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죽이고 싶은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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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죽이고 싶은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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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죽이고 싶은 여자
2022.05.27.
레이디 앰브로시아가 제도로 떠난 후, 나는 당장 그곳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황제와 황후의 놀이터인 그 도시는 반쪽짜리 시더우드인 나를 조금도 환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슨 자격으로? 나는 그녀의 진짜 연인도 아니고, 친구나 동업자라 하기에도 부족한데. 플록스처럼 그녀가 주워 가려는 것도 아니고.
언제부터인가 로제트의 일에 지나치게 신경 쓰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들이 그녀를 대하는 태도까지 못마땅해지기 시작했다. 막 대하면 막 대해서, 잘 대하면 잘 대해서 거슬렸다.
자꾸만 나의 것을 강요하고 싶어지는 이 마음. 스스로 가장 경멸하는 소유욕인 것 같아 자신이 싫어지려 했다.
제도로 달려가는 내내, 황후와 같이 있다는 보고를 듣고서, 내 속이 얼마나 타들어 갔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그녀.
내 신경이 바짝 곤두선 이유는 또 있었다. 그녀의 뒤를 쫓는 동안 이상하게도 황제의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다. 평생 나를 따라다닌 피 냄새이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황제가 왜 그녀를?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하릴없이 제도 쪽을 바라보던 그 밤들. 내 마음속 방황도, 그런 밤들도 모르는 천방지축 새끼고양이 같은 네가 왜 이토록 신경이 쓰이는 걸까.
“황후에게 왜 그랬어?”
황후를 걱정해서 한 말이 아니었다.
그 말에 그녀의 올리브색 눈동자가 청록으로 젖어드는 것을 어둠 속에서도 알 수 있었다.
* * *
나를 비난하는 듯한 진의 눈빛과 말투에 왈칵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뭘 어쨌는데?”
일을 꾸민 건 내가 아니라 황후잖아!
“뭐라도 했으니 황후가 저렇게 나오는 거 아닌가?”
“연극 보러 간 죄밖에 없어! 당신이 존재 자체로 누군가에게 위협이듯, 나도 존재 자체로 미운털인가 보지!”
연극의 명장면을 놓친 울분에 황후에게 모욕당한 울분까지 더해 진에게 화풀이를 했다. 그러고도 몇 마디 더 쏘아붙였다.
“또 황후가 불러서 왔어? 호구처럼? 내가 황후한테 무슨 해코지라도 할까 봐 헐레벌떡 달려온 거야?”
진도 피해자인 걸 알면서 나는 그렇게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황후의 말처럼 진이 나를 이용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초조해졌다. 정작 필요할 때마다 진을 실컷 이용해 먹은 건 나면서.
진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서운해지는 건, 위험 신호였다.
“왜 왔느냐…… 그것도 놀란 망아지마냥 허겁지겁.”
여느 때처럼 태연을 가장한 삐딱한 목소리.
하지만 이제는 구별할 수 있었다. 진이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열 받은 상태란 걸.
“자기가 어떤 위험에 빠졌는지도 모르고 한가하게 연극 타령이나 하는, 어떤 신세 좋은 인간 때문에 왔다면?”
진의 잿빛 눈이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와 조금 아찔했다. 눈빛을 오해하기 딱 좋은 거리였다.
토버마리에서 키스 연습을 할 때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라면, 내 얼굴에 닿는 진의 숨결이 매우 거칠고 뜨겁다는 것.
아마도 화를 삭이는 중이리라.
“연극이 뭐 어떻다고? 황후한테 끌려가지만 않았어도 아무 문제될 게 없는 하루거든?”
황후한테 끌려간 건 바로 당신 때문이고!
“아무리 연극이 좋아도 그렇지, 자제심이 그렇게 없나?”
“몰랐어? 나 자제심도 조심성도 배알도 없는 거?”
“배알 없는 건 나지. 연극 볼 생각에 마냥 신난 사람을 쓸데없이 걱정해서 뭣 빠지게 달려온 내가.”
황후가 아니라 정말로 나 때문에 제도까지 왔다고?
“걱정을…… 왜 할까. 황후가 날 미워해 봤자 방금처럼 말도 안 되는 연기나 펼치는 정도겠지. 막말을 좀 들었지만, 이래 봬도 하는 것뿐 아니라 듣는 것도 잘하거든.”
“황후는 그 정도로 끝내지 않아.”
진이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흠, 그러고 보니, 인생 17회차 만에 겨우 미스터 N의 뒤태를 영접할 기회를 황후가 산산이 박살냈지. 매우 악랄한 방식으로.
“황후는 잔인한 사람이야.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진의 표정이 너무 심각해서 죄책감이 들었다. 미스터 N의 뒤태 같은 소린 입 밖에 꺼내지도 말아야지.
“황궁은 당신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무서운 곳이야. 뒷골목보다 더 비열하고 지저분하지.”
진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누구보다 사정을 잘 알기에 저토록 과한 반응을 보이는 거겠지만…….
“내가 황후와 만난 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나는 아까부터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어떻게 알고 이처럼 빨리 올 수 있었던 건지.
“일단 말을 숨겨 둔 곳으로 서둘러 가야 해. 설명은 나중에. 시간이 없어.”
진은 미간을 찌푸린 채 손으로 턱을 이리저리 매만지며 나를 노려보았다.
왜 사람을 기분 나쁘게 훑어보지?
“잠깐만 실례하지.”
진의 말이 무슨 뜻일까 미처 다 생각하기도 전에 나는 현기증을 느꼈다. 세상이 뒤집히고 피가 머리로 쏠렸다.
배 아래로 진의 단단한 어깨가 느껴졌다.
“뭐 하는 거야!?”
진이 나를 보릿자루처럼 짊어진 채 달리고 있었다. 자세도 민망하고 머리도 흔들려서 항의했다.
“정말로 급해서 그래. 조금만 참아.”
“내 발로 가게 해 줘.”
“갈 길이 멀어. 방금 괜한 실랑이로 시간을 낭비했고, 그 부실한 구두로는 어림없어.”
“머리 망가진단 말이야.”
“아, 그 머리? 아까부터 이상하다고 말하고 싶은 걸 참았어.”
“보는 눈도 없으면서? 이게 어떤 머린데!”
“레이디, 그만 좀 버둥거려. 숨 차 죽겠어.”
“그러니까 내려 달라고.”
“나도 그러고 싶어. 잘 먹더니 보기보다 통뼈인가.”
“모양새가 너무 수치스럽잖아.”
“그럼 업거나 안을까? 원한다면 그렇게 해. 나도 고민 많이 한 거야.”
“대체 이러고 어딜 가는 건데?”
“항구.”
“설마 배를 탄다는 건 아니지?”
“왜 아니겠어.”
나는 할 말을 잃고 축 늘어졌다.
배라니. 뱃놀이 하러 이렇게 급히 가는 건 아닐 테고.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되돌아보았다.
야밤에 배 타고 도주해야 할 만큼, 제국 땅에 발을 딛고 살 수 없을 만큼 황후에게 큰 잘못을 했단 말인가.
진의 등이 땀으로 축축해졌을 때 우리는 말을 숨겨 둔 곳에 도착했다.
나와 함께 제도에 왔던 휴고와 막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호텔에 있던 짐은 챙겼습니다, 레이디.”
휴고가 별 내색 없이 이 말만 하자 막스가 투덜거렸다.
“레이디 혼자 극장에 가시면 어떡합니까. 보스한테 저희만 된통 깨졌다니까요.”
연극 한번 보려다가 연극은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여러 사람에게 폐만 끼친 꼴이 되었다.
내가 무슨 대역죄를 지었는지 찬찬히 따져볼 겨를도 없이 이번엔 말이었다. 진의 어깨에서 말의 등으로 옮겨진 보릿자루가 되어 한참을 또 달렸다.
정신도 없고 말 타기도 익숙지 않아 또 진에게 신세를 져야 했다. 엉덩이가 아프도록 들썩거리며 진의 울대뼈와 쇄골을 실컷 구경했다.
나중엔 지쳐서 그냥 진의 가슴에 머리를 멍하니 기댔다. 그에게서 풍기는 삼나무 향기가 더욱 짙어졌다.
“레이디 앰브로시아, 우린 곧 배를 탈 거야. 제국을 잠시 떠나 있을까 해. 하말린으로 가는 일정을 조금 앞당겼어.”
말 달리는 속도가 느려지더니 진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내가 그렇게 큰 잘못을 했어?”
“잘못을 한 게 아니라 위험에 처한 거야.”
“그 말이 그 말 같은데…….”
“내가 제도에 온 건 당신에 관한 첩보를 얻어서였어. 그런데 심지어 황후랑 같이 있잖아.”
어쩐지, 황후와 만난 걸 어떻게 알고 날아왔나 했네.
“여하튼 당신은 사람 간 떨어지게 하는 덴 선수야. 내 장기들이 튼튼해서 다행이지. 이러다 명줄 짧아지겠어.”
짧아지기는커녕 끊어진 명줄을 이어 드렸거든요?
“그냥 못 본 척하지 그랬어. 당신이 날 두둔한 바람에 괜한 오해를 사고 황후의 화만 돋운 거 같은데.”
솔직히는 반반의 마음이었다. 그렇다고 정말 모른 척했다면 또 섭섭했겠지.
“그래, 좀 더 냉정하게 대응했어야 한다고 나 역시 후회하고 있어. 마음이 좀 급했거든.”
“하긴 얼마만의 재회인데. 냉정해지기 쉽지 않았겠지.”
황후 얘기를 들먹이자 진이 나를 잠시 노려보더니 입을 열었다.
“당신, 암살 의뢰가 들어왔어.”
진과 황후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내 마음의 발길이 뚝 멈췄다.
“암살 길드에 심어 놓은 우리 쪽 첩자한테 연락이 왔어. 천만다행으로 그가 당신을 알고 있어서.”
“그게 무슨 말…….”
“당신을 쫓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란 말이야.”
누가 나를?
나는 지난 열여섯 번의 생 모두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
프러너스나 아젤리아가 사주했거나 아니면 그 측근이 한 짓이겠거니 막연히 생각했는데.
“올랜도 웰츠.”
진의 입에서 암살 의뢰인의 이름이 나왔다.
소꿉친구인 웰츠 백작의 아내이자 내 유일한 귀부인 친구의 이름이.
“알아보니 3년 전에 우리 길드에도 의뢰한 기록이 있더군. 의뢰 내용은 카를슈테인 공작부인에 대한 세부 정보.”
내가 가장 피하고 싶었던 진실마저 맞닥뜨리고 말았다.
“그랬구나, 3년 전에…….”
내겐 당장의 암살 의뢰보다 3년 전의 그 의뢰가 더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소꿉친구로만 여겼던 윌로우 웰츠가 실은 나를 오랫동안 짝사랑해 왔고, 그 아내인 올랜도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여기까지가 최근 알게 된 이 부부의 사정.
윌로우는 내 이혼을 비뚤어진 욕망을 실현시킬 기회로 여겼고, 올랜도는 내 이혼을 자신의 삶을 무너뜨릴 재앙으로 여겼다.
그럼에도 막연히 바랐는지 모르겠다. 그녀가 적어도 처음엔 내게 호의로 다가왔기를.
하지만 진실은 내 기대를 보기 좋게 저버렸다. 3년 전이라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무렵. 올랜도가 처음부터 내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사실을 이제는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그녀는 누구보다 다정하고 살뜰하게 챙기며 가장 가까이서 감시했던 것이다. 자기 남편의 첫사랑인 나를.
자신의 만류와 설득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내가 이혼을 감행하자 재앙의 근원을 없애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으리라.
“레이디 앰브로시아, 괜찮나?”
“뱃멀미 말이야?”
내 대꾸에 진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우리는 갑판에 나와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이 우리의 머리칼과 옷자락을 사정없이 희롱했다.
파도가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데도 배가 위아래로 꽤 출렁였다.
어젯밤 우리는 그리치보다 아래에 있는, 제도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인 오웰에서 급히 배에 올랐다. 내 뒤를 쫓을지 모를 황제나 황후의 자객과 암살 길드의 자객을 피해서.
이렇게 말하니 중죄를 짓고 국외로 도피하는 거물이라도 된 기분이다.
우리가 탄 배는 페가수스가 소유한 무역선으로, 선장과 선원 몇 사람, 페가수스 직원 몇 사람이 배 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에 뜻밖의 반가운 얼굴이 끼어 있어 깜짝 놀랐다. 그는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었다.
「플록스? 플록스도 함께 가는 거였어?」
「당신이 책임지고 주워 가겠다고 한 화상 아닌가? 가둘 사람이 줄줄이인데 감금방이 비좁아서 말이야.」
참하고 성실한 인상과 달리 무시무시한 주사를 지닌 플록스를 내가 거두겠노라 큰소리치긴 했는데, 진이 이렇게 손을 썼을 줄은 몰랐다.
반가운 마음도 잠시, 플록스는 심한 뱃멀미 때문에 초주검이 된 채 자기 침대에 널브러졌다.
나는 큰 바다로 나온 건 처음인데도 다행히 뱃멀미는 심하지 않았다. 멀미보다 더한 것이 내 안을 묵직하게 내리누르고 있어서일까.
“나를 죽이려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되는 건 괴로운 일이지. 더구나 그자가 가까운 이라면.”
진이 여전히 바다 쪽을 보며 말했다.
“막연한 암살자와 얼굴과 목소리를 가진 암살자는 다른 법이니까.”
나는 새삼 진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진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진은 마음 놓고 그자들을 비난할 자격이 있지만, 그와 달리 나는 걸리는 게 많았다. 이래저래 불순했고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 찜찜하게 걸쳐 있었다.
“어차피 나는 올랜도에게 그리 좋은 친구가, 아니 평범한 친구도 못 됐어. 원망하기에도 서먹한 사이지.”
“별 괴상한 사이가 다 있군. 원망하기에도 서먹하다니.”
지난 생에 나는 올랜도를 진짜 친구라 여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내가 올랜도에게 관심이라 부를 만한 마음을 품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전 삶에서 그녀는 내 방의 커튼이나 카펫보다 나을 게 없었다. 늘 곁에 있지만 보라색이었는지 연두색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
“지금 내 마음이 괴롭다면 그건 인간에 대한 실망감이나 배신감 때문이 아니야. 나 자신의 무신경함 때문이지.”
당황스러운 건 내가 당한 일을 나도 모르는 사이 남에게 고스란히 행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보다 더 당황스러운 건 이 모든 걸 열여섯 번은 까맣게 모르고 지나갔다는 점이고.
지난 생에도 올랜도가 나를 죽였을까? 혹시 열일곱 번이나 삶을 되돌아온 건 이런 둔감함에 대한 벌일까?
“생각보다 대범한 레이디네? 윙크 자두 때문인가, 아니면 이상한 버섯을 먹었나?”
진이 나를 위로하려 애쓰는 게 느껴졌다.
“아무리 대범한 사람이라도 외로울 때는 있지.”
이렇게 말한 그가 슬그머니 나를 감싸 안았다.
진의 품은 생각보다 더 따뜻했다. 그의 온기가 내 어깨와 등을 타고 마음까지 퍼져 왔다.
“갑판이란 좋은 곳이네. 침실에선 냉정하게 딱 잘라 내더니. 이렇게 쉽게 품을 내어주고.”
“이렇게 사방이 뻥 뚫려 바람이 사납게 부는 곳에서 순결을 빼앗기긴 쉽지 않을 테니.”
여러 번 산 만큼 더 야무지고 똑 부러지는 인간이 될 것 같았지만, 웬일인지 나는 점점 더 갈팡질팡하게 되었다.
지난 생엔 악도 적도 목표도 단순명료했다. 하지만 지금은 무엇을 하려 해도 주춤거리게 된다.
“나는 그녀들에게 약해질 수밖에 없어.”
진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 중얼거렸다. 바다 냄새와 삼나무 냄새가 바람 따라 코끝에 나부꼈다.
황후도, 아젤리아도, 올랜도도 모두 지난 생의 나와 같아서. 그 못나고 어리석고 불쌍했던 모습을 떠올리게 해서.
그렇다면 나의 분노는 어디로 향해야 하나? 전남편 프러너스? 소꿉친구 윌로우? 친오빠 루이?
분노의 대상으로 삼기에도 시시한 이름들.
“힘내. 하말린에 가면 운이 트이고 일이 술술 풀려서 돈방석에 앉게 될 거라며? 에스 포 옴브리아 알트 피에릭(이번엔 빈말이 아니길 빌겠어).”
“이 포포(나 역시).”
미고의 말대로 진짜 해답이 그곳에 있기를.
하말린의 오랜 신들과 정령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