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밤이면 밤마다 그 남자는2021.12.27.
정신 사나운 여자였다. 남의 객실에 무례하게 밀고 들어올 땐 언제고, 사사건건 귀족의 예절을 따지지 않나. 어떻게든 자존심을 세워 보겠다고 속이 훤히 보이는 수를 내밀지 않나. 자기가 엉성한 걸 모르는지, 지지 않으려고 바락바락 달려드는 모양새가 가소롭기도 하고 조금은 기특하기도 했다. 그녀에 관해서라면 알고 싶지 않아도 이미 지나치게 많이 알고 있었다. 최근 제국을 뒤흔든 스캔들의 주인공이니까. 그런 만큼 엮이지 않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또 공작이나 공작부인이나 어차피 똑같은 인간들일 거라 생각했다. 귀족들이란 게 그렇지 않은가. 빤한 속셈을 가지고 비슷비슷한 인간끼리 만나 지지고 볶는 거겠지. 그런데 이 여자가 자꾸만 이상한 행동을 해서 사람 신경 쓰이게 만들었다. 아무래도 남편이란 작자가, 그것도 첫사랑과 그랬던 일로 충격이 컸겠지. 체구는 자그마한 여자가 자존심은 또 어찌나 고래힘줄 같은지. 곧 죽어도 독립을 하겠다나. 독립이라니. 험한 일 한번 안 해 봤을 얼굴로 박박 우겨대니 우습지도 않았다. 그나저나 이 빌어먹을 남편 놈은 또 어쩐다? 본부에서 온 의뢰 메시지를 보고 욕이 절로 나왔다. 정보 길드에 제 아내의 뒷조사를 의뢰하다니. 그것도 제국이 다 아는 유명한 똥을 싸질러 놓고. 대체 무슨 심보인가. 나보다 더 뻔뻔한 놈이었다. 제국의 신사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제국의 양아치구먼. 성질 같아서는 싹 다 엎어 버리고 싶지만, 부부싸움에 멋모르고 끼어들었다 곤란해지는 수가 있다. 그렇다고 공작의 멍청한 의뢰를 들어 줄 마음은 없어 가출한 귀부인에게 에둘러 설명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당신 남편 마음이 변한 거 같다고. 내가 보기에 그녀의 눈에도 미련이 가득했다. 본인은 곧 죽어도 아니라고, 자신은 더 이상 남편의 마음 따위 관심 없다고 고집을 부리지만 사람이, 마음이 그렇게 쉽게 변할 리가. 시간을 두고 가만히 살펴보니 프러너스 같은 놈에겐 좀 아까운 여자이긴 했다. 보여 주는 언행마다 저렇게 기상천외하고 재미난데, 그 공작 놈은 유머 감각이라곤 약에 쓰려도 없는 냉동 생선 아닌가. 게다가 웬일로 그녀의 하말린어 실력이 보기 드물게 수준급이었다. 거기다 깜찍하게도 장난을 치는 배짱까지. 정말로 혼자서도 잘살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속는 셈 치고 한번 믿어 봐? 그녀 마음속에 남은 한 뼘의 미련이 나중에 얼마나 큰 폭풍으로 되돌아와 일을 그르칠지 여전히 확신할 순 없지만. 간만에 재미있으니까 일단 믿어 보기로 한다. * * *
‘그래도 침대는 건졌어.’
이제는 이 침대만이 내 마지막 남은 자존심인 것 같았다. 진이 차지하고 있던 침대라는 것 외엔 아무 특별할 것도 없는 침대인데 말이다. 물론 진이 하말린어를 모르는 줄 알고 장난을 친 건 스스로 무덤을 판 격이었다. 가소롭다는 듯 나를 응시하던 그 잿빛 눈동자를 잊을 수가 없다.
「사람을 골탕 먹일 줄도 알고. 생각보다 장래가 촉망되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똑똑히 보았다. 웃고 있는 진의 입꼬리가 비뚤어져 있는 걸. 덜컹덜컹 열차 달리는 소리만이 두 개의 침대 사이를 규칙적으로 오가던 그때. 침묵을 깨고 진이 입을 열었다.
“시간이 꽤 늦었으니 이만 잘까. 슬슬 선반으로 올라가지.”
“선반이라뇨?”
“알잖아. 진짜 잠은 짐 선반에서 자야 하는 거.”
뭘 새삼스럽게 묻느냐는 진의 표정.
“그건 당신 사정이고요. 내가 어떻게 선반에서 자요?”
“아주 맞춤일 거 같은데? 나보다 더 작고 짧으니까 쏙 들어가겠네.”
어떻게 손에 넣은 침대인데. 내 평화와 맞바꾼 마지막 자존심인 걸. 기껏 빼앗은 침대에서 잠도 잘 수 없다는 건 말이 안 되지. 내가 입을 꾹 다문 채 버티자 진이 성가신 표정을 지었다.
“나 대신 칼이라도 맞겠다는 건가? 뭐, 나로선 나쁘지 않군.”
약 올라. 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말이었다. 여기서 나를 진으로 착각한 자객에게 당한다면 지금껏 조심조심 삶의 방향을 틀어 온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된다. 이번엔 무조건 가늘고 길게 살아 수명을 채우고, 영원히 잠들어 다시 돌아오는 일이 없어야 하리라. 18회차 같은 경우는 절대로 없어야 한다는 말씀!
“대체 어디서 무슨 죄를 짓고 다니는 거예요? 얼마나 흉악한 짓을 저질렀기에 하루가 멀다 하고 자객이 들이닥치는 거예요?”
나는 퉁명스럽게 물었다.
“내가 지은 죄라……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가 죄라더군.”
“…….”
저기요? 여기서 그렇게 나오시면 나만 나쁜 사람 같잖아요. 어울리지 않게 쓸쓸한 기색을 띤 진의 눈빛에 나는 하는 수 없이 혼자 꿍얼거리면서 짐 선반으로 기어 올라갔다. * * *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나는 좁고 낮고 깜깜한 짐 선반에 끼인 채 생각했다. 서로가 아니면 안 된다는 남편과 남편의 첫사랑을 통 크게 밀어 주고 집을 나왔다. 후회와 미움으로 가득한 열여섯 번의 삶을 반복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수많은 들풀 중 하나가 되어 바람결에 나부끼며 수수하게 살고자 했다. 그랬는데 왜! 잠조차 수수하고 평범하게 잘 수 없는 것인지. 허울뿐인 삶이었다 해도 어쨌든 제국의 공작부인이었던 내가! 멀쩡한 특실의 멀쩡한 침대를 놔두고 짐 선반에서 잠을 청해야 하다니. 불편하고 답답하고 어이가 없고……. 그나마 작은 위안이라면 특실의 짐 선반은 생각보다 깊고 큼직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특실을 이용하는 건 거의 황족이나 부유한 귀족들이었으니까. 그들은 한 번 움직일 때마다 드레스 룸, 아니 저택을 통째로 들고 다녔으니. 그렇게 긍정적인 마음을 불러내려 애쓰며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했다. 그 노력의 결실로 겨우겨우 얕은 잠에 들었을 때.
“아리…… 타타…… 아리…… 스타…… 타…….”
신음인지 말소리인지 모를 이상한 소리가 진의 선반 쪽에서 들려왔다.
“아리스…… 타…… 타…… 아리…….”
귀를 쫑긋 세우고 들어 보니 진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야, 선반 귀신! 너 잠꼬대하는 버릇까지 있었던 거니! 정말이지 가지가지 한다. 안 그래도 불편한 잠자리 때문에 예민해져 있던 나는 성질이 버럭 났다.
‘그래, 당신은 정말 존재 자체가 유죄야!’
아까 진의 말을 듣고 숙연해졌던 것이 억울할 정도였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발버둥을 치며 소리 없이 흐느꼈다. 그렇게 한동안 분노와 짜증을 발산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아리…… 스타타…… 아리스타타…….”
머리가 조금 차가워진 상태로 들으니 진의 목소리가 다른 때와 사뭇 달랐다. 천만년은 산 듯 얄밉도록 무심하고 매사 지겨운 듯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의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를 부르는 것처럼 애잔한 목소리였다. 다시 들어도 그렇게 들렸다. 진은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걸까? 매우 슬픈 꿈인 것 같았다.
“아리스타타…….”
아리스타타? 자꾸 듣다 보니 뭔가 기억이 날 듯 말 듯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어디서 들어 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지난 열여섯 번의 삶을 바람난 남편 프러너스와 그의 첫사랑 아젤리아를 증오하는 데 송두리째 갈아 넣었던 나는 여러 번 산 것치고는 주변 사정에 어두웠다. 다른 것에 관심을 둘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 해도 공작부인으로 살며 그간 먹어치운 접시 수가 있는지라, 나도 모르는 사이 머릿속에 저장돼 조용히 잠들어 있다 어느 순간 불쑥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었다.
‘아리스타타!’
생각났다. 그건 황후의 처녀 적 이름이었다! 결혼 전 연회와 티파티에서 그녀를 몇 차례 마주친 적이 있었다. 지금은 알펜시아 바카리스 황후지만, 그땐 분명 아리스타타 힐먼으로 불렸다.
‘황후의 이름을 왜 저리 애절하게 부른담…….’
무심코 생각하던 나는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이거 그거지? 치정의 냄새가 물씬하잖아? 진, 딱 걸렸어!’
어쩌면 진의 치명적인 약점을 잡았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나는 잔뜩 흥분했다. 오늘처럼 또 빙글거리며 나를 놀리려 들면 이 일을 꺼내 입을 다물게 할 수 있을지 모르잖아. 비상시(?)에 내밀 카드 한 장쯤 있어서 나쁠 것 없지.
‘껄렁껄렁한 불량 귀족 주제에 하필 황후가 될 여자를 넘봤다니.’
알펜시아 황후의 고혹적인 자태가 떠올랐다.
‘흥, 여자 보는 눈은 지극히 평범하네.’
나는 진을 향해 콧방귀를 날리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쾌재를 부른 것도 잠시, 진의 잠꼬대가 끝날 줄 몰라 난감했다. 나로서는 집을 나와 낯선 곳에서 묵는 첫날이라 꽤 피곤했다. 게다가 하루 사이 좀 많은 일이 있었는가.
“아리스타타…….”
밤새 저럴 건가? 잠꼬대하다 목이 쉴 판이었다. 아니, 정말로 그의 목이 점점 잠기는 것 같았다. 그럴수록 목소리는 점점 더 애달파졌다.
‘뭔가 천덕꾸러기의 냄새가 나는데?’
나 역시 만만찮은 천덕꾸러기라 알 수 있었다. 그가 조금 짠하기도 하고, 이제는 정말 자고 싶었던 나는 진을 가까이서 살펴보기로 했다. 더 이상 잠꼬대를 하지 않도록 코라도 비틀어야 할 판이었다. 나는 버둥거리며 이쪽 선반에서 힘들게 내려와 진이 누워 있는 저쪽 선반으로 다가갔다. 침대에 올라가 까치발을 하고 선반에 매달리다시피 해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비틀기엔 코가 너무 섬세하고 오뚝했다. 험하게 다루면 조각상에 금이라도 갈 것 같았다. 코를 비트는 대신 어깨를 살짝 흔들며 그를 불렀다.
“저기, 진, 진…… 하아악!”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잠시 동안 파악이 되지 않았다. 몸이 붕 떴던 것 같고 세상이 핑글 돌았던 것 같고. 그리고 내가 그토록 눕길 바랐던 침대에 몸이 반쯤 묻힐 정도로 처박혀 있었다. 숨이 막혀서 보니 진이 근육이 불거진 몸으로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의 거친 숨결이 내 얼굴에 쏟아졌다. 나를 내려다보는 눈에 살기가 가득했다. 그제야 섬뜩한 느낌에 시선을 아래로 하니 차가운 검날이 내 목을 파고들어 있었다.
“젠장!”
사태를 파악한 그가 거칠게 내뱉으며 단검을 거뒀다. 나는 숨을 토해내며 헛구역질을 했다.
“자는 걸 건드리면 사나워진다고 하지 않았나!”
진이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널 죽일 뻔했어!”
그가 어깨와 가슴을 들썩이며 나를 노려보았다.
“으흑…….”
내가 흐느끼자 그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들었다. 그러게 왜 밤새도록 그런 잠꼬대를 하냐고. 당신 때문에 하마터면 18회차 갈 뻔했잖아……. 한풀 꺾인 진이 손을 뻗어 내 턱과 목을 어루만졌다. 길고 메마른 손가락이 이상하게 부드러웠다. 나는 눈가에 눈물을 매단 채 물었다.
“당신, 시더우드예요?”
내 입에서 나온 뜬금없는 단어가 마침내 그의 동공을 흔들었다. 그 순간 나는 철딱서니 없게도 작은 승리감을 맛보았다. 그가 내 위에서 거친 숨을 몰아쉴 때 얼굴 위로 삼나무 향이 훅 끼쳤다. 그제야 나는 벼락같이 깨달은 것이다. 그가 시더우드라는 걸. 이곳 로센보르 제국에서 시더우드는 황족의 성이었다. 건국 설화 속에서 그들은 신성한 삼나무에서 잉태된 혈통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몸에서는 은은한 삼나무 향이 났다. 그 향은 그들 고유의 특징이자 황족이라는 증명이었다. 어쩐지 처음부터 객실 안에 기분 좋은 나무 향이 배어 있다 했다. 나는 그저 고급 객실이라 좋은 향을 뿌린 줄 알았다.
「태어난 것 자체가 죄라더군.」
이제야 진이 했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황제와 천한 신분의 여자 사이에 잉태된 아이들은 시더우드라는 성을 받긴 했으나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으며 불행한 유년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들의 존재는 가능한 한 드러나지 않도록 숨겨졌고, 그들 중 눈에 띄게 출중한 이는 견제되어 목숨을 위협받기도 했다. 지난 삶의 오래된 기억 창고 속에 사소하게 방치되어 있던 소문 하나가 떠올랐다. 특이하게도 천재적인 소질이나 뛰어난 면모가 아닌 다른 것으로 주목받은 시더우드가 있었다. 황실에서도 내놓은 문제아, 방탕 황자. 진 시더우드. 이것이 그가 숨긴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