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거친 사내들을 울렸습니다2022.01.17.
예상하지 못한 비유라 잠시 멈칫했다. 아기 고양이는 귀엽잖아? 물론 지금은 칭찬이 아니라 욕으로 한 말이겠지. 하지만 진이 평소답지 않게 내 머리를 꽤 애지중지 감싸 안고 있는 걸 보면 정말로 나를 아기 고양이로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인데.
“그 녀석도 천방지축으로 다니더니…….”
나를 구하다가 설마 머리를 다친 걸까. 진이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아까 웃을 때부터 상태가 좀 이상하더니.
“그 녀석이 누군데요?”
“키키.”
“키키요? 사람인가요?”
“당신처럼 조심성 없는 고양이였지. 녀석도 그렇게나 말을 안 듣고 여기저기 아무 데나 작은 머리를 들이밀더니 결국 마차에 치여서는…….”
가뜩이나 경황도 없는데,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여하튼 키키라는 아기 고양이와 슬픈 일이 있었구나.
“하루에 얼마나 많은 목숨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줄 알아? 잠깐의 방심으로 말이야. 그렇게 무서운 세상이야. 그때마다 마침 누가 지나가다 도와줄 것 같아?”
내가 죽을 만큼 다친 것도 아니고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는데, 실수 한번 한 것 가지고 너무 고양이, 아니 쥐 잡듯이 잡는 거 아닌가? 아련한 추억에서 완전히 빠져나왔는지 진이 본격적으로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
“대체 아는 게 뭐야? 기본적인 상식도 없나?”
“무슨 말이 그래요? 말 뒤로 다가가면 안 된다는 거야 알고 있었죠. 하지만 평소엔 주로 마차를 타고 다니잖아요. 말 가까이 갈 일이 별로 없었던 터라 방심한 것뿐이에요.”
“방심한 정도가 아니라 말 엉덩이에 얼굴을 갖다 묻겠던데?”
“가끔 실수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가끔이 아니니까 그렇지. 그렇게 움직일 때마다 실수 연발이면서 어떻게 혼자 살겠다는 거야?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줄 알아?”
진은 말하면서 점점 더 짜증이 치솟는 듯했다.
“내가 안 보는 데서나 그러든지. 왜 사람을 쫓아다니면서 눈앞에서 귀찮게 굴어?”
쫓아다니다니. 귀찮게 굴다니! 너무나 억울하고 답답해 울화가 치밀었다. 나는 어떻게든 당신 살려 보겠다고 되지도 않는 억지 고백에 손까지 포박당하는 수모를 겪으며 고군분투했는데.
“일부러 그러는 건가? 열차에서도 그러더니. 내 순발력과 인내심을 시험하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냐고.”
아무리 진이 나를 위험에서 구해 줬다지만, 남의 속도 모르고 저렇게 비딱하게 나오니 더 이상 고맙다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하기 무안하고 점점 기분이 상하기 시작했다. 거기다 있지도 않은 의도까지 들먹이며 이죽거리니 나 역시 말이 비딱하게 나갔다.
“네, 쫓아다니면서 귀찮게 해서 정말 미안하네요. 그렇게 귀찮으면 그냥 내버려 두면 됐을 텐데. 아, 그러기엔 당신 순발력이 너무 좋은가? 싫어도 몸이 저절로 움직이나 보네요.”
진의 미간에 주름이 확 가는 게 제대로 열 받은 것 같았다. 내 턱을 낚아채더니 거친 숨을 마구 쏟아냈다.
“사는 게 그렇게 쉬워? 죽는 게 그렇게 우스워? 당신이야 사라져 버리면 그만이겠지. 괴로움은 남은 사람들의 몫일 테니.”
나만큼 사는 것도 죽는 것도 힘든 사람이 어디 있다고! 여러 번 죽었다 살아나 봤지만 누가 나 때문에 괴로워했다는 소린 들어보지 못했다. 가장 훌륭한 공작의 가장 훌륭한 공작부인. 한때 사람들이 나를 표현하던 말이다. 어느 생인가는 ― 5회차였나 6회차였나? ― 황태후가 ‘귀부인의 모범’으로 내 이름을 특별히 언급하기도 했다. 다시 말해 나는 결코 머리가 나쁜 사람도, 불성실한 사람도, 할 줄 아는 게 없는 사람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말 뒤에 서 있으면 안 된다는 걸 깜빡했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할 줄 몰라서 주변에 민폐나 끼치는 덜떨어진 여자 취급을 받고 있었다. 요란한 소리에 놀라서 달려온 사람들이 아까부터 우리 주위를 서성였지만, 진의 서슬에 선뜻 다가오지 못하고 물러나 있었다. 이제야 그 사람들을 의식했는지, 진이 입술을 내 귀에 바짝 들이대고는 뜨거운 숨을 토해내며 비아냥거렸다.
“공작부인이면 공작 옆자리나 지키고 있어야지. 왜 어울리지도 않은 짓을 한답시고 여러 사람 피곤하게 만들지?”
“뭐라고요?”
돌아가지 않겠다고, 아니 난 이제 돌아갈 곳이 없다고 한 게 벌써 몇 번인가. 그런데 공작부인 자리나 지키라니. 게다가 공작이 얼마나 비열한 인간인지 본인도 잘 알면서. 그래서 그의 의뢰도 거절했으면서. 그런데도 있던 데로 돌아가서 살던 대로 살다 죽지도 못하고 또 살라고? 아무리 놀라고 화가 나서 하는 말이라도 서러운 마음이 치밀었다. 당신이 먼저 내 하말린어 실력을 칭찬해 줬으면서. 처음으로 날 인정해 줬으면서. 공작부인이 아니라 통역사로. 마치 그 모든 게 별것 아니었다는 듯 말하는 것처럼 들려서 배신감마저 들었다. 게다가 정말로 사람 귀찮고 골치 아프게 만드는 게 누군데! 당신이 아니었으면 나는 지금쯤 내 아름다운 정원에서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맨발로 기분 좋게 산책하고 있었을 거라고. 이런 차가운 장제소 바닥이나 구르는 게 아니라! 나도 그의 귓불을 이로 짓이기고 싶은 걸 간신히 참으며 이를 악문 채 속삭였다.
“남 인생에 참견 말고 당신 앞가림이나 잘하시지. 지금 누가 누굴 피곤하게 하고 있는데에!”
여전히 바닥에 누운 채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서로의 귓바퀴를 노리고 있을 때였다. 투두둑. 또 서류 같은 게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기시감을 느끼며 눈을 들어 보니 아니나 다를까 말보르크 백작과 플록스가 우리를 묘한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진, 그새를 못 참는군. 이 혈기왕성한 친구 같으니라고.”
기생오라비 백작이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아니, 이러실 거면 왜 같이 안 간다고 고집을 피우시는 겁니까?”
플록스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어디서까지 할 수 있는지 시험해 보는 건가? 이런 식이라면 어디 들어가기가 겁나는군. 발밑을 잘 살펴야겠어.”
건수를 잡은 백작이 신나서 드릉드릉 발동을 거는데, 플록스가 다가와 나를 부축해 일으켰다.
“레이디 괜찮으십니까?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그러면서 진 몰래 내게 눈짓을 했다.
‘맞아, 진과 다투느라 깜빡하고 있었네.’
말 엉덩이에 얼굴을 디밀었다가 예기치 않게 상황이 좀 꼬이긴 했지만, 내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플록스가 낸 아이디어, 이름하여 ‘청개구리 유인 작전’을 시도해 보기로 했지. 그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플록스가 진을 유인하러 간 사이에 잠깐 장제소 구경을 왔고, 이 사달이 난 것이었다.
‘아아주 잘되었어요, 진.’
그 계획을 떠올린 나는 갑자기 기분이 나아졌다. 심장의 피가 손바닥까지 용솟음치는 듯했다. 기왕 진을 살리기로 마음먹은 거, 이젠 한시라도 빨리 끝내고 싶었다. 그를 예정된 죽음에서 구하고, 나 역시 깔끔하게 손을 털고 내가 계획한 삶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자면 플록스가 말한 대로, 진이 결코 거부할 수 없는 확실한 한 방이 필요했다. 다시 카페로 무대를 옮기니 기대로 반짝반짝 빛나는 수많은 눈들이 단번에 우리에게 쏠렸다. 나는 무대 한가운데로 나아가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진을 도발했다.
“진, 나와 함께 토버마리로 가요.”
그러자 진이 대수롭지 않은 듯 화답했다.
“그래.”
“네?”
뭐야? 이렇게 쉽게 간다고?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플록스의 아이디어는 이대로 폐기 처분되는 건가? 플록스를 건너다봤더니 그 역시 당황한 눈치였다. 혹시…… 절박하고 위험한 상황에 처하고 보니 뒤늦게 내 소중함을 깨달았다는, 뭐 그런 얘기? 그렇다고 보기엔 방금 전까지 나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던 진의 태도는 조금의 가식도 없이 진심 중에서도 상 진심이었는데?
“대신 조건이 있어.”
“어떤 조건…….”
“여기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말이야.”
진이 좌중을 한 바퀴 둘러보고는 말을 이었다.
“마지막으로 웃은 지 십 년, 이십 년 된 암울한 사람들이거든. 웃겨 봐. 이들을. 당신 노래로.”
그럼 그렇지. 진이 웬일로 고분고분 승낙한다 했다. 열차에서 내 노래를 들은 적 있는 진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시키면 내가 곤란해하며 꽁지를 뺄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진을 보니 한쪽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올라가 있었다. 그 호선의 모양이나 각도가 참 얄밉기도 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진은 모르고 있었다. 모두의 짐작과 달리 내가 노래 부르는 걸 매우 좋아한다는 사실을. 원래 하는 사람이 민망해하지 않으면 시킨 사람이 도리어 민망해지는 법. 민망하기만 한가, 진은 레이디의 약점을 일부러 들추어 곤란하게 만든 야비한 놈팡이가 되는 거지. 마음껏 노래만 불러도 동정표를 얻어 여론을 내게 유리한 쪽으로 돌리고, 진을 그리치 밖으로 데려갈 수도 있으니 이거야말로 일석이조 아닌가. 진, 내게 망신을 주려고 이런 일을 벌였겠지만, 천만에. 망신은 당신 몫이야. 나는 사양치 않고 우아하게 자세를 잡은 후, 유명한 북부 민요 ‘앤은 내가 만든 푸딩을 좋아했지’의 개구리 버전을 부르기 시작했다.
“나의 아름다운 미고는 좋아했지, 내가 잡은 개구리를.”
고상한 귀부인이 우아한 자세로 음정도 박자도 엉망인 채 괴상한 노래를 부르는 모습. 나도 안다. 세상에서 가장 웃긴 모습이라는 걸. 그러나 지금은 최대한 우스꽝스런 모습이 되는 것이 내게 유리하다.
“미고는 사랑한다고 말했지. 나를? 아니면 개구리를?”
눈을 지그시 감고 노래 부르는 데 열중하던 나는 카페 안이 너무 조용한 것 같기도 하고, 청중의 반응이 궁금하기도 해 슬쩍 눈을 떠 보았다.
‘이런…….’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나는 그만 당당하던 목소리가 떨리고 말았다. 여기 있는 이 장정들의 됨됨이가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배를 움켜잡고 발을 구르며 웃고 싶을 텐데도 그들은 이를 악물고 웃음을 참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눈은 이미 인내심의 한계를 넘은 듯 텅 비어 있었다. 웃음의 법칙 하나. 참으려 할수록 참을 수 없게 된다. 고개를 푹 숙인 채 허벅지를 쥐어뜯는 그들의 모습은 고행 그 자체였다. 웃음보다는 울음을 참고 있는 듯 괴로워 보였다.
‘그냥 시원하게 웃어도 되는데.’
웃음의 법칙 둘. 전염성이 강하다. 그러다 누구 한 사람이 참지 못하고 ‘푸’ 소리를 내자 웃음의 둑이 와르르 무너졌다. 그다음부터는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웃음의 해일이 카페를 집어삼켰다. 얼굴을 우그러뜨린 채 눈꼬리에 눈물까지 매달고서 지진이라도 난 듯 거대한 어깨를 들썩이면서도 그들의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의리를 지키지 못해 미안합니다, 레이디.’
그 북새통 속에서도 나는 마음을 다잡고 차분하게 완창을 했다. 노래가 끝나자 카페 안은 호흡곤란 환자로 넘쳐났다. 거칠고 우락부락해 보이는 이 청중들은 의외로 실크처럼 부드럽고 고운 감성을 지니고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에 분명 흠모의 빛이 가득했다. 심지어 방금 전 나와 함께 청개구리 소탕, 아니 유인 작전을 모의한 플록스마저 내게 반한 듯한 표정이었다. 이놈의 매력은 도무지 숨길 수가 없군. 이로써 토버마리 행 티켓은 확정이었고, 여기서 조용히 일을 마무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플록스가 세운 작전을 한번 확인해 보고 싶은 강한 충동이 일었다. 진에게 악감정이 있어서는 결코 아니고. 나는 몸을 돌려 진을 바라봤다. ‘이게 아닌데’ 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일부러 한 발 한 발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심장 쫄깃거리라고. 진짜 쇼는 지금부터 시작될 참이었다.
“이제 꼼짝없이 토버마리로 가야겠네요. 먼 길 가기 전에 내가 당신께 충고 한마디 올릴게요.”
뜬금없는 제안에 진의 눈이 의아함과 불길함으로 일렁였다.
“우선은 말이죠, 노래를 못 부른다고 노래 부르는 걸 싫어할 거라고 단정하는 건 당신의 착각이고 편견이죠.”
나는 늘 노래 부르는 걸 좋아했다. 노래 부를 기회가 생기면 마다하지 않았다. 평소 노래 부르기를 자제한 건 내 노래가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남들이 견디기 힘들어해서였다.
“명심해요. 당신의 어리석은 착각과 편견이 당신의 발목을 잡은 거란 사실을.”
내가 여전히 프러너스에게 미련을 가지고 있을 거라 확신하는 것 역시 당신의 착각이고 편견이라고! 나의 금과옥조와도 같은 충고에 진의 눈가가 티 나지 않게 떨렸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여기서부터는 플록스 플랜.
“남의 삶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의 잣대로 이러쿵저러쿵 쉽게 평가를 내리고.”
나는 숨을 가다듬었다.
“남의 노력과 정성을 비웃고 조롱하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알아두도록 해요.”
자, 가자, 로제트!
“이렇게 된답니다.”
나는 손을 들어 있는 힘껏 진의 따귀를 갈겼다. 짝! 찰진 소리가 카페 안을 깔끔하게 관통했다. 진의 고개가 홱 돌아가는 걸 보고서야 아차 싶긴 했다. 초보자의 흔한 힘 조절 실패. 구경꾼들의 환호와 박수, 휘파람 소리가 카페 안을 가득 메웠다. 로제트 앰브로시아의 맹목적인 추종자들이 탄생한 순간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