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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바보가 멍청이를 만났을 때 (12/110)

#12화. 바보가 멍청이를 만났을 때2022.01.10.

16548660378665.jpg“그게 무슨…… 프러너스가 뭘 의뢰했다고요?”

16548660378684.jpg“당신이 어디서 뭘 하는지, 누굴 만나는지, 혼자인지 아니면 웬 놈이랑 같이 있는지 궁금해 미치겠나 보더군.”

나는 할 말을 잊고 굳어 버렸다. 문득 집 나오기 전날 밤 프러너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혹시 남자가 생긴 거냐는 정신 나간 질문을 해서 나를 살 떨리게 웃겼지. 아무리 그래도 정보 길드에 내 뒷조사를 의뢰했을 줄이야. 정말이지 믿기 힘든 말이었다. 나는 프러너스라는 남자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 걸까? 열여섯 번의 삶을 반복하는 동안 그토록 그에게 매달렸으면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이렇게도 몰랐다니. 로제트 앰브로시아, 그동안 대체 누굴 좋아했던 거니?

16548660378665.jpg“지금까지 왜 내게 말을 안 해 줬어요?”

나는 배신감 가득한 눈을 하고 진에게 따졌다.

16548660378684.jpg“내 고객은 프러너스니까.”

16548660378665.jpg“정말 추잡하군요.”

16548660378684.jpg“몰랐나? 돈을 받고 이런 추잡한 짓을 하는 게 내 일이지.”

알고 있었다. 그는 뒷골목에서 지저분한 정보를 사고팔고 불법적이고 께름칙한 일을 대신 처리하며, 돈이면 무슨 짓이든 하는 천박한 무리의 우두머리라는 걸. 그는 믿을 만한 사람이 결코 못 된다는 걸. 그럼에도 나는 진의 말을 들으며 솔직히 슬펐다.

16548660378665.jpg“그래서 열차에서 그랬던 거예요? 날 철없는 변덕이나 부리는 여자 취급했잖아요. 내 말은 전혀 들으려 하지 않았죠?”

16548660378684.jpg“어쨌든 당신 남편이 당신이랑 끝내고 싶지 않다잖아. 당신도 그걸 바란 거 아닌가?”

16548660378665.jpg“그러니까 감지덕지하면서 받아들이라고? 그가 이런 식으로 내 뒤를 캐고 다니는 걸 기쁘게 생각하라고? 내 안에 무조건 그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을 테니까?”

16548660378684.jpg“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은 하루아침에 바뀌기 힘들잖아. 당신, 프러너스와 잘해 보려고 오랫동안 노력했다면서?”

하루아침에 바뀐 게 아니니까 그렇지. 무려 열일곱 번째 삶 만이라고, 이 인간아. 하지만 이 순간에도 솔직히 나는 스스로를 완전히 믿지 못했다. 혹시나 기뻐하는 마음이 조금은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해 보았다. 짝사랑 5년, 부부생활 5년, 무려 10년 만에 처음으로 프러너스가 나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다. 그의 관심이 아젤리아가 아닌 나를 향하고 있다.

16548660378665.jpg‘로제트, 기뻐?’

나는 조금 긴장까지 해 가며 내 마음속 자물쇠에 진실의 열쇠를 꽂아 보았다.

16548660378665.jpg‘기쁘긴 개뿔.’

기쁘기는커녕 기분이 더럽고 찝찝하기만 하다는 사실에 나는 기뻤다. 생각해 보면 프러너스는 딱 이만큼의 인간이었다. 첫사랑 운운하며 지금껏 함께한 배우자를 걷어차면서도 인간적인 미안함이나 죄책감조차 갖지 않는. 따지고 보면 그는 과거 첫사랑도 지키지 못했다. 아젤리아의 신분 때문에 가문에서 그녀를 반대했고, 그는 방황하는 척하다 그 결정을 얼간이처럼 따랐으니까. 그런 주제에 이제 와서 첫사랑 타령? 보기보다 사람 웃기는 재주가 있다니까. 이것도 이번 생에 새로이 알게 된 프러너스의 진면모였다. 그런 사람을 한 번도 아니고 무려 열여섯 번이나 좋아한 게 나라고 생각하니 우울해졌다. 나는 사람 보는 눈을 키워야 했다.

16548660378665.jpg‘왜 그런 진실들이 이제야 보이는 걸까?’

사람은 자신과 영혼의 무늬가 비슷한 사람을 좋아하게 된다고 한다. 하말린어를 공부할 때 하말린의 금언집에서 본 말이다. 즉 내가 프러너스를 좋아한 건 내 영혼의 수준이 딱 그와 같았기 때문이란 말이다. 어리석은 나머지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하고 삶을 끊임없이 반복했지만, 이제라도 그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그 같은 깨달음 덕분에 나는 프러너스보다 나은 인간이 되었다고 자부한다. 그와 내 영혼의 무늬는 이제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더 이상 그를 좋아할 일은 없다. 나는 확신에 찬 얼굴로 진을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16548660378665.jpg“진, 그 남자의 마음이 시답잖은 자기애인 걸 알면서 나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는 이유가 뭐예요?”

16548660378684.jpg“내 생각은 그렇지만 당신 생각은 어떤지 모르지. 혹시 거짓이라도 허울이라도 끌어안고 싶은 건지 어떤 건지.”

16548660378665.jpg“거짓인 걸 알아도 쥐고 있는 게 낫다는 거예요?”

16548660378684.jpg“그런 게 하나씩은 있지 않나?”

16548660378665.jpg“하, 당신은 그게 뭐였는데요? 가짜인 줄 알면서도 놓을 수 없었던 게?”

16548660378684.jpg“…….”

16548660378665.jpg“당신이나 놓지 말질 그랬어요? 밤이면 밤마다 엄마 잃은 아이처럼 그렇게 애처롭게 훌쩍일 거면.”

16548660378684.jpg“뭐?”

16548660378665.jpg“그녀의 치맛자락이라도 잡고 매달려 보지 그랬어요? 난 그런 것도 다 해 봤어요. 그러니까 당신보단 자격이 있죠. 인생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 자격.”

우리는 서로 원수처럼 노려보았다.

16548660378665.jpg“그녀와 하말린 같은 데로 멀리멀리 도망이라도 가지 그랬어요?”

손이 묶여 있으니 말로라도 그를 찌를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진이 내 마음에 대해 억측하고 그게 진실인 양 떠들게 두지 않으리라. 더구나 그가 프러너스와 한통속이라면. 최대한 잔인하고 비열한 말을 골라 비아냥거리던 나는 진의 표정을 보고 가슴이 덜컹했다. 그러려고 했구나……. 아니, 그랬구나. 정말로 그녀와 함께 하말린으로 가려고 했구나. 하지만 도주가 실패했거나 누군가 배신했거나.

16548660378665.jpg‘그래서 하말린어였나.’

내가 프러너스의 눈길을 끌기 위해, 그에게 쓸모있는 사람이란 걸 증명하고 싶어 하말린어를 파고들었던 것처럼 당신도……. 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기 시작했다.

16548660378665.jpg“끼 어 소무로이 알란 투 디(정말 답 없는 멍청이들이네).”

16548660378684.jpg“…….”

16548660378665.jpg“포즈모이 에 구무아로즈(비겁하고 어리석어).”

내 하말린어 비꼬기에 화답하듯, 진도 코가 닿을 만큼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말했다.

16548660378684.jpg“수부타 에 아타무로이(무모하고 대책 없지).”

설마, 진도 내 모습에서 자신을 본 걸까? 그래서 같은 후회를 하지 않길 바란 걸까? 그런데 어쩌죠, 이번에도 헛다리 짚었는데? 어쩌면 이렇게 너나 할 것 없이 얼간이 같은지. 너무 우스워서 눈에 눈물이 다 글썽해질 정도였다.

16548660378665.jpg“무아츠(말똥구리)!”

16548660378684.jpg“엘크크(쥐방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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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려고 하말린어를 배우기라도 한 사람들처럼, 우리가 하말린어로 서로를 비난하느라 여념이 없을 때였다. 투두둑. 서류 같은 게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려 보니 웬 남자 두 명이 문가에 서 있었다. 물고 뜯는 데 열중하느라 누가 우리를 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한 사람은 귀족인 듯 매우 반지르르하고 멀끔한 차림을 하고 있었고, 한 사람은 비서관인 듯 단정하고 꼼꼼한 인상이었다. 진이 불법적이고 비공식적인 쪽을 담당하는 어둠의 보스라면, 그들은 누가 봐도 빛의 세계에 속한 듯 보였다. 이 정보 길드에서 합법적이고 상식적이며 공식적인 영역을 담당하는 이들. 그들의 눈에 우리의 모습이 어떻게 보일지, 뒤늦게 살짝 우려가 됐다.

16548660420031.jpg“와우, 역시 화끈할 땐 화끈한 남자라니까. 진, 난 자네를 믿었네.”

16548660420035.jpg“보스…… 이번엔 진짜였던 겁니까? 속살을 본 내밀한 사이라더니…….”

16548660420031.jpg“힉스가 헛소리를 지껄이기에 이 바텐더가 대낮부터 술을 퍼마셨나 했는데. 그나저나 자네 이런 과격한 취향이었나?”

그놈의 바텐더, 아직도 나불거리고 다니나 보네.

16548660420035.jpg“아무리 보스가 방탕한 시더우드라지만 집무실에서 이러는 건 삼가시는 것이……. 레이디도 불편하실 테고요.”

비서관으로 보이는 남자가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라 당황해하며 말했다. 그러자 외모에 공을 들인 귀족 쪽이 냉큼 손을 들고 나섰다.

16548660420031.jpg“아니, 참고로 난 전혀 상관없다는 입장을 밝히네. 왠지 이쪽 취향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실제로 보니 신선한 영감과 자극을 주는군.”

16548660420035.jpg“말보르크 백작님, 친우로서 누구보다 말리셔야 할 분이 정말 이러실 겁니까? 레이디를 보십시오, 얼굴이 하얗게 질리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당신들 때문에. 당신들이 하는 말이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16548660420031.jpg“뭐, 보기만 좋은데? 그리고 아무리 친우라도 취향에 관한 문제는 건드리는 게 아니야. 영원히 안 보고 살고 싶을 때나 그러는 거지. 플록스 자넨 취향 존중이라는 말도 모르나?”

16548660420035.jpg“오해는 마십시오. 보스가 연애하시는 걸 저보다 더 기뻐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군요.”

16548660420031.jpg“플록스 자네, 우나?”

16548660420035.jpg“너무 기뻐서 눈물이…….”

대체 저 주책바가지들은 누구고 언제까지 저러고 있을 작정인지! 손이 포박돼 있는 레이디를 보면 말리거나 구해야겠다는 생각은 안 드나 보지?

16548660378684.jpg“그만.”

결국 진이 그들의 만담을 가로막고는 내 손을 묶은 구속구를 풀었다.

16548660378665.jpg‘으, 팔이야. 지독한 인간.’

나는 이를 부득 갈며 손목을 주물렀다.

16548660420031.jpg“아, 이런. 우리가 눈치 없게 방해를 했군.”

기생오라비같이 꾸민 남자가 말은 그렇게 하면서 문을 닫고 나가기는커녕 방을 가로질러 성큼성큼 다가왔다.

16548660420031.jpg“디온 말보르크라고 합니다. 진의 친우이자 동료지요.”

이 상황에 통성명을 해야 하나 어째야 하나 망설이는데 진이 아직 문가에 서 있는 샌님을 향해 말했다.

16548660378684.jpg“플록스, 레이디 앰브로시아를 배웅해 드리게.”

16548660420035.jpg“예? 예에…….”

진의 축객령에 나는 망설임 없이 이 지긋지긋한 곳을 나섰다.

16548660378665.jpg‘이 정도면 됐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잖아. 더 이상 어떻게…….’

지금까지의 일을 떠올리니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쳐 걷는데 플록스라고 불린 남자가 허겁지겁 뒤따라오며 다급하게 불렀다.

16548660420035.jpg“레이디, 레이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레이디!”

내가 우뚝 멈춰 서자 그가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16548660420035.jpg“이대로 가시는 건 아니지요?”

이대로 가지 않으면 여기서 볼일이 더 남았을까 봐? 아하, 프러너스가 이 정보 길드에 내 뒷조사를 의뢰했다고 했지? 염탐해야 할 대상이 제 발로 찾아왔으니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없다 이거야? 나는 도끼눈을 뜨고서 플록스라는 샌님에게 소리쳤다.

16548660378665.jpg“내 전남편한테 가서 전해요. 나는 공작부인 자리에 요만큼도 미련이 없다고요.”

플록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16548660420035.jpg“전남편이요? 왜 전남편을 여기서 찾으시죠? 저희 보스와 교제하시는 게 아닌가요?”

나는 그보다 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맹한 소리를 흘렸다.

16548660378665.jpg“예에?”

16548660420035.jpg“진 보스와 각별한 사이가 아니신가요?”

16548660378665.jpg“…….”

16548660420035.jpg“다른 길드원들이 집무실에서 들었다는 얘기도 그렇고, 방금 제 눈으로도 확실한 장면을 목격했는데 정말 아니라고요?”

이 사람이? 확실한 장면이라니. 이유는 모르지만 그는 굉장히 실망한 눈치였다. 그는 미심쩍은 얼굴로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16548660420035.jpg“아니, 그럼 의뢰는 뭐 때문에 거절하신 거지?”

16548660378665.jpg“……?”

16548660420035.jpg“말보르크 백작님이 분명 그러셨는데. 보스가 돈을 마다하는 건 처음 본다고.”

16548660378665.jpg“의뢰라니요? 어떤 의뢰?”

16548660420035.jpg“카를슈테인 공작의 의뢰 말입니다. 그러니까 레이디와도 관련이 있는 그…… 알고 계시지요?”

16548660378665.jpg“진이 그 의뢰를…… 거절했다고요?”

프러너스가 정보 길드에 내 뒷조사를 의뢰했다는 사실과 진이 그 의뢰를 거절했다는 사실. 잇따라 알게 된 두 개의 벼락같은 사실에 혼란스러워진 나는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16548660378665.jpg“진이 의뢰를 거절했다는 게 확실한가요?”

16548660420035.jpg“그렇습니다. 중간에서 저희가 얼마나 곤란했는지. 보스는 대수롭지 않게 엎어 버리라고 했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쉽습니까. 무려 카를슈테인 공작이라고요.”

16548660378665.jpg“그런데 방금 나한테는 왜…….”

왜 그런 식으로 말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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