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네 마음인지 내 마음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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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네 마음인지 내 마음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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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네 마음인지 내 마음인지
2022.04.18.
플록스의 눈이 점점 흐릿해졌다. 만취한 플록스가 저러다 곯아떨어지기라도 할까 봐 나는 조마조마했다.
다른 건 몰라도 진의 죽음에 관한 실마리는 찾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죽일 생각이 아니면 왜 자꾸 제도로 불러들이겠습니끄아. 안 그래도 사방 천지에 자객이 득실거리는데.”
열차에서 만났을 때도 황후의 부름에 제도로 달려갔다 돌아오던 길이었을까.
자객 때문에 멀쩡한 침대를 놔두고 짐 선반에서 자야 했지. 자객이 설렁줄도 끊어 놨고.
그러니까 황후는 그가 위험할 걸 알면서도 심심하면 제도로 불러들인단 말인가? 아니면 황후에게 무슨 다급한 사정이 있는 걸까?
그래도 한때 사랑했던 남자를 가벼운 이유로 사지로 불러들일 리는 없는데.
진의 마음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 같은 어처구니없는 이유는 아니겠지? 에이, 설마.
하지만 왜 불길한 느낌이 가시지 않는 걸까. 플록스가 오죽하면 미친 여자라고 했을까.
이유야 어찌 됐든 황후와의 관계를 지속하는 건 끝이 뻔했다. 지난 생엔 그 끝이 진의 죽음이었는지도.
저러다 진이 죽고 말 거라는 플록스의 호소는 지나친 게 아니었다.
혼자 그런 생각들을 하다 열 오른 얼굴로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대체 황후는 진을 불러서 뭘 하는 거지? 둘이 만나서 뭘 하는 거냐고.”
플록스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를 충동질한 술기운이 서서히 떨어져 가고 있는 듯했다.
“조개도 아니면서 입을 꽉 다물고…… 뭘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있어야죠! 어휴 참, 그런데…….”
자기 마음을 몰라주는 보스가 야속하고 서운해서인지, 플록스는 울 것 같은 얼굴이 됐다.
우는 주사까지 보기는 민망한데. 울지 말고 차근차근 얘기해 봐요.
“보려고 본 건 아닌데…… 아니긴, 보려고 봤습니다! 도대체 왜 자꾸 불러 대고 난리인지! 황후의 서신을 조금, 이렇게 조오금 봤단 말이죠. 그랬더니, 하 씨…….”
나도 모르게 목을 쑥 빼고 플록스의 입에 집중했다.
“얼굴 한번 보여 주기가 그렇게 어렵느냐고! 어떻게 회신 한마디 없냐고오!”
“응?”
“무정한 사람 어쩌고, 당신은 늘 제멋대로에 불충하니 어쩌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진이 황후의 부름에 불응했나요?”
“갔다니까요, 그 위험을 무릅쓰고 제도로 죽어라 갔다니까요. 그래서 제 속이 다 문드러졌다니까요. 그런데 황후는 모른대, 무정한 사람이래, 뭐냐고요 대체!”
그러니까 내가 묻고 싶은 말이라고요. 뭐냐고?
“아 진짜 다 미쳤다니까요! 이 플록스가 레이디한테 정식으로 물어보겠습니다. 왜 그래요? 왜, 왜애 그러고 다녀요?”
나도 궁금하오.
플록스 당신이 왜 얼굴을 마구 들이밀며 나를 추궁하는 건지.
취해서 마구 내지르는 플록스의 말을 정리하면 대충 이랬다.
황후가 진을 여러 차례 불렀다. 진은 그때마다 위험을 무릅쓰고 제도로 갔다.
하지만 황후는 진을 만나지도, 부름에 대한 응답을 듣지도 못했다.
‘아 진짜, 이 인간 어디서 뭘 하고 다니는 거지?’
답답해진 나는 취한 플록스를 붙잡고 흥분해서 물었다.
“둘은 정말로 어떤 사이인 거예요? 진과 황후가 좋아하던 사이라는 게 맞아요?”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두 사람이 의외로 그런 관계가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정말이지 지긋지긋해서 이를 갈며 잠꼬대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기엔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진의 목소리가 너무 애틋했지만.
플록스가 처음의 기세와는 달리 고개를 축 늘어뜨리고 힘없이 중얼거렸다.
“당신의 연인, 누이, 친구이며 영원한 주인인 아리스타타.”
“…….”
“서신 끝에 그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진의 영원한 주인…….
황후는 그저 저밖에 모르는 욕심 사납고 비뚤어진 인간일 뿐일까.
황제고 황후고 진에게서 무엇을 더 빼앗아 가려는 걸까? 정말 목숨이라도 내놓아야 만족할까?
불행한 결말이 불 보듯 뻔해 줄곧 뜯어말리고 싶었지만, 내겐 자격이 없어 망설이던 일.
그동안 호의로 대해 준 플록스와 페가수스에 갚아야 할 빚이 많은데, 그 은인들이 저토록 간절히 부탁한다면 이제는 내가 나서도 되지 않을까.
아니, 갚아야 할 빚이 없더라도 두고 볼 수 없었다. 황후의 행동은 부당하고 이기적이고, 여하튼 못돼 처먹은 짓이었다.
“플록스, 나만 믿어요. 다른 건 몰라도 주인 자리는 내가 빼앗아 올 테니.”
나는 술기운을 빌려 호기롭게 말했다.
와인의 에너지가 빠져나가며 빛을 잃어 가던 플록스의 눈이 번쩍 커졌다.
“레이디!”
“형수님! 형수님! 형수님!”
처음보다는 기세가 한풀 꺾이긴 했지만, 형수님을 연호하는 굵직한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내 비록 지나가는 아무 여자에 불과하다 해도 여기까지 알게 된 이상 진을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진은 내가 살려 놓은 책임 1호인데. 영원한 주인까지는 아니어도 임시 주인이 될 자격 정도는 내게도 있지 않을까.
잘 보호하고 갈고 닦아서 진과 어울리는 진짜 주인에게 인도해 줄 때까지.
그러니 이제 진의 주인은 아리스타타 당신이 아니고 나 로제트지! 물론 시한부로 말이다.
“플록스 당신은 내 이혼을 쟁취해 내고, 나는 황후한테서 진을 쟁취해 내고!”
나는 다 들어도 상관없다는 듯 큰 소리로 외쳤다.
아까 마신 와인의 술기운이 이제야 올라오는지, 소리를 좀 높였다고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여하튼 나는 이번에도 곧 ‘형수님’을 연호하는 소리가 이어지리라 기대했다.
그런데 기대했던 소리는 들리지 않고 주변이 어수선해지더니 성난 짐승 같은 목소리가 홀 안을 호령했다.
“제압해!”
주렴이 뜯겨 나가며 장정들이 달려들고 비명과 기합이 난무했다.
놀라서 멍해져 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순식간에 상황 종료.
플록스가 팔이 뒤로 꺾인 채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쓰러져 있었다.
그 곁에 진이 야수 같은 눈을 번뜩이며 위압적인 모습으로 서 있었다.
“플록스에게 술을 준 멍청이가 누구야?”
그가 나지막하지만 살벌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방이 고요해지며 터질 듯한 긴장감이 흘렀다.
물론 뺀질이 바텐더는 모르는 척 시선을 딴 데로 돌렸다.
아니, 술 좀 마셨다고 사람을 저렇게까지 땅에 처박고 결박할 일인가? 아니면 혹시 자기 얘길 떠벌린 걸 알고 저러는 건가?
나는 신음을 흘리고 있는 플록스에게 다가들며 진을 쏘아보았다.
“내가 같이 마셔 달라고 청했어……요. 이렇게까지 큰일인지 몰랐고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주인도 몰라보는 목줄 풀린 야수 같으니라고.
내가 야속한 눈으로 쳐다보자 진이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나와 플록스를 번갈아 보더니 거친 한숨을 토해 냈다.
“술 때문에 인생 조진 인간한테 술을 먹여? 그를 골로 보낼 셈이야?”
플록스, 당신은 또 무슨 짓을 한 건데?
어찌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살벌한 분위기로 봐선 내가 플록스를 심각한 위기에 빠뜨린 것 같았다. 고의는 아니었다 해도.
페가수스의 규칙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나라도 플록스의 진심을 해명하고 명예를 지켜 주어야 했다. 그는 결코 주정뱅이가 아니었다.
“사랑이에요.”
나는 비장하게 말했다.
“플록스만큼 진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고요.”
말하고 보니 ‘사랑’보다는 ‘충심’이라는 말이 더 적합했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갑자기 변호하느라 그렇게 표현했지만, 플록스의 진심을 담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사랑이든 충성심이든 의리든, 표현 자체가 뭐 그리 중요한가.
이거나 저거나 결국 핵심은 아끼는 마음 아닐까.
지금껏 지켜본 결과, 플록스만큼 진을 아끼고 걱정하는 사람은 보기 드물었다.
정작 진의 주인을 사칭하는 아리스타타는 마음 씀씀이가 그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플록스는 진을 위해서라면 쓴 약을 처방하는 것도, 곯은 상처를 터뜨리는 것도, 심기를 거스르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지난번 모의 땐 진에게 따귀를 올려붙여 그의 청개구리 근성을 자극하라고 귀띔했고, 이번엔 진을 구하기 위해 규칙을 어기는 것도 불사하고 자기 몸을 던졌으니.
이것이야말로 숭고한 사랑……이 아니면 무엇인가!
“플록스의 진심을 헤아려 줘요.”
말하다 보니 나까지 울컥해졌다. 그래, 나도 진을 좋아하니까.
진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고, 당연히 진작부터 진을 좋아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마음이 쓰였던 거고.
그의 일에 참견할 핑계를 이것저것 끌어다 붙였지만, 결국은 다 그를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내 진심까지 얹어서 진에게 호소했다.
그런데 분위기가 왜 이럴까.
진을 비롯한 주변의 직원들이 하나같이 벌레 씹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저거 주정뱅이인 줄 알았더니 미친놈이잖아.”
“은혜를 뒤통수로 갚아도 유분수지. 대체 무슨 억하심정으로 보스한테 저러는 거야?”
“술 처먹고 레이디에게 제 사랑 고백이나 하고 있었던 거야? 불쌍한 놈. 아니, 불쌍한 레이디.”
“어째 나를 보는 플록스 경의 눈빛이 비릿하더라니.”
나의 기대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비난의 말들이 플록스에게 쏟아졌다.
그나마 플록스가 땅에 처박힌 김에 정신을 놓고 곯아떨어진 걸 다행이라 해야 할지, 불행이라 해야 할지.
플록스의 진심을 헤아리는 사람이 정말로 나밖에 없다고?
여보세요? 방음이 안 되는 홀에 있는 아우님들?
다 같이 들었잖아요? 플록스의 애끓는 충심을.
“레이디 앰브로시아, 장소를 옮기는 게 좋겠군. 이러다 엄한 사람 여럿 잡겠어.”
진이 잡아먹을 듯한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바닥에 널브러진 플록스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주변에 명령했다.
“감금방에 넣어.”
감금? 나는 놀라서 진을 쳐다보았다.
진은 무심한 얼굴로 손을 뻗어 내가 가야 할 길을 가리켰다.
“가실까요, 레이디.”
어울리지 않게 정중한 어투가 사람을 옥죄어 왔다.
그냥 여기서 얘기하면 안 될까요? 다른 사람들도 뒷얘기가 궁금할 텐데.
가면 왠지 무서운 일이 기다리고 있을 거 같아. 진짜로 잡아먹힐 것 같아…….
하지만 지금 이곳에 진의 말을 거역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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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조심하라고 했을 텐데.”
진이 어디에 삐딱하게 기대지 않고 어깨와 등을 꼿꼿하게 펴고 있는 것부터가 위협적이었다.
“상상도 못 할 말로 사람 잡는 재주가 있어. 비서보다는 자객이 어떤가. 재능 있어.”
“별말 안 했는데.”
“하, 그러셔. 황후에 대해 입에 올린 건?”
흥, 누가 그새 일러바쳤나 보네.
“플록스에게 술을 먹이면 안 된다는 사실은 몰랐다고 해도, 술을 마신 후 딴사람으로 돌변한 건 충분히 느꼈을 텐데?”
진의 냉정한 눈빛에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정말로 플록스를 걱정한다면 못 마시게 말렸어야지. 말로만 위하는 척할 게 아니라.”
찔린다. 플록스가 위태로워 보였는데도 흑막을 캐기 위해 그를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았음을 인정하고 반성한다.
하지만 누구나 살다 보면 가끔은 괴로운 일로 술을 마시고 흐트러지고 싶을 때가 있지 않은가.
물론 그런다고 해결되는 건 없지만, 술김에 용기를 내 괴로운 심사를 털어놓는 것만으로 마음이 한결 가벼워질 때가 있다.
지난 생에 많이 마시고 많이 쓰러져 봐서 안다. 독살 당하거나 칼을 맞기 전에 뇌진탕으로 갈 뻔한 적도 있었으니.
맨정신으로는 견디기 힘든 나날이었다.
플록스의 주정도 그런 거라고 생각했기에 그의 말을 들어 주고 맞장구쳐 주고 싶은, 그런 마음도 없지 않았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사태가 벌어질 거라고 짐작이나 했겠는가.
“이 일로 플록스의 삶은 완전히 끝장날 수도 있어.”
진이 한심함과 원망이 뒤섞인 눈빛으로 나를 찍어 눌렀다.
발끈, 억울한 마음이 치솟았다.
플록스가 누구 때문에 술을 참지 못할 만큼 괴로운 마음이 됐는데?
“나도, 플록스도 잘못이 있는지 몰라도 가장 잘못된 건 당신이야!”
“뭐?”
“플록스가 삶을 끝장낼 각오로 술을 마신 건 당신 때문이라고.”
“나와의 약속을 생각했으면 절대로 술을 입에 대지 말았어야지.”
“그랬으면 플록스 자신이야 무사하겠지만 당신은 무사하지 못할 테니까.”
진이 멈칫했다. 태연한 척하지만 무슨 뜻인지 전부 짐작하고 있으리라.
“또 이상한 소릴 하는군.”
“당신은 겨우 그런 하찮은 문제로 부하들을 걱정하게 만들었잖아. 수장의 안위는 곧 조직의 안위와 직결되는 거 아니야? 당신은 길드를 위험에 빠뜨린 거나 마찬가지야.”
“플록스가 그런 쓸데없는 소릴 지껄였나?”
“아니, 플록스는 오직 당신이 행복하기만을 바랐어.”
“주제넘군. 내 행복은 내가 판단해.”
어느 시점부터인가, 내가 말하는 것들이 플록스의 마음인지 내 마음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나 역시 진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나는, 진을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
사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