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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말로는 안 되겠군 (11/110)

#11화. 말로는 안 되겠군2022.01.07.

16548660235733.jpg“다들 나가.”

진이 낮고 싸늘한 목소리로 명했다. 장정들이 불만스런 표정으로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나며 구시렁거렸다.

16548660235738.jpg“아까부터 나간다니까 못 나가게 잡을 땐 언제고 중얼중얼.”

16548660235738.jpg“한창 재미날 때 끊고 나가라니 인간이여 꿍얼꿍얼.”

16548660235738.jpg“숙녀에게 원한을 사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는데 어쩌자고 저러시나 웅얼웅얼.”

16548660235738.jpg“아흐, 내가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성격인데. 그게 아무리 보스라도 말이야.”

매서운 생김새와는 달리 말이 많은 자들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은 일말의 동요도 없이 그들이 모두 방에서 꺼지기를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마침내 둘만 남게 되었을 때, 나는 기대했다. 혹시 그가 그리치를 떠나기로 마음먹은 게 아닐까 하고. 컴컴한 부하들 앞에서 선뜻 수락하는 것이 보스 체면에 쑥스러웠을지 모른다고. 그래, 자기 좋다는 여자 싫어하는 남자는 없다고 했어. 아닌가? 어쨌든 내 계산대로라면 이쯤에서 진이 못 이기는 척 내 제안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진이 건들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서로의 발끝이 닿을 듯 가까워졌을 때 그는 어깨를 기울여 자신의 얼굴을 내 얼굴에 바짝 갖다 댔다. 나도 모르게 흡 하고 숨을 들이켰다.

16548660235733.jpg“대체 무슨 꿍꿍이야?”

16548660235761.jpg“꿍꿍이……라뇨. 레이디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고백했는데.”

16548660235733.jpg“웃기지 마. 대체 이렇게까지 하는 목적이 뭐야?”

그러게나 말입니다! 내가 왜 당신 같은 무뢰한을 살리려고 이런 망신까지 감수해야 하는지! 하지만 머릿속 생각과 달리 나는 제어장치가 망가진 전차처럼 돌진할 수밖에 없었다.

16548660235761.jpg“목적이라면 당신의 마음을 얻는 것밖에 더 있겠어요?”

16548660235733.jpg“퍽이나. 그렇게 굳은 얼굴에 무뚝뚝하고 뻣뻣한 말투로 나를 좋아한다고? 그래 가지고 잘도 그 말을 믿겠군. 무서워서 등골이 다 오싹하던데.”

16548660235761.jpg“긴장해서 그래요. 좋아하는 마음을 고백하는 게 얼마나 떨리는 일인 줄 알아요?”

역시 거짓 고백은 티가 나는구나. 애쓴 성의를 봐서라도 대충 넘어가 주면 안 되겠니. 그래도 기왕 한 고백을 냉큼 주워 담긴 뭣해서 한 번 더 미끼를 던져 보았다. 이번엔 나름 감정을 담으려고 노력했다.

16548660235761.jpg“당신이 내 운명의 반쪽인 것 같아요. 그런 확신이 들어요.”

인생 17회차 만에 드디어 타인의 생각을 읽는 이능을 터득하게 된 걸까. 진의 얼굴에 선명하게 떠오른 생각이 보이는 듯하니. 그 생각이란 아마도…….

16548660235761.jpg‘최악이군.’

여러모로 기분이 나빠져서 그냥 가 버리고 싶지만, 처음부터 어느 정도 각오하지 않았는가. 정해진 운명을 비트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임을. 나는 다음 방법을 궁리해 보았다. 말이 안 통한다면, 육체적으로 공략해 보는 수밖에. 사실 내겐 하말린어 말고도 숨은 필살기가 하나 더 있었다. 이렇게 쓰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원어민 가정교사에게 하말린어를 배울 때 그곳의 역사나 문화 같은 것도 틈틈이 배웠다. 가정교사는 미소가 온화하고 가녀려 보이는 중년 부인이었는데, 어느 날 하말린의 호신술에 대해 알고 싶은지 물었다. 호신술? 뜬금없는 제안에 처음엔 손사래를 쳤다. 호위기사도 있고 딱히 위험한 곳에 갈 일도 없는 데다 몸을 쓰는 일엔 흥미도 자신도 없었기에.

16548660235738.jpg「저같이 자그마한 여자가 산만 한 장정을 제압할 수 있답니다.」

하지만 저 말을 듣고 돌연 호기심이 생겼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들어 보니 완력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의 약점을 공략하는 기술이었다. 그러니 나같이 주먹 힘이 없는 여자들도 얼마든지 익힐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하말린의 전통 호신술은 한마디로 사람의 몸에 있는 급소를 손가락으로 찌르는, 일종의 손가락 검술 같은 거였다. 나는 몸의 기운이 모인다는 지점이 어디인지 배웠고, 그곳을 공략하는 법도 익혔다. 아무리 체구가 큰 진 같은 남자도 이 손가락 검술에 당하면 속수무책으로 무릎을 꺾으며 고꾸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이 호신술을 진짜 호신을 위해 쓴 적은 없었다. 가르쳐 주신 스승껜 죄송하지만, 시작은 순수한 호기심이었어도 나중엔 그 불륜 남녀의 급소를 노리려고 연습에 몰두한 것이 더 컸다. 결국 누구도 찔러 보지 못했지만. 물론 이 방법을 쓰면 진을 기절시킬 수는 있지만, 저 거구를 들쳐 메고 그리치 밖으로 달아날 수는 없다. 마침 이 방에 보는 눈이 없으니 진을 쓰러뜨린 뒤 사람을 불러 진이 발작을 일으켰다고 말할 것이다. 이 희귀한 발작을 치료할 수 있는 이는 제국에 몇 사람 없는데, 마침 내가 아는 치료사가 그리치에서도 꽤 떨어진 지역에 살더라는 얘기. 치료사를 데리러 왔다 갔다 하면 시기를 놓친다고 야단을 치면, 더 말하지 않아도 직원들이 서둘러 진을 실어 갈 것이다. 거기서 기절한 진을 그대로 며칠 붙잡아 두면 끝인 것이다.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다면, 호신술 연습을 한 지가 너무 오래됐다는 것? 그래도 위기가 닥치니 절로 기지를 쥐어짜게 되는 것이 신기했다. 까맣게 잊었던 호신술을 여기서 쓰게 되다니. 배워 두면 언젠가는 다 쓸 데가 있다. 손가락 검술을 쓰기로 결심한 나는 새삼 진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진득한 시선으로 훑었다. 시선을 느낀 진이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지금 맘껏 여유를 누리시길. 곧 내 발아래 쓰러져 미동도 할 수 없게 될 테니. 순수한(?) 고백이 먹히지 않으니, 어른의 매운맛을 보여 주는 수밖에. 자, 진 시더우드, 간다.

16548660235761.jpg“쥐이인…….”

나는 비릿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며 눈빛을 그윽하게 뭉개려고 애썼다. 상대를 방심하게 만들어 접근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특히 진같이 신체를 단련해 온 사람들은 가까이 붙기가 쉽지 않았다. 자기 몸에 손을 대도록 호락호락 허락하지 않으니까. 나는 진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딴마음이 있는 척했다. 일부러 그의 목에다 숨결을 하아아 토해내며 은근슬쩍 그의 가슴을 손으로 더듬었다. 어딜 찌른다? 진이 못 볼 꼴이라도 본 것처럼 인상을 구겼다.

16548660235761.jpg“여기, 우리 둘밖에 없는 거 맞죠?”

16548660235733.jpg“아까 다 내보냈으니까. 얼마 남지 않은 당신의 알량한 체면을 지켜 주느라.”

16548660235761.jpg“그런 세심한 배려가.”

16548660235733.jpg“내가 좀 속이 깊어. 그런데 이번엔 또 뭐야? 무슨 괴상한 짓을…….”

나는 검지로 나불대는 그 입술을 꾹 눌러 저지했다. 그가 눈썹을 찡그리며 황당한 눈길로 나를 내려다봤다. 그렇게 입에 빗장을 질러 놓고, 본격적으로 찌를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 배운 내용을 떠올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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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과감하게 진의 가슴에 손을 착 올렸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그의 쇄골을 천천히 따라갔다. 그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나는 기세를 몰아 손으로 그의 복근을 더듬어 내리다가 몸을 좀 더 밀착시키며 장골이 있을 법한 허리 아래쪽을 지그시 눌렀다. 그가 탁해진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16548660235733.jpg“해부학 실습은 그만하면 충분한 거 같은데?”

내가 뭐라고 대꾸할 틈도 없이 진이 거칠게 나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이제 거의 다 찾았는데 왜 갑자기 밀어? 나를 벽에 붙여 세운 그는 죽일 듯이 나를 노려보면서 내 양팔을 위로 훑어 올렸다. 그의 손길이 여린 살결을 스치자 왠지 겁이 났다. 무엇보다 손으로 급소를 찔러야 하는데 하필 손을 붙잡힌 상황에 당황하고 있을 때 진이 뜨악한 말을 했다.

16548660235733.jpg“정말 깜찍해서 봐 줄 수가 없네. 그걸 유혹이라고 하는 건가? 여전히 날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아닌데요? 물론 처음에 접근하기 위해 그런 척을 했지만. 그렇다고 유혹이 아니면 뭐라고 말할 것인가. 당신 기절시키려고 이러는 거라고? 난감해하고 있을 때였다. 차갑고 불길한 소리가 들린 것은. 철컹.

16548660235761.jpg‘철컹……?’

  . . .

16548660235761.jpg“진, 어서 풀어요.”

16548660235733.jpg“…….”

16548660235761.jpg“풀라고요.”

16548660235733.jpg“…….”

16548660235761.jpg“장난 그만 쳐요.”

매우 수치스럽고 절박한 형편이지만 나는 품위를 잃지 않기 위해 침착한 목소리로 타이르듯 말했다.

16548660235733.jpg“싫은데? 당신 어딜 믿고?”

나의 점잖은 노력이 무색하게 진은 저딴 식으로 경박하게 응수했다.

16548660235761.jpg‘이 인간아, 그냥 죽어! 마지막으로 불꽃놀이나 보고 죽어 버리라고!’

나는 지금 구속구에 손이 묶인 채 벌서는 자세로 한쪽 벽 앞에 서 있다.

16548660235761.jpg“풀어 줘요.”

16548660235733.jpg“나도 이러고 싶지 않아. 하지만 레이디의 손버릇이 나쁘니 어쩔 수가 없군.”

16548660235761.jpg“안 할게요.”

16548660235733.jpg“당신을 못 믿겠어. 풀어 주면 또 무슨 황당한 짓을 벌일지.”

당신 목숨 살려 보겠다고 내 고요하고 소박한 시골 생활도, 물처럼 바람처럼 평화롭고 담담한 삶도 미루고 난리법석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었건만! 불꽃놀이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다. 풀려나면 이 손으로 당장 저 목을 조르리라. 나는 조용히 그를 노려보다 이죽거렸다.

16548660235761.jpg“원래 여자를 싫어하나 봐요? 여자한테 크게 덴 적이라도 있나?”

16548660235733.jpg“전혀. 여자를 너무 좋아해서 탈이지.”

16548660235761.jpg“그럼 나한테는 왜 이러는 건데요?”

16548660235733.jpg“당신이야말로 어쩌자고 어울리지도 않는 짓을 한 거야? 겁도 없이.”

진짜 유혹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계속 듣고 있자니 은근히 빈정이 상했다. 유혹하려고 한 게 아니라 당신 급소를 콱 찌르려고 한 거라고 말할 수도 없고.

16548660235733.jpg“걱정하는 마음에서 하는 말인데, 어디 가서 절대 유혹 같은 거 하지 마.”

어떻게 해서든 구속구를 풀어서 진의 급소부터 찔러야겠다. 더 이상 얄미운 소리 하지 못하도록. 이어진 진의 말은 더 가관이었다.

16548660235733.jpg“당신 노력은 가상하지만 진심이 아니란 걸 알지. 당신은 계속 거짓말을 하고 있어.”

16548660235761.jpg“…….”

16548660235733.jpg“당신이 좋아하는 건 내가 아니라 프러너스지.”

16548660235761.jpg“……?”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수법은 아까 지나가지 않았나? 왜 다시 좋아한다, 안 한다 타령?

16548660235733.jpg“당신 마음속에 프러너스가 있는데 나를 좋아한다는 말은 거짓이지. 당신은 두 사람을 동시에 마음에 둘 수 있을 만큼 약은 여자가 못 되니까.”

아니, 내 마음속에 프러너스 없다니까. 이 남자가 왜 자꾸 남의 마음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이러쿵저러쿵 판단하는 거야? 아무래도 이참에 확실히 말해 두어야겠다.

16548660235761.jpg“그래요. 한때는 그가 내 세상의 전부여서, 그를 놓치면 내 세상이 사라질 것 같아서 물에 빠진 사람처럼 절박하게 매달렸어요. 하지만 이젠 아니에요. 봐요, 그를 놓았는데도 내 세상은 멀쩡하잖아요?”

지금 위태로운 건 내가 아니라 당신 세상이라고. 그러니 이제 좀 가자고 이 화상아. 안 가면 당신 죽는다고! 이렇게 중대한 얘기를 하는데 구속구는 좀 풀어 주면 좋겠는데. 묶인 손도 아프고 가슴도 답답해진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진에게 소리쳤다.

16548660235761.jpg“그래요, 집어치워요. 이제 사랑 타령은 됐어요. 그냥 나랑 같이 토버마리에 가 줘요.”

16548660235733.jpg“대체 토버마리에 뭐가 있는데?”

16548660235761.jpg“그냥 가 줘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때 열차에서 내게 이유 없이 호의를 베풀었던 것처럼. 그때처럼 한 번만 그냥 함께 가요.”

진이 왜인지 한숨을 내쉬었다.

16548660235733.jpg“열차에서 내가 이유 없이 호의를 베풀었을 거라 생각하나?”

16548660235761.jpg“……이유가 있었다는 뜻이에요?”

16548660235733.jpg“이제 생각해 보니 당신에게는 혹시 희소식일지 모르겠군.”

16548660235761.jpg“……?”

16548660235733.jpg“당신 남편이 우리 길드에 뒷조사를 부탁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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