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영혼이 참 맑으십니다
(52/110)
52화. 영혼이 참 맑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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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영혼이 참 맑으십니다
2022.05.30.
처음 하말린어를 익히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각자 다른 사람과 그곳에 가는 미래를 꿈꾸었으리라.
그때 그토록 사랑했던 그와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그들을 위해 하말린어로 안녕, 맛있어, 날씨가 좋네요, 사랑해 따위를 익히던 날들이여.
지금 우리는 과거에 상상도 하지 못한 엉뚱한 사람과 하말린으로 가고 있었다.
「난 거기서 하말린어가 서툰 타국의 황자 노릇을 할 거야.」
진은 이렇게 못 박았다.
일국의 황족이나 고위 귀족은 설령 방문한 나라의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줄 알아도 직접 말하지 않는 것이 관례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외에 또 다른 이유로 위장한다고 했다.
비밀리에 일을 처리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데 더 유리하기도 하고, 만일의 경우 하말린과의 관계를 부인하기에도 좋다고.
솔직히 왜 그리 복잡하게 움직여야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덕분에 통역관인 내가 할 일이 늘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하말린과 페가수스의 관계나 그곳 풍속과 정서 같은 걸 웁, 제가 차근차근 설명해 드려야 웁, 하는데 우웁.”
뱃멀미로 고생 중인 플록스는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것에 몸을 뒤틀며 괴로워했다.
나도 하말린어 수업 시간에 들은 것이 꽤 되지만, 그건 일반교양에 가까운 지식이고 사업 현장에서의 실전은 다를 것이다.
그래도 컨디션이 좋을 때 간간이 들려준 이야기를 통해 몇 가지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풍부한 자원 때문에 ‘정령의 축복을 받은 땅’, ‘황금 비가 내리는 왕국’으로 불리며 제국을 비롯한 수많은 나라가 진출하고 싶어 하는 나라, 하말린.
페가수스는 의외로 발 빠르게 그곳에 진출했고, 오래전부터 왕가나 요직에 상당한 인맥을 만들어 두었다는 것. 특히 하말린 왕가가 진에게 매우 호의적이라고 했다.
‘자국에선 불량 황자라도 타국에선 나름 이미지 관리를 했나 보네.’
점잖은 척하는 진의 모습을 떠올리니 웃음이 나왔다.
또 제국에서는 오래전에 희미해진 영적인 전통이 하말린에서는 지금도 굳건히 이어진다고 했다. 그곳의 왕이 영적 지도자를 겸하고 있다는 건 하말린어 수업 때도 들은 바 있었다.
오래된 신들과 정령이 가득하며 그들과 대화하는 사제나 정령사, 심령술사 역시 가득하다는 나라.
하말린 사람들은 신의 섭리와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고 말하며 플록스가 덧붙였다.
“특히 이 부분을 타국 사람들은 쉽게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왠지 난처한 얼굴로 이 대목에서 유난히 버벅거리는 플록스를 보며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건 원래 당연한 거 아닌가? 뭘 이해하지 못한다는 거지?’
“페가수스는 주로 뭘 사고파나요? 요즘 인기 있다는 그곳의 지하자원?”
“여러 자원과 물품을 취급하지만 페가수스는 원래 정보 길드란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무엇보다 진 보스의 방문을 재촉해 온 건 하말린 왕가입니다.”
“왕가에서 직접? 왜요?”
“어떻게 설명을 드려야 할지……. 하말린 왕은 현인입니다. 결코 허투루 볼 인물이 아니지요. 강대국인 로센보르 제국에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 그들에게도 정보가 필요할 테지요.”
“진이 첩자란 소린가요?”
“첩자보다는 자문 역할입니다. 하말린 왕은 진 보스와 대화하는 걸 유난히 좋아한다고 들었습니다.”
현인이라는 하말린 왕이 방탕 황자 진과 대화를 즐기신다? 어떤 대화를 나누기에.
“왕께서 교류에 벽이 전혀 없으신가 봐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분인가 보죠?”
“어휴, 그런 말씀 마십시오. 매우 까다로운 관문을 통과해야 왕가에 겨우 줄을 댈 수 있습니다.”
“그 까다로운 관문을 진이 통과했다고요?”
검술이나 격투기 시합 같은 건가? 아니면 암살이나 독살 위협 피해 살아남기? 그도 아니면 뒷돈이나 비밀 정보를 어마어마하게 찔러 주는 로비 실력?
그러나 플록스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예상을 한참 벗어났다.
“영혼의 형상이 아름다운 자만이 왕족과 교류할 자격을 얻습니다.”
예?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영안을 뜬 자, 이것이 하말린 왕의 별호입니다. 영안으로는 겉모습 안에 숨겨진 본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걸 영혼의 형상이라고 한답니다.”
“그러니까 하말린 왕의 영안에 비친 진의 영혼이 아름다워서 그 까다롭다는 왕가의 관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그 얘기인가요?”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의심스러워 차근차근 물어보았다.
“예, 진 보스를 향한 왕실의 환대나 신뢰가 유난한 걸 보면 보스의 영혼이 보통 아름다우신 게 아닌가 봅니다.”
말도 안 돼……. 사랑에 눈이 먼 플록스야 뭔들 믿지 않겠느냐만.
왕가와 교류할 자격이 영혼의 형상에 따라 주어진다는 것도 믿기 힘든 얘기인데, 더욱이 그 관문을 통과한 이가 진이라니!
차라리 육체의 형상 때문이라면 신빙성이 있을 것 같았다.
“좀 의외네요. 진이 신뢰 같은 거 받고 그럴 인상은 아니잖아요?”
“들리는 소문엔 몇 백 년 만에 처음이랍니다. 보스와 같이 영롱한 광채를 발하는 영혼의 형상은.”
“아니, 몇 백 년 산 사람도 없을 텐데 그걸 어떻게 아는…….”
“여하튼 하말린 왕궁을 자유롭게 출입하는 외지인은 흔치 않으니 뭐가 특별해도 특별한 거겠지요?”
이쯤에서 강한 의문이 들었다.
“그토록 환대하는 곳에 왜 정착하지 않고? 제국에 있어 봤자 목숨을 위협받을 뿐인데.”
“그건 보스가 하말린과 하말린 사람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좋아하시기 때문입니다.”
“……?”
“안 그래도 제국은 하말린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지 않습니까? 혹시라도 보스 자신이 침략과 전쟁의 빌미가 될까 봐 우려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일부러 거리를 두시는 거고요.”
“아,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네요.”
시더우드에게 가장 흔히 붙는 죄목은 반역죄. 진은 반쪽짜리니 뭐니 해도 시더우드니까 이래저래 모함할 만한 좋은 구실이 되겠지.
“레이디께서도 지금쯤은 눈치채셨겠지만, 방탕 황자란 이미지도 일부러 퍼뜨린 겁니다. 황위를 향한 야심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인상을 심어 주기 위해서지요.”
그렇다기엔…… 역할에 너무 심취한 것 같은데.
“하말린 왕도 진의 그런 사정을 모르지 않을 텐데요? 그런데도 영혼의 형상 하나 믿고 진에게 덜컥 의지하다니. 순수하다 해야 하나, 배포가 크다 해야 하나?”
“그렇지요? 그런 총애가 없습니다. 오죽하면 부마 얘기까지…… 흡!”
“부마?”
딱 걸렸어. 그럼 그렇지. 영혼의 형상 좋아하네.
이 방탕 황자가 거기서도 끼 부렸구나!
“그게 그러니까…… 농, 농담 같은 건데요, 우, 우웁, 아이고 또 멀미가…… 우웁웁.”
“……?”
아무래도 저거 최악의 연기 같은데? 말하기 난처해지면 뱃멀미가 도지는 건 아니겠지?
뱃멀미를 핑계로 플록스가 나를 내쫓는 바람에 갑판으로 떠밀려 나왔다.
밤의 갑판은 또 다른 운치가 있었다.
밤의 갑판은 바다가 아니라 하늘을 헤엄치기 위한 곳. 쏟아지는 별의 바다가 낮의 바다만큼이나 보는 이를 유혹했다.
나는 난간에 손을 짚고서 밤하늘을 한참 올려다보았다. 오늘은 달이 훤해 별이 덜 선명한 편인데도 경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하말린에서의 새로운 시작을 앞둔 지금, 진과의 관계에도 정리가 필요할 것 같았다.
생각지 못한 일로 거칠게나마 황후와 진을 떼어 놓았으니, 플록스와 한 약속도 지키고 책임도 다한 셈이 됐다. 이제 더는 질척거릴 핑계도 없었다.
마음을 가지치기해야 할 때가 되었다. 진에게 어설픈 미련을 품어서는 안 되고, 이제부터야말로 오해 살 행동은 삼가야겠지.
‘잘할 수 있을까?’
아니, 누구한테 묻는 거니? 당연히 잘해야지.
더 이상 진의 앞길에 얼쩡거리며 방해해선 안 돼. 하말린 왕의 부마가 될, 영혼의 형상이 영롱하신 분인데.
‘난 지금 사업 때문에 하말린으로 가는 것이기도 해. 내가 맡은 통역관 역할부터 잘해 내자. 이번엔 내 몫을 제대로 하는 거야.’
이렇게 밤하늘과 밤바다를 바라보며 결심을 다졌을 때였다.
촤아아, 촤아아.
문득 파도 소리와는 결이 다른 소리가 들렸다.
물을 차는 소리 같기도 하고 물속에서 물 위로 솟구치는 소리 같기도 하고. 이어서 뭔가 동물이 내는 듯한 웅성거림, 환호성 비슷한 소리도 섞여서 들려왔다.
‘설마 말로만 듣던 돌고래 떼의 출현?’
돌고래는 행운과 순항의 상징이라 바다에서 돌고래를 보면 길조로 여겼다. 정령의 축복을 받은 땅, 하말린으로 가는 바다에서 본 행운의 상징 돌고래 떼라!
새로운 결심을 하자마자 조짐이 매우 좋았다. 나는 흥분된 마음으로 달빛이 일렁이는 바다를 찬찬히 살폈다.
“어머!”
정말로 그림에서나 봤던 돌고래 떼가 물 위로 튀어 오르는 게 아닌가!
다섯 마리 정도 돼 보였다.
거리가 좀 있고 밤이라 형체가 분명하진 않아도 달빛을 받은 그 힘차고 탄력 있는 움직임은 돌고래가 분명했다.
환호성을 지르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발을 동동 굴렀다. 혹시 내가 내는 소리 때문에 돌고래 떼가 달아나면 안 되니까.
‘와, 어쩜 저렇게 매끈하고 멋질…… 어?’
나는 급히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돌고래가 저렇게 생겼나?
깜깜한 바다 위에서 나는 달빛과 별빛에 의지해 돌고래 떼의 실루엣을 눈으로 쫓고 있었다. 하지만 저것이 돌고래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 순간, 한기가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돌고래 떼가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 야밤에 망망대해를 헤엄치는 저 괴 생명체는. 설마 제국에서 오래전 사라진 마수 같은 건 아니겠지?
묘한 공포심에 돌고래고 뭐고 객실로 도망치고 싶은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설상가상 그 괴 생명체들이 배로 점점 다가오는 듯한 건 내 착각일까.
나는 두려움과 호기심 사이에서 눈을 백 번쯤 깜빡거렸다.
그들이 점점 배로 다가오는 건 불행히도 내 착각이 아니었다.
‘사람을 부를까? 선장에게 알려야 하나? 불침번을 서는 선원이 있을 텐데?’
이렇게 허둥거리고 있는데 순간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왠지 그들도 나를 발견한 것 같은.
‘안 돼, 더 이상 꾸물거릴 시간이 없어.’
황급히 몸을 돌려 갑판에 쌓인 화물 상자들을 향해 뛰려는데 다리가 말을 잘 안 들어 휘청거렸다.
등 뒤에서 익숙한 소리가 내 귀를 파고들었다. 분명 사람 목소리 같은 게 웅웅거린 듯한데?
‘어어? 흐읍!’
상자 뒤에 몸을 숨긴 후 방금까지 내가 서 있던 난간 쪽을 바라본 나는, 입을 틀어막으며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뭔가 난간을 기어오르는 기척이 나더니 순식간에 검은 그림자들이 갑판 위로 훌쩍 뛰어올랐기 때문이었다.
그 그림자는 당연히 해양 생물은 아니고, 괴물로 오해할 만큼 울퉁불퉁했지만 괴물도 아니고…… 사람, 건장한 장정들이었다.
시시각각 가까워지며 선명해지는 형체는 더 많은 것을 알려 주었다. 그 전라의 괴한들이 아는 사람이라는 것.
그중에서도 바다의 신 오시나스의 현신인 양 유독 아름답고 당당한 존재감을 발하며 온몸에서 물을 뚝뚝 흘리고 서 있는 이는 조금 더 아는 사람.
대체 왜…… 야밤에 저런 몰골로 바다를 헤집고 다니느냔 말이죠!
놀란 나는 얼른 두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도 모르게 손가락 사이가 스르륵 벌어졌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아야 할 게 아닌가.
사실 이렇게 숨어 있는 건 모양새가 매우 요상했다. 하지만 이제 와 인기척을 내기도 영 어정쩡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앉아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내 귓전에 속삭였다.
“레이디, 여기서 뭐 하십니까?”
“꺅!”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갑판 위를 쨍 하고 갈랐다.
웅성거리며 서 있던 대여섯 명의 장정이 쏜살같이 흩어지더니 지형지물을 이용해 순식간에 몸을 가렸다. 동작이 그렇게 날랠 수가 없었다.
“죄, 죄송함다, 레이디. 놀라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말임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신 건가 싶어서…….”
불침번을 서던 선원이 미안한 얼굴로 뒷목을 긁적이며 바닥에 주저앉은 나에게 말했다. 하지만 선원에게 대꾸할 여력이 없었다.
아무 천이나 대충 두른 바다의 신, 아니 진이 머리카락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내 앞에 서 있었다.
“레이디 앰브로시아, 여기서 뭐 하는 거지?”
방금 마음을 접겠다고 결심했는데, 지독하게 유혹적인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