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타락과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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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타락과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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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타락과 구원
2022.05.23.
황후는 고상한 슬픔에 잠긴 사슴 같은 표정을 잘도 만들어 냈다.
그녀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하, 연극 보러 와서 연기하고 있네.
“제국의 달을 뵙습니다.”
진이 어울리지 않게 단정한 모습으로 황후에게 예를 갖추었다.
황후의 보랏빛 눈동자에 복잡 미묘한 감흥이 번졌다.
진의 강아지 시절이라도 떠올리는 걸까. 강아지라기엔 부담스러울 정도로 무럭무럭 컸으니 감회가 새롭긴 하겠네.
얼마 만의 만남일까. 마음은 늘 곁에 있었다고 우긴다 해도 몸까지 곁에 두는 건 꽤 오랜만이리라.
“이제야 만나네, 야속한 사람.”
“송구합니다.”
“그동안 왜 그리 날 염려케 만든 건데?”
황후의 표정과 말투가 애틋하기 짝이 없었다. 방금 전까지 나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던 그분이 맞는지.
혀도 살짝 짧아진 거 같고…… 오, 나의 착각이길.
‘그나저나 진은 이 위험한 곳에 왜 온 거야? 무슨 바람이 불어서? 또 황후가 불렀나?’
황후의 작태에 나도 모르게 몸서리를 치며 생각했다.
책임지고 두 사람을 갈라놓겠다고 플록스에게 큰소리쳤는데, 그러기는커녕 둘이 눈앞에서 만나는 걸 속수무책으로 보고만 있어야 하다니.
진은 황후의 물음 아닌 물음에는 딱히 답하지 않고 나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노려보면 어쩌시려고? 누군 여기 있고 싶어서 있는 줄 아나?’
아마 지금 내 표정도 가관일 것이다.
고대하던 연극을 뒤통수로 본 분노와 좌절감, 황후에게 모욕당하고 누명까지 쓴 황당함, 거기다 느닷없이 나타난 진에 대한 짜증과 못마땅함.
이 모든 감정이 뒤섞인 괴상망측한 얼굴이겠지.
“말하지 않아도 알아. 당신이 멀리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걸.”
진의 시선을 끊고 황후가 끼어들었다.
그의 시선이 품은 것이 적개심이든 불만이든 한심함이든, 무엇이 되었든 다른 데로 향하는 건 잠시도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하지만 늘 믿고 있었어. 정말로 내가 곤란에 처하면 당신은 한시도 주저하지 않으리란 걸.”
그러더니 갑자기 또르르 한 줄기 눈물을 흘린다?
눈물 예쁘게 흘리는 방법이라도 연습했나? 눈물방울 모양이나 볼을 타고 흐르는 궤적은 꽤 예뻤으나 타이밍이 영 뜬금없네.
이런 진기명기나 구경하자고 힘들게 여기 온 게 아닌데.
“그래, 내가 먼저 공작부인에게 요구했어. 제발 당신을 놔 주라고.”
황후의 입에서 눈물보다 더 뜬금없는 말이 쏟아졌다.
진을 놔 주라고 말한 건 분명 나일 텐데?
그저 몇 번 내연남으로 소개한 적이 있을까, 진을 붙잡은 적도 없는데 뭘 놓으라는 건지.
황후의 가증스런 연기가 이어졌다.
“제국의 황후가 나설 일은 아니었는지 모르지. 하지만 견딜 수가 없었어. 진, 당신 일이잖아. 당신이 불행해지는 걸 내가 어떻게 두고 보겠어.”
눈물 연기를 선보일 때부터 어느 정도의 거짓말은 예상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웬만큼은 믿을 수 있도록 지어내야 하지 않나?
그리고 나는 뭐 입이 없어?
하지만 황후는 내가 발코니 난간이라도 되는 양 무시했다.
“공작부인을 무리하게 여기까지 불러서 사정할 수밖에 없었어. 당신을 조금이라도 좋아했다면 제발 놓아 달라고. 내가 경솔했다고 비난해도 좋아.”
수법이 너무 치사해서 화를 낼 일인지도 헷갈렸다. 남을 해코지하려 들면서 어떻게 최소한의 노력도 없이 남의 대사를 그대로 갖다 쓰는지.
“내 부탁에 화가 났나요, 공작부인? 아무리 화가 났어도 그렇지, 세간에서 떠드는 우리 둘에 관한 음탕한 소문을 면전에서 들먹이다니.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모욕적인 언사를…….”
황후는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으며 괴롭다는 듯이 눈을 감았다.
미스터 N의 전설적인 무대와 맞바꾼 연기 치고는 실망스러웠다. 아무리 멍청한 남자라도 그렇지, 설마 저런 말에 속아 넘어간다고?
황후를 지켜보던 진이 이윽고 나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어째 나를 보는 그의 잿빛 눈이……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입조심하라고 했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그 힐난하는 눈빛 때문에 나는 황후가 헛소리를 늘어놓은 이래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뭔가 큰 오해가…….”
하지만 곧 진의 손짓에 저지당했다. 그는 재빨리 손을 들어 내게 입 닥칠 것을 명했다.
그 냉정한 손짓 하나가 지금까지 들은 황후의 모함과 모욕, 아니 살면서 들은 온갖 비난과 비웃음, 별별 인간들이 돌아가면서 몰려와 늘어놓은 어처구니없고 이기적인 말들보다 더.
서운한 것 같았다.
진은 지금까지 한 번도 내 말을 막은 적이 없었다. 툴툴거리며 말조심하라거나, 듣고 싶지 않다고 으르렁거리거나, 관심 없는 척 딴청을 부린 적은 있어도 결국은 모두 들어 주었다.
황당하고 어이없는 말도, 어리석은 말도, 도발하는 말도, 가소로운 말도.
그래서 열일곱 생 만에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그토록 많이 쏟아 낼 수 있었다.
내가 생각해도 어이없게, 진의 그 손짓 한 번으로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려 했다.
‘주책이야, 왜 이래 정말.’
내 모습을 지켜보던 진이 다시 예를 갖추고 황후를 마주했다.
“폐하, 외람되지만 제 사람을 대신해 오해를 좀 풀어 드리고 싶습니다. 우선 심기를 불편하게 해 드린 점 용서를 구합니다.”
서운한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잘 못 들었는데, 진이 저렇게 말한 거 맞나?
예법에 맞는 깍듯한 화법도 어색하고, 그보다 방금 진이 ‘제 사람’을 대신한다고 말했나?
내가 의문을 표하는 것보다 황후가 더 빨랐다.
“그게 무슨 말이야? 당신이 왜?”
“제 사람의 일이니 제게도 변호할 자격이 있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저 여자가 왜 당신 사람이냐고!”
황후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찢어졌다.
성격 나오신다. 기껏 연기한 보람도 없이.
“모르셨습니까. 황후 폐하께서 모르시는 일이 다 있을 줄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황후의 격한 반응엔 아랑곳없이 진이 평온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리고 내게 다가와 방금 전 나를 그렇게도 서운하게 만든 그 크고 메마른 손을 뻗어 내 손을 꼭 잡았다.
돌아보면 지금껏 본의 아니게 진과 많은 걸 해 보았다. 안아도 보고 더듬어도 보고 뒹굴고 키스까지 해 보았다.
하지만 지금처럼 떨린 적이 있던가?
마치 어릴 적 소꿉친구처럼 해맑게 손만 잡았을 뿐인데. 그 담백한 동작에 나의 심장과 진의 심장이 손바닥에서 만나 요동치는 듯했다.
황후의 노기등등한 시선이 내 심장을 뚫을 듯해 조금 걱정은 됐지만.
진이 내 손을 잡은 채 나머지 한 손을 가슴에 대고 황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모르신다니 다시 인사드리지요. 레이디 앰브로시아의 내연남 진 시더우드입니다.”
아니! 대체 왜 그렇게까지 말하는 거야!
혹시 나를 두둔하려는 게 아니라 그간 쌓인 걸 복수하려는 건 아니죠? 이참에 나를 완전히 보내 버리려고?
나는 당황한 얼굴로 진을 올려다보았다. 진의 입꼬리가 예쁘게 들리며 다정한 미소가 내 얼굴로 쏟아졌다.
병 주고 약 주는 사신의 미소가 저럴까.
잘못했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은 황후를 자극하지 마시고…….
하지만 진은 끝을 보려고 작정하고 온 듯했다.
“폐하, 오해가 있는 듯합니다. 레이디 앰브로시아의 화법이 원래 다소 거칠긴 하지요. 하지만 방금은 황후 폐하 앞이라 표현을 매우 절제한 겁니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아? 저 여자가 날 어떻게 욕보였는지 상상도 못 할걸? 당신 앞에서야 콧소리를 내며 아양을 떨겠지.”
“앰브로시아가 제대로 실력을 발휘했다면 폐하께서는 결코 지금과 같은 모습이 아닐 테니까요. 이 사람의 막말과 욕설은 웬만한 뒷골목 장정들도 지리게 만들 정도입니다.”
갑작스런 뒷골목 화법에 이번에야말로 진짜 모욕을 당한 듯 황후의 눈이 커다래졌다.
나는 잡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항의했다. 저기요? 막말은 그렇다 치고 욕설은 아니잖아요?
그러자 진이 내 얼굴을 그윽한 눈으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저야 그런 매운 맛에 반한 거지만요. 입만 거친가요, 손도 아주 맵답니다.”
저런 말을 지껄이며 윙크 자두도 안 먹었는데 능청스럽게 눈까지 찡긋거렸다.
나한테 정말 왜 이러는 거예요. 나는 이를 꽉 물고 속으로 민망함을 삼켰다.
물론 이 순간 누구보다 기가 막힌 건 황후겠지만.
“진, 일부러 이러는 거야?”
황후가 평정을 유지하려 애쓰며 물었다.
현실 부정. 내가 왕년에 지겹게 해 봤지.
“날 위해 저 여잘 이용하려는 거라면 그만 해. 거짓이라도 그런 방식은 마음에 안 들어.”
황후의 반격이 매서웠다. 내 마음이 현혹될 정도로.
진을 좋아하지만, 우리 사이의 신뢰는 저런 말 한마디로도 흔들릴 만큼 아직은 보잘것없었다.
사람을 흠뻑 믿어 버리기엔 내가 너무 망가진 걸까.
황후와 진이 함께한 시간은 나와 진이 함께한 시간과 상대가 되지 않겠지. 내가 모르는 둘만의 시간이 있을 것이다.
언젠가 이 시간의 권위에 대해 아젤리아도 말한 적이 있었다. 프러너스와 함께한 시간의 가치를 하찮게 만든 내가 원망스러웠다고.
내 안에서 얽히고설킨 갈등의 덩굴을 비집고 들어온 건 진의 태연한 목소리였다.
“늘 그러셨듯 좋으실 대로 생각하십시오. 참고로 레이디 앰브로시아는 콧소리로 아양을 떨지 않습니다. 그건 제 몫이거든요.”
진은 작정한 게 맞았다. 해치우려는 게 어느 쪽이든.
“진 시더우드, 방탕한 척 위장하지 마. 당신은 굳이 애쓰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핏줄부터 천하니까.”
황후의 독기 오른 말에 이번엔 내 입이 벌어졌다.
살벌한 황궁에서 외로운 소년의 유일한 벗이 되어 준 그녀. 친구이자 오누이이자 연인이자 어머니였다는 그녀가 저런 말을?
저런 비난이야 살면서 수없이 들었는지 몰라도, 그녀의 입에서 나온 거라면 의미가 달랐다. 진이 상처받았을 것 같아 내 가슴이 다 벌렁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타락하나? 놀아난다는 여자가 기껏 저런.”
나를 가리키는 황후의 얼굴은 이제 연기고 뭐고 다 집어치운 민낯이었다.
민낯이 아름답지 못한 사람이었다.
“케케묵은 첫사랑에게 떨려난 한심하고 처량 맞고 빈털터리인 이혼녀라니.”
흠, 한꺼번에 너무 많은 수식어를 갖다 붙이시네요. 내가 빈털터리인 것은 어떻게 알았지?
“아니지, 잘 어울리는 한 쌍인가? 생각해 보니 반쪽짜리에겐 시궁창이 딱인 걸?”
황후는 자신이 상처 입기 싫어서 남을 상처 내는 철부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진의 입가에 아주 잠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제가 반쪽짜리라면 그건 부친의 부재 때문이겠지요. 그 점은 저도 조금쯤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부끄러운 건 어머니가 아니라 선황인 아버지란 말이었다.
“황후께서 말씀하신 천한 핏줄이 어느 쪽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 자신은 감사하고 있습니다. 남들은 천한 반쪽이라 하고 제겐 전부인 어머니께 말입니다.”
이곳의 분위기는 착잡하게 가라앉는데, 객석에서는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아무래도 연극이 끝난 모양이었다.
“제가 타락했다고요? 아시겠지만 타락이야 예전에 하지 않았습니까. 명확히 말씀드리지요. 당신 때문에 타락했고…….”
진이 나와 맞잡은 손을 들어올렸다.
“로제트에게 구원받았습니다.”
브라보, 브라보!
감동한 관객들이 배우들을 향해 기립박수를 치고 있으리라. 역사에 길이 남을 훌륭한 무대였을 테니.
달빛을 머금은 검은 머리칼, 그 아래 빛나는 잿빛 눈동자 그리고 껄렁한 표정과는 어울리지 않게 우아한 이목구비.
이 순간 진의 존재야말로 타락과 구원, 빛과 어둠, 속됨과 고귀함 등 이중적인 것들의 조합 같았다.
“황후 폐하, 혹시 제 행동이 무례하여 벌하고 싶으시더라도 조금 참으시지요. 이것이야말로 충정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미 황제 폐하께서 제 뒤에 붙으셨거든요.”
게다가 진은 생각보다 냉정하고 교활하게 굴었다.
“두 분 모두 저를 이리 아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순서를 다투진 마십시오.”
“황제의 개들이 벌써 냄새를 맡았나? 뭐, 그렇겠지.”
“잘 아시겠지만 황제께선 누구든 적으로 돌릴 수 있는 분입니다.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진은 협박인지 걱정인지 모를 말로 인사를 대신한 후, 내 손을 꽉 쥔 채 앞장서 자리를 벗어났다.
진에게 이끌려 황후의 발코니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본 황후의 얼굴이 몹시 낯익었다.
허락되지 않은 것을 향한 욕망과 분노와 슬픔과 오기.
그건 지난 생의 내 모습이었다.
급한 걸음으로 극장을 빠져나온 후에도 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걷기만 했다. 여전히 내 손을 놓지 않은 채.
성큼성큼 걷는 그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숨이 차올랐다.
옆으로 지나가는 풍경이 낯선 것을 보니 말로만 듣던 평민 거리인 것 같았다.
귀족들의 말과 마차는 이곳을 지나가지 않는다. 귀족과 평민은 사용하는 길마저 다른 것이다.
“어디로 가는 거야?”
아무리 기다려도 설명이 없자 결국 내가 먼저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뭔가 사정이 급한 건 알겠는데, 발도 아프고 애써 지킨 밤비의 머리가 엉망이 돼 가는 것도 슬프고 그리고…….
“무대 인사라도 보고 싶었는데.”
급히 나오느라 배우들의 마지막 모습이나마 눈에 담으려던 것마저 좌절되고!
진이 갑자기 걸음을 멈춘 바람에 하마터면 그의 널찍한 등에 코를 박을 뻔했다.
나의 새된 비명은 아랑곳없이 진이 어처구니없다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하긴 연극광의 마음을 모르는 당신은 이 상황에 연극 타령하는 것이 황당할 수 있겠지.
그렇지만 당신도 삶을 수차례 반복해 봐요. 위기나 시련 같은 중대사는 도리어 시시해지고, 자잘한 디테일에 집착하게 된다고!
점점 더 지금 이 순간밖에 모르는 가벼운 사람이 되어 가는 것 같다. 왜냐하면 삶에는 정말 그것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황후에게 왜 그랬어?”
한참 만에 진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가 내 안일한 상념을 납작하게 짓뭉갰다.
‘결국, 그는 황후를 걱정한 걸까?’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내 편을 드는 척했지만, 실은 그 모든 게 황후를 위한 행동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