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아무것도 모른 죄2022.03.25.
“넌 왜 날 한 번도 안 봐 줘? 널 가질 수 있다면 난 뭐라도 될 거야!”
소꿉친구 윌로우의 막무가내 고백에 말문이 막혔다.
“지금껏 내가 쏟은 모든 노력은 오직 널 갖기 위한 거였어.”
“내가 물건이야? 땅이나 건물인 줄 알아? 누구 마음대로 가지고 말고야?”
“대체 내 어디가 모자라는데? 어디가 네 성에 안 차니?”
이 무슨 어린애 떼쓰는 것도 아니고. 우리는 어렸을 때 싸우던 것처럼 자기 말만 하면서 악을 써댔다.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도 아까웠다. 저런 코찔찔이에게 인생을 저당 잡힌 올랜도만 아니면 상종할 필요도 없었다.
“윌로우, 넌 구제불능이야!”
“……!”
더 이상의 대화를 이어가는 게 무의미하게 느껴진 나는 결국 윌로우에게 선고했다. 우리의 어처구니없는 실랑이는 그것을 끝으로 긴 침묵에 잠겼다. 나는 자리를 뜨기 위해 일어섰다.
“로제트!”
윌로우가 다급히 불렀다.
“설마 올랜도 때문에 프러너스에게 눌러앉으려는 건 아니지? 그 자식 태도가 바뀌었다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아무 대꾸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얼른 자리를 떠야 못 볼 꼴을 조금이라도 덜 볼 것 같았다.
“올랜도를 믿지 마. 그 여자 그렇게 순수한 사람이 아니야.”
결국 나는 멈춰 서고 말았다. 마음을 가다듬으려고 심호흡을 했다.
“윌로우, 이혼하겠다는 내 결심은 변함이 없을 거야. 왜냐하면 내가 이혼하려는 건 프러너스나 아젤리아 때문도 아니고, 너나 올랜도 때문은 더더욱 아니야.”
언제까지, 누구한테까지 내 이혼에 대해 이해시켜야 하는 건지.
“이제는 알았으니까. 프러너스든 누구든 나를 사라지게 할 수 없다는 걸. 그 누구에게도 내 삶을 흔들 권한을 주지 않을 거야.”
“그럼, 이혼은…… 틀림없이 하는 거구나. 그래, 그거면 됐어…….”
윌로우가 혼잣말인 듯 중얼거렸다. 되긴 뭐가 돼?
“로제트, 올랜도를 조심해. 정말로 걱정돼서 하는 말이야.”
사실 나는 올랜도에 대해 알고 싶은 게 하나 있었다. 너무나 묻고 싶지만 겁이 나서 망설여지는 질문. 나는 결국 용기를 내지 못하고 윌로우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제 이 아름다운 호텔에 더는 머물 수 없게 되었다.
“로제트, 오늘은 떠나지 마.”
“…….”
“내가 아무리 싫어도 오늘 밤은 여기서 묵어.”
내 소꿉친구는 구제불능 파렴치한에 남의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고 저밖에 모르지만. 그렇게 오래 알고 지냈으면서도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눈뜬장님이지만. 가끔 귀신같이 저런 소릴 해서 곤란하다. 당장 갈 곳이 마땅치 않은 게 사실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곧장 호텔을 박차고 나가고 싶지만. 해만 떠 있어도 일단 나가고 생각할 텐데.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나는 객실로 돌아왔다. 혹시나 윌로우가 또 들이댈까 싶어 문단속을 꽁꽁 해 두었다. 창 너머로 달빛을 받아 미미하게 빛나는 밤바다가 보였다. 풍경은 죄가 없었다. 올랜도도 잘못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랜도를 조심하라는 윌로우의 말이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올랜도에겐 안됐지만, 나는 그녀를 위해 이혼을 번복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미안하지만 그건 그들 부부가 풀어야 할 문제였다. 내 이혼을 돌이키기는커녕 그녀에게도 이혼을 권하고 싶었다. 나를 조금만 더 미워한 다음에, 결국은 자기 삶을 찾아 떠나길 바랐다. 물론 그녀가 결혼을 계속 유지하고 싶어 한다 해도 비난할 생각은 없다. 그녀의 삶이고 그녀의 선택이니까. 그저 각자의 방식으로 행복하길 바랄 뿐이다. 피로감을 느낀 나는 적당히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다. 아아, 잠이 올 리 없었다. 실은 그녀의 행복을 바라는 것보다 더 시급한 문제가 내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다.
‘올랜도는 나에 대한 윌로우의 마음을 언제 처음 알아챘을까?’
겁이 나서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질문은 바로 이것이었다. 이기적이게도, 그녀가 언제 그 사실을 알았는지, 내겐 그 시점이 매우 중요했다. 그 시점이 언제였느냐에 따라 내게 다정히 대해 준 거의 유일한 친구를 잃을 수도 있었다. 처음부터 그 때문에 내게 접근한 걸까? 그리 무뚝뚝하게 대해도 내 곁을 떠나지 않은 이유가 설마…….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이 역겨웠지만, 그 생각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허탈하고 무기력해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몇 생에 걸쳐 오직 프러너스를 향해 헛된 손짓을 하는 동안 내 주변에선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니. 내가 모르는 일들이 더 있을까. 완전히 헛살았다는 회의감이 몰려왔다. 무려 열일곱 번이나 되는 인생을. 어째서 삶을 반복해도 전혀 현명해지지 않는 걸까. 아무리 살아도 지혜로워지지 못하는 걸까. 그 어리석음이 이번 생에도 끝나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다. * * * 다음 날 일찍 체크아웃을 한 나는 페가수스로 향했다. 호텔을 나서기 전 지배인에게 물어보니 윌로우는 어젯밤 이미 호텔을 떠났다고 했다. 잠을 못 자서 머리가 멍했다. 마음속에 다른 근심이 가득해서 말보르크 백작과 플록스가 하는 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내 이혼 추진단이 다소 과한 느낌으로 꾸려져 있었다.
‘이 사람들이 왜 이리 신이 났지?’
멍한 머릿속에 이런 의문이 둔하게 떠오를 뿐이었다.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으신가요?”
이런저런 작전을 설명하던 플록스가 물었다. 이혼 소송 때문에 기분이 가라앉은 걸로 보인 모양이었다.
“아, 아니에요. 그냥 어제 잠을 좀 설쳐서요.”
“피곤하십니까? 좀 쉬고 다시 할까요?”
“그럴까요?”
직원들이 자리를 비우자 소파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오늘은 이거 안 쓰나?”
나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진이 턱으로 자기 어깨를 가리켰다.
“얼굴이 안 좋아 보이는데?”
“웬일이에요?”
“전에 보니까 나를 휴게실 쿠션 같은 걸로 생각하는 거 같아서. 이용료는 안 받지.”
진이 내 옆에 앉으며 말했다. 나는 조심성 없이 진의 팔에 툭 기댔다.
“이혼 소송이란 게 원래 쉽지 않다고 하더군.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지?”
진이 뻣뻣하게 말하는 걸 듣고 있자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도 그동안 부대낀 정이 있다고 나를 걱정했나? 은은하게 풍기는 삼나무 향은 언제 맡아도 시원하고 편안했다. 나는 투정하듯 말했다.
“잘못 살아온 거 같아요.”
“대부분 그쪽이지. 그나마 잘못 산 지 얼마 안 됐잖아.”
난 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오래, 여러 번 잘못 살았다고요.
“난 왜 이렇게 어리석을까요? 인간이 왜 이렇게 민폐야? 내 무신경함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줬어요. 이런 것도 최근에야 알았죠.”
“그랬군.”
“지금이라도 만회할 수 있을까요? 할 수 있다면 바로잡고 싶어요.”
“뭐, 치러야 할 건 늦게라도 치러야겠지.”
나는 몸을 홱 일으키며 따졌다.
“빈말이라도 괜찮다거나, 네 잘못이 아니라거나, 그런 위로는 할 줄 몰라요?”
“어리석은 짓으로 남한테 상처를 줬다는데 괜찮긴 뭐가 괜찮아?”
“그래서 책임지려고 하잖아요!”
“그 자세는 좋네.”
나는 다시 머리로 진의 팔뚝을 쿵 받았다.
“왜? 죗값을 치르려니 겁나?”
그렇다고 금세 죗값이라니.
“무서우면 같이 가 줄게. 물론 공짜는 아니고.”
호객행위 하시는 정보 길드 대장님? 사람 잘못 고르셨습니다. 나 이제 공짜 숙소도 날아간 완전 빈털터리인데요?
“혹시요, 여기서 좀 같이 살면 안 돼요?”
앞뒤 설명이 많이 생략된 질문이었던 건 인정한다. 진이 태연한 척 나를 보는데, 얼굴에 이미 ‘또 무슨 수작이지?’라고 쓰여 있었다.
“설마 방금 말한 사람이 난가? 당신의 무신경함에 상처 입었다는 그 사람. 사죄하고 싶다던 그 사람 말이야.”
“뭐예요? 당신이야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가소롭게 여길 사람이잖아요. 심장이 있긴 해요?”
“지금 또 상처받았어.”
“이거 봐, 이거 봐.”
말은 저렇게 했지만, 진의 표정은 상처받기는커녕 짓궂은 장난이 머릿속에 막 떠오른 말썽꾸러기 같았다. 입꼬리 끝에 특유의 미소가 슬쩍 걸렸다. 진이 강한 사람이어서 좋았다. 자신이 연약해서 남에게 잔인하게 구는 여느 귀족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반쪽짜리 시더우드인 그가 이렇게 강한 사람이 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을지.
“여긴 규모가 크니까 직원 숙소 같은 것도 있을 법한데.”
“직원 숙소는 왜? 정말 직원으로 들어앉으려고?”
“안 돼요?”
“우선 자격이 될지 검증해 봐야겠지. 이래 봬도 길드원 가입이나 직원 채용 조건이 엄격하거든.”
흥, 야멸차긴. 하기야 페가수스는 꽤 크고 유명한 정보 길드라니까. 그때 웰츠 호텔 지배인도 그랬잖아? 하말린까지 사업을 확장할 정도의 정보 길드는 많지 않다고.
“여기 직원들이 겉보기엔 시큼털털한 건달 같아도 다들 간단치 않은 실력자들이야. 우린 신분이나 배경은 전혀 상관 안 해. 오로지 실력만 보지.”
나도 신분이나 인맥을 이용하거나 동정심에 호소해 얼렁뚱땅 자리를 차지하고 싶진 않았다. 정정당당하게 능력을 인정받고 싶지. 알고 보면 내가 공작부인 시절부터 나름 노력파다. 집요하고 질긴 구석이 있단 소리지.
“내 하말린어 실력은 당신도 알잖아요? 그 정도론 부족해요?”
“단기 계약직은 가능해도 정식 직원은 좀 곤란하지. 내가 하말린어를 못해서 당신을 채용하려는 게 아닌 건 알지?”
얄미워.
“그럼 정식으로 비서직에 지원할래요.”
“누구 비서?”
“페가수스 보스이신 진 시더우드 전하의 비서요.”
“안 돼.”
“신분도 배경도 개의치 않고 실력만 본다면서요? 나한테는 실력을 증명할 기회조차 안 주는 거예요?”
“내 비서니까 내 맘이야. 정 도전하고 싶으면 다른 거로 해.”
방금 전과는 말이 다르잖아요.
“내 어디가 못마땅한 건데요?”
“비서라니 당치도 않지. 누가 누구 수발을 들게 될 거 같아? 비서까지 모시고 살고 싶진 않아.”
억울한 면이 없지 않지만, 어찌 됐든 진에게 폐를 끼친 전적이 있으니.
“어디 지원하든 내 맘이에요. 떨어뜨리든 말든 그건 당신 마음이고요.”
“되지도 않는 유혹 같은 건 아예 시도할 생각도 하지 마.”
그땐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고! 당신 살리느라고 내가 얼마나 치욕을 감수하며…… 에휴, 말을 말자. 말끝마다 그놈의 ‘되지도 않는’ 유혹.
“왜요? 넘어갈까 겁나요?”
“그래, 겁나 죽겠으니까 하지 마.”
“호옹, 자꾸 그러니까 더 하고 싶네.”
“그 호옹 소리부터 틀렸어.”
안 그래도 실력으로 승부할 겁니다. 인재를 몰라본 걸 후회하게 만들어 주지.
“그런데 직원 숙소는 왜?”
진이 놓치지 않고 물었다.
“아, 원래 묵던 숙소가 마음에 안 들어서요. 다른 데로 옮겨 볼까 해서.”
“그리치에서 그 호텔보다 나은 덴 없을 텐데?”
“내가 좀 까다롭거든요.”
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껌뻑였다.
“지난번 기차나 마차 여행 때 보니까 귀족 레이디치고는 굉장히 호방하던데?”
“맞아요, 바로 그거예요. 웰츠 호텔은 너무 고급스럽고 빈틈없이 관리돼서 갑갑해요. 좀 더 투박하고 야성이 느껴지는 곳이 없을까요? 숙박료도 저렴하고.”
“이해가 잘 안 가는 취향이지만, 그럼 우리 길드원이 운영하는 숙소를 알아봐 주지.”
“직원 숙소는 없고요? 오해 말아요. 왔다 갔다 하는 시간을 절약하고 싶어서 그래요. 당신 말대로 이혼 소송이 참 피곤하더라고요.”
“있어도 없어. 마차로 모셔오고 모셔다 드리도록 하지.”
진 이 인간은 눈치가 없는 건지, 지나치게 눈치가 빠른 건지. 공짜로 빌붙기 힘드네, 참. * * * 오후 회의에서 우세한 지지를 얻은 작전은 나의 내연남이 아니라 프러너스의 내연녀를 움직여 보자는 것이었다. 잘하면 번거롭게 소송이나 옥살이까지 가지 않아도 의외로 쉽게 합의 이혼을 끌어낼 수 있다는 의견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젤리아, 그녀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녀야말로 매우 심란한 상황일 것 같았다. 워릭 백작과의 이혼, 혼외 임신, 불륜녀라는 세간의 곱지 못한 시선, 공작의 태도 변화와 늦어지는 공작저 입성까지. 지난 생에선 그녀를 해하려고 혈안이 돼 온갖 술수를 다 썼는데도 그녀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이번 생엔 화해의 뜻으로 그녀의 로맨스를 시원하게 축하해 주려 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그 어느 생보다 그녀에게 타격을 입히고 만 것 같아 찜찜했다. 나만 빠지면 모든 것이 보기 좋게 돌아갈 줄 알았는데, 자꾸만 틀어져 버리는 상황에 당황되고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하면 프러너스와 아젤리아의 관계를 원래 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을까? 하, 이제 남편의 재혼까지 챙겨 줘야 한다니, 이놈의 운명 참 징그럽네.
“내가 아젤리아와 접촉해 봐요?”
“그렇게까지 적극적으로요……. 레이디, 설마 과격한 방법을 쓰시려는 건 아니죠?”
“과격한 방법이라뇨?”
“사교계 점잖은 귀부인들 사이에서도 가끔 난투극이 벌어지거든요.”
“어머, 홑몸도 아닌 사람한테 무슨 그런 짓을. 날 뭐로 보시고.”
많이 했다. 그런 짓. 지난 생에선. 하지만 이번 생엔 아젤리아에게 바라는 것 자체가 다르고……. 잠깐만. 아니지? 이번에도 아젤리아에게 몹쓸 짓을 하려는 것처럼 보여야 하나? 그럼 오히려 프러너스를 자극할지도 몰라.
‘요즘 내가 너무 발톱 빠진 맹수처럼 굴었는지도.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필요가 있겠어.’
이번 생엔 연극을 몇 차례나 벌여야 할지. 그저 조용히 이혼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밋밋한 삶을 살고자 했는데. 이러다 명배우로 거듭날 판이다. 얼결에 내 연기 파트너로 낙점된 진은 또 어떻고. 생각하자니 삶이 한 판 코미디극처럼 우스꽝스러웠다.
“아하하.”
갑자기 실소가 터져 나왔다. 손으로 이마를 짚고 웃고 있자니 직원들이 경계 어린 눈으로 흘끔거렸다. 흠흠, 나는 얼른 웃음을 거뒀다. 보는 사람은 조금 무서울 수 있는 상황이었다. 마침 진과 말보르크 백작이 자리에 없어 다행이었다. 두 사람은 오후에 다른 일이 있다고 했다. 대신 플록스가 조심스레 물었다.
“오늘 회의는 이만 하실까요? 괜찮으시면 아래 바에서 간단하게 식사라도 함께 하시겠습니까?”
아무래도 내 상태가 오락가락 불안정해 보이니 말벗이라도 되어 주려는 것 같았다.
“플록스도 피곤할 텐데 폐가 되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실은 제가 드릴 말씀이 있어서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