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연극이 시작되었다
(49/110)
49화. 연극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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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연극이 시작되었다
2022.05.20.
“레이디,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콧노래도 흥얼거리시고. 저는 소리 내 부르시는 것이 더 좋은데.”
우직한 휴고와 달리 넉살 좋은 수행원 막스가 이렇게 말했다.
심각한 용건으로 제도에 온 사람치곤 이상해 보일 정도로 신바람이 나 있으니. 자중해야겠다.
삶이란 참. 열일곱 번째인데도 기대로 두근거리는 일이 남았다니.
내 손에 들어온 ‘장화 신은 야수’의 카이저 3년 판 공연 티켓. 나를 전설의 무대로 이끌어 줄 행운의 날개여.
‘장화 신은 야수’는 수십 년 넘게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연극이었다. 특히 남자 주연 배우의 역량에 연극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만큼 당대 최고의 배우가 주인공인 골드문트 역할을 맡아 왔는데, 그중에서도 미스터 N이 연기한 카이저 3년 판은 ‘역대 최고 골드문트의 탄생’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 전설의 무대를 연극광이었던 내가 보지 못했다는 건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필 남편의 첫사랑이 이혼을 한 바람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던 그때 상연되다니.
‘프러너스를 놓으니 이렇게 좋은 일이 생기는구나.’
사람의 영혼을 탈탈 터는 이기주의 커플을 응대하느라 잠시 위기가 찾아왔지만 잘 버텨 냈다. 소중한 머리도 잘 지켜 냈고.
물론 공연은 내일 저녁. 오늘 밤은 알아서 잘 보내야 한다는 뜻이다. 귀부인이나 영애들이 머리 모양을 유지하기 위해 앉거나 서서 밤을 지새우는 일은 흔했으니.
허영심과 과시욕을 부리는 일에도 근성이 필요했다.
* * *
나는 수행원들 몰래 숙소를 빠져나와 일찌감치 페레티 극장으로 향했고, 지금은 특별석에 앉아 느긋하게 샴페인을 기울이고 있다.
내 삶이 확실히 바뀌었다는 것을 제대로 실감할 수 있었다.
특히 ‘장화 신은 야수’란 제목을 고스란히 구현한 연극의 클라이맥스를 상상하자니 내 입가에 흐르는 것이 샴페인인지 군침인지.
막이 오르기를 기다리며 흥분과 설렘에 들떠 있을 때였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극장 안이 쩌렁쩌렁 울렸다.
“제국의 달 알펜시아 바카리스 황후께서 입장하십니다!”
금빛 찬란한 행렬이 극장 안으로 줄줄이 이어지는데, 이상하게 눈앞이 어두컴컴해지는 듯한 건 왜인지…….
‘아니야, 중요한 문화 행사에 참석하는 건 원래 황후의 몫이잖아. 게다가 황후 역시 연극광이라며.’
나는 불길한 예감을 떨치려고 세게 고개를 젓다 하마터면 머리를 망가뜨릴 뻔했다.
우리는 그저 같은 연극을 보러 온 것일 뿐. 그녀는 그녀대로 나는 나대로, 연극을 즐기면 되는 일. 나는 냉정을 되찾았다.
축사를 마친 황후는 사람들을 이끌고 자신의 자리로 사라졌다. 소문으로만 들은 넓디넓고 호화롭다는 특별석 중의 특별석 ‘황후의 발코니’로.
특별석에 있든 일반석에 있든 연극이 상연되는 동안 관객의 눈은 모두 같은 곳을 향하리라.
댕댕댕댕. 드디어 막이 올랐다.
신비롭고 아름다운 미스터 N이 무대 위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
.
.
으흐흑.
나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아, 이번 생은 성공이야.’
오늘 이 연극을 본 것만으로 마지막 눈 감을 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듣던 대로 미스터 N의 연기는 대단했다. 수려한 외모로 관객을 압도하더니 때론 섬세하고 때론 카리스마 있는 연기로 보는 이를 현기증 나게 만들었다.
2막이 끝난 막간. 나는 부푼 가슴을 안고 3막이 시작되길 기다렸다.
‘장화 신은 야수’의 클라이맥스는 주연 배우가 제목 그대로 장화만 신고 과감한 노출을 하는 장면이다.
당연히 관람석을 향하는 건 뒤태이고 조명을 이용해 실루엣만 보여 주는 거지만, 그것만으로도 배우의 출중함은 충분히 확인됐고 극장은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다.
지난 생에 올랜도가 나를 위로한다고 찾아와 이런저런 사교계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 이 공연 뒷얘기도 잠깐 언급했다. 귀부인 몇 사람이 졸도하는 소동이 있었다고.
그때 외롭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절망의 수렁에 빠져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리고 있는 이때에도 세상은 잘도 돌아가는구나.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즐겁게 지내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야속해했지만, 이젠 그런 청승과도 안녕이다.
‘혹시 이 연극을 보기 위해 끝없이 되살아난 것은 아닐까?’
똑똑.
그런 주책맞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 노크했다. 아마도 막간에 술이나 음료, 핑거푸드를 서빙하는 극장 직원이겠지.
“실례합니다. 카를슈테인 공작부인이시지요?”
아직 내가 깔끔하게 이혼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목소리. 돌아보니 극장 직원이 아니라 단정하게 차려입은 부인이었다.
“괜찮으시면 잠시 저와 동행하시겠습니까?”
차분하게 미소 지으며 갑작스런 제안을 하는 그녀를 어리둥절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말과는 달리 안 괜찮아도 가야 할 분위기였다.
“그분께서 부르십니다.”
그분?
* * *
“그대가 그 카를슈테인 공작부인이군.”
황후의 첫 마디는 이러했다.
나를 ‘황후의 발코니’ 구석에 세워 둔 지 꽤 지났을 때였다. 황후가 나를 불렀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줄 알았다.
그래서 나도 소문으로만 듣던 초호화 특별석을 슬쩍슬쩍 눈을 굴려가며 구경했다. 이런 것까지 바란 건 아닌데, 머리 본전은 제대로 뽑는구나 생각하면서.
과연 황후의 장소다웠다. 제국에서, 아니 세상에서 가장 넓고 호화로운 관람석이 아닐까.
하지만 여기서 보이는 무대와 내 자리에서 보이는 무대가 딱히 다를 건 없었다. 문제의 클라이맥스가 포함된 3막이 시작되기 전에 내 자리로 돌아가야 할 텐데.
황후는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하며 느긋하게 와인을 마시고 다른 귀부인들과 웃으며 환담을 나누었다.
슬슬 조바심이 나기 시작할 무렵, 자기 볼일만 보던 황후가 새삼 생각났다는 듯 저렇게 말한 것이다.
더욱이 그냥 공작부인도 아니고 ‘그’ 공작부인이라니.
‘그’라는 말은 왜 붙었을까. 별 생각 없이 한 말일 수도 있지만, 괜히 신경이 쓰였다. 아무래도 황후와 진을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으니.
황후가 흘리는 작은 뉘앙스 하나에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나도 이혼이나 할까?”
순간 내 귀와 정신 상태를 의심했다.
약간 모호한 부분은 있어도 지극히 평범한 첫 마디에 이어 갑자기 지나치게 과격한 발언?
“카를슈테인 공작과 그대의 용기가 부럽단 말이지.”
저건 또 무슨 심사인지. 진을 대해 온 걸 듣고 황후의 심보가 고약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사랑을 위해 모든 걸 내던지다니, 정말이지…… 아하하하하!”
황후는 갑자기 우스워 죽겠다는 얼굴로 자지러졌다. 호흡도 가쁘고 관자놀이에 핏줄도 솟은 모양새가 저러다 무슨 일 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정말로 내가 이혼하는 게 부러워 실성이라도 하셨나.
부러우면 이혼하시라고, 부귀와 권력도 좋지만 사람부터 살고 봐야 하지 않겠냐고 충언을 올리고 싶지만, 눈 깔고 멍청한 웃음만 흘리는 것이 살길이다.
아까부터 와인을 홀짝이던데 취한 건 아니겠지? 플록스 사태 이후 취객 기피증이 생겼는데.
다른 귀부인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인지 황후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폈다. 따라 웃기도, 웃지 않기도 애매한 상황일 터.
아까 나를 이리로 데리고 왔던 부인이 눈치껏 자리를 정리하며 다른 이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사리 판단도 빠르고 황후를 보필하는 솜씨도 훌륭한 사람이라고 속으로 칭찬하며 나도 재빨리 빠져나가는 행렬의 뒤꽁무니에 붙었다.
‘곧 3막이 시작될 테니 자연스럽게 내 자리로 돌아가면 되겠어.’
미꾸라지보다 더 민첩하게 움직이는데, 무언가 내 앞길을 턱 하고 막았다. 화들짝 놀라서 보니 보필 솜씨가 훌륭한 부인의 강직해 뵈는 팔이었다.
“공작부인께선 남아 주십시오.”
“음, 조금 이따 다시 오는 게 어떨까요? 황후께서도 피곤하신 것 같은데.”
“안 됩니다.”
그녀의 표정과 목소리가 단호했다.
나는 우유 통에 빠진 생쥐라도 된 것처럼 머릿속으로 팔다리를 필사적으로 허우적대며 우유를 버터로 만들 방법을 궁리했다.
‘아, 그래!’
내가 딛고 탈출할 버터가 만들어졌다.
‘급한 대로 그냥 여기서 황후와 같이 보면 되잖아?’
황후도 연극 애호가인 만큼, 그래도 막이 오르면 무대에 집중하겠지. 나도 그녀의 말을 적당히 경청하는 척하다 슬그머니 연극을 보면 되는 거잖아.
내 자리에서 보는 것만큼 편하진 않겠지만, 어디서 어떻게 누구와 보든, 서서 보든 앉아서 보든 항시 미스터 N의 연기에 몰입할 준비는 되어 있으니까.
마침 내가 선 자리의 시야가 그런대로 괜찮았다.
“귀여운 강아지 같았단 말이지.”
황후의 말은 종잡을 수 없이 넘나들어 당황스러웠다.
“어렸을 때부터 내 품에서만 깊은 잠을 잘 수 있었지, 그 아이는.”
설마 귀여운 강아지의 이름이 진 시더우드?
진, 내가 방금 십 년은 족히 우려먹을 당신 약점을 손에 넣은 거 같은데?
나도 모르게 히죽거렸나 보다. 황후가 돌연 나를 사납게 노려보는데, 3막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댕댕댕.
그 소리를 듣자 내 심장도 조급하게 댕댕거리기 시작했다. 황후는 아랑곳없이 자기 할 말을 이어갔다.
“나는 그를 버릴 수 있지만 그는 나를 버릴 수 없어.”
뭐라는 거야. 나는 황후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무대를 슬금슬금 곁눈질했다.
“한물간 첫사랑에게 남편이나 빼앗기는 한심한 이혼녀 따위가 감히 집적거릴 대상은 아니란 거야.”
예예, 안 집적거릴 테니 제발 목소리 좀 낮춰요. 대사가 잘 안 들리잖아.
가만, 진과 내가 가까운 사이란 걸 알고 있다? 황후 체면에 진의 뒤를 캐고 다니는 건가?
연극에 집중할 수 없어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따지면 당신도 한물간 첫사랑인데, 왜 자꾸 진한테 추하게 집적거려?
연극이 다시 시작된 지 꽤 되었는데도 황후의 훈계인지 주정인지는 끝날 줄 몰랐다.
“그대가 뭔가 크게 착각하는 거 같아서 내 친히 일깨워 주려 하는데 말이야.”
왜 하필 지금 여기서 굳이 그런 친절을? 나야말로 곧 연극의 클라이맥스가 시작된다는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 드리고 싶습니다.
“그가 그대에게 관심을 주는 듯 보일지 몰라도 그건 남자들의 못된 습성일 뿐. 그대는 내 대용품밖에 안 돼.”
황후가 연극 애호가라는 건 잘못된 소문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중대한 시점에 저런 시시껄렁한 소리나 할 리가 없었다.
“그대가 남자들에게 재차 이용당하는 걸 같은 제국의 여인으로 좌시할 수만은 없어서.”
호의로 넘쳐나는 세상이었다. 어쩌면 그렇게 다들 내 걱정을 해 주는 건지.
“그가 주기적으로 제도에 온다는 사실은 알고 있나? 왜 위험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오겠…….”
아차, 무대로 곁눈질하는 걸 황후에게 딱 걸리고 말았다. 아닌 척 시치미를 떼 보았지만, 이미 그른 것 같았다.
황후의 표정이 무시무시할 정도로 싸늘해졌다가 갑자기 야릇한 빛을 띠었다.
그러더니 느긋하게 걸어서 자리를 옮겼다. 황후를 마주해야 하는 나도 황후의 동선에 맞춰 서 있는 방향을 바꿔야 했다.
그렇게 자리를 옮기고 보니, 무대를 완전히 등지고 있었다!
황후가 입꼬리를 한껏 올리고 말했다.
“오오, 클라이맥스가 시작됐네.”
고조되는 음악과 번쩍이는 조명, 관객들의 술렁거림이 황후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했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17회차 만에 처음 영접하게 된 명장면이 내 등 뒤로 지나가고 있었다. 꺄악 하는 감탄성이 비수가 되어 내 등에 박혔다.
내 발아래 버터가, 버터가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다시 우유 통에 빠진 비참한 생쥐처럼 버둥거렸다.
저 미친, 악독한, 거지같은 개 황후!
마음 같아서는 아까부터 나를 몸으로 저지하고 있는 이 시녀 나부랭이부터 자빠뜨린 후 황후에게 달려들어 밤비의 라이벌 미용사인 로잘린 풍의 머리를 확 쥐어뜯고, 이미 실전 경험이 있는 따귀도 시원하게 올려붙이고 싶었다.
제국사에 길이 남을 구경거리를 관객들에게 선사한 후 18회차 갈까? 아후, 한 대 치고 18, 18, 18회차 가? 18회차 가서 다시 봐?
안 그래도 진한테 하는 짓을 보고 고약하고 못된 인간이라는 건 진작 알았지만. 정말이지 졸렬해서 치가 떨렸다.
“조금이라도 진을 좋아했다면 그를 그만 놔 주세요.”
분노에 떨던 나는 느닷없이 직언했다. 내가 못 보는 건 황후 당신도 못 봐.
“그가 폐하께 품고 있는 마음은 연민입니다.”
황후의 눈썹이 바르르 떨렸다.
“건방진 것! 귀족의 피가 부끄럽지도 않은 모양이지? 더러운 창부 노릇이나 하는 주제에 어디서 입을 함부로 놀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욕을 날리려고 벼르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래도 앞뒤가 맞는 욕을 해야지.
나만 빼고 다들 정부랑 놀아나는 거 같은데 왜 억울하게 내가 창부야? 그럼 시동생한테 껄떡대는 댁은?
“그나마 공작한테 이혼 당하면 아무것도 아닌 게.”
이 황후 정말, 아까부터 언어 선택 능력이 심각하게 떨어지네. 이혼을 왜 당하니? 내가 이혼을 갈겼다고. 제국어의 피동형과 사동형을 다시 배워야겠네.
“놔 줘? 연민? 그동안 내가 그를 봐주고 있었다는 생각은 못 하나 보지? 지금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그를 당장 내 앞에 대령시킬 수 있어.”
나는 당신이 애걸복걸하는 서신에 대해서만 들었는데?
“황제가 내게 손찌검을 했다고 말해 보면 어떨까? 그가 나를 위해 어디까지 할 거라고 생각해?”
황후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지만 초라해 보이기만 했다. 황후의 눈에선 오만함과 열등감이 동시에 소용돌이쳤다.
그래도 자신의 강아지에 대해 대체로 잘 파악하고는 있었다. 진이야 그런 소릴 듣는다면 눈이 돌아서 황제에게 검을 겨누고도 남겠지. 진이 가장 싫어하는 게 그런 짓이잖아.
그때 밖에 있던 황후의 수행인 하나가 조심스레 들어왔다. 수행인에게 귀를 빌려 주었던 시녀가 다시 황후에게 다가가 무언가 고했다.
황후가 움찔 놀라는 눈치더니 느닷없이 손수건을 꺼내들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급격한 태도 변화에 나는 넋을 놓고 황후를 바라보았다. 저건 또 뭐 하는 짓이지?
“견디기 힘들군요. 당신을 걱정해서 조언 몇 마디 했거늘 내게 어찌 그런 매정하고 난폭한 말을 하는 건지.”
울먹이는 황후를 보며 경악하던 나는 한 남자가 발코니 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뒤늦게 발견했다.
옷을 제대로 갖춰 입어 그답지 않게 멀끔한 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