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이 결혼은 누구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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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이 결혼은 누구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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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이 결혼은 누구의 것
2022.05.16.
“아젤리아는 잘 지내요?”
아젤리아가 이곳에 온 걸 프러너스가 아는지 모르는지 떠보기 위해 물었다.
“늘 나보다 아젤리아 안부가 더 궁금한가 보군.”
“홑몸도 아닌데 잘 지내나 해서요.”
“잘 지내.”
아무래도 아젤리아가 여기 왔던 건 모르는 듯했다.
“이젠 공작저에서 지내겠죠? 사용인들이 신경을 많이 써 주면 좋겠네요.”
“…….”
“임부의 마음이 편한 게 가장 중요한 건 알죠? 어차피 치러야 할 일이라면 가능한 한 일찍 아젤리아를 공작부인으로 올리고 아이의 승계도 확정 지어요.”
“그만 해…….”
“그래요, 알아서 잘할 텐데. 내 참견이 주제넘었네요.”
“제국은 처첩을 허용하는 곳이야.”
“누가 뭐래요?”
“그러니 첩을 들인다고 정실을 내칠 필요가 없지.”
웃긴다, 웃긴다 했더니 이번에도 웃기려고 하는 소리인가?
나는 황당한 얼굴로 프러너스를 쳐다보았다.
“우리는 헤어질 때 분명 이혼에 합의했어요. 기억 안 나요?”
“내가 경솔했어.”
“뭐라고요?”
“어차피 우리는 처음부터 계약으로 시작한 사이잖아. 이제 와서 감정을 빌미로 계약을 번복하는 건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건 프러너스 당신 얘기지. 내가 자신을 좋아했다는 걸 알면서. 그 썩어빠진 감정을 무척이나 갈구했다는 것도.
“아젤리아를 공작저로 들이더라도 당신을 공작부인 자리에서 내칠 필요는 없어.”
“눈물 나는 배려네요.”
“원한다면 아젤리아가 낳은 아이를 당신 양자로 입적시킬 수도 있어. 그게 아이가 작위를 승계받기에도 유리하고.”
말문이 막혀서 겨우 입을 뗐다.
“아젤리아는 당신이 이런 생각을 한다는 걸 알고 있어요?”
“…….”
“갑자기 왜 이래요?”
“우리 결혼은 우리 두 사람만의 것이 아니야. 잠시 판단력을 잃었지만, 제자리로 돌아와야지.”
“나는 감정이 전부인 인간이라서요. 내 감정이 식으니 참을 수가 없어요. 이 결혼이 누구의 것이든 알 바 아니에요.”
“귀족의 삶이 어떤 건지 당신도 잘 알잖아? 일단 저택으로 들어와.”
“저택으로 들어오라…….”
“당신이 저택으로 돌아온 후에 아젤리아도 저택으로 들일 거야. 그게 모양새가 좋아.”
“어떤 모양새? 처첩이 자매처럼 사이좋게 지내는 모양새?”
파렴치한 불륜남에서 두 여자 모두를 화목하게 다스리는 능력남으로 이미지 세탁하려고?
“그럼 나도 저택에 들어갈 때 누구 좀 데려가도 되나?”
나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다른 사람은 끌어들이지 않겠다고 다짐해 놓곤, 프러너스가 제국의 처첩제를 무척 자랑스럽게 여기는 듯해 나도 모르게 빈정거렸다.
“내가 첩을 들였으니 당신도 첩을 들이겠다?”
프러너스가 웃음기 없는 얼굴로 쏘아보았다.
나는 무대 위의 배우처럼 과장되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게 무슨 망측한 소리예요? 첩이라뇨? 그이에게 어떻게 그런 짓을.”
“그럼? 새로운 사용인이라도 거느리고 오려고?”
“당신이 혹시 첩이라도 될 마음이 있으면 그러자는 거죠. 물론 그이와 의논해 봐야 하지만. 마음이 넓은 사람이라 내가 부탁하는 건 웬만해선 거절하는 법이 없긴 한데.”
프러너스는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부류지만, 그의 호흡이 슬쩍 거칠어진 걸로 봐서 꽤 열 받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물론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아닐 테고.
내가 두 눈 똑바로 뜨고 맞서는 자체가 그에겐 기가 찬 노릇이겠지.
“당신, 그런 식으로 날 충동질할 셈인가?”
프러너스의 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만약 그럴 생각으로 한 소리라면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말해 주지.”
그래? 약 올라? 모욕적이야? 그럼 이혼해.
“갑자기 왜 이러느냐? 갑자기 궁금해졌으니까. 당신이 대체 뭘 믿고 이러는지. 이렇게 궁금해서야 당신을 못 놓지.”
부부였지만 프러너스에 대해 모르는 게 많았다는 걸 다시 한번 인정한다. 점잖고 반듯해 보였던 건 그의 겉모습일 뿐.
프러너스는 음산한 웃음을 띠고 내게 다가왔다.
차라리 폭력을 휘두르려고 다가오는 거라면 이렇게 소름 끼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얼굴은 이상한 욕망에 사로잡힌 괴물의 얼굴이었다.
다가오는 그를 피해 뒷걸음질하던 나는 손을 뻗어 그를 저지했다. 그가 시선을 내려 자신의 가슴께를 보았다.
자신을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는 내 부실한 손을 가소롭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설마 당신이 날 거부하는 이유가 진 시더…….”
그가 그 상태 그대로 한 발 더 다가왔다.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마!”
“진 시더우드 때문이라고는 말하지 마. 아닌 거 아니까.”
“더 다가오면 사람을 부를 거야.”
“공작 부부가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데 감히 누가 끼어들어.”
그가 어울리지 않게 픽 웃었다.
“여긴 당신 내연남 진 시더우드도 없잖아. 제도는 의뢰 가능 지역이 아닌가 보지? 아, 그자는 제도엔 오기 힘들지.”
프러너스가 쉽게 속으리라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엉성하게 급조한 연극으로나마 한 번은 말하고 싶었다.
그의 대단함이나 특별함은 자신만의 것이 아님을. 상당 부분 내가 그에게 부여한 것이라 어느 날 내가 걷어가 버리면 그만인 것을.
“로제트, 상대를 잘못 골랐어. 애초에 그는 누구의 내연남이 될 수 있는 자가 아니거든.”
하긴 카를슈테인 공작은 모르는 게 없지. 제국의 권력과 정보를 장악하고 있는 사람이니.
까탈스럽고 난폭하다고 알려진 황제의 몇 안 되는 측근이기도 했다.
황제가 우호적으로 대하는 가문은 딱 두 가문뿐. 카를슈테인 공작가와 황후, 아리스타타의 친정인 페리에 공작가.
원래는 이 두 가문보다 훨씬 막강한 세력을 지니고 있던 가문이 하나 더 있었지만. 바로 선황비 중 한 명이었던 마르멜 대부인의 친정, 몽펠리 후작가.
마르멜 대부인은 지금의 황제를 친아들처럼 키운 이였다. 선황후가 황자를 출산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승하했기 때문이다.
황후의 죽음 탓인지 황태자를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선황에게 간언을 하는 등 현 황제를 비호한 인물이 또한 몽펠리 후작이었다.
한마디로 현 황제에게 마르멜 대부인은 어머니, 몽펠리 후작은 외조부와 같은 사람들이었던 셈.
그런 대단한 가문이 하루아침에 반역죄로 멸문 당하자 귀족들은 황제를 더욱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자는 언제 황제한테 목이 꺾일지 모르는 황후의 장난감이거든. 듣자 하니 추잡한 명성과 달리 황후가 아니면 남자 구실도 못 한다던데. 당신 침대에서 활약하긴 아무래도 좀 힘들지.”
대체 누가 추잡한 시정잡배인지 모르겠다. 방금 저게 제국 최고의 신사에게서 나온 언사란 말이지.
프러너스의 두터운 가면을 벗겨 보고 싶지만, 기분 나빠질 것 같아서 관둔다.
“그러니까 있지도 않은 내연남 타령은 그만 하고…….”
“가까이 오지 마, 머리 망가져!”
나는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소리를 꽥 질렀다.
가슴으로 밀어붙이던 프러너스가 우뚝 멈춰 섰다.
“뭐?”
“이게 어떤 머리인 줄 알아?”
“……어떤 머린데?”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예술 작품이야. 내일 저녁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멀쩡하게 유지해야 하니까 더 이상 다가오지 마.”
“이 와중에 그걸 농담이라고 하나? 머리라니.”
“농담 아니니까 허튼짓하지 마.”
“허, 튼, 짓?”
당신같이 파렴치한 난봉꾼이 하는 짓이 허튼짓이 아니면 뭐겠어.
카를슈테인 공작의 허튼짓. 아마 머리털 나고 처음 들어 본 말이겠지만.
“나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지독한 근시안에다 속물이라 이 머리가 지금 세상에서 가장 신경 쓰인다면 어쩔 거예요?”
그러니까 당신은 내게 이 머리만큼도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야.
관심 없어. 공작가도 공작부인 자리도, 귀족의 결혼관과 제국의 자랑스런 처첩제도!
제발 내 진심을 알아주길 바랍니다.
“분명하게 요청할게요. 나는 당신과 이혼하기를 바랍니다. 당신에게 바라는 것은 오직 그것뿐이에요. 다른 마음은 전혀 없어요.”
나는 일부러 정중하게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당신 말대로 진은 나와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하지만 그는 좋은 사람이에요. 무척 좋은 사람. 그동안 내가 그를 함부로 이용한 것이 너무나 미안하고 후회될 만큼.”
마지막으로 인심 써서, 민망할 프러너스를 위해 내가 먼저 이 객실을 뜨기로 했다.
아니, 사실은 그를 배려해서라기보다 정말로 볼일이 많기도 했다.
브린 앤 해밀턴 서점에서 신간을 둘러보고 미리 주문을 넣은 버섯 세밀화 도록도 찾아와야 하지?
시내에 나간 김에 새 빗을 주문해? 그때 진의 머리를 빗기다 빗을 부러뜨렸잖아. 요리사 한스가 올리브 오일과 바닐라 에센스가 다 떨어졌다고 투덜거리던데 몇 개 사다 줄까?
나는 금세 딴생각에 빠져 건성으로 인사했다.
“다른 일정이 있어서 먼저 실례할게요.”
그런 나를 향해 프러너스가 싸늘하게 물었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요즘 유행어인가?
윌로우도, 프러너스도 후회할 짓은 저희가 실컷 해 놓고 왜 하나같이 내게 으름장을 놓는 건지.
후회할 거라고? 인생 17회차 만에 처음으로 후회하지 않기 위해 용쓰고 있는데.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객실을 나섰다.
* * *
카를슈테인 공작은 등을 보인 채 멀어지는 로제트를 바라보며 오래전 선친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프러너스의 표정에서 평소에는 절대 드러나지 않을 음험함이 풍겼다.
「더 사용하면 위험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부작용 중에는 불임도 있다고 하고요. 계속하실 겁니까.」
「아직은 안심할 수 없다. 어쩔 수 없지. 로제트가 아이를 가진대도 문제 아니냐. 그런 몸에서 난 아이가 온전할 리 없으니.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르지. 후계야 다른 여자에게서 보면 되는 것이고.」
로제트는 유사시에 황제의 약점을 찌를 수 있는 카를슈테인의 패였다.
선친은 로제트를 이용하기 위해 프러너스와 결혼시키고, 그녀가 목격한 비밀을 필요시까지 떠올리지 못하도록 그녀의 기억을 은폐해 왔다.
선친은 로제트를 두고 ‘안전장치’라고 표현하곤 했다. 은폐된 그녀의 기억이 황제의 폭주로부터 가문을 지킬 최후의 방비책이란 뜻으로.
하지만 공작이 보기에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자신이 아는 황제는 출생의 비밀 따위로 옭아맬 수 있는 인간이 아니었다.
선친의 명으로 로제트에게 몰래 처방돼 온 그 광물은 대부분 외국에서 들여온 것으로, 제국에서는 희귀한 물질인 데다 불법적인 루트로 구하는 것이라 값이 만만치 않았다.
암시장에서 ‘정령의 돌’이라 불리며 거래되는 광물.
그 광물은 제국에서 오래전 금지된 흑마술의 재료로 쓰였다. 로제트에게 주술을 거는 데 그 광물이 쓰이는 걸 본 프러너스는 광물의 또 다른 쓰임새를 추측했다.
결국 프러너스는 로제트의 사례에 착안해 지금은 사라진 마수들을 부활시킬 방법을 찾아냈다.
그리고 마수들을 황제의 개로 쓰라며 넘겨주었다.
‘애견 육성 사업이라. 황제가 기르는 애견의 정체를 알면 다들 놀라 자빠지겠지. 마수를 물리친 황제는 있어도 마수를 키워 백성을 짓밟으려는 황제는 처음일 거야, 아마.’
프러너스는 전쟁과 학살을 통해 황권을 키우고 싶어 하는 황제에게 그의 약점을 잡는 대신 칼자루를 바치는 것으로 선대들과는 다른 길을 가기로 했다.
공작의 예상대로 황제는 혈통의 정당성을 약점으로 쥐고 협박하려 든 귀족들을 전부 쓸어버릴 기세였다. 그 첫 번째 대상이 몽펠리 후작가였다.
공작은 귀족 사회에 불어 닥친 피바람을 지켜보며 자신이 가문을 위해 더 영리한 대비책을 발 빠르게 세운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귀한 깨달음을 줬으니 그 보상으로 로제트 당신을 그만 놔 줄까도 생각했는데.’
하지만 지난날, 황제가 이혼을 운운하며 로제트에 대해 언급한 이후 마음을 굳혔다.
‘황제가 로제트의 일을 알고 있는 게 분명해. 뒤에서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모르니 더 두고 봐야겠어.’
선대와 다른 길을 간다고 해서 이미 쥐고 있던 패까지 버릴 필요는 없으니까.
공작도 가끔은 로제트가 안쓰러울 때가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어쩌다 권력 다툼에 휘말려 이용당해 온 걸 생각하면.
게다가 최근엔 딴사람이라도 된 양 깜찍한 짓을 하며 자신의 심사를 어지럽힌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그게 운명이 정해 준 너의 쓸모이니. 안전장치 역할, 당분간 계속해 줘야겠다, 로제트.’
프러너스는 전혀 동정이 묻어나지 않는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 그는 아직 로제트와 이혼해 줄 생각이 없었다.
엄청난 일들을 생각하는 사람답지 않게, 그의 얼굴은 서늘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