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책임져야겠네2022.03.11.
“태어날 때부터 죄인 취급을 받으면 만사가 귀찮아지는 법이지. 억울한 걸 따지려 들면 끝이 없거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내뱉는 말이 가슴 아팠다.
“반쪽짜리 시더우드는 늘 가능성만으로 단죄를 받거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뭔가를 할지 모른다는 가능성만으로 증오와 제거의 대상이 돼. 그런 주제에 일일이 억울함을 따지면 살 수가 없어.”
나는 세상이 왜 나한테만 잔인할까 원망해 왔다. 하지만 사실 나에겐 선택권이 있었다. 수렁에 빠질 것이냐, 수렁을 피해 갈 것이냐. 내가 정신만 똑바로 차리고 있었더라면 너무 쉬운 문제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진에겐 처음부터 선택권이 없었다. 그의 자리는 날 때부터 수렁 속으로 정해졌다. 수렁을 탈출하는 방법이 있겠지만, 지난 생에 그는 수렁 속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너무 불공평한 죽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진은 왜 죽은 걸까? 진을 죽인 자는 누구지?’
진을 죽이려 한 자들이 여전히 기회를 노리고 있을 터였다. 한 번의 죽음은 피했지만 그다음은 어떻게 되는 걸까? 내 선택과 행동이 바뀌자 세상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프러너스의 골치 아픈 변화만 봐도 그랬다. 앞으로 일이 어떻게 뒤틀릴지 알 수 없었다. 진은 이제 곧 그리치의 정보 길드로 돌아갈 텐데, 가도 괜찮은 걸까? 하긴 진의 소재를 파악하는 대로 그들은 어디든 찾아오겠지. 지난 생에 정보 길드의 우두머리이자 황자인 진을 은밀히 해치웠을 정도면 꽤 대단한 세력이리라. 차라리 동료와 부하 직원들이 있는 페가수스가 안전하려나?
‘어휴, 그때 이런 거나 미고에게 물어 보는 건데!’
이혼 후 토버마리로 가서 존재감 없는 삶을 조심조심 이어가기. 머릿속에 오직 이 계획밖에 없던 나는 갑자기 갈피를 잃고 방황했다.
“법적인 분쟁을 피할 수 없겠어.”
내 표정이 복잡해진 게 이혼이 틀어져서라고 생각했는지 진이 그에 대해 운을 뗐다.
“법적인 분쟁?”
“방금 공작의 분위기로 봤을 땐, 절대 그냥 이혼해 줄 것 같지 않던데?”
여러 생에 걸쳐 오로지 어떻게 하면 이혼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를 붙잡을 수 있을까 전전긍긍하며 밤낮으로 연구해 온 나인데. 이제는 반대로 이혼하기 위한 방법을 연구씩이나 해야 한다니. 혼란스럽고 헷갈렸다.
“진, 이해가 잘 안 가요. 프러너스가 싫어할 만한 짓을 골라서 했는데 왜 이혼을 거부하는 거죠?”
“당신들 부부는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게 왜 이리 많아? 공작이야 저 외엔 관심 없는 인간이라 그렇다 치고, 당신은 그에 대해 꽤 연구했을 거 같은데.”
“그래서 최대한 그가 원하는 쪽으로 맞춰 주려 했어요. 홀가분한 마음으로 재혼하라고 일부러 정떨어질 만한 모습을 보여 줬다고요.”
내 말을 듣고 난 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흠,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나았을지도.”
“그게 무슨 소리예요?”
“당신 유혹에 소질 없다고 했잖아. 유혹하려는 상대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뜻일 뿐 아니라 유혹하지 말아야 할 상대에게 통한다는 뜻이기도 해.”
“내가 프러너스를 유혹이라도 했다는 소리예요? 절대로 아니에요!”
정말이지 너무 억울해서 나도 모르게 소리를 꽥 질렀다.
“아니, 유혹할 생각이었으면 안 통했겠지. 당신도 모르는 사이 엉뚱하게도 공작을 낚아 버린 것 같군.”
“아, 머리 아파요.”
“겉보기에 반듯하기만 한 공작이지만 그렇게 지나치게 반듯한 건 자연스럽지 못하단 증거이기도 해. 그도 꽤나 비뚤어졌을 가능성이 높단 얘기야.”
알쏭달쏭한 얘기. 그럼 겉보기에 꽤나 비뚤어져 보이는 진은 사실 매우 반듯하고 고지식한 신사란 얘기? 맞는 말 같기도 하고. 예전엔 모든 경우에 프러너스를 끼워 넣어 보았다면 이젠 진을 넣어 보는 버릇이 생겼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그러니까 우린 겉과 속이 다른, 매우 까다로운 미친놈과 싸워야 한다는 뜻이지.”
진이 ‘우리’라고 했다. 이 와중에 그 말이 이렇게 기쁜 걸 보면 나도 꽤나 비뚤어졌단 말이지.
“공작은 자존심이 괴물같이 센 사내야. 만약 순순히 이혼을 한다면 당신이 한 말이 전부 옳다고 시인하는 꼴이 되는 거라 생각할 거야.”
“아, 정말 나더러 어떻게 하란 거야.”
또 짜증이 치밀었다. 정말이지 골치가 지끈지끈 아픈데, 이럴 땐 진에게 좀 기대야지. 나는 진짜 연인이라도 된 것처럼 진의 어깨에 머리를 살짝 기댔다. 진은 뚱한 얼굴로 내려다봤지만 다행히 내 머리를 냉정하게 툭 쳐내진 않았다. 기분 좋은 삼나무 향이 솔솔 풍겨서 나름 진정 효과가 있었다. 이러고 있자니 커다란 삼나무 아래 기대앉은 기분이었다. 나는 눈을 스르르 감고 말했다.
“역시 프러너스를 상대하기에 침대는 너무 약했어요. 아이가 생겼다고 할 걸.”
“뭐?”
진이 냉정하게 어깨를 빼 버리는 바람에 내 몸이 기우뚱했다.
“왜요? 프러너스도 아젤리아와 아이를 만들었는데 나라고 못 하란 법 있어요? 설마 다른 남자 애까지 책임지겠다고 고집 부리진 않겠죠.”
진이 기가 차서 콧구멍이 넓어진 채 말했다.
“기대 이상으로 내 생각은 안 하는군. 멀쩡한 독신남을 멋대로 애 아빠로 만들어?”
아이 얘기는 애초에 별 생각 없이 나온 푸념이었지만, 내가 생각해도 도가 지나쳤다. 하지만 진이 펄쩍 뛰자 나도 모르게 장난기가 발동했다.
“왜요? 설마 제대로 된 가정이라도 꾸릴 계획이었어요?”
일부러 과장되게 물었지만 진은 이미 내 의도를 눈치 채고 금세 아무렇지 않게 장단을 맞췄다.
“서운하게 무슨 소릴까. 당신 말대로 침대에서도 출중한데. 프러너스 같은 미친놈도 가정을 꾸리는데 나라고 못 하란 법 있어?”
흥, 단란한 가정을 향한 진의 포부에 내가 입을 비쭉거릴 때였다.
“여자들은 어째서 이렇게 무서운 거야?”
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여자들?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큰일 날 소릴 태연하게 내뱉는단 말이지.”
마치 무서운 게 눈앞에 있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진이 말했다.
“천사 같은 얼굴을 하고서 어느 땐 악당보다 더 잔인하게 굴지 않나, 때로는 뒷골목 건달보다 더 박력이 넘친다니까.”
내가 뾰족한 눈으로 쳐다보자 진이 뭔가 더 말하려다 급히 마무리했다. 흥, 그렇단 말이지? 무서운 여자가 한둘이 아니란 말이지? 진이 진짜 내 연인도 아닌데 괜히 심사가 뒤틀렸다. 설마 이 감정, 질투 같은 건가?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지만, 기분이 나쁜 건 나쁜 거였다.
“궁금해서 그래요. 그 무서운 여자분들 얘기 좀 해 보세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악당같이 캐물었다.
“몰라서 묻나? 로제트 앰브로시아, 당신 얘기잖아.”
역시 순발력 있게 위기를 모면하는 방탕 황자님.
“그렇죠, 나도 있겠고…… 또 있었을 거잖아요.”
“있었으면?”
“응? 그냥 궁금하잖아요. 다른 여자들은 어떻게 무섭게 했는지. 그리고…… 그 여자들 얘길 꺼낸 건 당신이잖아요!”
괜히 열 오르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말도 안 되는 시비를 건 듯해 민망해졌다. 정말 질투일까? 진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녀들을, 그녀들과의 시간을 질투하는 걸까? 나 정말 염치없다. 아니야, 그런 단순한 질투는 아닐 거야. 그럼 뭔데? 자문자답하며 이 기분의 정체가 무엇인지 들여다보았다. 문득 어렸을 적 기억 한 조각이 떠올랐다. 일곱 살 때였나, 길 잃은 강아지 한 마리를 주워 저택으로 데리고 왔다. 작고 작은 강아지를 키우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넓디넓은 저택과 정원엔 그 작은 강아지 한 마리쯤 품어 줄 곳이 차고 넘쳤으니까. 하지만 선대 앰브로시아 후작인 내 아버지는 의외로 선뜻 허락하지 않으셨다.
「로제트, 생명을 책임지는 일은 매우 무거운 일이란다.」
「책임이요? 저는 그냥 미미고가 귀여워서 돌봐 주고 같이 놀려는 건데요?」
「살아 있는 것들엔 미래가 있는데, 네가 그 강아지의 미래를 바꾼 거야. 이리로 데리고 와서 미미고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으니까. 그러면 책임을 져야 하는 거란다.」
「책임을 안 지면 미미고와 못 노는 거예요?」
「흠, 못 노는 것보다 노는 것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야. 즐겁고 좋은 것만 하려고 하면 안 된다는 뜻이지.」
「책임진다고 하고 책임을 안 지면 어떻게 되는데요?」
「미미고가 슬퍼지겠지. 너무 슬프면 약해지고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단다. 그런데 얘야, 벌써부터 책임 안 질 생각을 하는 건 아니지?」
대략 이런 대화가 오간 것 같다. 이 대화를 돌이켜 보며 이제 와 고개를 드는 의문점 두 가지. 하나, 선친은 일곱 살짜리 어린애에게 굳이 저런 말씀까지 하셔야 했을까? 둘, 저런 선친에게서 어떻게 루이 같은 싸가지가 나올 수 있었을까? 그리고 내가 진에게 느끼는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이 기억 속에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죽을 운명이었던 진을 살려 냈다. 그의 미래를 바꾼 것이다. 내가 구한 생명이니 마음이 쓰이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나에게 진은 얼결에 주운 강아지인 것이다. 어쩔 수 없네. 내가 책임져야지.
“걱정 마. 천하의 공작이라도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니까.”
자신을 두고 저런 시답잖은 망상을 펼치고 있는지 모르고 덩치 큰 강아지 진이 위로하듯 말했다.
“어떤 방법이 있는데요?”
나는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우리 길드에도 법률 전문가들이 있어. 인정하긴 싫지만 이 바닥에선 꽤 실력 있다고 소문난 이들이지. 당신도 이미 아는 사람들이야.”
“내가 아는 사람이요?”
“디온이랑 플록스. 그 기생오라비 같은 백작과 샌님 같은 비서관 말이야.”
“아, 말보르크 백작과 플록스가 법률 전문가였어요?”
“뒷골목 법률 해결사지. 그래 봬도 소송에서 이기려고 못 하는 짓이 없는 악랄한 자들이지.”
“소송을 맡아 줄까요? 상대가 카를슈테인 공작인데.”
“그럼, 돈이면 뭐든 하는 자들인데. 그나저나 당신 재산은 아직 남아 있긴 한 건가?”
내 재산이 얼마였는지 새삼 계산해 보았다. 어머니가 물려주신 유산과 토버마리의 저택과 농장에서 나오는 수익. 그중 저택과 농장에서 나오는 수익은 손댈 수 없다. 지금껏 공작부인으로 살며 돈에 대해 신경 써 본 적이 없었기에, 솔직히 금전에 대한 감각이 많이 떨어졌다. 그래서 뒷일을 생각지 않고 마구 지른 면이 있는데, 지금 따져 보니.
‘많이…… 모자랄 것 같다!’
이럴 줄 알았으면 프러너스에게 위자료를 아주 세게 청구할 걸 그랬다. 그랬으면 차라리 이혼하는 데도 도움이 됐을지 모르는데. 이제 와서 말을 바꾸기도 민망한데, 심지어 이혼조차 안 해 주려고 하니 생각지 못한 지출이 생겨 버렸다. 나쁜 놈, 프러너스를 욕했다.
“이혼 소송료가 많이 들까요?”
내가 조심스레 묻자 진이 의심스런 눈초리로 말했다.
“왜? 돈이 없어?”
“아주 없는 건 아닌데, 소송료는 지불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소송료는 그렇고, 나한테 지불할 건?”
“음, 그게, 진에게는 너무나 크게 신세를 졌잖아요. 단순히 돈 따위로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그래서?”
“몸으로 갚으면 안 될까요!”
진이 잽싸게 떨어져 나갔다. 아무리 그래도 동작이 너무 날쌘 게 아닌가, 기분이 상할 정도로. 그가 인상을 콱 찌푸리며 소리를 높였다.
“제발 그딴 소리 좀 하지 마. 우린 오직 돈만 받아. 몸 같은 건 절대로 안 받아.”
“좀 받아 주면 안 돼요?”
진의 눈에 황당함과 난처함이 소용돌이쳤다. 하긴 페가수스 사무실에 직원이 그렇게 많았는데도 여자 직원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고? 오직 남자만 직원으로 채용하나? 그래도 정보를 다루려면 세상의 반을 차지하는 여자들이 필요한 부분이 분명 있을 텐데?
“그때 하말린어 통역을 맡아 달라고 제안도 했잖아요. 내 하말린어 실력은 진도 알죠?”
“하말린어 통역……을 말하는 거였나?”
“거기다 하나 더요! 내가 나름 사교계 톱클래스였잖아요. 그리 열심히 활동한 건 아니지만 컴컴한 사내들보다야 귀부인들 사정에 밝지 않겠어요? 분명 쓸모가 있을 거예요.”
진에게 밝힐 수 없어서 그렇지, 나는 사실 그보다 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이래 봬도 인생 17회차 아닌가. 지난 생의 기억 덕분에 진을 죽음에서 구할 수 있었던 것처럼, 가까운 미래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안다는 건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엄청난 가치를 지닌 정보가 될 터였다. 지난 생의 경험이 너무 좁고 치우쳐 있다는 게 문제이긴 했지만. 그래도 잘 뒤져 보면 쓸 만한 정보가 있겠지.
“내 하말린어와 정보를 팔게요.”
“그걸로 대가를 치르려면 종신 노예 계약은 맺어야 수지가 맞겠는데?”
“내 정보의 가치를 과소평가하지 말아요!”
나는 호기롭게 장담했다.
“레이디 앰브로시아.”
진이 지친 얼굴로 나를 불렀다. 목소리가 약간 갈라져 나왔다.
“네? 당신 얼굴색이 안 좋아요.”
“나도 앞으로 말을 분명히 할 테니까, 당신도 조심했으면 좋겠어.”
“내가 실수했나요?”
“가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위험한 말을 할 때가 있어.”
“그래요? 알았어요…… 앞으로 주의할게요.”
무엇 때문에 진이 길 잃은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짓는 건지, 나는 곰곰이 반성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