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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마음도 통역이 되나요? (7/110)

#7화. 마음도 통역이 되나요?2021.12.24.

하말린어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히자, 나를 바라보는 진의 눈빛이 달라졌다. 드디어 그의 흥미를 자극한 모양이었다.

16548659701208.jpg“실력 좀 보여 줄 수 있나?”

16548659701213.jpg“아, 뭐…… 에빠 호 무에 이도로즈 아따 아무보로 아따(인생의 절반은 쓸데없는 걱정을 하느라, 나머지 절반은 고민하고 망설이느라 탕진한다).”

하말린 격언인데, 꼭 지금 내 상황 같아서 이 말이 머릿속에 얼른 떠올랐다. 진이 처음으로 감탄과 동경의 눈빛 같은 걸 보내기에 내처 하나 더 말했다.

16548659701213.jpg“주르아르 또 이마 아고로(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하말린의 저명한 학자가 남긴 묘비명이라고 한다. 역시 나한테 하는 말 같아서. 진이 나름 자세를 가다듬는 시늉을 했다. 그래 봐야 팔다리 모양이 조금 겸손해진 정도?

16548659701208.jpg“어쩌다가?”

16548659701213.jpg“네?”

16548659701208.jpg“어쩌다가 하말린어를 하게 된 거야? 잘은 모르지만 꽤 유창한 거 같은데.”

16548659701213.jpg“그건…….”

어쩌다가는 뭘 어쩌다가겠는가. 프러너스한테 잘 보이려고, 그에게 쓸모있는 인간이 되어 보려고 하게 된 거지. 무슨 말만 하려면 전부 프러너스와 연결되니, 참으로 난감했다. 프러너스는 외국과의 무역에서도 대단한 수완을 발휘해 눈부신 성공을 거뒀다. 그쪽 방면에서 최고의 능력자로 꼽혔고, 제국 밖에서도 명성이 높았다. 황궁에서도 프러너스의 능력이나 인맥을 높이 사 외국에서 중요한 손님이 오면 꼭 그에게 접대를 부탁하곤 했다. 당연히 공작가에서도 외국 손님을 맞이할 일이 많았다. 어쨌든 공작부인이었던 나도 접대 자리에 동석할 때가 많았는데, 그때 외국어를 익혀 두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전문 통역사도 있고, 대부분의 손님이 제국어를 익혀서 왔기에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서툴게 몇 마디라도 그 나라 말로 인사를 건네면 대부분이 반가워하면서 좋아했다. 경직된 분위기도 화기애애해지고. 언젠가 프러너스가 그런 분위기를 흡족해하는 걸 보고 외국어를 제대로 익혀 봐야겠다고 결심했다. 외국어 중에서도 하말린어를 택한 것 역시 프러너스가 그 나라에 관심이 많아서였다. 한때는 자나 깨나 하말린을 외치고 다닐 정도였다. 너도나도 하말린에 열을 올리는 시기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프러너스의 마음을 얻고자 하말린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물론 처음엔 적당히 할 생각이었다. 그의 관심을 끌 만큼만. 문제는 프러너스가 제국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그즈음은 사업 핑계로 며칠씩 귀가하지 않은 적도 많았기에, 내 하말린어 실력을 뽐낼 기회를 좀처럼 얻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처음 계획과는 달리 지나치게 하말린어를 파게 됐고, 원어민 가정교사에게 제국에서 하말린어를 가장 잘하는 사람 중 하나일 거란 극찬까지 들어 버리고 말았다. 내가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진이 먼저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16548659701208.jpg“멀리 갈 필요 없이 나부터도 곧 하말린에 가야 해서 실력 있는 통역사를 찾던 참이거든.”

진이 하말린에? 저래 보여도 정보 길드에서 일하는 해결사가 맞구나. 발 빠르게 하말린에 줄을 댄 걸 보면.

16548659701213.jpg“사정이 급한가 봐요?”

16548659701208.jpg“하말린어를 한다는 사람은 적지 않은데 막상 까 보면 엉터리가 많아서. 진짜 실력자를 구하기가 힘들어. 게다가 내가 상대해야 할 사람들은 지위가 좀 높거든.”

16548659701213.jpg“그렇군요. 진의 부탁이라면 당연히 들어드려야죠. 신세 진 것도 많은데.”

16548659701208.jpg“그딴 걸로 우려먹을 생각 없어. 흥정을 해 보잔 소리야. 바라는 조건을 말해 봐. 내 쪽에서도 몇 가지 더 확인할 거야.”

바라는 조건이라. 바라는 것도 필요한 것도 그다지 없는데? 명색이 협상이니 뭐라도 제시해야 한다면…… 적정한 액수의 통역료를 받아서 연구용 오두막을 하나 들일까? 시골집 정원 한쪽에 세워 두면 좋을 텐데. 정원에 집필실이나 작업실로 쓸 오두막을 짓는 것이 최근 귀족들 사이에 유행이었다. 360도 회전해 언제나 볕이 든다는 집필 오두막은 작가로도 유명한 프리드만 백작의 자랑거리였다. 거기에 하나 더 얹자면 소소하게 진을 골탕 먹이는 거?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가소롭다는 듯이 내려다보는 진의 눈빛이 자꾸만 내 승부욕을 건드렸다. 한 번은 이겨 보고 싶은 마음?

16548659701213.jpg“뭐, 그래야 당신 마음이 편하겠다면…… 적정한 보수를 지불하되 이 열차의 객실료를 보수에서 제해 줘요. 내가 지불한 것으로 해 달란 말이죠. 또 내 해결사가 돼서 잠시 날 도와주고요.”

16548659701208.jpg“또 그 소리야?”

진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16548659701213.jpg“바라는 것이라곤 그것밖에 생각이 안 나는데 어떡해요.”

16548659701208.jpg“좋아. 정 원한다면 일단은 그렇게 알지.”

진이 석연찮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16548659701213.jpg“그럼 이제 내가 진한테 얹혀 가는 게 아니고 진이 나한테 얹혀 가는 거죠?”

16548659701208.jpg“…….”

돌연 의기양양하게 살아난 내 목소리에 불길함을 느낀 진이 미간을 구겼다.

16548659701213.jpg“진, 뭐 하고 있어요? 얼른 일어나서 저쪽 침대로 가지 않고?”

구겨진 그의 미간 골이 더욱 깊어졌다.

16548659701213.jpg“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그쪽 침대를 써야겠어요. 처음부터 거기가 마음에 들었거든요.”

나는 진에게 비키라고 턱짓을 했다.

16548659701208.jpg“하…….”

그는 마지못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느릿느릿 반대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얼마 전까지 내가 의기소침하게 몸을 말고 앉아 있던 침대에 털썩 내려앉은 그는 팔짱을 끼고 나를 쳐다보았다.

16548659701208.jpg“보기보다 집요하군. 일할 때도 그런 자세로 하면 성공하겠어.”

16548659701213.jpg“아니요. 그렇게 살았더니 머리칼은 푸석해지고 주름만 늘고, 결말이 그리 좋지 못하더라고요. 난 그저 탐나는 거라곤 이 침대밖에 없어서.”

진이 더 따지려다 말고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그 모습을 보며 드디어 진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다는 기쁨을 만끽하던 나는, 문득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다. 진과 함께 일하면 조용히 살겠다는 내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 거 아닌가? 하지만 나는 새로 정한 지침대로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시골집에 틀어박혀 고요하게 살 날은 새털같이 많으니까. 침대도 손에 넣은 마당에 무를 수는 없잖아.

16548659701208.jpg“자, 조건은 대충 얘기가 됐으니 당신 실력을 좀 더 점검해 볼까?”

16548659701213.jpg“그러죠. 그런데 어떻게 확인할 거예요? 당신은 하말린어를 모르는데.”

16548659701208.jpg“어차피 언어라는 것도 소통을 위한 수단 아닌가. 당신 눈빛이나 당신한테서 느껴지는 분위기로 알 수 있어.”

16548659701213.jpg“그게 말이 돼요? 의외로 주먹구구식이네요.”

16548659701208.jpg“왜 말이 안 돼? 아무리 생소한 언어로 욕을 해 봐. 욕인 줄 당장 알지.”

16548659701213.jpg“세상에, 그거랑 같아요?”

물론 진이 보기보다 예리하고 눈치가 좋다는 건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사업의 성패가 달린 문제인데. 저렇게 감으로 대충 때우려 하다니, 그간 사업깨나 말아 먹었을 것 같은데?

16548659701208.jpg“사람 사이의 소통에서 가장 중요한 건 마음이지. 생각해 봐. 우리가 제국어로 유창하게 대화를 나눈다고 상대의 의도나 속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다 자신하나?”

자신할 수 없다. 사람의 말만큼 어렵고 복잡하고 거짓된 것이 없음을 지난 열여섯 번의 삶 동안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마음으로 소통한다니. 보기보다 순진한 그를 놀려 주고 싶은 짓궂은 마음이 동했다.

16548659701208.jpg“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하말린어로 바꿔서 말해 봐.”

나는 고개를 끄덕여 준비가 됐음을 표시했다.

16548659701208.jpg“나는 대 제국 로센보르의 정보업자 진이오.”

16548659701213.jpg“메르 암 쿠 마보 로센보르 헤 미아미아 토보소 진(나는 대 제국 로센보르의 껄렁껄렁한 해결사 진이라고 해).”

16548659701208.jpg“제국의 귀족 출신으로 가문의 성이 있지만 직업상 자세히 밝힐 수 없는 점 양해를 구하오.”

16548659701213.jpg“쿠 마보 헤 호밀리아 메크……(이래 봬도 귀족이지만 아무도 안 믿지. 당신들도 안 믿긴다고? 그거 참 미안하게 됐수다. 그래도 미남이니까 용서해 주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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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이따위 장난을 치면서도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명배우 뺨치는 연기력을 선보였다. 왜 이런 짓을 벌였는지, 시작하자마자 후회가 됐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진은 매우 집중한 듯 내 영혼까지 꿰뚫을 기세로 내 눈을 깊숙이 들여다보았다. 아까 말한 마음이나 분위기 같은 걸 읽으려는 걸까. 나도 겁 없이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나른하고 표정 없는 잿빛 눈동자라고만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청보라 색이 살짝 감돌았다.

16548659701213.jpg“어떤 것 같아요? 내 하말린어 실력이?”

16548659701208.jpg“뭐, 괜찮은 것 같군.”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순순히 인정하는 모습을 보니 갑자기 죄책감이 몰려왔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어린애 같은 짓을 했는지. 그동안 날 놀린 대가라고 생각해요, 진. 하지만 지금부터 장난은 그만 치고 진지하게 임해야겠어.

16548659701213.jpg“더 없어요? 방금 건 기본적인 소개였고, 구체적인 업무와 관련된 것도 얘기해 보세요.”

16548659701208.jpg“그러지.”

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몇 가지를 잇달아 말했다.

16548659701208.jpg“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처리했소.”

16548659701213.jpg“……?”

16548659701208.jpg“묻어 버리는 방법과 태워 버리는 방법, 아니면 약물로 녹여 버리는 방법이 있소.”

16548659701213.jpg“……?”

16548659701208.jpg“여기 하나 썰고, 저기 하나 썰고, 피가 좀 비치는 게 나은가?”

16548659701213.jpg“……잠깐만요, 대체 무슨 일을 하는 거예요? 하말린까지 가서 뭘 하는 거냐고요.”

16548659701208.jpg“왜? 난 불법은 안 해.”

16548659701213.jpg“영 수상하잖아요!”

16548659701208.jpg“방금 한 말, 당신 실력으로는 통역하기 힘든가?”

16548659701213.jpg“그런 게 아니라, 무슨 일을 하기에 그런 험한 말이 필요한지 궁금하다는 거죠.”

물론 해결사들이 저런 류의 험한 일도 한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나 역시 지난 삶에서 암살자를 고용한 적이 있으니까. 하지만 나와 딱히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닌 사람들을 해치는 일에 직접 가담하게 되는 건 꺼려졌다. 더욱이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이때에!

16548659701208.jpg“흠…….”

진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 자신의 턱을 매만졌다.

16548659701208.jpg“뭘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다지 심각한 일은 아니야. 껄렁껄렁한 해결사가 할 법한 그런 사소한 일이지.”

16548659701213.jpg“그러니까 그게 뭔데요. 껄렁껄렁한 해결사가 할 법한…… 으음?”

16548659701208.jpg“나도 궁금한 게 있는데, 내가 그렇게 미남인가?”

16548659701213.jpg“……!”

그가 사악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아마 내 얼굴은 붉게 달아오르다 못해 터지기 일보 직전일 터였다.

16548659701213.jpg“당신, 하말린어를 할 줄 알았던 거예요?”

진은 대답 대신 유창한 하말린어를 좔좔좔 쏟아냈다. 그의 하말린어 실력은 나 못지않게 훌륭했다. 나는 너무 부끄러워서 눈물을 글썽이며 되레 큰소리로 따졌다.

16548659701213.jpg“사람 갖고 논 거예요? 그렇게 잘하면서 왜 못하는 척한 거예요?”

16548659701208.jpg“대외적으로 모르는 걸로 해야 하니까.”

16548659701213.jpg“그건 왜요?”

16548659701208.jpg“그래야 내가 하는 일에 유리하니까?”

순진한 건 그가 아니라 나였다.

16548659701208.jpg“레이디 앰브로시아.”

진의 목소리가 왠지 근엄하게 들렸다.

16548659701213.jpg“네?”

나는 엄한 선생님 앞의 학생처럼 고개가 절로 꺾였다.

16548659701208.jpg“정보 길드에서 일하려면 첫째도 둘째도 말조심이지. 벽에도 귀가 있다는 말을 명심하면 장수하는 데 도움이 될 거야.”

16548659701213.jpg“네…….”

16548659701208.jpg“하말린어 실력은 훌륭하더군. 이것으로 계약은 체결됐어.”

진이 께름칙하게 웃었다.

16548659701213.jpg‘알란프제 이미 모호르(경거망동의 끝은 후회)…….’

속으로 혼자 하말린어 금언을 중얼거려 보는 수밖에. * * * 하말린어 통역 계약이 체결된 후, 객실엔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진은 바뀐 침대에 금세 적응해, 흑발을 산발한 채 방만하게 늘어져 있었다. 만사 귀찮다는 듯한 얼굴로 침대와 하나가 되어 뒹굴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그쪽 침대가 더 좋아 보일 지경이었다. 나는 진을 흘끔거리며 궁금해했다.

16548659701213.jpg‘저 인간은 어째 인생 17회차인 나보다 더 세상 대하는 태도가 불량하고 무성의하네.’

그런 주제에 결정적인 순간엔 예리한 날붙이 같은 게 불쑥불쑥 튀어 나온단 말이지. 진을 이겨 보려고 아무리 꾀를 내도 번번이 그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꼴이 되니. 나야 혹독한 열여섯 번의 삶이 있었기에 이렇게 김빠진 사람이 됐다지만, 저 인간은 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저런 걸까? 진처럼 최대한 방만한 자세를 취하려고 노력하면서 나는 그런 것들을 궁금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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