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내겐 너무 호구로운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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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내겐 너무 호구로운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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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내겐 너무 호구로운 당신
2022.04.29.
가까운 곳에 누워 달라는 나의 요청에 진이 수상한 마물 보듯 나를 내려다봤다.
“어디까지나 내 심신 안정을 위해서야. 그렇게 석상같이 서 있으면 마음이 불편하잖아. 가뜩이나 눕기 좋아하는 사람이.”
내가 해치지 않는다는 표정을 열심히 지어 보이자, 진이 마지못해 침대 가장자리에 몸을 반만 걸치다시피 누웠다.
그래도 늘 방만하게 늘어져 있는 게 특기인 사람이라 금세 편안한 자세를 찾아 침대와 한 몸이 되었다.
나는 수려한 그의 얼굴을 몰래 흘끔거렸다.
삭발 당한 머리칼은 그새 꽤 자라 있었다.
“당신한테선 좋은 향이 난단 말이야. 심신 안정에 도움이 돼.”
“방향제로나마 쓸모가 있으니 천만다행이군.”
지금, 황후 이야기를 꺼내도 될까.
플록스가 자신을 갈아 넣어서라도 꼭 수면 위로 띄우고 싶어 한 그 이야기.
황후의 서신 내용으로 미루어 진도 자신이 이용당하는 걸 알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황후에게 휘둘리는 건 왜일까. 자신의 목숨까지 위태롭게 하면서.
“세상엔 지독하게 이기적인 인간들이 이렇게 많은데, 당신은 어쩌면 그래?”
“어쩌면 그런 게 뭔데?”
“왜 호구 노릇이냐고.”
“흥, 그렇지. 그중 최고는 내연남 노릇이지.”
“아니, 그게 아니라…….”
망설이던 나는 플록스의 간절한 부탁을 떠올리며 조심스레 물었다.
“황후를…… 사랑해?”
정적이 흘렀다.
질문이 잘못됐을까? 하지만 사랑이 아니고서는 도무지 설명되지 않는 무모한 행보였기에.
“나도 궁금해.”
아, 당신도 궁금하군요. 나도 참 궁금한데.
진은 다행히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대답도 질문도 아닌 말을 했다.
“사랑한다고 생각한 때도 분명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아닌 것 같아.”
오? 뭔가 싹수가 보이는 자기 성찰?
“무슨 마음인지 알 것 같아. 그 문제는 나야말로 참 헷갈리거든.”
열여섯 번의 삶 동안 줄곧 사랑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게 사랑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
그걸 깨닫는 건 또 어찌나 한순간인지.
길고 긴 헛수고 끝에 찾아온 짧고 명료한 깨달음에 허탈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어쩌면 나에게도 안을 것이 필요했는지 모르지.”
진은 팔을 베고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여기가 토버마리의 야생 정원이라 장미 무늬 벽지 대신 별이 가득한 밤하늘이 보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그 시절의 나는 정말 추웠거든. 세상의 모든 것이 나를 냉대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지.”
지금 얼굴을 보면 어렸을 때도 무척 예뻤을 것 같은데, 사람들이 참 죄 없는 어린아이에게 야멸차기도 하지.
“어느 날 후원에서 만난 소녀가 처음으로 내게 환하게 웃어 준 거야. 뭐라고 말도 걸어 주었는데 잘 알아듣지 못했지.”
진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때까지 지시나 금지같이 목적이 명확한 말만 들어온 터라 날씨가 좋다거나 정원의 꽃이 아름답다거나 나는 쿠키를 좋아하는데 너는 어떻냐는 재잘거림이 의미하는 바가 뭔지, 나한테 하는 말인지 그냥 혼잣말을 하는 건지도 몰랐지.”
쿠키…….
가슴 아픈 고백을 하고 있는데 딴생각을 하는 건 매우 미안하고 무정한 짓이지만, 이 대목에서 뭔가 아득한 기억을 뚫고 움틀 깨어나려는 것이 있었다.
까마득히 잊고 있던, 뭔가 굉장히 신경 쓰이는.
머릿속 그 부분을 누가 살짝 떠낸 것처럼 답답했다.
두통이 밀려와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어릴 적 황궁에 놀러 갔던 기억을 떠올리려 할 때마다 찾아오는, 그 두통과 같았다.
“눈이 부셨지. 너무 황홀해서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어. 그즈음의 나는 독 때문에 시력이 터무니없이 약했거든.”
진은 여전히 그때의 기억에 빠져 있었다.
아아, 어렸을 때 우리가 만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와 미고, 셋이 함께 놀 수 있었다면 어린 마음이 그렇게 춥지는 않았을 텐데.
플럼 하우스의 자두로 만든 잼을 듬뿍 넣은 쿠키, 우리 집 별미인 그 자두 쿠키도 양손 가득 가져다주었을 테고.
“알고 보니 그 소녀는 무슨 명문가의 영애인데, 황태자의 정혼자라더군. 아마 그래서 황궁을 주기적으로 드나들었을 테고, 그날은 우연히 나와 마주친 거겠지.”
아리스타타는 일찍부터 차기 황후 내정자였구나.
황궁에서 우연히 진을 발견한 그녀가 추위에 떨던 소년을 따뜻하게 보듬어 주었구나.
흠, 이건 좀 센데?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기가 쉬운 일은 아니겠어.
“지금은 사랑이었건 사랑이 아니었건 상관없는 일이 됐지만.”
“말은 그렇게 해도 여전히 상관 많아 보이는데? 플록스가 저렇게 극단적인 방법으로 당신을 만류하려 한 이유가 있을 테고.”
“…….”
“왜 그래야 해? 뭘 놓지 못하는 거야?”
나도 안다. 사랑이 아닌 걸 알아도 놓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는 걸. 살아가는 데 사랑이 전부는 아니니까.
“아리스타타는…… 지금은 아니어도, 오랫동안 나를 살게 한 유일한 이유였으니까.”
진이 의외로 담담히 털어놓았다.
오히려 듣는 내가 속이 쓰렸다.
“당시 살아도 죽은 것같이 취급되던 나를 그녀는 살아 있는 사람으로 대해 주었지. 내게 생명을 준 어머니 같은 존재였어.”
하아, 그럼 내가 그사이에 끼면 천륜을 갈라놓는 일이 되어 버리는 건가.
“세상엔 해로운 어머니도 있다지만, 그렇다고 어머니를 버릴 수는 없잖아?”
나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머니 같은 사람이 진을 심심하면 사지로 불러들인다고? 서신에 그런 투정을 써서 사람의 마음을 흔든다고?
생명을 준 숭고한 어머니와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런 말을 해 봐야 황후를 헐뜯는 걸로나 들리겠지?
“진, 모든 아이는 언젠가 어머니를 떠나야 한대. 아무리 훌륭한 어머니라도 말이지. 때가 지나도록 떠나지 못하면 기다리는 건 죽음뿐이야. 그럼 어머니는 무덤이 되겠지.”
죽음을 특히 강조했다. 당신 그러다 또 죽는다고! 당신이 살 길은 황후를 떠나는 거야.
사실 나는 진의 마음을 이해했다.
남들 눈엔 어리석고 답답해 보이는 선택인지 몰라도, 알면서도 속아 주는 마음을.
자신에게 해가 될 줄 알면서도 버릴 수 없고, 재앙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기어이 그곳으로 걸어 들어가는 그 마음을.
그때 말했던, 알면서도 속아 주는 사기 피해자 이야기가 다름 아닌 진 자신의 이야기였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결국 미고를 보내야 했듯이 그도 아리스타타를 보내 주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둘은 사는 세계가 다르니까.
서로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 함께하다 보면 시간이 갈수록 서서히 한쪽은, 아니 어쩌면 양쪽 모두 병들게 되니까.
“그래, 아마 당신 말이 맞을 거야.”
진이 순순히 동의했다.
하지만 당신 말이 백번 옳아도 내 마음 가는 대로 할 거야, 로 들렸다.
황후가 부를 때마다 제도로 달려가고도 정작 그녀를 한 번도 만나지 않은 것은 아마 자신의 안전 때문이 아니라 황후의 안위를 걱정해서이리라.
부를 때마다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걸까 걱정이 돼서 안 갈 수는 없었겠지.
제도의 어느 뒷골목에 몸을 숨긴 채 황후의 소식을 수소문하고 별일이 없는 걸 확인하면 그리치로 돌아왔겠지.
그렇죠, 진?
직접 확인해 보고 싶지만, 보나 마나 조개처럼 입을 딱 다물어 버리겠지.
“내가 이런 말을 줄줄 늘어놓는 건 아마 당신이 플록스를 책임지려 해서일 거야.”
진이 갑자기 털어놓았다.
“플록스를 주워 간다고 할 때 당신한테서 광채 같은 게 나왔거든.”
진이 웬일로 나를 띄워 주는 거지? 갑자기 저러니 어색했다. 설마 골칫거리를 치워 주겠다니 고마워서?
“그 광채가 호구한테서만 나오기로 유명한 광채인데 말이야.”
“뭐, 놀린 거야? 그럼 그렇지.”
“놀리다니, 칭송이야.”
놀리는 거 맞는 듯한데. 저런 말로 화제를 돌리려는 걸까.
“당신이야말로 호구 아닌가? 책임지려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 남 걱정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진이 어울리지 않게 아주 조금 다정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 책임지려는 사람에 진 당신도 포함되는 건 아는지.
포함되는 정도가 아니라, 가장 큰 두통거리지.
“자기 행동이나 말에 최소한의 책임은 지고 살면 좋겠어. 그럼 세상에서 불행이 사라질 것 같아.”
진이 이렇게 말하고는 머쓱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와, 지금 내 옆에 누운 사람이 방탕 황자 진 시더우드 전하가 맞습니까?
사실 별호만 방탕 황자지, 지금껏 본 진은 옷섶이 자주 벌어져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방탕은커녕 고지식한 외고집에 가까웠다.
그래, 진. 사람 한번 잘 봤어. 당신 말대로 나 책임감이 어마어마한 사람이라고.
그래서 당신을 위험한 황후에게서 멀리멀리 떼어 놓고 싶어.
책임감이 아니라 주제넘은 오지랖이라고? 그건 당신이 알면서도 속아 주는 부류라서 그래. 누가 말리지 않으면 망할 걸 알면서도, 아니 기꺼이 망하기 위해 불속으로 뛰어들 위인이라 내가 이럴 수밖에 없다고.
아마 진은 기회가 된다면 혼자서 모든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사라지려 할 것이다.
그 심정이 어떤 건지 나도 잘 안다. 그리고 진 역시 나와 같은 심정일 거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가 가끔 나와 닮은 표정을 짓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 그거 알아? 누구 한 사람 조용히 사라진다고 문제가 해결되진 않더라고. 세상은 결코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거든.
멀리 갈 필요 없이 나를 좀 봐.
“진, 요즘도 안을 게 필요한 거야?”
“그건 왜?”
“음, 필요하면 다른 걸 함께 찾아봐 주고 싶어서. 황후 대신 안을 무언가 말이야.”
나는…… 안 되겠지? 임시로도, 시한부로도 힘들겠지?
술김에 내가 진의 주인 자리를 황후한테서 뺏어 오겠다고 플록스에게 큰소리 탕탕 쳤는데.
호기롭게 장담하던 그때의 나는 용감한 전사 같았지. ‘형수님’을 연호하던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하지만 진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처럼 가볍게 입을 놀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처럼 기가 팍 꺾여서 어정쩡하게 눈치를 살피는 중인데.
그나마도 진에겐 황당한 소리였는지,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았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아는 거야?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느닷없이 펀치를 날리는 것도 재주군. 재미없는 농담 하지 마.”
“내 생각엔…… 이제는 당신이 다른 즐거움을 찾아도 되지 않나 해서.”
“다른 즐거움?”
“나의 버섯 같은? 그러니까 당신의 버섯을 찾아보자는 거지.”
진은 기가 찬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당신은 참, 신기해. 요즘 유행하는 말 있잖아. 당신 좋아하는 연극에 나온다는. 매년 겨울만 되면 제도의 페레티 극장에서 상연하는 그…….”
“매년 겨울 페레티라면 ‘나의 눈사람’? 거기 나오는 대사?”
“아마도. 내게 이렇게 대한 눈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뭐 이런 식의 말.”
“아, 그 대사!”
“당신이 딱 그래.”
“진…… 당신이야말로 그게 무슨 말인지 알고 하는 거야?”
“살다 살다 처음 보는 괴짜한테 쓰는 말 아니야?”
“처음 보는 괴짜라니. 그 말이야말로 프러포즈할 때나 쓰는 말이라고!”
“뭐?”
아마 연극을 띄엄띄엄 봤거나 페가수스 직원들이 하는 말을 지나가다 주워들었거나.
“고마워. 내 색다른 매력에 푹 빠졌다는 말로 알아들을게.”
“아니, 알아듣지 마.”
“겉보기에 내가 좀 독특하지? 안을 들여다보면 더 신기할걸?”
진은 귀가 또 붉어져서는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의 말실수로 나한테 말려든 게 분한 모양이었다.
너그러운 내가 기분을 풀어 줘야지.
“진, 말 나온 김에 언제 함께 연극이나 보러 갈까?”
“속도 편하네. 지금 이 상황에 연극이 눈에 들어와? 연극은 원래도 안 좋아했어.”
“그래? 연기는 능글맞게 잘하던데. 국민 연극 ‘나의 눈사람’도, 거기 나오는 대사도 다 알고.”
“그거야, 아리스타타가……!”
“…….”
이제 아리스타타란 이름이 아주 편하게 입에서 나오나 보네.
황후께서 소싯적부터 연극을 좋아하셨나 봐? 극장에 행차할 때마다 진을 엄청 끌고 다녔나 보지?
무슨 인생이 아리스타타를 빼놓고는 얘기할 수가 없는지.
황후 떼어놓기에 아주 조금은 진전이 있었다고 생각하던 나는 그만 맥이 빠져서 등을 홱 돌리고 누웠다.
‘두 사람을 꼭 갈라놓을 거야.’
물론 책임감 때문에!
왜 매번 누굴 갈라놓으려 드는 역할인지. 안을 것이 필요한 건 아무래도 진이 아니라 나인 듯했다. 온기가 좀 필요한 것 같았다.
지금은 한여름, 마음이 추웠다.
“진, 하말린엔 언제 가?”
나는 등을 진 채 물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진의 헛웃음 소리를 들으며 나는 떠올리고 있었다.
미고가 내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언니가 찾는 해답은 하말린에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