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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끝까지 추하게 (27/110)

#27화. 끝까지 추하게2022.03.04.

나의 과도한 아젤리아 걱정에 프러너스의 단단한 가면에도 실금이 갔다.

16548663365174.jpg“솔직히 당황스럽군. 마치 진심으로 두 사람을 이어 주고 싶은 것 같아.”

프러너스는 ‘두 사람’이 다른 누군가인 것처럼 말했다.

1654866336518.jpg“믿기지 않겠지만, 진심이에요. 당신이 원하는 삶을 살게 해 주고 싶어요. 물론 나도 원하는 삶을 살고요.”

프러너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1654866336518.jpg“나는 진심으로 이혼을 원하고 있어요. 이혼을 빌미로 무슨 거래를 하려는 건 더더욱 아니고요. 당신에게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프러너스는 진중해 보이는 얼굴로 내 말을 곱씹는 듯했다. 이제라도 그가 내 진심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행복을 찾아 떠나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어진 프러너스의 말은 내 안일한 생각을 보기 좋게 비웃었다.

16548663365174.jpg“진 저자가 당신에게 바람을 넣었나?”

안타깝게도 그는 내 생각보다 더 어리석었다.

1654866336518.jpg“아, 그렇죠, 잊고 있었네요. 당신이 정보 길드에 내 뒷조사를 의뢰했다면서요? 그 일에 대한 사과부터 받아야겠군요.”

16548663365174.jpg“당연한 거 아닌가? 아내가 호위나 수행원도 없이 집을 나갔는데 걱정이 안 된다면 그게 이상한 거겠지. 바깥세상이 얼마나 흉흉하고 위험한지 순진한 당신은 아무것도 모를 텐데.”

하, 이런 걸 고양이 쥐 생각해 주는 꼴이라고 하나. 당신 말처럼 한때 나는 세상 물정도, 사람 볼 줄도 모르는 순진하고 멍청한 여자였지. 하지만 세상이 얼마나 살벌하고 비정한 곳인지, 인간이 얼마나 비열하고 무서운 동물인지 가르쳐 준 이가 있었어. 바로 당신, 프러너스 카를슈테인.

1654866336518.jpg“내가 누굴 만나고 다니는지는 왜 궁금했던 거예요? 아니, 왜 내가 누굴 만날 거라고 생각했죠?”

16548663365174.jpg“당신이 공작저를 벗어나는 순간, 당연히 온갖 추잡한 놈들이 달라붙을 테니까. 당신을 이용하기 위해 더러운 수작을 부릴 테고. 당장 저 진이라는 작자를 봐.”

1654866336518.jpg“아니요, 진이 나에게 달라붙은 게 아니라 내가 진에게 달라붙은 거예요. 이 점을 분명히 해 두어야겠네요.”

16548663365174.jpg“뭐?”

프러너스의 얼굴이 구겨졌다. 아무래도 나는 그가 인상을 쓸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는 변태인가 보다.

16548663365174.jpg“그자가 어떤 자인 줄은 알고 있어? 정말로 당신 부탁 때문에 여기 있다고 생각하나?”

1654866336518.jpg“그 사람에 대한 소문과 평판은 나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알잖아요? 소문은 진실이 아니라는 거. 내가 직접 겪어 본 그는 소문과 달랐어요.”

16548663365174.jpg“이러니 당신을 걱정하지 않을 수 있나. 그자가 우연히 당신 앞에 나타났을 거라고 생각하나? 사심 없이 당신에게 잘해 줬을 거라고 믿어?”

1654866336518.jpg“나도 내 필요 때문에 그에게 접근한 걸요. 사심이 있었다 해도 피차 마찬가지예요.”

내 솔직한 발언에 프러너스는 잠시 멈칫했지만, 곧 다시 진을 헐뜯기 시작했다.

16548663365174.jpg“저런 자들은 사람의 곤경이나 외로움을 이용해. 하지만 결코 사람에게 진심으로 호의를 가질 수 없는 자들이지. 그자가 바라는 건 오직 돈이야.”

1654866336518.jpg“그건 진 스스로 늘 떠들고 다니는 말이에요.”

프러너스는 가끔 골치 아픈 일이 생겼을 때 하던 대로 자신의 반듯한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16548663365174.jpg“로제트, 자신만은 예외라고 생각하겠지? 그가 당신에게만은 진심일 거라고 생각할 거야. 그건 당신 잘못은 아니야. 그게 그자들의 수법이니까.”

프러너스의 말에 나는 씁쓸해졌다. 말의 내용 때문이 아니었다. 나 역시 꼭 같은 생각을 했다는 사실이 떠올라서였다. 진이 어떤 행동을 하든 그건 다 바라는 게 있어서라고 여기기로 결심했으니까. 내가 다치지 않기 위해. 지금까지 나는 프러너스보다 조금은 나은 사람이라고 자부했지만, 이 순간 과연 그런지 의심스러워졌다.

16548663365174.jpg“그가 혹시 위자료나 당신 명의의 재산을 관리해 주겠다고 하진 않던가? 자기 사업에 투자하라고 하진 않았어? 재산을 몇 배로 불려 주겠다면서.”

1654866336518.jpg“내 재산……?”

16548663365174.jpg“아니면 당신의 동정심을 자극해 돈을 융통해 달라고 하진 않아?”

내가 황당한 표정을 짓자 프러너스는 제멋대로 넘겨짚었다.

16548663365174.jpg“역시 그랬군. 그런 자들의 흔한 수법이지. 그렇지 않고서야 그자가 왜 뜬금없이 당신을…….”

내 표정이 싸늘해지자 프러너스가 말을 골랐다.

16548663365174.jpg“내 의뢰를 거절했기에 하는 말이야. 내가 왜 진의 정보 길드를 택했는지 알아? 그가 내 아카데미 동기이기 때문이었어. 아무 곳에나 당신 일을 부탁할 순 없으니까.”

나를 그토록 끔찍이 아꼈을 줄이야. 정말이지 끔찍한 핑계였다.

16548663365174.jpg“그를 믿고 부탁했는데 결과는 황당한 거절이더군.”

1654866336518.jpg“의뢰를 거절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16548663365174.jpg“아니, 제대로 된 사고를 하는 사람이면 내 의뢰를 거절할 수 없어. 당신은 권력이나 비즈니스 세계의 생리를 잘 모르겠지만.”

1654866336518.jpg“진은 오직 이익을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라면서요? 그렇다면 당신과 척을 져서 그가 얻을 이익이 뭐죠?”

16548663365174.jpg“나를 망신 주려는 거겠지. 당신을 농락하는 게 내 위신을 떨어뜨리는 일이 될 테니까. 세상엔 그런 걸 바라는 자들도 있지.”

그렇지. 당신은 세상이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부류지. 분하지만 어느 정도는 실제로 그렇기도 하고.

16548663365174.jpg“아니면 내가 제시한 의뢰비보다 당신에게 뜯어낼 것이 더 많다고 판단했든지.”

자신만이 너무나 소중해서 다른 사람의 상처는 하찮게 여기는 부류이기도 하고.

1654866336518.jpg“그러니까 나의 가치라는 건 오직 그런 거란 말이군요. 당신을 망신 주는 빌미이거나 돈을 등쳐먹을 호구이거나.”

내 말에 프러너스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프러너스 앞에서 이런 식으로 말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정말로 진에게 조금 물들긴 했나?

16548663365174.jpg“당신 그사이 좀 달라진 것 같네.”

1654866336518.jpg“난 원래 이랬어요. 그동안은 당신 앞에서 내숭 떤 거예요.”

이대로 얼마 있지도 않은 정마저 확 떨어져 버렸으면. 그러나 내 바람과는 전혀 다르게, 프러너스의 눈에서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빛이 일렁였다.

1654866336518.jpg‘저건 무슨 반응이야?’

그의 눈에서 욕정 같은 걸 본 듯해 나는 흠칫 놀랐다. 설마 잘못 본 것이겠지. 하지만 그는 갑자기 손을 뻗어 내 턱을 쥐더니 말했다.

16548663365174.jpg“앞으로 내숭 같은 건 떨지 마.”

1654866336518.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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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사랑의 이혼을 기점으로 점잖은 공작이 발정이라도 난 건가. 그는 다시 손을 뻗어 이번엔 흐트러진 내 머리칼을 다정히 귀 뒤로 넘겼다. 그의 손가락이 내 귓불을 스쳤다. 언제나 얼음처럼 냉랭하던 그의 파란 눈동자가 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정색을 하고 말했다.

1654866336518.jpg“당신 말대로 아젤리아도 진도 아닌 우리 얘기를 해 보죠. 이혼 말이에요.”

하지만 그는 내 말엔 아랑곳없이 어느 틈엔가 내 왼손을 쥐고 손등에 자신의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여전히 내 손에 입술을 붙인 채 눈만 들어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사파이어처럼 차갑지만 신비롭던 그의 눈이, 그래서 나를 아프게 하면서도 설레게 했던 그 눈이 이렇게 느물거려 보일 수가 있다니. 가슴이 서늘하게 얼어붙었다. 마침내 내 손에서 입술을 뗀 그가 말했다.

16548663365174.jpg“우리 이야기, 좋지. 부부끼리 거리낌 없이 얘기해 보지.”

그의 어투가 수상쩍다 싶더니, 대화를 나누는 대신 내 허리를 끌어당기는 게 아닌가. 피할 틈도 없이 그가 내 목에 입술을 묻고 지분거리기 시작했다. 내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 나는 꽥 소리를 지르며 온 힘을 다해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몇 발짝 뒷걸음치던 그는 처음엔 어리둥절한 표정이더니 곧 입꼬리를 야릇하게 비틀었다. 내 비명 소리를 들었는지 진이 문을 두드리며 물었다.

16548663407897.jpg“레이디 앰브로시아, 괜찮나?”

내가 뭐라고 대답할지 몰라 망설이는데, 프러너스가 내 얼굴과 문 쪽을 번갈아 보더니 픽 웃었다.

16548663365174.jpg“재미있군. 가출한 사이 남자를 애태우는 법도 배웠나? 아니, 비꼬는 게 아니야. 나로 말하자면 나쁘지 않아.”

눈앞이 하얗게 된다는 게 이런 걸까. 프러너스를 향한 분노가 내 몸 구석구석을 망가뜨렸다.

16548663365174.jpg“그래, 당신이 이러는 것도 이해가 가. 그동안 내가 당신에게 너무 소홀했지? 우리 이야기를 더 깊숙이 나눠 보지.”

그는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들을 생각이 없었다. 이혼하자는 말도, 돌아가지 않겠다는 말도, 아젤리아와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는 말도 그저 자신을 자극하기 위한 어설픈 몸부림이나 앙탈 정도로 받아들였다. 내 정성을 갸륵하게 여겨 다시 기회를 주겠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괜찮은 척하니까 정말로 괜찮은 줄 알아?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줄 아냐고! 열일곱 번의 삶을 반복하는 내내 당신 때문에 내가 얼마나 비참하고 아프고 아팠는지 알아? 그런데 뭐라고? 재미있어? 나쁘지 않아?

1654866336518.jpg“프러너스, 미안하지만 당신의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겠어요.”

나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1654866336518.jpg“나는 이혼과 관련한 일들을 조용히 마무리하고 싶었어요. 곧 이혼할 사이에 당신에게 굳이 이런 소식까지 전할 필요가 있을까 했고요.”

프러너스의 반듯한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이제 시작인데, 벌써부터 인상 구기지 마시지.

1654866336518.jpg“아까 나와 진 사이엔 돈 말고 있을 게 없다고 했죠? 물론 당신 말도 완전히 틀린 건 아니에요. 맞아요, 처음엔 그렇게 시작됐죠.”

진, 정말 미안합니다! 한 번 더 나를 도와줘야겠어요.

1654866336518.jpg“하지만 어쩌다 보니 우리 사이에 다른 게 생겨나고 말았어요.”

프러너스가 미처 어떤 반응을 보이기 전에 나는 문 쪽으로 다가갔다. 문을 열어젖히니 바로 앞에 진이 서 있었다. 방금 들린 비명 소리 때문에 방 안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다짜고짜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1654866336518.jpg“진, 방금 프러너스에게 우리 사이를 말했어요.”

16548663407897.jpg“우리…… 사이를. 프러너스에게…… 말했군.”

눈치 빠른 진은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눈빛으로 물었다.

16548663407897.jpg‘이번엔 또 뭔데?’

나는 프러너스 몰래 잠깐 울상을 지어 보이고는 진에게 냉큼 팔짱을 꼈다.

1654866336518.jpg“프러너스, 당신의 의심이 맞아요. 진은 내 부탁 때문에 여기 온 게 아니에요. 실은 이이는 호위가 아니라 내 연인이에요.”

그리고 사랑스러운 눈길로 올려다보는 척하며 재빨리 진의 기색을 살폈다. 프러너스의 반응보다 진의 반응을 살피는 것이 더 시급했다. 진은 언제나 그랬듯, 당황하는 기색 없이 느긋했다. 하긴 소녀 유령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키스도 했는데 산 사람 앞에서 가짜 연인 행세쯤이야. 진의 표정에서 뭔가 해탈한 듯한 경지가 느껴졌다. 자포자기라고 해야 하나. 나는 미안함의 표시로 진의 손을 꽉 쥐었다 놓았다. 진이 내 얼굴을 한번 들여다보더니 프러너스에게 말했다.

16548663407897.jpg“그렇게 됐어.”

나와 진이 하는 양을 지켜보던 프러너스가 말없이 소파로 가더니 우리를 향해 팔짱을 끼고 앉았다. 마치 연극을 관람할 준비를 마쳤다고 말하는 듯했다.

16548663365174.jpg“두 사람이 연인 사이라…….”

프러너스는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그렇다. 그는 절대로 속이는 줄 알면서 속아 주는 부류가 아니었다. 그는 내 머릿속을 해부하려는 사람처럼 메스 같은 눈빛으로 나를 겨누었다.

16548663365174.jpg“그래서 어쩔 셈이지?”

1654866336518.jpg“당신과 이혼하고 진과 소박하게 새 출발을 해 보려고요.”

16548663365174.jpg“진, 아니 황자께서 그러자고 하던가?”

1654866336518.jpg“내가 먼저 그러자고 했어요.”

16548663365174.jpg“진 황자 같은…… 이가 당신의 그 말을 쉽게 받아들이다니. 신기하군.”

진 같은 이라니 어떤 점을 말하는 걸까? 걸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프러너스가 질문을 몇 번씩이나 한다는 건, 이 상황을 조금도 믿지 않는다는 표시. 그는 저렇게 질문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저 내가 어떻게 나오는지 구경이나 해 보자는 심산이리라. 어떻게 대꾸하면 그럴듯할까 고민하는데 진이 먼저 나섰다.

16548663407897.jpg“쉽게 받아들였을 리가. 로제트와 이런 사이가 되지 않기 위해 나로선 안간힘을 썼지.”

갑작스런 대사에 나는 불안한 눈으로 진을 흘끔거렸다. 연극 중에 진심 고백하기 있어요?

16548663407897.jpg“공작도 알겠지만 나라는 인간은 로제트에게 어울리지 않지. 워낙 엉망으로 굴러먹었잖아. 내가 아무리 양심이 별로 없는 인간이라도, 로제트의 남자가 되기엔 한참 부족하단 건 알아.”

아, 그런 설정이었어요? 놀랐잖아요.

16548663407897.jpg“하지만 어느 순간 로제트가 없이는 숨을 쉴 수가 없겠더라고. 내가 당장 죽겠는데 어떡해? 로제트에겐 미안하지만.”

진은 나름 애틋한 눈빛을 나에게 보냈다. 연기라도 괜히 뭉클해지네.

16548663407897.jpg“인생을 송두리째 걸어도 상관없다는 이런 마음, 공작이 누구보다 잘 알지 않나?”

이 와중에 프러너스의 외도를 상기시키며 은근슬쩍 한 방 먹이기까지. 맞아, 부부의 신의를 깨뜨린 건 프러너스 당신이잖아. 그 점을 생각하니 어째서 내가 이런 연기까지 하고 있는 건지 새삼 분통이 터졌다. 첫사랑과 잘 살아 보라고 시원스레 밀어주고 훌훌 떠나면 모든 게 제자리를 찾고 강물처럼 유유히 흘러가게 될 줄 알았는데. 삶이란 참으로 심술궂고 얄궂다. 우리의 연기를 가만히 지켜보던 프러너스가 감흥 없는 얼굴로 진에게 물었다.

16548663365174.jpg“두 사람이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텐데, 로제트의 어떤 면에 푹 빠진 걸까? 그렇게 새사람이 될 만큼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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