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열여섯 번 돌아온 이유 (61/110)


#61화. 열여섯 번 돌아온 이유
2022.07.01.


마음을 책임진다는 건 뭘까.

나는 확실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채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책임질 수 없는 것만은 확실했다.

진과 가까운 사이가 된다는 건, 어쩔 수 없이 그를 내 삶에 끌어들이는 일이 될 것이다. 나 자신에 대해 모르는 채로 진의 마음을 받아들이기는 싫었다.

아니, 그 마음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거절해야 하는지조차 결정할 수 없었다.

진의 말대로 그를 제대로 책임지기 위해서라도 잃어버렸거나 조작된 기억을 되찾고 싶었다.

그래서 모얌 왕녀에게 부탁해 ‘기억의 분실물 취급소’라고 불리는 최면 시술소를 찾았다.


“반갑습니다. 이곳에서 외지인을 만나 뵙는 건 저도 처음이군요.”

왕녀는 이 와중에도 미남을 소개하려는 열정을 꺾지 않았다. 최면술사 역시 빛나는 외모와 훈훈한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왕녀가 특별히 선별한 정성이 느껴졌다.

물론 이제 어떤 미남도 내 눈길을 끌지 못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잃어버린 기억을 찾는 일은 유쾌하기만 한 경험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간 여러 체험자가 매우 다양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고통을 호소한 이도 있었지요.”

최면술사는 조심스럽게 경고했다.


“레이디께서 어떤 기억을 찾게 되실지 모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기억을 되찾은 후로는 결코 기억이 없던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점입니다. 모험을 하시겠습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최면술사는 김이 오르는 차 한 잔을 내 주었다.


“야누스라는 버섯을 우린 겁니다. 진실을 찾기 위한 잠으로 안내할 차지요.”

“야누스라면 독버섯 아닌가요?”

“글쎄요, 독이 될지 약이 될지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게 아니니까요. 독이란, 그리고 진실이란 원래 그런 것입니다.”

매우 끔찍한 기억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몰랐다. 솔직히 두려웠지만, 나는 진을 위해 용기를 내기로 했다.

독이 돼도 좋으니 진실을 보여 주기를.

* * *

어둡고 무거운 공기가 짓누르고 있던 황궁에 아이들 소리가 들리며 오랜만에 생기가 돌았다.

황태후의 초대를 받아 귀족 가문의 자제들이 황궁을 방문한 날.

말괄량이 후작 영애 로제트 앰브로시아는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황궁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황궁에서는 몸가짐을 조심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당부는 잊은 지 오래였다.

황궁의 후원에는 작고 예쁜 연못이 있다고 들었는데. 로제트는 시종장의 안내를 따라 역대 황제의 조각상을 참배하는 행렬에서 몰래 빠져나와 살금살금 후원으로 향했다.

아까 궁내부의 관리가 황궁의 3대 절경을 설명할 때 가까이 있던 하녀에게 물어 후원 위치를 익혀 두었다. 로제트는 호기심을 푸는 일에 있어서는 아주 영악하고 부지런해졌다.

파란 하늘을 떼어다 쨍하게 광을 낸 듯한 작은 연못. 너무나 예쁜 연못이어서 로제트는 오늘도 말을 안 듣길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어? 저건 누구지?’

연못가의 키 작은 나무 사이에서 작은 그림자를 발견한 로제트는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다가갔다.

로제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거기서 눈이 마주친 건 매우 아름답게 생긴 소년이었다. 방금 눈까지 마주쳤는데도 소년은 로제트를 못 본 체했다.

소년은 매우 아름다웠지만 많이 여위었고 얼굴도 창백했다. 왠지 슬프고 아파 보였다. 로제트는 그 소년에게 한눈에 반했다.

로제트가 소년의 옆에 냉큼 착 붙어 앉자, 소년이 움찔 몸을 움츠렸다. 가까이서 보니 더 예뻤다. 로제트는 환하게 웃었다.
 

 
소년의 관심을 끌기 위해 로제트는 이 말 저 말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오늘 날씨가 참 좋다.”

“…….”

“여기 살아? 이 연못 참 예쁘다. 그치?”

“…….”

“이 연못에 자주 오니? 그럼 저기 핀 저 꽃 이름이 뭔지 알아?”

“…….”

“난 열 살인데, 넌 몇 살이야?”

어떤 질문을 해도 소년은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로제트는 포기하지 않고 소년의 관심을 끌 방법을 궁리했다.


‘맞아, 그게 있었지.’

왈가닥 로제트를 위해 신입 하녀 마델이 치마 주름 사이에 달아 준 비밀 주머니. 아까 다과 시간에 그 주머니에다 쿠키를 슬쩍 넣어 둔 게 생각났다.

원래는 연못을 보러 가는 중에 고양이나 다람쥐를 만나면 주려고 챙겨 둔 것이었다. 하지만 저 아이도 예쁜 고양이처럼 생겼는걸.

로제트는 회심의 미소를 숨기며 쿠키를 올려놓은 손바닥을 소년에게 내밀었다.

역시, 지금껏 아무 반응이 없던 소년에게서 고양이 귀가 쫑긋 서는 것 같은 기척이 느껴졌다.


“너 줄게. 황궁 파티시에가 솜씨를 발휘한 쿠키래.”

“…….”

“싫어? 그럼 도로 가져간…….”

소년은 로제트의 손바닥 위에 있던 쿠키를 얼른 낚아챘다. 그러고서 뒤늦게 얼굴을 붉혔다. 로제트는 소년이 민망할까 봐 웃음을 꾹 참았다.


“너도 쿠키 좋아하는구나?”

로제트는 아예 과자가 들어 있던 주머니를 떼어내 통째로 소년에게 안겼다.


“우리 시골집에 가면 맛있는 자두가 열리는 나무가 있거든. 그 자두로 만든 쿠키가 얼마나 맛있는지 몰라. 방금 그 쿠키도 맛있지만, 우리 자두 쿠키는 그보다 훨씬 훨씬 더 맛있거든.”

자랑하는 동안 로제트의 입에도 침이 고였다.


“요리사 한스가 특급 비법으로 만든 쿠키야. 다음에 아버지를 졸라 황궁에 올 때 그 자두 쿠키를 꼭 가져다줄게. 약속해.”

로제트는 더 있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사람들이 찾을지도 몰랐고, 또 자신이 가야 소년이 쿠키를 먹을 것 같아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녕, 또 만나.”

작별인사를 한 로제트는 소년의 응답을 기대하지 않고 돌아섰다. 그때 소년의 수줍은 목소리가 로제트의 뒤통수를 두드렸다.


“꼭, 다시 와.”

 

* * *

황궁에서는 초대한 귀족 자제들을 위해 어린이 연극을 준비했다.

로제트는 좋아서 발을 동동 굴렀다. 로제트는 꼬마 연극 애호가였다.

안 그래도 얼마 전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은 연극을 보려고 몰래 가출했다가 호되게 꾸지람을 들었다. 일주일간 금족령도 내려졌다.


‘루이가 보란 듯이 고소해하다 저도 반성문 쓰는 벌을 받았고, 미고는 울면서 자기 몫의 간식을 몰래 내 방에 넣어 줬지.’

로제트는 그때의 시련을 떠올리며 자신을 찾아온 행운에 기뻐했다.

울고 웃으며 연극에 흠뻑 빠졌던 로제트는, 막이 내리자 벼르던 일을 시도하기 위해 또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로제트는 늘 무대 뒤가 궁금했다. 좋아하는 배우와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나름 작은 머리를 열심히 굴려서 방과 복도의 위치와 연결 구조를 그려 보고, 배우들의 분장실이나 대기실로 쓰일 만한 방들을 기웃거렸다.

하지만 황궁은 앰브로시아 후작저와는 달리 구조가 복잡했다. 어려서 머리가 덜 여문 데다 원래도 방향 감각은 썩 좋지 못했던 로제트는 순식간에 길을 잃고 말았다.

길을 잃을 거라고 조금도 생각지 못한 곳에서 길을 잃었다는 걸 깨닫자 로제트는 더욱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사실 황궁은 침입자를 막기 위해 독특한 비밀 구조로 설계돼 있었다.

방심하면 어른도 길을 잃기 쉬운 미로와도 같았다. 그걸 알 길 없는 로제트는 이리저리 헤매다 어느 방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희미한 약재 냄새가 풍기고 크고 작은 자루가 쌓여 있는 걸로 봐서 약재를 모아 두는 방 같았다. 기진맥진한 로제트는 커다란 자루들 사이에 풀썩 쓰러졌다.

쾅!

깜빡 잠들었던 로제트는 커다란 소리에 화들짝 정신이 들었다. 누군가 방에 들어온 것 같았다.

남자 어른 목소리가 들렸다. 다투거나 화를 내는 듯했다.


“전하, 몽펠리 후작의 태도가 영 미덥지 않습니다. 거사 전에 약속한 것들을 제대로 지킬까요?”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잡아먹는다더니, 감히 이 카를슈테인을 물 먹이려고 해?”

분통을 터뜨리며 몽펠리 후작을 성토하는 남자는 로번 카를슈테인 공작이었다.

카를슈테인 공작가, 페리에 공작가, 몽펠리 후작가. 이 세 가문은 황태자파를 대표하는 가문으로, 근래 제국에서 엄청난 위세를 떨치기 시작한 가문들이었다.


“우리 쪽에서도 계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들의 약점을 잡아 둔다든지 말입니다. 이대로는 카를슈테인의 위치가 아무래도 위태롭습니다.”

“황자를 바꿔치기 하는 거사가 성공했으니, 그 늙은 여우가 슬슬 본전 생각이 나는 모양이군.”

“몽펠리 후작이야 제 여식이 낳은 아이를 황후가 낳은 아이로 둔갑시켜 무사히 황태자 자리에까지 올렸으니, 이제 아쉬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몽펠리 후작의 여식이란 현 황제 베르툴 바카리스의 비들 중 하나인 마르멜 황비를 가리켰다. 로안나 황후는 십수 년 전 황자를 낳고 세상을 떠났다.


“약점이라…… 그나저나 황후가 낳은 황자가 아직도 살아 있더군? 반쪽짜리들 사이에 던져 놓으면 금세 죽어 나갈 줄 알았더니 명이 길군.”

“어차피 성인이 되기 전에 죽는 건 매한가지일 겁니다. 반쪽짜리 시더우드들은 누가 됐든 학대나 음독으로 조용히 제거되니까요.”

“며칠 전 후원 쪽에서 우연히 마주쳤는데, 황후를 꼭 닮은 얼굴이 그 아이가 진 시더우드인 걸 금방 알아보겠더군. 어째서 후환이 될 싹을 말끔히 처리하지 않는 건지.”

“섣불리 움직였다가 반대파 귀족들에게 괜한 의심을 사고 역이용 당할까 봐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세 가문은 황자를 바꿔치기 해 황위를 조작하는 일에 가담했다. 시간이 흐른 후, 그 일에 관한 대가와 포상을 놓고 그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난 것이다.


“몽펠리뿐 아니라 페리에도 실속을 다 챙겼지요. 제 여식을 황태자비로 황궁에 밀어 넣지 않았습니까. 두 가문은 이제 한 배를 탄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이대로 있다간 우리 가문만 이용당하다 버려지고 맙니다.”

쾅! 악에 받친 공작이 맨주먹으로 테이블을 거칠게 내리쳤다.


“히끅!”

어디선가 들려온 자그마한 소리에 카를슈테인 공작의 눈빛이 무시무시하게 변했다.

그는 곧장 검을 뽑아 소리 난 쪽의 자루를 미친 듯이 헤집었다. 약재가 담긴 커다란 자루 사이에서 나온 건 잔뜩 겁에 질린 여자아이였다.

소리도 내지 못하고 덜덜 떨고 있는 아이의 옷차림을 보니 귀족가의 자제였다.

카를슈테인 공작은 로제트의 멱살을 움켜쥔 채 사납게 들어올렸다. 로제트는 덫에 걸린 새처럼 힘없이 파닥거렸다.


“전하, 어쩌시려는 겁니까.”

옆에 있던 수하가 공작을 말렸지만, 그는 아랑곳없이 로제트의 가녀린 목을 움켜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이 도둑고양이 같은 년. 뭘 들었어?”

로제트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가뜩이나 그 늙은 여우가 내 등 뒤를 노리는데, 너 같은 것 때문에 일을 그르칠 수 없지.”

결국 로제트의 몸이 축 늘어졌다. 공작은 실신한 아이를 아무렇게나 자루 사이에 팽개쳤다.

수하가 급히 로제트에게 달려가 상태를 살폈다.


“죽은 겁니까?”

“글쎄, 숨이 붙어 있더라도 놔두면 알아서 곧 죽겠지.”

“이, 이래도 괜찮은 겁니까?”

“그 애 목숨이 아니라 네 목숨이나 걱정하지 그래? 우리 얘길 들었으니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할 테니.”

“하…….”

“후환이 없도록 깔끔하게 처리해. 실수는 용납 못 해.”

손수건으로 손 구석구석을 정성껏 닦아 낸 카를슈테인 공작은 도리어 기분이 좀 풀린 듯 가벼운 걸음으로 방을 나서려다 문득 멈춰 섰다.


“가만. 내가 또 어리석은 짓을 저지를 뻔했군.”

공작은 걸음을 돌려 로제트에게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 수하는 이제야 주인이 이성을 되찾은 건가 싶었다.

역시 아이를 저렇게 만든 건 몽펠리와 페리에 탓에 화가 나 충동적으로 저지른 짓이리라.


“이래서 사람은 흥분하면 일을 그르치는 거야. 그 늙은 여우와 황태자파 전부를 위협할 수 있는 훌륭한 패를 나 스스로 못쓰게 만들 뻔했군.”

공작의 눈이 스산한 빛을 발했다.


“늙은 여우가 약속을 안 지키면 지키게 만들어야겠지. 의사를 불러. 그중에 아이의 기억을 봉인할 흑마술사도 섞어라. 서둘러.”

원래도 냉혹한 주인이었지만, 아이를 다루는 그의 모습에서 수하는 악마를 본 듯했다.

공작은 섬뜩하게 웃으며 정신을 잃은 로제트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는 아이의 순수한 기억은 만일의 경우 훌륭한 증인이 되어 주겠지. 미래의 황제를 위협하는 강력한 칼이 되고 말이야.”

로제트는 사실 의식을 잃은 것이 아니었다. 살기 위해 기절한 척했을 뿐이었다. 버둥거릴수록 그 잔인한 손은 목을 더 조여 왔으니까.

하지만 기지를 발휘한 것도 소용이 없었다. 정신을 놓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써 보았지만 로제트의 의식은 점점 흐릿해져 갔다.

* * *



“레이디, 괜찮으십니까?”

최면술사의 목소리가 점점 또렷이 들려왔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누워 있던 침대의 시트가 축축하게 젖었다.

어린 시절 내가 당한 일 때문이 아니었다.

지난 열여섯 번은 오로지 나를 위해 울었다면, 열일곱 번째에 이르러서야 내가 아닌 다른 사람 때문에 울었다.


“그 아이 나를 많이 기다렸을 텐데.”

그날 닥쳐온 불운으로 나와 진의 길은 한참 어긋나 버렸다.

삶은 크고 거창한 것들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실은 작고 하찮은 것들로 지탱된다.

내가 삶을 수차례 되돌아온 것은 복수나 성공처럼 거창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자두 쿠키를 가져다주겠다는, 한 소년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는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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