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침대에 관한 견해 차이2022.03.07.
프러너스는 갑자기 초조해졌을 것이다. 자신이 처박아 두었던 하찮은 물건에 혹시 미처 파악하지 못한 값어치가 있었던 건 아닌가 하고. 약삭빠른 도적이 그걸 알아채고 슬쩍 빼돌리려는 건 아닌가 하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의 어떤 점이 그리도 좋았느냐고 면전에서 묻다니. 내가 정말로 물건도 아닌데. 프러너스의 무례한 질문에 진이 천연덕스런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그걸 모른다고? 그럼, 이제 와서 굳이 알려고 하지 마.”
두 사람 다 모르긴 마찬가지겠지……. 진의 대처에 안도하는 한편, 프러너스의 의도가 치사했다. 진이 내게 빠진 게 그렇게 희한한 일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 없을 만큼? 그때 프러너스가 어울리지 않게 이죽거렸다.
“아니, 황자 전하의 취향이 많이 바뀐 거 같아서. 황후 폐하께서 좀 섭섭하시겠군.”
귀를 의심케 하는 말이었다. 비록 남의 눈을 의식한 가식이라 해도, 공작은 품위에 죽고 품위에 사는 인간이었다. 그런데 얄팍한 가식마저 집어던지고 진흙탕 싸움을 하자고? 야비하게 황후까지 들먹이면서?
“취향이야 움직이는 게 흔한 일 아닌가? 난 오히려 공작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취향이 그리 한결같을 수 있는지.”
아리스타타를 들먹인 것 때문에 혹시나 진의 눈이 돌아갈까 걱정했는데, 내게 이미 당할 만큼 당해서인지 다행히 내성이 생긴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공작의 한결같은 취향에 감사해야 할 것 같군. 덕분에 로제트가 내게 올 수 있었으니까.”
진은 다시 그윽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주책맞게 두근거렸던 감정이 되살아났다. 그만큼 진의 연기가 훌륭하다는 소리다. 진이 정말로 사랑에 빠진 남자 같은 얼굴을 하고 말했다.
“특별해. 로제트 같은 여자는 어디에도 없어.”
흠흠, 그동안 내가 유별난 짓을 좀 많이 하긴 했죠. 그동안 고생 많았습니다.
“손짓 하나, 눈빛 하나가 다 신경이 쓰여. 내 신경을 온통 끌어당겨서 도무지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어.”
압니다, 지끈지끈 커다란 두통거리죠. 그런데 이거 지금 연기 맞죠? 이러다 명배우로 거듭나겠어요.
“당신을 보면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우습지. 어차피 살지, 그럼 안 살 건가.”
연기…… 맞죠? 보고 있는데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픈 거지?
“당신의 올리브색 눈과 밀색 머리칼을 보면, 뭐랄까, 먹고 싶어져.”
네? 그 대사는 좀…….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말하고 보니 자기가 생각해도 오해를 불러일으킬 말이다 싶었는지 진이 정정했다.
“아, 그러니까 맛있어 보인다는 뜻이야.”
더 이상하잖아요.
“그러니까 살고 싶다는 말이야.”
굉장히 수수께끼 같은 말이지만, 나는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알아들었다. 진은 어떤 음식을 맛있어서, 먹고 싶어서 먹은 적이 매우 드물고 오래됐을 터였다. 아니,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반쪽짜리 시더우드들은 어렸을 때부터 독살 등으로 목숨을 위협받는다고 하니까. 그러니까 누군가가 맛있어 보인다는 건 진으로선 굉장한 애정 표현이겠지? 물론 연기지만.
“특히 로제트의 윙크는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녹여 버리지. 그건 공작도 잘 알고 있을 테지.”
그사이 완전히 잊혔던 프러너스 보릿자루 공작을 그제야 기억해 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는지 그의 얼굴에서 처음의 여유는 사라져 있었다. 난생처음 패배감을 맛보고 있을까? 갖고 싶은 걸 손에 넣지 못한 경험은 그로선 지독히 낯선 것이겠지. 하물며 지금껏 갖고 싶다는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는 상대에게 거절당한 기분은? 프러너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아직도 나의 미련함에 희망을 걸고 있는 듯했다. 그의 눈에 여전히 오만함이 살아 있었다.
“난 로제트의 말을 듣고 싶군.”
여러 번 살다 보니 그 대단하신 카를슈테인 공작이 내가 하는 말을 다 듣고 싶어 했다.
“솔직히 말하지. 난 믿기가 어렵군. 당신에게 지금껏 남자는 나밖에 없었다는 걸 알아. 당신의 새 애인이 나와 엇비슷한 사람이라면 또 모르겠군. 하지만 멀어도 너무 멀잖아?”
지금까지 남자에 관한 나의 모든 기준이 프러너스에게 맞춰져 있었다는 걸 인정한다. 그래서 진에게도 보통 남자 같지 않다는 망언을 했던 거고. 둘은 달라도 너무 달랐으니까. 진은 과거에 내가 가지고 있던 기준에서 너무나 벗어나 있었으니까.
“그랬죠. 하지만 공작저를 나온 후 알게 됐어요. 내가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걸. 세상엔 참으로 다양한 기준과 취향이 있더군요.”
“그래, 취향을 바꾼다는 게 누군가에겐 손바닥 뒤집듯이 쉬운 일이기도 하지. 그렇지만 로제트 당신은 아니야. 당신은 그렇게 쉽게 바뀔 사람이 아니지. 난 알아.”
당신이 알던 로제트는 지난 생에 죽어 버렸어.
“나만을 바라보던 심장으로 진을 좋아하는 일은 있을 수 없어.”
대단한 자신감. 게다가 진을 앞에 두고 그런 말 하기 민망하지도 않나? 배우 보호 차원에서라도 내가 나서야 했다.
“프러너스, 우긴다고 사실이 아닌 게 사실이 되는 건 아니에요.”
프러너스는 기억을 못 하겠지만, 이 말은 사실 지난 생에 그가 내게 했던 말이었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최후의 최후까지 발악하던 내게 그는 차가운 눈으로 그렇게 말했다. 이번 생엔 그 말 당신에게 돌려줄게요. 내 진심이 이제야 조금 전해졌는지, 프러너스는 놀란 눈치였다. 딱한 양반, 그러게 당신의 취향, 당신의 심장, 당신의 기준, 당신의 첫사랑에게 썩 꺼지라니까. 시간을 더 끌었다가는 프러너스의 추한 모습만 골고루 보게 될 것 같았다. 지금은 이렇게 미워하지만, 한때 좋아했고 내 모든 기준이자 중심이었던 프러너스 카를슈테인이라는 허상. 그 허상의 몰락을 지켜보는 심정이 좋지만은 않았다.
“미안하지만 취향이 바뀌었어요. 나도 변할 수가 있더라고요. 진을 만나기 전엔 스스로도 몰랐던 사실이죠.”
딱히 연기를 위한 대사가 아니었다. 사실에 가까운 말들이었다.
‘공작저를, 프러너스를, 네가 만든 기준을 조금만 벗어나 보지 그랬니?’
나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지난 생의 모든 나에게 말했다. 내가 지금껏 반복돼 온 운명의 수레바퀴를 돌리려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 프러너스라는 운명의 게임 말도 한껏 훼방을 놓았다.
“안 돼. 아무리 그래도 이혼은 안 돼.”
“대체 왜요?”
“요즘 시대에 귀부인이 정부 한둘쯤 거느리는 건 그렇게 희귀한 일도 아니니까. 어떤 귀족도 그 정도로 이혼하진 않아.”
“그런 좋은 유행을 왜 이제야 말하는 거예요? 당신이 그렇게 이해심이 많은 사람인지 미처 몰랐네요.”
프러너스와 나는 어떻게 해도 좋게 끝낼 수는 없는 사이인 걸까. 어떤 식으로든 서로에게 상처 입히고 너덜너덜해져야 끝날 징그러운 악연인가 보다.
“정부라니요, 당치 않아요. 내가 어떻게 진에게 그럴 수 있겠어요. 소중한 내 사랑에겐 떳떳한 남편의 자리를 주어야죠.”
당신이 아젤리아에게 떳떳한 공작부인 자리를 주고 싶었듯이. 프러너스의 얼굴에 확연한 짜증이 솟았다.
“로제트, 당신은 약삭빠르지 못한 게 흠이야. 머리가 있다면 생각을 해 봐. 황금과 똥을 구분 못 하나?”
하여간 똥 이야기는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대 카를슈테인 공작도 짜증이 나니 심술궂은 언사가 막 나가는 열세 살 여자아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이 끝없이 유치한 설전을 나는 조금 과격한 방식으로 끝맺기로 결심했다. 똥똥거리며 원색적으로 나온 건 어디까지나 프러너스가 먼저였음을 분명히 해 두자.
“아니오, 오히려 그걸 구분할 수 있게 된 게 문제예요. 당신 표현을 빌리면 황금과 똥을 말이죠. 예전과 달리 그런 고마운 안목이 내게 생겼어요.”
나는 진의 탄탄한 허리에 슬쩍 팔을 두르며 최대한 요사스런 표정을 지어 보이려 애썼다. 잘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소질 없다는 말이 자꾸 사람을 주눅 들게 하네.
“특히 침대에서는 진이 당신보다 훨씬 출중하죠. 황금이라는 얘기예요.”
이런 건 진위를 확인하기도 반박하기도 힘드니까. 나의 소신 발언에 두 남자 모두 당황한 듯 방 안에 정적이 흘렀다.
“아, 물론 사람마다 잘하는 게 다를 수 있으니까. 프러너스 당신도 진보다 뛰어난 점이 있죠. 어디 보자, 사교계 예법 같은 거? 외교술? 그러니까 너무 실망은 말고요.”
내가 이렇게 자신을 띄워 주며 열연을 펼치는데 진의 호응이 너무 없다 싶어 잡고 있던 허리를 살짝 꼬집었다.
“핫하하, 내가 좀…… 잘해.”
진이 살짝 거만한 어투로 말했다. 나는 흐뭇한 얼굴로 진을 우러러보았다.
프러너스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심중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다가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후회하게 될 거야, 로제트.”
후회? 당신이 후회가 뭔지 알아? 지난 열여섯 번의 삶이야말로 후회로 점철된 답답하고 구질구질한 삶이었지. 자랑은 아니지만, 나만큼 후회를 반복한 어리석은 인간도 다시 없으리라. 감히 그런 내 앞에서 후회를 입에 올리다니. 사양할게. 이번 생에 후회하게 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프러너스 당신이야. 싸늘한 얼굴로 퇴장하려는 프러너스의 어깨를 진이 붙잡았다.
“공작, 서로를 위해 그녀를 놓아주는 게 어때?”
프러너스는 가소롭다는 듯 진의 손을 털어 내더니 조소했다.
“그건 그 유명한 방탕 황자의 방식이고.”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등을 꼿꼿하게 세우고 턱을 치켜든 채 방을 나갔다.
“축하해. 이혼 가능성에서 멀어진 걸.”
진이 소파에 털썩 기대앉더니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그 옆에 털썩 앉으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왜요? 설마 저 사람이 그런 굴욕적인 소릴 듣고도 가만있겠어요? 제국에서 최고로 잘난 공작께서? 아주 오만 정이 떨어졌을 텐데.”
진이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대체 그런 소린 왜 한 거야?”
“뭐요? 침대요? 그가 먼저 당신을 모욕했잖아요.”
“얘기했잖아. 그런 귀여운 앙탈은 모욕거리도 안 된다고.”
“아무리 그래도 면전에 대고 그처럼 무시하는 태도라니. 당신은 괜찮은지 몰라도 난 못 참아요. 이건 내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기도 하다고요.”
나의 강경한 태도에 진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자존심이 왜 거기서 나와?”
“어쨌든 당신은 명목상 내 새 애인, 심지어 정부로 지목된 사람이잖아요. 당신을 무시하는 건 나를 무시하는 거죠.”
“그거 아주 눈물 나게 고맙군.”
“당신은 왜 자신을 위해 항변하지 않아요? 그러니 별 개뼈다귀 같은 작자들까지 이러쿵저러쿵 막말을 하는 거 아니에요?”
“개뼈다귀라며 뭘 이해시키려고 해? 나한테 아무 의미도 없는 뼈다귀들이야. 정 거슬리면 묻어 버리면 그만이지 뭐 하러 입 아프게.”
진은 가끔 험한 소리를 막 한다.
“묻어요……?”
“묻는 수고도 귀찮아. 웬만해선 안 하니까 그런 눈으로 볼 건 없어.”
“당신이 가만있으면 루이 같은 겁쟁이들은 더 신나서 떠들 거예요. 그 꼴을 안 볼 수만 있다면 묻어 버리는 것도 괜찮겠네요.”
진이 눈을 껌뻑이며 나를 보았다.
“점점 뒷골목 사내가 돼 가는군. 그 치들이 아무리 막말을 해 봐야 당신 한 사람 못 당하는 걸. 들을 때마다 이렇게 오금이 저리는데.”
진이 과장되게 몸을 부르르 떠는 시늉을 했다.
“내가 뭘요?”
“뭘요, 라.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침대 얘길 하는 게 별거 아니다?”
“그건…… 이대로는 실랑이가 언제 끝날지 모르겠고, 애꿎은 당신이 나 때문에 모욕당하는 것도 미안해서…….”
“그러니까 미안한 마음에 나를 출중한 정부로 만들었다?”
프러너스가 어쭙잖게 들이대는 통에 우발적으로 벌인 짓이라는 것까지는 차마 진에게 밝히기 거북했다. 다시 생각해도 소름이 돋고 끔찍한 느낌이었다. 프러너스를 두고 이런 감정을 갖게 되다니. 나 자신이 낯설면서도 기특했다.
“애인이 생겼다고 하면 도도한 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우아하게 떠날 줄 알았죠. 내가 애인으로 내세울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당신과는 여러 차례 호흡을 맞춰 본 사이잖아요.
“보통 남자도 못 되는 괴생물체에서 침대 위의 황제로 격상되니 너무 황송해서 현기증이 날 지경이군.”
물론 진에겐 뿌듯하기만 한 상황은 아닐 터. 너무 무례했나? 언제부턴가 마음대로 그런 믿음을 가지게 된 것 같다. 내가 아무리 어처구니없는 부탁을 해도 진은 귀찮은 얼굴을 하고서 전부 스윽 들어줄 것만 같다는. 나야말로 진을 너무 편하게 생각한 나머지 함부로 대해 온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미안하다는 말을 제대로 하지 않았네요. 고맙다는 말도요. 유쾌하지 못한 일에 끌어들여서 미안해요.”
내 말에 그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모욕 같은 건 별거 아냐. 귀찮은 게 질색이지.”
“당신은 참, 귀찮은 게 많은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이상한 일 좀 들고 오지 마.”
“하긴, 나만큼 당신을 귀찮게 한 사람은 지금껏 없었죠?”
“아니, 당신은…… 두 번째 정도?”
내가 두 번째라고? 귀찮고 성가신 사람 순위가 그렇다는 것이니, 첫 번째를 차지한다고 딱히 영광스러운 일이 아닌데도 이상하게 서운했다. 첫 번째는 보나마나 황후겠지. 그렇다고 그걸 콕 집어 밝히긴. 이제 아예 대놓고 아리스타타에 대한 마음을 고백하고 싶은 거야? 하지만 쓸데없는 승부욕을 불태우는 내게 진이 꺼낸 건 전혀 다른 고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