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나랑 같이 가자 좀2022.01.03.
그의 죽음을 다룬 짤막한 기사가 신문 한 귀퉁이를 차지했던 지난 생과 마찬가지로 진은 또 여기, 그리치에 와 있다. 그리고 곧 불꽃 축제가 시작된다. 나는 예정대로 그리운 토버마리의 컨트리 하우스로 가서 존재감 없이 조용히 살며 수명을 채우고. 그는 운명대로 삶의 마지막 불꽃을 터뜨리고 쓸쓸히 점멸하다 사라질 것이고.
“정말 마음에 안 들어…….”
나는 지끈거리는 두통에 머리를 감싸 쥐었다.
“뒤통수 한 대만 후려갈기면 좋겠어.”
후려갈기고 싶은 게 누구 뒤통수인지는 헷갈렸지만, 소리 내어 말할수록 진의 얄미운 얼굴이 더 선명하게 눈에 밟혔다. 순간 우습게도 이런 생각이 불쑥 튀어 올랐다.
‘지난 생에 아리스타타는 그의 죽음을 슬퍼했을까.’
누구도 슬퍼하지 않고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죽음은 무척 쓸쓸할 테지. 지난 열여섯 번의 생에 내 죽음을 슬퍼해 준 이가 있었을까?
“하아…… 로제트, 어떻게 하고 싶은데?”
지금 당장 진을 찾아내 멱살을 잡아끌고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고 싶었다. 어쨌든 그리치를 벗어나면 그의 죽음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약간의 수고를 감수하면 그 키만 멀대같이 크고 어깨만 쓸데없이 떡 벌어진 데다 어울리지 않게 긴 속눈썹과 섬세한 코를 달고 다니는 불쌍한 목숨 하나 살릴 수 있는 것이다. 나는 혼탁한 마음을 휘적거리며 진을 찾기 전에 내 진심을 찾으려고 애썼다. 같은 천덕꾸러기여서 팔이 안으로 굽는 걸까? 사랑이라는 자비 없는 게임에서 흠씬 두들겨 맞고 코가 깨진 채 고꾸라져 본 이들 사이에 흐르는 전우애? 그래도 내가 너보다는 처지가 조금 나은 것 같다는 은근한 우월감과 안도감? 서로의 치부를 들추며 사이좋게 한 대씩 주고받은 심술궂은 펀치의 추억 때문에? 그 모든 모호하고 야비한 감정과 더불어 미신 같은 생각 하나가 나를 사로잡았다.
‘그의 운명이 바뀌면 내 운명도 바뀌지 않을까.’
나를 둘러싼 세상이 바뀌면 내 삶도 더 확실하게 지금까지와는 다른 길을 가게 될 것 같았다. 진이 예정된 죽음을 피해 살아 본 적 없는 새로운 삶을 얻게 되면, 나 역시 굴욕적인 열여섯 번의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으리라는 이기적인 기대. 물론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뻔히 아는 누군가가 곧 죽는다는데 아무렇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더구나 성인이 된 후 처음으로 순수한 호기심을 품었던 사람인데.
‘내가 조금 무리해서라도 그 사람을 이곳에서 구해 냈더라면…….’
그런 식의 죄책감을 평생 마음에 담고 살기는 싫었다. 결국 또 이기적인 마음이네. 자신에게 전혀 호의적이지 않은 삶을 열여섯 번이나 반복하다 보면 이기적이고 각박한 사람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고, 혼자 주절주절 변명도 해 보았다.
‘참, 생각을 많이 하지 않기로 했지.’
결정. 나는 진 시더우드, 그 인간을 구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음은 먹었지만, 이 넓고 복잡한 도시에서 진을 어떻게 찾는담? 고민하던 나는 아까 인사한 이 호텔 지배인을 떠올렸다. 이렇게 큰 호텔을 책임지고 운영하려면 수완깨나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지역 정보에도 밝아야 할 것이고. 잠깐 봤지만 그의 눈매가 꽤 날카롭던 게 떠올랐다. 눈치 빠르고 일솜씨가 좋을 것 같은 인상이었다. 나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그를 찾았다.
“진이라는 사람과 관련된 정보 길드 말입니까?”
지배인이 되물었다.
“네, 긴히 부탁할 일이 있어서요.”
“외람되지만 어떤 종류의 일을 의뢰하시려는 건지요? 꼭 진이라는 사람이 소속된 정보 길드여야 합니까?”
“아, 진과 친분이 있어서요.”
지배인의 표정이 미세하게 달라진 걸 포착했다. 그래서 고급정보를 좀 더 흘렸다.
“이래 봬도 내 하말린어 실력이 꽤 쓸 만하거든요. 진이 하말린까지 사업을 확장하고 싶어 해서 자문을 좀 해 준 적이 있죠.”
그러니까 진이 어디 있는지 어서 불라고. 지배인이 목소리를 조금 낮춰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알기로 하말린 같은 외국까지 사업을 넓힐 만큼 규모가 있는 정보 길드는 이 그리치에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거 편하게 됐네요.”
“플럼가에 있는 페가수스에서 킹핀을 찾으십시오. 가실 때 기별을 주시면 마차를 불러 드리겠습니다.”
“페가수스요?”
“아, 중심가에 있는 장제소입니다.”
“장제소라면 말발굽을 다듬고 편자를 갈아 끼우는 곳 말인가요?”
“예, 모든 말이 모이는 곳이지요.”
지배인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 * * 그리하여 나는 진이 이끄는 정보 길드의 본거지인 페가수스 앞에 와 있었다. 어쩌겠는가. 그리치 비치 파이어 파티가 당장 내일부터 시작이라는데. 그전에 진의 멱살을 잡아끌고 토버마리로 떠나야 한다. 가만히 보니 페가수스는 단순한 장제소라기보다 일상 용무와 휴식과 사교를 두루두루 해결할 수 있는 종합 편의 시설이었다. 말들이 발굽을 다듬고 신을 갈아 신는 동안 말 주인들이 휴식을 취하거나 사교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카페 겸 바가 딸려 있었다. 나는 카페 쪽으로 가 보기로 했다. 곧장 카운터로 직진해 낮은 목소리로 바텐더에게 말했다.
“킹핀을 만나러 왔어요.”
바텐더가 멍한 눈을 껌뻑였다.
“로제트 앰브로시아가 왔다고 전해 주세요.”
잠시 당황한 기색이던 바텐더는 이내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레이디, 약속을 하고 오신 건가요?”
“그건 아니에요.”
“아 그렇다면, 알아는 보겠지만 어차피 보스는 출타 중이실 겁니다.”
“그럼 기다릴게요.”
“오늘 복귀하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급한 용무이신가요?”
아무래도 내부 접객 방침에 따라 나를 차단하려는 듯했다. 나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텐더를 바라보다 목소리를 조금 더 낮췄다.
“내밀한 속사정을 나눈 여자가 찾아왔다고 전해요.”
바텐더가 흠칫 굳어졌다.
“밤새 함께 달린, 당신이 침대에 메다꽂은 여자라고 하면 알 거예요.”
바텐더가 어색하게 웃으며 침착한 태도로 자리를 떴다. 하지만 이내 벽 너머로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렸다. 그래, 잽싸게 움직이라고. 시간이 없으니까. 바텐더가 자리를 비운 사이 주위를 둘러보니, 나를 보며 수군거리던 사람들이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실컷 수군거리고 기왕이면 나가서 소문도 내라고요.’
나는 오직 사실만을 말했을 뿐. 거기엔 티끌만큼의 거짓도 없었다. 아니, 그보다 더 내밀한 속사정이 어디 있느냐고. 무덤까지 비밀로 가져가야 할 그 이름 아리스타타, 그리고 우리의 수치스런 실연의 역사여.
‘내가 입만 뻥긋하면 진 시더우드 당신은…….’
수많은 길드원 앞에서 망신살이 뻗치는 거죠. 첫사랑 그녀를 잊지 못해 밤마다 목 놓아 부른다는 사실을 확 터뜨려, 말아? 이 정도 폭로면 회생불가일지 모르겠네요. 밤새 달리는 열차 안에서 주거니 받거니 난투극을 벌인 건 진 당신도 똑똑히 기억할 테고. 한 객실에 묵으며 잠도 자고, 밥도 먹고, 죽일 듯이 몸싸움도 벌이고, 안 한 거 없이 다 하지 않았나요! 그리 깊은 사이인 나를 이렇게 문전박대하면 섭섭하죠.
“레이디, 보스께서 마침 업무를 마치고 복귀하셨군요. 집무실로 모시겠습니다.”
진작 그렇게 나왔어야지. 바텐더의 안내를 받으며 나는 우아하게 걸음을 옮겼다. 진의 집무실이란 곳은 건물의 2층에 있었다. 바텐더가 열어 준 문으로 들어가 보니 진 혼자가 아니었다. 열댓 명쯤 되는 장정들이 분주히 움직이거나 각 잡고 업무에 몰두하다 일제히 나를 바라보았다. 모두 해결사들인지 인상이 험상궂거나 메마른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눈매도 하나같이 날카로웠다. 그 와중에 진만 책상에 다리를 올리고 반쯤 드러눕다시피 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출타는커녕 계속 거기 방만하게 늘어져 있던 게 분명했다.
“보스, 우린 잠시 나가 보겠습니다.”
내가 방 한가운데 덩그러니 서 있자 그들 중 누군가가 말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레이디 앰브로시아는 금방 가실 거거든. 하던 일 계속하라고.”
진이 인정머리 없게 말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알아서 진에게 다가갔다. 내가 코앞까지 갔는데도 진은 자세를 바로잡을 생각이 없는지 여전히 건방진 자세를 고수했다.
‘내가 당신 목숨 살리려고 여기까지 행차를 했건만.’
진의 박대에 부아가 치민 나는 훌쩍 뛰어서 그가 다리를 올리고 있는 책상 위에 내 엉덩이를 털썩 올려놓았다.
‘이제 좀 격이 맞는 것 같네.’
내가 책상 위에 걸터앉아 진을 내려다보자 그가 미간을 구겼다.
“뭐? 속살을 본 내밀한 사이?”
진이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이며 비꼬았다. 아니, 그 바텐더 놈 귀가 어떻게 되거나 기억력에 문제가 있나. 말이 왜 그렇게까지 변질됐어?
“우리 사이에 얘긴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진의 매정한 말에 주위에 있는 장정들이 나를 흘끔흘끔 쳐다봤다.
“그땐 너무 정신이 없었어요. 생각해 보니 나만 일방적으로 당한 것 같아서요.”
장정들이 수군수군거렸다.
“나는 당신을 믿은 바람에 아무 대책을 못 세웠어요. 당장 토버마리로 가야 하는데 어떻게 해요!”
“그러게 마차를 주선해 준다고 하지 않았나? 좋아. 이제라도 마차를 구해 주면 끝이겠군.”
“아니요! 그것만으로는 안 되죠!”
“그럼?”
“토버마리까지 가는 길이 얼마나 험하고 먼지 알아요? 길목에는 귀족의 마차만 전문적으로 노리는 도적 떼도 있다고요.”
나는 과장되게 몸을 떨면서 공포에 질린 가련한 여인을 연기했다. 공작부인이 된 이후에도 버리지 않은 유일한 처녀 적 취미가 연극 관람이었던 만큼, 연기엔 자신이 좀 있었다. 하지만 별 효과는 없었는지, 진이 무표정한 얼굴로 내가 하는 양을 구경하다 성가시다는 듯 제안했다.
“실력 있는 호위를 붙여 주지.”
“안 돼요! 그걸론 안심할 수 없죠!”
“뭐 하자는 거지?”
“당신이 직접 데려다줘요. 다른 호위는 믿을 수 없어요. 최근에 인적이 드문 곳에서 호위가 강도로 돌변한 사건도 있었잖아요.”
진은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나더러 직접 데려다 달라? 내가 시더우드란 것도 알았으면서?”
“어쨌든 그게 처음 우리 계약이었죠. 나는 하말린어 통역을 해 주고 당신은 나를 토버마리까지 무사히 데려다주고.”
“내가 직접 간다는 말은 한 적 없는데? 대체 무슨 꿍꿍이인 거지?”
의심을 가득 담은 진의 잿빛 눈이 나를 쏘아보았다. 무작정 그가 직접 가야 한다고 우기는 것도 한계에 부딪혔다. 내가 생각해도 설득력이 없으니. 뭐라고 해야 진을 그리치에서 끌어낼 수 있을까?
“지금 당신이 하는 행동을 보면 마치 나와 함께 가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인 거 같은데? 이거 부담스럽네.”
알면 이쯤에서 협조 좀 해 주지 그래요? 아마 진은 내 자존심을 건드리고 수치심을 주면 내가 포기할 거라 생각하고 저런 말을 했을 것이다. 내가 수치심에 16회에 걸쳐 누적된 면역이 있는 건 모를 테지. 나는 그의 의도와는 반대로 그 말을 이용해 보기로 했다. 무작정 가자고 조르는 것이 먹히지 않은 후, 달리 떠오르는 뾰족한 방법도 없던 차였다. 어디서 암살 계획을 엿들었다고 말하자니 둘러댈 근거가 너무 미약했다. 암살이라면 이들이 더 전문가 아닌가. 얼렁뚱땅 넘어가려다 비웃음을 사거나 저의를 의심받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삶을 반복하기 때문에 미래를 안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더욱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역시 당신 눈을 속일 수가 없네요.”
“그래, 서로 솔직한 게 편하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말해 봐.”
“진 시더우드 당신이요.”
누군가 연장 떨어뜨리는 소리가 났다.
“진 시더우드 전하, 당신을 사모합니다.”
주변의 소리와 움직임이 일순 멈췄다. 무시무시한 정적이 흘렀다.
“잊으려고 노력도 해 봤습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새 당신을 그리워하고 있었어요.”
나는 눈에 힘을 줘서 눈물을 짜내 보려고 노력했다. 진이 그런 나를 보며 인상을 와락 구겼다.
“이러는 내가 한심하고 역겨운가 보군요? 그래도 어쩔 수 없지요. 이게 내 어리석은 진심이니까.”
진심이 아니어서 그런지, 대사가 의도했던 것보다 영 부드럽게 나오지 않았다. 진의 표정도 썩 좋지 못했다. 당신도 같은 아픔을 겪었잖아? 이해할 수 있잖아? 이렇게 애쓰는 나를 어서 불쌍하게라도 여기라고! 나는 벌써부터 피로감을 느끼며 마지막으로 그에게 손을 뻗었다.
“진, 당신을 사랑하는 나와 함께 가 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