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미안하다, 동정해서 (42/110)


#42화. 미안하다, 동정해서
2022.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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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로우 웰츠 백작. 저거, 죽여 버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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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의 홀대로 많이 외로웠지? 내가 정말 아껴 줄게. 도무지 이해가 안 가. 난 지금도 널 간절하게 안고 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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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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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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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흰 어쩜 그렇게까지 이기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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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트, 왜 그렇게 화가 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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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지긋지긋해. 그 끔찍하게 자기중심적이고 일방적인 횡포에 몸서리가 쳐져. 너희 종족은 남자도 여자도 아니고 그냥 이기적인 괴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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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널 위해서 많은 걸 포기할 각오가 돼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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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쳐! 그게 네가 날 위해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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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트…….”

진을 향한 내 감정에 취한 나머지 나를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윌로우를 어설프게 동정한 것이 실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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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 다시는 찾아오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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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숙해서 네 기분을 상하게 했는지 몰라. 하지만 널 향한 내 마음은 진심이야. 그것만은 믿어 줘, 로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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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넌 나는 말할 것도 없고 너 자신도 잘 모르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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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네 말대로 난 멍청이야. 어렸을 때부터 그랬잖아. 네가 이해해 줘. 난 얼간이지만 널 사랑하는 마음만은 진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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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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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도 올랜도도 널 위험에 빠뜨릴 거야. 내가 널 지켜 줘야 해.”

윌로우는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내 양어깨를 우악스럽게 거머쥐고는 거칠게 벽으로 밀어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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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하지 마. 우릴 위해서야.”

불길한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윌로우가 내 입술을 덮쳤다.

징징거리는 소리에 잠깐이나마 마음이 약해졌던 나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빡.

윌로우가 제 머리를 감싸 쥐고 비틀거렸다.

껌뻑이는 눈은 미처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듯했다.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짰더니 내 손도 비명을 삼켜야 할 만큼 아프고 욱신거렸다.

내가 윌로우의 머리를 후려친 직후였다.

따귀를 올려붙이는 건 저런 개자식에겐 지나치게 과분하고 우아한 처분이란 생각이 들었다. 유서 깊은 하말린의 호신술은 말할 것도 없고.

내가 정숙한 공작부인 역할을 훌륭히 소화해 냈다고 해서 원래부터 온순하고 얌전한 사람이었을 거라 생각하면 곤란하다.

왕년에 앰브로시아의 말괄량이 영애로 이름깨나 떨쳤으니까. 어렸을 때도 윌로우에게 완력으로 져 본 적은 없었다.

정신을 차린 윌로우가 화가 나서 달려들면 이번엔 어딜 어떻게 공격할까 궁리하며 씩씩거리고 있는데, 쾅 소리가 나며 객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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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하고 있었네. 딱히 내 도움이 필요 없겠어.”

진이 나와 윌로우를 번갈아 보더니 말했다.

그의 한쪽 손이 누군가의 멱살을 틀어쥔 채였다.

질질 끌려온 남자를 보니 낯익은 얼굴이었다.

그때 그 슈발럼? 저 슈발럼이 왜 여기에?

서늘한 예감에 내 몸의 피가 차게 식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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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파리가 똥을 달고 왔더군.”

고개를 돌려 윌로우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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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네가 슈발럼을 불러들인 거야?’

눈으로 묻자 엉거주춤 서 있던 윌로우가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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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많이 맡아 본 구린내다 했더니. 이런? 똥이 구면이네. 반가워서 그냥 지나칠 수 있어야지. 간만에 진하게 안부를 주고받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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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헉, 허어억, 쿨럭쿨럭…….”

진이 움켜쥐고 있던 멱살을 놓자 슈발럼이 죽는 소리를 내며 엄살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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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 장치, 촬영 도구, 탈라리아 메신저까지. 아주 첨단 기기로 무장을 했던데.”

진이 옆방을 턱으로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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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가벗겨서 탈탈 털어 사진이란 사진은 다 처리하긴 했는데. 쥐새끼 같은 인간이 어디다 또 빼돌렸을지 알 수 없는 일이지.”

진이 매서운 눈초리로 슈발럼을 이리저리 훑자, 그가 손을 내저으며 강하게 부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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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없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샅샅이 뒤지셨잖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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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어 달라? 매우 힘든 주문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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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야말로 힘들게 촬영한 걸 다 빼앗겨 곤란한 처집니다. 밥줄이 달린 문제라서요. 아시잖습니까? 저희야 그저 돈을 받은 대로 일할 뿐인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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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이 추잡한 일을 하는 처지에 사정을 봐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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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레이디 앰브로시아께 무슨 사적인 유감이 있어 이러는 게 아니란 말씀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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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사적인 감정이야 일을 의뢰하는 사람에게 있겠지. 그 감정 충만한 의뢰자가 저기 저 애송이 호텔 주인장일 테고?”

자신의 자부심인 호텔이 조롱당하는 느낌이자 여태 눈치만 보던 윌로우가 발끈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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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트, 저 남자는 뭐야?”

지역에서 힘깨나 쓰신다는 웰츠 백작께선 뒷골목의 방탕 황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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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중요한 게 아닐 텐데?”

내가 사납게 눈을 치뜨며 묻자 윌로우는 방금 처맞은 것도 잊었는지 내 손을 꼭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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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트, 우리를 위한 일이었어. 믿어 줘.”

사방팔방 믿어 달라는 인간 천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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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야 너도 쉽게 이혼하고 나도 쉽게 이혼할 수 있어. 그래야 내가 널 지켜 줄 수가 있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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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너와 내가 불륜 관계라는 기사를 쓰도록 일부러 슈발럼을 불러들인 거야?”

어쩐지 오늘따라 윌로우가 발정 난 짐승처럼 자꾸만 몸을 붙여 대더라니.

껴안은 것도 입술을 덮친 것도 자꾸만 내 몸 여기저기를 만지작거린 것도 모두 사진에 그럴싸하게 찍히기 위해 포즈를 취한 거였다.

이 정도면 한심해서 불쌍해질 지경이었다. 저 팔푼이 같은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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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로우, 아무래도 내가 너한테 잘못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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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로제트. 너를 위해서라면 난 어떤 취급을 받아도 상관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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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그렇게 나를 생각한다면서 내 명예가 더럽혀지는 건 왜 생각하지 않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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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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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나 따위에게 명예 같은 건 없을 거라 생각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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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 마. 지금 당장보다 좀 더 크고 먼 걸 생각해. 너와 내가 함께할 미래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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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맞아. 내가 너에게 저지른 잘못은 내 생각을 분명히 말하지 않았다는 거야. 네가 알아서 헤아리길 바랐는데 그 부분도 내가 어리석었어.”

나는 윌로우의 손아귀에서 내 손을 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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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말할게. 너와 내가 함께할 미래 같은 것은 없어. 친구로서 우정을 나눌 수는 있었을 텐데, 지금으로선 그것도 불가능하게 됐어.”

잠시 말을 끊은 나는 슈발럼을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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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발럼 남작? 여기서부터는 메모해도 좋아요. 참, 아까 내가 윌로우를 후려치는 장면도 찍혔나요? 진, 그 사진은 없애지 말아요. 기념으로 갖고 있게. 윌로우 너도 한 장 줄까?”

그러곤 다시 원래 화제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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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네 멋대로 해석하지 말고 그대로 귀에 박아 넣어.”

나의 거친 어휘 선택에 윌로우의 눈이 커다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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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를 전혀 남자로 보지 않아. 지금껏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쥐새끼 같은 슈발럼이 받아 적으랬다고 정말로 끄적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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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공작과 이혼을 하든 하지 않든, 네가 독신이든 유부남이든, 심지어 우리 사이에 올랜도가 있든 없든 그 사실은 변함이 없어.”

윌로우를 보니 마치 외국어로 욕설을 들은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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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그냥 취향의 문제일 뿐이었어. 넌 예나 지금이나 내 취향이 아니야. 물론 그건 네 잘못이 아니지. 당연히 내 잘못도 아니고.”

윌로우의 얼굴이 슬슬 뻘게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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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금은 네게 인간적으로 너무나 실망했어.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게 됐지. 얼마 전까지는 널 좋아하지 않았다면, 지금은 널 싫어하게 됐어.”

윌로우가 열 받은 얼굴로 열심히 적고 있는 슈발럼을 쏘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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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평생 습관이라.”

슈발럼이 밉살맞게 능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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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내 소꿉친구고, 자꾸만 어린 시절 네 모습이 어른거려서 모질게 대하기 망설여졌어. 그래서 네게 오해를 불러일으켰는지 모르겠네. 하지만 더 이상 네게 잘못을 저지르면 안 되겠어.”

나는 마지막으로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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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함께할 미래는 없어. 넌 내가 상종하기도 싫은 사람이 됐어.”

일순 객실 안에 정적이 흘렀다.

솔직히 조금 가슴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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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트, 갑자기 왜 이래?”

윌로우의 목소리가 떨렸다.

갑자기라니. 갑자기가 아니라고 지금껏 말했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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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의 아니게 줄곧 옆에서 들었는데 말이야. 갑자기 하는 말은 아닌 거 같은데?”

진이 내 마음을 대변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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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자식은 누구야?”

윌로우가 의심스런 눈으로 진을 쏘아보았다.

내 ‘갑작스런’ 변심의 이유로 진을 찾아낸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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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내 친구? 동료? 계약자? 파트너? 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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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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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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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연남. 인사가 늦었군. 난 로제트의 내연남이야.”

내가 뭐라고 해야 할지 망설이는 사이 진이 먼저 말했다.

메모하는 슈발럼의 손이 빨라졌다.

윌로우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진이 아닌 나를 향해 사납게 짖어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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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남자 없이는 하루도 못 사는구나? 이 발정 난 암고양이 같은 것!”

하도 어처구니가 없으니 웃음이 다 나왔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윌로우가 끝까지 쓰레기여서.

더 이상 가슴 아파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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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충격이 큰 거 같은데 부축할 사람이라도 불러 줄까? 여기서 날 샐 건 아니지?”

진이 내연남 타이틀에 걸맞게 나를 몸 뒤로 숨기며 앞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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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나와 로제트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이제까지도 많이 참아 준 거라. 당신이 로제트의 손님인 것 같아서.”

진이 문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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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말하는 태도를 보니 손님이 아닌 듯하군.”

윌로우는 굴욕감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내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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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하게 될 거야.”

그래그래, 다들 작별 인사로 그렇게 말하더군.

똥파리는 끝까지 앵앵거리며 퇴장했다.

똥파리를 따라 은근슬쩍 자리를 뜨려던 똥에게 진이 친절하게 안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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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넨 심도 있는 상담이 좀 필요할 것 같군. 나가면 내 부하들이 반갑게 맞아 줄 거야.”

슈발럼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터덜터덜 객실을 떠났다.

두 사람이 떠나자 진은 한동안 방 안을 왔다 갔다 하며 둘러보는 척했다.

괜히 커튼을 뒤집어보고 벽에 걸린 그림을 들여다보고 가구의 서랍을 열었다 닫았다 하더니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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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을 바꿔 달라고 할까? 아니면 아예 다른 호텔로 옮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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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시간도 늦었고 피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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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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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당신이 같이 있어 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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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좋아. 내연남 노릇 좀 하지.”

당연히 허락하지 않을 줄 알고 그냥 한번 해 본 소린데. 뜻밖의 수락에 어리둥절한 눈으로 진을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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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미안한 것도 있고. 내가 숙소를 소개했잖아.”

아, 그랬지. 책임을 톡톡히 물어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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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은 이런 데 직접 행차할 위인이 아니라서 방심한 게 사실이야. 플록스 일로 신경이 분산된 것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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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계산에 없던 인간이 등장한 거네. 그건 내 잘못이야. 왜 숙소를 옮겨야 했는지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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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츠 호텔을 나온 건 그자 때문이군. 어떻게 아는 사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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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꿉친구. 그의 아내는 내 유일한 친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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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더럽게 얽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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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럽게 됐지.”

막상막하인 내 거친 말투에 진의 한쪽 입꼬리가 비싯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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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자도 충격이 크겠어? 당신의 그 무자비한 막말도 모자라 폭행까지 당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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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정신 못 차렸을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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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로 안 보인다는 말, 그거 충격이 꽤 오래갈 텐데 말야. 난 요즘도 악몽을 꾸잖아.”

진의 너스레에 큰 소리로 웃고 말았다.

아마 윌로우는 가장 먼저 진에 대한 조사에 착수하겠지. 진이 자기보다 훨씬 강해 견적이 안 나온다 싶으면 냉큼 꼬리를 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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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피곤해. 침대에 좀 누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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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쉬어.”

이불 속으로 들어간 나는 멀거니 서 있는 진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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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당신도 어디 누워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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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신경 쓰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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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괜찮으면 나와 가까운 곳에 좀 누워 주면 안 될까?”

오해하지 마. 당신한테선 심신 안정에 좋은 향이 난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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