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사랑이라는 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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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사랑이라는 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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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사랑이라는 흉기
2022.04.22.
진을 향한 감정을 깨닫고 암담한 심정이 된 나는 맥없는 목소리로 부탁했다.
“제발 플록스를 풀어 줘.”
진이 착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플록스는 제가 한 말을 지키려면 길드를 나가야 해. 그런데 조직의 기밀에 깊숙이 관여한 인사라 길드에서 추방되는 건 죽음과도 같아.”
“괜히 겁주지 마. 술 좀 마셨다고 길드에서 추방하는 건 너무하잖아. 게다가 죽음이라니.”
“여기도 기강이라는 게 있거든. 규율과 원칙도 있고. 애초에 술 문제 때문에 그를 받아들이는 걸 반대하는 사람도 많았어. 정보 길드의 특성상 위험 요소가 될 소지가 높았거든.”
금욕 단체야 뭐야?
직접 바도 운영하고 보스 자체가 껄렁한 방탕 황자이면서.
“너무 야박하지 않아? 다른 사람은 뭐 취해서 실수한 적 없어?”
“다른 사람도 취해서 실수는 하지. 그렇지만 누구나 살인을 하는 건 아니지.”
뭐라고요?
“그, 사고였을 수 있잖아? 고의가 아니라.”
“사고로 다섯이나 죽이긴 힘들지. 플록스 본인도 시인했고.”
술을 마시면 인격이 변하는 그런 질환이라도 있나?
하지만 방금 전까지도 성격과 태도는 거칠게 바뀌었을지언정 인격은 여전히 촉촉했는데…….
“물론 납득이 가는 이유는 있었어. 그래서 그를 어렵게 빼내 온 거고. 하지만 이유가 있다고 살인이 용인되는 건 아니야.”
플록스는 무슨 일이 있어도 금주하겠다는 자신의 맹세를 지키려 했을 사람이다. 그저 충동적으로 술을 마셨을 리 없는데.
“정말 플록스를 버릴 거야?”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방금 말했듯이 그는 조직의 기밀을 너무 많이 알고 있어.”
“설마 플록스가 길드를 배신하겠어? 그래서 그를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배신하지 않을 거라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
“그가 길드를 나가는 순간, 온갖 굶주린 이리 떼가 몰려들겠지. 다시 말하지만 내가 적이 좀 많아.”
술이 확 깨는 소리였다. 징벌이나 퇴출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니.
“플록스한테서 당신이나 길드의 약점을 캐내려 할 거란 말이야?”
“길드 내부에서도 죽이거나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로 만들자는 의견이 나올 거야. 아니면 저 스스로 그걸 원할 수도 있고.”
“말도 안 돼!”
“그래,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당신이 깊숙이 관여하고 있어. 신세 좋게 사랑 타령이나 하면서. 사태의 심각성을 조금 알겠나?”
나를 겁주려고 괜히 하는 말일까?
진의 표정을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때 불쑥 떠오른 생각 하나가 내 머릿속을 온통 장악했다.
혹시…… 진의 운명이 바뀐 바람에 이번엔 플록스가 대신 죽게 되는 걸까?
진이 플록스를 감금한 건 그를 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보호하기 위해서인 듯했다.
“부탁을 바꿀게. 제발 플록스를 계속 가둬 줘. 내가 데려가기 전까지.”
“뭐?”
“어차피 버릴 거잖아? 내가 주워 갈 거야.”
이렇게 또 책임 3호가 탄생하고 말았다.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살다 영원히 죽으려 했을 뿐인데.
책임질 사람이 잔뜩 늘어나 버렸다.
토버마리에서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 내가 살려 놓은 진과 덕분에 죽게 생긴 플록스, 이대로 시들기엔 너무 아까운 앤, 그리고 나 때문에 삶이 위태로워진 올랜도와 아젤리아까지.
더 이상은 힘들 것 같다. 만석이다. 매진.
“말로는 못 할 일이 없는 레이디로군.”
진이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 보니 플록스 얘기에 열을 올리느라 황후 얘기는 쑥 들어가 버렸네.’
진은 황후에 관해선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황후를 욕하거나 원망하지도, 그렇다고 두둔하거나 변명하지도 않았다.
그녀에 관한 것은 누구와도 공유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 줬으면 좋겠군. 레이디께서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듯하니 내가 수양을 더 해야겠어.”
진이 비아냥거리며 나를 쫓아냈다.
* * *
페가수스에서 운영하는 숙소까지는 토버마리 여정을 함께했던 휴고가 안내해 주었다.
고단한 몸을 침대에 눕혔지만 뒤숭숭한 마음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내 앞가림도 못 하는 주제에 다른 사람들에 대한 걱정과 불안으로 뒤척였다.
이 와중에 대책 없이 또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다니.
진을 좋아한 지야 꽤 됐지만,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좋아하는 건 누구든 몇 명이라도 얼마든지 좋아해도 되지만, 사랑은 그렇게 마음 내키는 대로 덥석덥석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내 지난 삶을 돌이켜보아도, 사랑은 한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것이기에. 사랑에 빠지는 족족 다 사랑할 수는 없는 일이지.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조금 훌쩍였다. 왜 진 같은 남자를 사랑하게 되고 난리야.
플록스가 생사의 기로에 놓여 있는데 사랑 타령이나 하는 난 또 뭐고.
똑똑.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내 끙끙거리던 고민을 흩어 놓았다.
이 시간에 누구지?
호텔 직원이라기엔 너무 늦은 방문이었다.
진일까?
매몰차게 내쫓곤 마음에 걸려서 사과하러 왔을까?
아니면 그새 수양이 끝나서 설명이 미진한 부분을 보충하려고?
진은 좀 그런 구석이 있었다.
나는 잠옷 위에 숄을 두르고 방문을 열었다.
“로제트.”
기대했던 진이 아니었다.
그는 객실에 들어서자마자 나를 덥석 끌어안았다.
“지금 뭐 하는 거야?”
그의 가슴을 밀어내며 빠져나오려 했지만 나를 가둔 팔이 의외로 필사적이었다.
“로제트 제발, 잠시만 이렇게 있자.”
그가 입술을 붙인 채 속삭인 귓가를 시작으로 소름이 온몸을 타고 퍼졌다.
우정의 포옹이라기엔 기분 나쁘게 끈적했고, 반가움의 포옹이라기엔 반가울 상황도 관계도 아니었다.
“윌로우, 그만 해!”
그가 마침내 팔을 풀었다.
“넌 언제나 날 이렇게 밀어내더라.”
서운한 듯 말하는 윌로우의 목소리가 알 수 없는 만족에 젖어 있어 끔찍한 느낌이 들었다.
“그거 알아? 네가 그럴수록 난 더 미치겠어.”
얘가 진짜 미쳤나.
소심한 약골 윌로우가 발정 난 짐승 흉내를 내고 있었다. 만면에 야릇한 표정까지 띠고서.
“쓸데없는 소리 말고 용건이나 말해. 이 시간에 여긴 왜 온 거야?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고?”
“로제트, 여긴 내 근거지야. 여기선 나도 힘깨나 쓰지. 그래도 찾느라 조금 애먹었어, 요 귀여운 다람쥐.”
윌로우가 요상한 소릴 지껄이며 내 턱 끝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그 징그러운 손길을 쳐내며 물었다.
“너 술 마셨어?”
아니면 약을 했거나.
그러고 보니 술 냄새가 희미하게 나는 듯했다. 술이라면 이제 지긋지긋한데.
“널 생각하면 늘 갈증이 나고 술이 당겨.”
“날 짜증나 죽게 할 작정이 아니면 헛소리 집어치우고 용건이나 말해. 특별한 일 없으면 가고.”
“아, 용건.”
윌로우가 불길하게 웃었다.
“그 어느 때보다 확실한 용건이 있어서 왔지. 하지만 네게 말해도 될지 어떨지는 모르겠어.”
“헛소리하려면 그냥 가.”
“넌 너무 예쁘고 새침해. 공작 그 인간은 어떻게 너한테 무심할 수가 있지? 이렇게 보기만 해도 달아오르게 만드는데.”
“가까이 오지 마.”
나는 뒷걸음질 치면서 이 자식을 후려칠까 소리를 질러 도움을 요청할까 고민했다.
문제는 소란을 피우면 백 프로 가십지에 실릴 거라는 점이었다.
호텔 주변은 가십지 기자들의 주요 출입처 중 하나였다. 남녀가 함께 있는 사진 한 장만 건져도 별별 기사를 무한하게 만들어 낼 수 있으니.
물론 없는 내연남도 일부러 만들어 내는 마당에 내가 이까짓 가십 기사를 두려워하겠는가. 프러너스 얼굴에 똥칠을 하려면 일부러 스캔들을 만들어야 할 판국인데.
기차역에서 기자들을 애써 따돌린 건 내 최후의 안식처에 똥파리가 꼬이는 게 싫어서였을 뿐. 그 외에는 저희끼리 나를 씹든지 뜯든지.
하지만 지금은 마음에 걸리는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이 망할 백작 놈이 올랜도의 남편이라는 점.
나와 윌로우는 지금 이 공간에 같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무엇이든 한 사이가 될 수 있었다.
아무리 허접하고 앞뒤가 맞지 않는 가십 기사라도 지금의 올랜도에겐 큰 상처가 될 것이다.
더욱이 나와 올랜도의 관계를 생각하면 사교계 입방정꾼들이 뭐라고 떠들어 댈지 훤했다.
나를 아니꼽게 생각하던 웨더그린 후작부인의 제라늄 파는 정숙과 품위의 화신이라도 되는 양 이렇게 성토할 것이다.
‘어떻게 절친한 친구의 남편과 붙어먹을 수가 있는지. 아무리 남편의 외도로 체면이 바닥에 떨어졌대도 그렇죠. 저리 품위 없이 막 나가서야 쓰나요. 귀부인의 수치예요.’
품위를 논하려면 처제와 붙어먹은 제 남편 웨더그린 후작의 품위부터 논할 일이지.
이런 제라늄.
올랜도를 눈꼴시어 하던 해밀턴 백작부인의 프리지아 파는 이렇게 비웃겠지.
‘공작부인의 발이라도 핥을 기세더니 꼴좋네요. 쓸개라도 꺼내 줄 듯 비굴하게 굴더니 이젠 남편까지 갖다 바치려나? 요즘 웃을 일이 없었는데 뒤통수 맞은 그 표정 한번 보고 싶네.’
설마 그렇게까지 잔인하게 말하겠느냐고?
대상이 올랜도만 아니었지, 지난 생에 들은 말을 거의 그대로 옮긴 것뿐이다.
이런 프리지아 같은.
내가 배덕하고 저속한 귀부인의 수치가 되는 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하필 상대가 코찔찔이 윌로우란 것이 심히 굴욕적이지만.
하지만 올랜도가 겪을 수모를 생각하면, 그 치 떨리는 분노와 배신감과 자괴감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왔다.
너무나 익숙한 아픔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가소로운 자식의 엉덩이를 한 방에 걷어차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내가 망설이는 모습을 저 편한 대로 해석한 윌로우는 용기백배해서 입방정을 떨기 시작했다.
“소년 시절부터 내 환상 속엔 늘 로제트 네가 있었어. 몸은 다른 여자랑 있어도 늘 널 생각했지.”
또 시작이네. 나는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윌로우, 넌 더 이상 소년이 아니야. 나도 소녀가 아니고. 우리는 이제 각자 책임져야 할 삶과 사람들이 있어.”
“난 널 책임지고 싶은데? 널 행복하게 해 주고 싶어.”
“날 그렇게 좋아했으면 소년 시절에 고백이라도 한번 해 보지 그랬니. 공작에게 파혼 결투라도 신청하든지. 왜 이제 와서 이래?”
물론 프러너스에게 결투를 신청했으면 그때 죽었겠지.
아무리 나를 좋아한다 해도 제 목숨이 더 소중했겠지.
“그러게 말이야. 후회하고 있어. 그땐 나 자신이 너무 형편없다고 느껴서…….”
윌로우, 넌 지금이 더 형편없어.
어렸을 땐 소심한 약골이었어도 지금처럼 느물거리고 야비한 인간은 아니었는데.
“그래, 네가 공작부인이 돼서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어. 내가 어떻게 카를슈테인을 이길 수 있겠어? 못난 생각이었는지 몰라도 내 주제엔 결코 널 만족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지.”
그때 만족시킬 수 없었던 걸 어째서 지금은 만족시킬 수 있을 거라 자신하는지?
“윌로우, 내 생각에 넌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했어. 평생 독신으로 살거나, 다른 사람과 결혼했으면 나에 관한 건 싹 잊거나.”
“그럴 걸 그랬어. 독신으로 널 기다릴 걸. 이제라도 만회하고 싶어.”
“아니, 기다렸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이미 결혼을 선택했으니 책임을 져야 한단 소리야. 이제 와서 네 마음이나 소년 시절 추억 같은 철없는 소릴 들먹일 게 아니라.”
남의 말을 제대로 안 듣는 건 불치병인가.
“우리 귀족들의 결혼 형편이야 너도 잘 알잖아. 작위를 물려받으려면 어쩔 수 없이 결혼해야 하는 걸. 후계자 문제도 있고. 결혼이라고 해 봐야 특별한 게 아니야. 사업이랑 같은 거지.”
“넌 어쩌면 그렇게 너만 생각해?”
“올랜도 얘길 하고 싶은 거야? 그 여자도 순수한 마음으로 결혼한 건 아닐걸? 그 여잔 음침해.”
“올랜도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듣고 싶지 않아.”
“내 귀여운 로제트는 너무 순진해서 탈이야.”
윌로우가 또 어쭙잖게 내 턱을 쓰다듬었다.
“한 번만 더 내 턱을 만지작거리면 그 손가락을 부러뜨려 버릴 거야.”
윌로우가 당황한 얼굴로 손을 거뒀다.
“사업이었다 해도 약속과 신의는 지켜야지.”
“그 여자도 약속을 못 지켰는걸.”
“올랜도가 뭘.”
“오직 후계자를 보겠다는 일념으로 마음에도 없는 여자를 밤마다 안았는데 결과가 이러니까.”
웰츠 백작 부부에게는 아직 후사가 없었다.
나는 화가 나서 숨이 잘 안 쉬어졌다.
「로제트 앰브로시아는 공작부인의 가장 중요한 책무라 할 수 있는 후계자 문제에 성의를 다하지 않았습니다.」
지난 생에 이혼하지 않으려고 버티는 나를 떼어 내기 위해 프러너스의 변호인이 법정에서 한 말이었다.
프러너스는 나와 아이를 갖는 걸 단 한 순간도 바란 적이 없으면서 그렇게 말하도록 지시했다.
결혼 생활 내내 성의가 없었던 건 그였다.
눈에 보이는 인상처럼 워낙 금욕적인 사람이어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금욕적인 공작은 결혼식 전날 밤에도 아젤리아를 만났다.
이제 무슨 말을 들어도 담담할 수 있을 거라 자신했는데.
나는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이렇게 조금만 헤집어도 금세 선혈이 흘렀다.
내 얼굴이 하얗게 질리자 눈치 없는 윌로우도 뭔가 깨달았는지 허둥지둥 아무 말을 주워섬겼다.
“로제트 네겐 아무 문제 없어. 듣자 하니 공작이 내내 잠자리에 소홀했다며? 그 내연녀가 임신한 걸 보면 그 인간 일부러 피한 거야. 너랑 나는 아마 금방 생길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