당신을 중심으로 마법을 구현할 것입니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알 수 있었다. 마법은 이미 구현되었음을‥. 

                                     50악장 아직은 남은 이야기

제플론의 별장이라고 불리는 세이탄, 작지만 풍요로운 마을을 감싸고 있는 숲에 숨어있는 아름다운 저택 앞에는 많

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검사, 학자, 마법사, 마녀 등 다양한 모습들이었다. 

"시즈‥. 꼭 가야 하나요?" 

아릴이 한숨을 쉬며 물었다. 서글픈 빛이 떠오른 사람은 그녀뿐이 아니었다. 모두가 아쉽고 슬픈 빛이 가득하여 울

음이라도 터트릴 것 같았다. 

떠나는 이는 조용히 말했다. 

"바람이 말하고 있어요. 이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고‥." 

"그런 말 따위는 듣지 말라고!" 

보를레스가 투덜대며 소리쳤다. 엘시크를 뜻하는 빛의 문양이 그려진 망토, 그는 근위 기사가 된 후에도  험한 입버

릇을 고치지 못했다. 그러나 시즈의 고집을 알고 있는 젠티아는 어깨를 짚어주며 격려했다. 

"잘 가라. 널 잊지 못할 거다. 시즈." 

"젠장! 이렇게 떠나다니 정말 끝까지 마땅찮은 녀석이로군." 

술을 하도 마셔서 얼굴이 시뻘게진 토루반이 분통이 터진다는 듯 술병을 내던졌다. 

"저런저런! 비싼 술을‥." 

끝까지 돈을 밝히는 토플레. 파마리나가 그의 복부에 강렬한 일격을 선사했다. 블리세미크한테 틈틈이 배웠던  무투

술인 만큼 토플레의 안색을 달리하게 할 충격이었다. 벌렁 엎어진 그를 발로  꾹꾹 밟으며 파마리나는 아리에를 위

로했다. 

"잡아야 하지 않아?" 

"‥아뇨. 괜찮아요." 

"하지만‥." 

"걱정 말라고! 저런 녀석 따위는 하룻밤만에 잊게 해줄 테니까!" 

페스튼은 소리 높여 외쳤다가 여인들에게 둘러싸여 몰매를 맞았다. 어설프게  미소를 짓고 있는 아리에를 레스난은 

꼭 안아주었다. 

"자네의 노래를 들을 수 없다니 슬프군." 

노리스가 하나밖에 없는 손으로 악수를 청했다. 검술은 더 이상 펼칠 수  없었지만 츠바틴은 노리스가 지닌 검술의 

경험과 이론을 책으로 펼쳐냈다. 이제는 기사가 된 광풍의 검사마저  정식으로 스승으로 섬기는 노리스의 검술서는 

젊은 기사와 용병들에게 제일의 지침서로 정평이 난 상태였다. 

"그나저나 돌아올 수 있는 건가?" 

"분위기에 맞지 않는 말 좀 하지마!" 

"궁금하잖아!" 

물론 절친한 친구이자 앙숙인 츠바틴과 어린애같은 다툼을 벌이는 것은 여전했다. 시즈는 양손으로 그들의 손을 꼭 

잡은 후 한 차례 힘찬 포옹을 했다. 

넬피엘은 아무 말 없이 시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시즈와 그의 인사는 

그게 끝이었다. 오늘이 오기 전날 밤, 미헬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한 마디를 덧붙였다. 

"입으로만 노래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음유술사란 사실 조금 의지가 강한 자들일 뿐이지요. 꿈을  꾸며 살아

가는 이들은 모두, 음유술사입니다. 그러니까 당신도 노래를 하고 있어요. 시간과 더불어 말이죠." 

블리세미트는 끝내 붉은 뱀의 사원을 다시 재건했다. 소레인 교단에 정식 계승자로  인정을 받고 지원금을 타낸 것

이다. 교단 내의 암수를 견뎌내는데는 남몰래 파마리나의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녀의 꽁수는 소레인  교단

의 늙은이들도 감히 예측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확실한 문제는 남아있었는데 사막에서의 지겨운 고행을 할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젠티아는 요즘 마크랜서 자작과 보를레스를 피해  도망치기 일쑤였다. 남작에서 후작이 한 단계  작위가 상승한 후 

더욱 쌓인 일을 팽기치고 데린과 놀러  다녔으니 마크랜서 자작의 추격을 받는 것이야  당연했다. 보를레스가 그를 

쫓는 이유는 대련을 위해서였다. 

시도 때도 없이 대련을 하자고 졸라대니 젠티아로서는 견디지 못하고 그의 그림자만 보이면 줄행랑을 치는 것이다. 

어쩌면 시즈가 떠난 후에 바로 대련을 신청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젠티아는 짐을 풀지도 않고 있었다. 

"시간이 됐어요." 

달의 상태를 살펴보던 유레민트가 말했다. 그녀와 피브드닌은  달이 대륙에 가장 가까워졌을 때, 세일피어론아드의 

의지가 가장 활성화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 시간은 바로 밤 12시. 신데랄라의 마법이 풀리는 시간이었다. 

"준비를 합시다." 

흔들리는 눈동자들이 시즈를 주시했다. 머리를 긁적이며 시즈는 말했다. 

"그 동안 즐거웠습니다." 

"난 별로 안 즐거웠어. 힘들기만 했다고." 

"다시 돌아오려면 늙기 전에 오라고. 아리에가 꼬부랑 할머니가 되기 전에!" 

수많은 인사에 감정이 교차했다. 시즈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기억에 두려는 듯 아주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의 표정, 옷차림, 돌아갔을 때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라며 그는 눈을 감았다. 

동시에 아리에도 눈을 감았다. 

넬피엘, 젠티아, 아릴의 몸에서 의지의 빛이 시즈를 감쌌다. 그리고 원래부터 아무 것도 없었던 것처럼‥. 그들의 중

심에는 부드러운 바람이 한 줄기 남아있을 뿐이었다. 

‥ 

"하아‥." 

보를레스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터뜨렸다. 영원히 잃고 싶지 않았던 친구는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모였던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모두들 바람의 향기를 그리워하면서 말이다. 

"흐윽! 흑!" 

아리에는 열심히 눈물을 훔쳤다. 

'지금까지 잘 참았다가 이제 와서 왜 이런담!? 바보같이‥.' 

마음을 다시 잡으려고 해도 서럽다는 생각이 밀쳐 올라왔다. 여인들이  그녀를 감싸고 위로했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투명한 빛깔의 시선만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눈물에 담아버린 별의 외로움 

몰랐던 슬픔을 알았답니다. 

코 끝에 맴돌던 향기는 없어지고 

시리게 매몰찬 바람이 남아있네요. 

덧없는 그리움은 필요 없어요. 

의미 없이 잊혀지긴 싫으니까요. 

홀로 견딜 수 없는 기억의 순간을 돌려주세요. 

하염없이 달을 바라보다 달을 닮아버린 

그 시선으로 돌아봐 줘요. 

아무리 작게 속삭여도 

귓속에 메아리치는 곳에 있어주세요. 

내밀면 손에 잡혀 안으면 안길 수 있게 

돌아와 주세요. 사랑하는 이여‥. 

애처로운 목소리에 보를레스는 억지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 노래를 불러. 그러면 나아지겠지.' 

코끝이 아릿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러다가는 남자체면에 눈물을 보일지도 모른다.  훌쩍. 콧물을 들이키고 슬

쩍 소매에 눈가를 비볐을 때, 그는 눈알을 뽑아서 물에 헹굴 생각을 할 정도로 눈을 의심했다. 턱이 빠질 것처럼 입

을 쫘악 벌리며 그는 소리쳤다. 

"시즈!" 

아리에는 눈을 번쩍 떴다. 뚝뚝 흐르던 눈물이 거짓말처럼 멈춰버렸다. 그녀는  벌떡 일어났다. 눈앞에는 사라질 때

의 모습 그대로의 시즈가 서있었다. 조금  달라진 거라고는 사라질 때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지금은 볼을 긁적이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리에가 불렀군요. 그 노래‥. 들렸습니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깨달은 젠티아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하핫! 그렇군. 그런 거야!" 

"대체 뭐가 그렇다는 거에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데린이 물었다. 젠티아의 설명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번쩍거리는 안광에 젠

티아는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앞을 가리고 말했다. 여전히 입가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음유술사들의 의지, 세일피어론아드의 의지보다‥. 한 여인의 사랑하는 마음이 더 크고 깊다는 뜻이겠지." 

"그 말은‥." 

"아리에게 미움이라도 받지 않는 이상 시즈는 세일피어론아드를 떠날 수 없다는 거다! 우하하하핫!" 

통쾌하다는 듯 젠티아는 웃어 재꼈다. 사실 그로서도 아름다운 여인이 슬퍼하는 일을  감행한다는 게 기분 좋지 않

았다. 시즈가 보내기 싫을만큼 마음에 들었던 것도 사실이고. 

시즈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말했다. 

"그럼 전, 세일피어론아드의 포로가 된 건가요?" 

"바보 녀석! 사랑의 포로는 좋은 거야." 

"그럼 젠티아도 포로인가요?" 

"그럴 리가! 내가 포로일 리가 있나!?" 

그 말을 끝으로 젠티아는 데린에게 끌려갔다. 수풀 속에서 구타음이 들려오는 걸 가리키며 파마리나는 피식 웃었다. 

"저 인간은 노예야. 본받지는 말아." 

초상집같던 분위기는 갑자기 축제처럼 변해버렸다. 사람들은 웃고 떠들었고 마을에서는 술과 음식을 무작정 가져와

서 제공했다. 부자인 집주인이 떠나지 않았으니 값을 제공해줄 거라는 소리에 시즈는 이마를 감싸쥐었다. 

"그나저나 시즈, 고향에 돌아간 기분은 어땠어?" 

"가다가 돌아왔습니다만‥." 

계획이 중단되었지만 사람들은 기뻐하기만 했다. 슬퍼하는 사람이 한 명 있었는데 그는 바로 페스튼이었다.  아쉬움

에 세이탄의 다른 여자들에게 수작을 부리고 있었다. 

토루반은 술을 퍼붓는 이유가 달라졌다. 

"우하하하핫! 어떤가? 시즈. 오늘 달빛은?" 

"환영하는 것 같군요." 

밤이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저택 앞은 밝았다. 시즈의 말처럼 달이 환영의 빛을 뿌려준 덕일 지도 모른다. 

그들은 모두 함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다가 힘차게 술잔을 부딪혔다. 

"다시 돌아온 그대를 위해‥." 

                                           <에필로그>

"그렇게 얘기는 끝을 맺는단다." 

"그럴 듯한 얘기로군요." 

"그렇지?" 

창 밖을 바라보며 무심한 듯 소년은 말했다. 하지만 은근히 동공 안쪽에는 기대가 숨쉬고 있었다. 

"그러니까 일어나서 걸어보렴." 

"안 될 거에요." 

"노력해보렴." 

"선생님은 몰라요! 제 심정이 어떤지!" 

소년은 화를 내고 소리쳤다. 하루라도 휠체어에서 벗어나기를 바래보지 않은 적이 없었다. 병원 밖으로 나다니고 싶

다는 소원은 모두 휠체어에 앉아서였다. 자신의 발이 땅에 닿기보다는 바퀴가 굴렀다. 

"어서 나가요! 꼴 보기도 싫다고요!" 

"그래그래. 미안하구나." 

소년이 진정하지 못하고 난리를 치자 용기를 주려다가 실패한 사내는  당황하여 일어섰다. 담당 간호사에게 인사를 

하고 방문을 나선 그는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특이하게도 사내의 머리카락은 눈부신 은빛을 띄고  있었다. 요즘 젊은이들도 머릿결이 상한다고  주저하는 탈색을 

30대의 장년 사내가 돈을 들여 했을 리는 없을 것이다. 덕분에 흰 가운을  입고 있으면서도 다른 이들과는 달리 보

였다. 다른 세계의 사람 같달까? 그가 얘기하는 환상  속의 이야기는 정말로 일어난 것 같고 일어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사내가 나간 방문을 힐끔 바라본 소년은 입을 삐죽거리며 창 밖으로 눈을 돌렸다. 손을 잡고 걷는 연인들,  뛰어 노

는 아이들. 뒤룩뒤룩 눈을 굴려보던 소년의 귀여운 입술이 벌어졌다. 

‥‥. 

밖에서 문에 귀를 대고 있던 의사는 무슨  일인지 히죽 웃으며 돌아섰다. 그러자 뒤에서 궁금한  듯 그를 째려보는 

수많은 간호사와 의사가 보였다. 

"아하하핫!" 

이마의 땀을 닦으며 복도로 사라지는 사내가 다음 날 다시 병실을 찾아갔을 때, 소년은 물었다. 홍조마저 띄고 있는 

게 꽤나 용기를 낸 모습이었다. 

"노래를 가르쳐주세요." 

"그래‥. 그래. 가르쳐주지. 가르쳐주고 말고‥." 

너털웃음을 짓고 있는 그에게 소년은 궁금한 게 생겼는지 다시 물었다. 

"저기 궁금한 게 있는데요‥." 

"그래, 뭐지?" 

"이야기 속에서 시즈는 현실에서 갔다고 했잖아요?" 

"그렇단다." 

"지금 이 곳에 살고 있나요?" 

"물론이란다. 있고 말고." 

"누구인지 알려줄 수 있나요?" 

"왜? 만나고 싶니?" 

"네." 

"그렇다면 말해주마‥. 후후‥. 시즈는 말이다. 바로‥" 

‥당신입니다‥. 

                                     외전 세일피어론아드 신화.

내 이름은 가어르드. 신들 사이에서 가장 지혜롭다고 알려져 있다. 얼마 전에 만든 세계에 '세일피어론아드'라는 이

름을 붙인 것도 이 몸이시지. 고작 2천억 년 정도의 찰나같은  시간이지만 그래도 머리카락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그 동안 가지고 논 게 꽤 정이 들었다. 참고로 위의 머리카락에 대한 이야기는 분명히 틀린 말은 아니다. 대부분의 

신들은 분위기 상의 문제를 들먹거리며 머리를 기르고 있어 인연도 만들기 쉽다. 그래서인지 발스크를 제외한 신들

은 서로에 대해 친목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왜 발스크만 따돌렸냐고? 

‥ 그는 대머리다.

처음 세일피어론아드를 만들기 전, 신족들이 가지고 놀만한 장난감은 거대한 카오스, 혼돈 덩어리였다. 처음도 끝도 

없고 뭐라고 정의내릴 수도 없는 존재를 지켜보는 게 신들의 일과였다. 아마도 수 천억년은 지켜봤을 것이다. 그러

자 지루해졌다. 

결국 참을성이 없는 알르난이 짜증을 참지 못하고 혼돈 덩어리를 한웅큼씩 뜯어내 이리저리 내던졌다. 자칭 순수함

의 화신이라고 우겨대는 녀석이었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저 끔찍스런 결백증  환자인 알르난이다. 녀석이 땡강을 부

리기 시작하자 세상이 온통 시끄러운 것은 당연했다. 신들은 귀찮기만 한 어린애를 따돌리고 있던 발스크를 협박하

여 돌보도록 시켰다. 알르난은 심각한 결백증 때문인지 발스크의 깨끗한 대머리를 흠모하기 시작했다. 털이  하나라

도 보이면 뽑아댔는데 그렇잖아도 수 억년에 한 가닥이 날락말락하는 발스크로서는 정신적으로 대단히 고통스러운 

고문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그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몇 십억년 만에 소리를 질렀다. 그것도 째질 듯한 비명으로 

말이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내 오리하르콘 같은 머리카락!"

"헤헤헤. 발스크, 이제 깨끗해졌어."

"내 머리카락‥ 흑흑흑‥."

얼마나 원통했는지 발스크는 보기만에도 슬퍼질  정도로 흐느끼며 울어댔는데 그 눈물에는  발스크 특유의 기운인, 

파멸의 힘이 녹아 있었다. 하지만 알르난은 발스크가 운다고 봐줄 신인가?  그가 쫓아다니자 발스크가 도망가며 흘

린 눈물이 알르난이 뜯어놓은 혼돈 덩어리에  떨어졌고 그 안에 포함된 파멸의 기운은  혼돈을 깨끗하게 씻어냈다. 

혼돈을 지워버리고 순수하게 된 덩어리는 다들 신기해했다. 이게 바로 후의 세일피어론아드다. 신들은 카오스를  거

들떠보지도 않고 세일피어론아드 앞에 앉아서 구경만 했다.

그렇게 또 수천억년이 지났다. 

신들은 다시 혼돈으로 관심을 바꿨지만 단 한  명의 신은 달랐다. 그는 후에 대지의 신이라고  불리게 될 녀석으로 

이름은 지아스였는데 언젠가 순수하기만 세일피어론아드가 뭔가 변화를 보일 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렇게 또 수천억년이 지났다. 

아무리 참을성이 좋은 지아스였지만 더 이상 짜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화가 난 그는 세일피어론아드를 힘껏 

걷어찼는데 그 충격으로 세일피어론아드에 구멍이 뚫려버렸다.  뒤늦은 변화였으나 지아스를 달래기에는 모자랐다. 

이 난폭한 신은 떡 두들기듯이 세일피어론아드를 밟아놓고 혼돈을 보러 가버렸다.

그러나 세일피어론아드는 그가 가버린 후에도 변화를 계속했다. 여기저기 뚫린  구멍으로 채액을 쏟기 시작한 것이

다. 뜨겁고도 끈끈한 붉은 액체는 세일피어론아드의 표면을  모두 덮어버렸고 천천히 굳어갔다. 지아스의 여동생인 

여신 지아는 세일피어론아드보다는 지아스의 행동- 세일피어론아드를 차고 놀던 -이 흥미로웠다. 그녀는 뜨거운 세

일피어론아드를 식힌 후에 오라비가 하던 것처럼  힘껏 걷어찼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딱딱했다. 끈끈했던 붉은 

액체가 굳으면서 엄청난 경도를 자랑했던 것이다. 아픔을 참지 못한 지아는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울어댔

다. 그녀는 그 와중에도 세일피어론아드를 다른 누구에게 뺏기기 싫은지 꼭 끌어안고 흐느꼈는데 그 눈물이 세일피

어론아드의 골짜기 사이를 모두 채우고도 남았다. 이제 알았으리라 생각한다. 

이 울보가 바로 바다의 여신이다. 덕분에 바다는 짜다.

세일피어론아드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것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신의 행위  때문이었다. 그는 테쿠르 라는 이

름의 신이었는데 어찌나 목욕을 안 하는지 반경 수 천킬로 미터에만 가도 코를 막아야 할 지경이었다. 테쿠르는 어

느 날 온 몸을 깨끗하게 만들어보겠다는 가능성이 전무한  결심을 하게 되는데 어떤 도구로 밀어봐도 때가 밀리지 

않았다. 그는 최후의 방법으로 세일피어론아드를 사용했는데 세일피어론아드는 축축한 물기가 있으면서도 딱딱하고 

울퉁불퉁하여 때를 밀기에 최적의 도구였다. 나무 껍질 벗기듯 떨어져  나가는 때들이 어찌나 공포스러웠는지 신들

은 혼돈의 덩어리 뒤에 숨어서 그의 목욕이 끝날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 

이 더러운 놈이 바로 변화와 병마의 신이다.

대부분의 때가 혼돈 속으로 흘러 들어갔지만 세일피어론아드에는 약간 남아있었다. 테쿠르의 이름답게 약간의 때는 

병균과 악성 바이러스 덩어리였다. 이 놈들이 따스한 바다에서 진화를 계속하여 플랑크톤을 비롯한 여러 가지 생명

의 기초를 만들어간다. 그리하여 테쿠르의 때들이 혼돈에서 겨우 동화되었을 쯤 신들이 나와보니 세일피어론아드는 

이미 초록빛깔의 숲과 푸른 바다를 형성하고 크고 작은 동물들이 산과 바다를 활보했다. 신기하기 그지없는 일이었

다. 우리는 또 한동안 그것을 구경하는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알르난은 자신이 만든 세일피어론아드를 혼자 독차지하고  싶다는 생각에 빠진다. 그는 세일피어

론아드를 처음 혼돈 덩어리에서 떼어낸 게 자신이기에 자기 것이라는 어이없는 주장을 해댔다. 하지만 신들은 이미 

세일피어론아드를 지켜보는데 모두 관심이 쏠린 상태라 알르난의 땡깡도 소용이 없었다. 화가 난 그는 자신의 창조

물인 엘프를 시켜서 세계의 중심에 순수의 신전을 세운다. 신전은 신이 영향력을 전할 수 있는 통로. 당시의 세일피

어론아드는 신의 힘에 대한 아무런 제약이 없었으므로 결백증 환자의 영향력은 전세계에 미친다. 진화했던 모든 생

물들이 순수했던 초기단계로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뒤늦게 신들이 그 신전을 부수려고 했지만 이미 세일피어론아드는 알르난의 영향력 안에 들어서 다른 신들의  힘이 

미치지 못했다. 우리는 모두 달려가 발스크에게 도와줄 것을 부탁한다. 발스크의 의지인 파멸은 단일 의지로서는 신

들이 태어난 혼돈에 제일 근접한 힘으로 누구보다도 강력했다. 부탁을 들어주는 대신 신들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하

나씩 뽑아주며 그를 혼자 따돌리지 않을 맹세했다.

과연 발스크는 강했다. 그는 막 이빨 사이를 쑤시고 있던 이쑤시개를 순수의 신전 한가운데 꽂아버렸다. 그러자 순

수의 힘과 파멸의 힘이 뒤엉켜 영향력을 잃어버렸고 신들은 그 틈을 타서 신전과 이쑤시개를 없애버린다. 

그 후로 따돌림을 당한 신은 알르난이었다.

- 엘프의 장.

가장 먼저 창조된 엘프는 바로 결백증 환자인 알르난이 만들어낸 존재였다. 세일피어론아드의 많은 생물을 보고 있

던 알르난은 자기의 의지가 담긴 생물을 그 가운데 놓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리. 그 호기심 때문

에 신들은 저마다의 의지가 담긴 생물을 모두 창조하게 될 줄이야‥.

어쨌든 알르난은 만드는 걸 좋아하는 녀석이었기 때문에 몇 천년의 세월을 고생한 끝에 자신의 결백증을 담은 생물

을 만들어낸다. 이리하여 후에 엘프라고 불리게 될 무척 깔끔한 척하는 존재가 태어난다. 알르난은 어린애였기에 자

신이 자랑스러운 장난감을 만들어낸 것에 대해 다들 칭찬하고 축하해주기를 바랬는데 누가 거역할 수 있겠는가. 그

는 발스크 이후에 다른 이의 머리칼을 뽑는 것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거역하면‥ 안 된다.

다들 모여서 그가 새로운 생명을 창조한 걸 축하해주었지만 그 새로운 생명에게  축복을 부여하는 이는 없었다. 알

르난의 극성 때문에 다들 기분이 좋은 상태로 온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단 놀기 좋아하는 '셀오리아'는 엘프의 순

수함을 노래하여 알르난에게 아부를 떤다. 기분이 좋아진 알르난은 그 날 불렀던  노래의 악보에 자신의 힘을 부여

하고 엘프에게 전해준다. 이것이 바로 '성스러운 악보' 중의 하나 '순수한 악장'이다.  이 날, 셀오리아가 악보를 찾

지 않은 것은 단순히 게을러서였다. 이 빈둥대기 좋아하는 여자는 노는 일이 아니면 절대로 나서지 않는 일명, 놀보

였다.

그녀가 바로 후일 '유혹과 유흥의 여신'이라고 불리게 된다. 정말 이름은 잘 지었다.

- 드워프와 드래곤의 장.

늘씬늘씬하고 이쁘장하게 생긴 엘프는 신들의 관심을 독차지했으나 단 한  명의 신만은 제외였다. 바로 세일피어론

아드를 마구 걷어찬 대지의 신 '지아스'였다. 그는  알르난과는 다르게 정교한 작업을 좋아하여 예술품이나 기구를 

많이 만들었는데 예술품을 보는 눈과 인간들을 보는 눈은 정반대다. 그 때라고 다를 게 있나?

다들 엘프가 귀엽다고 난리였지만 지아스는 혼자 불만스러웠다. 그 당시 그의 말을 들어보자면‥.

"저게 어디가 아름답다는 거지? 팔과 다리는 유약하기 짝이 없고 가는 척주는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도 절대로 효

율적일 것 같지 않아. 뼈가 통뼈인가하면 그것도 아니고, 근육이 많은가하면  그것도 아니야. 그런데 몸까지 길어서 

앉았다 일어섰다하는 동선도 길쭉길쭉하니 그야말로 생기기는 더럽게 못생긴 게 아닌가!"

그리하여 그는 자신만의 관점에서 신체적으로 효율적이고 아름다운 생물을 만들어낸다. 그게 바로 드워프다. 엘프의 

절반도 안 오는 키에 우룩부룩한 근육, 두꺼운 허리! 그야말로 지아스의 이상형이었지만 다른 신들에게는 별 감흥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드워프들에게는 특별한 능력가 있었는데 창조를 닮아서인지  아름답고 정교한 물건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지아스는 자기가 만든 물건은 절대로 남에게 주지 않는 고약한  심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신들은 드

워프들이 건네준 뇌물에 홀짝 넘어간다. 결국 드워프는 세일피어론아드가 생긴 이래 유례없이 모든 신의 축복을 받

는다. 하지만 아무래도 만든 녀석의 기운이 워낙에 많이 남아있어서인지 원래의 성향에서 별로 변한 게 없다.

그 후로 자극을 받은 신들은 저마다의 의지를 담은 생물을 만들어간다. 그러나  부지런한 놈들 가운데는 게으른 놈

도 존재하는 법. 귀찮은 일을 하기보다는 공짜로 성과를 올리기를 원하는 신도 존재했다.

당연히 대머리 발스크였다.

힘으로 셀오리아를 협박한 발스크는 '멸망의 서곡'이라는 악보를 얻어내고 그 안에 자신의 의지를 심어 세일피어론

아드로 흘려보낸다. 그는 못생기기는 했지만 자신의 강한 의지를 품기에  드워프가 제격이라고 여겼기에 악보는 그

대로 드워프에게 발견되었다. 그러나 드워프들은 보석을 파는데 정신이 팔려  악보를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멀리 내

던져버린다. 

그 다음 '멸망의 서곡'을 존재는 우습게도 도마뱀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일곱 가지의  선명한 색깔을 가진 도마뱀들

은 뱀만큼이나 교활한 존재였다. 그들은 악보에 적힌 데로 '멸망의 서곡'을 노래하며 춤을 추기 시작했는데 춤이 끝

날 때쯤 되자 그들의 발걸음에 땅이 흔들렸고 숨에 불꽃이 새어나왔다. 머리  속에는 엘프들이 꿈에 그리며 연구하

던 마법의 절대경지가 심어졌고 비늘은 독수리의 부리로 수백만번을 찍혀도 흠짓 하나 나지 않을 정도로  단단해졌

다.

이들이 바로 드래곤이다. 한데 문제가 있었다. 7마리의 드래곤 중에 2 마리만이 암컷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4마리

가 행복한 가정을 꾸릴 때 남은 세 드래곤은 3000년에 가까운 세월을 눈물을 머금고 고독 속에 보내야 했다.

- 인간의 장

인간은 누가 만들었다고 하기가 곤란한 존재다. 많은 신들이 엘프처럼 아름답고, 드워프처럼 유능한 창조물을  만들

기 위해 노력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얼마 전 발스크의-드워프를 자신의 창조물화 시키려던- 모략이 있

은 후로는 알르난과 지아스가 공동으로 성명서를 냈기 때문이다.

"남의 것 가지고 이상한지 하면 머리털 다 뽑는다."

여기서의 이상한 짓이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이제 최후의 방법은 능력껏 만드는 것 뿐. 알르난과 지아스, 그리고 발스크를 제외한 신들은 결국  능력을 모으기로 

결정한다. 아예 분배를 해버린 것이다.

"머리는 '태양과 까마귀의 써헤그', 팔은 '달과 토끼의 셀룬', 다리는‥ ‥‥"

그런 식으로 가장 자신 있는 부위를 맡자 각자에 대한 부담은 훨씬 줄어들었다. 그리고 모두 담당했던 부분이 만들

어지자 한 군데 모아서 짜집기를 한다. 짜집기 담당은 '물의 여신 지아'였다.  이처럼 많은 신들의 합동작업으로 만

들어진 게 바로 인간이다. 그런데 인간은 참여인원이 너무나 많았고  부분별로 나누어져 있는지라 누구의 창조물이

라고 하기가 매우 곤란했다. 

그리하여 셀오리아가 인간을 축복할 때 노래를 부르고 악보를 만들기를 곡의 이름을 '불안한 자유'라고 한다.

- 이 이야기는 레이모하의 신전에서 낮잠을 자던 중 꾸웠던 내용을 글로 옮긴 것이다. 한 치의 거짓도 없는 내용이

다. 날 믿어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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