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처음인 듯 처음 아닌 처음 같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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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처음인 듯 처음 아닌 처음 같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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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처음인 듯 처음 아닌 처음 같은 밤
2022.07.15.
‘나, 죽은 건가? 눈 뜨면 18회차?’
하지만 눈을 뜨자 시야 가득 들어온 건 18회차의 풍경이 아니라 진의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진이 편안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처음 보는 그 모습이 무엇보다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열차의 짐 선반이나 마차의 좁은 좌석, 침대 가장자리 같은 곳에 몸을 구겨 넣어 반쯤 깨어 있는 채로 잠든 모습이 아닌, 포근한 잠의 은총에 영혼까지 내맡긴 모습.
진의 고른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자니 간밤의 고생을 전부 보상받은 느낌이었다.
보이지도 않는 흔적을 들이대며 새침을 떨던 혼전순결남과 어젯밤의 그 남자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고양된 근육 하나하나가 달빛을 받아 번들거리며 꿈틀거렸다.
지난밤 나는 갖게 되었다. 나만이 아는 그의 모습을.
강인함과 연약함이, 광폭함과 처연함이 공존하는 묘하고도 황홀한 모습.
그 모습만큼은 영원히 나만 알고 싶다고, 누구와도 공유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진도 그럴까? 자신만의 내 모습을 가졌을까?
창피한 고백을 하자면, 나는 어젯밤 청승맞게도 울었다. 울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자꾸만 눈물이 흘러 침대 시트를 적셨다.
진이 입술로 내 젖은 눈가를 훔치며 물었다.
「힘드니?」
힘들었다. 진과 함께하는 밤이 내가 아는 밤들과 너무 달라서.
지난날 의무적인 합방은 차갑고 무례하고 짧았다.
‘정말로 사랑하는 남녀가 함께하는 밤이란 이런 거구나.’
나는 처음엔 지난 기억이 서러워서, 점점 진의 따뜻한 대우에 행복해서, 나중엔 이러다 18회차 가는 게 아닌가 싶어서 흐느꼈다.
처음이라더니, 혼순남이라더니……. 걱정 어린 얼굴로 힘드냐고는 왜 물었어…….
말이 씨가 된다고 했던가. 그는 정말로 침대 위의 황제였다.
그때 내 말을 비웃었던 프러너스, 이제 보니 당신과 나는 부부가 아니었네. 남매, 아니 형제 사이였어.
처음이면서 처음 같지 않은 진과 처음이 아니면서 처음 같은 나의 첫날밤이 하얗게 새고 있었다.
나는 앰브로시아로 태어나 잠시 카를슈테인으로 살았고, 어젯밤 시더우드가 되었다.
하지만 진이 시더우드란 성을 버리고 싶어 하니 나도 그를 따라 자유인이 될 것이다.
자유인이 되는 밤엔 엄청난 고통과 희열이 뒤따랐다. 자유란 그런 것이었다.
나는 시더우드도 아니고 무엇도 아닌, 그래서 조금 쓸쓸할지 모를 그를 힘껏 품어 주고 싶었다.
내가 대신 그의 영원한 성이자 모든 성이 되어 주리라.
나도 모르게 곤히 잠든 그의 이마 위로 손을 뻗어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다행히 나를 침대 밖으로 집어던지거나 어젯밤처럼 사나운 무언가로 돌변하지는 않았다.
그 미의 남신 같은 모습을 눈앞에서 두고 보자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어디 그렇다면 나도 좀.’
궁금하던 그걸 시도해 보고 싶어진 나는 살금살금 몸을 움직여 진의 가슴에 입술을 꾹 붙였다가 뗐다.
앙증맞은 분홍빛 자국이 생겼다. 그래, 이 정도는 돼야지.
선명한 자태를 뽐내는 내 사랑의 흔적을 흐뭇한 얼굴로 보고 있는데, 진의 잠긴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당신이 먼저 했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진이 위험해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진이 내 목에 거침없이 얼굴을 묻었다.
“아앗, 너무해!”
나는 진의 팔을 찰싹 때리며 항의했다.
“난 그래도 당신 체면 생각해서 안 보이는 곳에 했잖아. 직원들이 짓궂게 놀리기라도 할까 봐.”
“감히 놀릴 테면 놀려 보라지.”
얼른 거울로 달려가 목을 비춰 본 나는 비명을 질렀다.
“이게 뭐야? 거의 자주색이잖아!”
“당신 그 관자놀이의 자주색 점이랑 아주 잘 어울리네.”
“어떡해, 정말!”
나는 울상을 짓고 서 있다가, 복수심 가득한 얼굴로 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진의 가소롭다는 듯한 웃음소리가 나를 도발한 바람에 잠시 이성을 놓았나 보다.
조금 뒤 내가 저질러 놓은 짓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였다.
덕분에 우리는 이 뜨거운 나라에서 때아닌 린넨 스카프와 크라바트를 턱밑까지 끌어올리고 다녀야 했다.
물론 우리를 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카프와 크라바트 안에 뭐가 있는지 이미 아는 표정이었다.
“더운데, 그냥 볼 테면 보라고 하지.”
“싫어! 절대 안 돼. 당신 목에 있는 건 내 얼굴이라고!”
“내 부인님의 각별한 애정이겠지.”
진과 나는 티격태격하며 서로의 목을 꽉 졸라매 주었다. 우리는 함께 하말린 왕을 알현하러 가는 길이었다.
* * *
진과 로제트의 결혼 축하연은 하말린 사람들도 함께 어울린 한바탕 축제와도 같았다. 하지만 그 축제를 마냥 즐길 수 없는 이가 있었다.
오쿨루스 왕은 사실 두 사람의 결혼식 전날 로센보르 제국으로부터 외교 서한을 받았다. 하말린으로 제국의 사절단을 보내겠다는 통보였다.
말이 외교 사절이지, 과연 어떤 횡포를 부리고 약탈을 일삼으러 오는 것인지, 왕은 제국의 갑작스런 기별이 불길하기만 했다.
진과 로제트가 왕을 알현하러 온 그때, 왕과 모얌 왕녀는 마침 그 문제로 논쟁을 벌이던 중이었다.
“황자, 실은 제국의 사절단이 곧 도착할 것이네.”
왕이 난처한 얼굴로 인사 온 신혼부부에게 말했다.
제국에서 사절단이 오는 것은 두 사람에게 반가운 일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심각하게 받아들일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왕과 왕녀의 얼굴을 보고 로제트와 진은 뭔가가 더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실 로제트는 더운 날씨에 목을 꽁꽁 동여맨 자신들의 모습을 보고 누구보다 먼저 모얌 왕녀가 박장대소하며 놀려 댈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왕녀는 무언가에 화가 나서 두 사람의 모습은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왕녀는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자는 잔인한 괴물이에요. 그처럼 부도덕한 자를 하말린 왕궁에 들여서는 안 됩니다.”
“왕녀, 자중하고 공과 사를 구분하여라. 그는 개인으로 이곳에 오는 것이 아니다. 제국 사절단의 대표로 오는 것이지.”
“그런 자가 와서 할 소리라는 게 뻔하죠.”
“그렇더라도 제국의 외교 사절을 홀대할 수는 없다. 감정적으로 대할 것이 아니라 외교적인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신중하게 처신해야 한다.”
“애초에 트집을 잡으러 오는 게 분명하다고요.”
“설령 그들이 부당한 요구를 하더라도 현명하게 대처해야 한다. 우리 하말린 왕국과 백성들의 안위가 달린 문제야.”
목소리를 높이던 왕과 왕녀는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로제트와 진을 바라보았다. 하말린에 곧 도착할 것이라는 문제의 제국 사절단 대표는 아무래도.
“카를슈테인 공작이오.”
오쿨루스 왕이 마침내 그 이름을 입 밖에 꺼냈다.
왕은 아들같이 아끼는 진과 갓 혼인한 그 아내 때문에 고민하는 것이리라. 진의 입장도 난처할 터였다. 책임감을 느낀 로제트가 왕 앞에 나섰다.
“하말린의 선인이시여, 그리고 왕국을 밝힐 불꽃이시여, 제국의 귀족들은 교활합니다. 그들의 계략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아마도 온 지혜를 모아야 할 겁니다. 그러니 하찮은 일에 조금도 마음 쓰지 마십시오.”
로제트에 이어 진도 왕에게 고했다.
“저희 부부는 하말린에 조금이라도 해가 되는 일은 원치 않습니다. 혹시라도 그런 일이 생긴다면 저희 두 사람 모두 무척 마음이 아플 것입니다. 저희 진심을 알아주십시오.”
* * *
하말린 왕을 알현하고 나오는 길, 진이 내 어깨를 감싸 쥐며 나를 돌려세웠다. 진이 내 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걱정돼?”
“어떤 게?”
“그자가 하말린에 오는 거 말이야.”
“내가 왜? 나 때문에 여기 오는 것도 아닐 텐데. 그보다는 당장 다른 게 걱정인걸.”
“다른 걱정?”
“오늘 밤이 너무 걱정돼.”
“왜? 마음에 안 차는 점이라도?”
진이 그 어느 때보다 미간을 가파르게 구기며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나 지금 너무 힘든데. 산비탈에서 구른 것처럼 여기저기 막 아프고.”
“더 신경 쓰고 조심하도록 할게.”
“아니, 그렇게 해결될 문제가 아닌 거 같은데? 그, 오늘은 그냥 쉬고…….”
진이 나를 흘겨보았다.
“그럼, 하룻밤에 한 번만…….”
“불가능해.”
거짓말! 당신 그제까지도 혼전순결남이었잖아! 꼭 안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잠만 잘 수도 있는 사람이잖아!
“너무해.”
“너무한 건 당신이야. 날 이렇게 만든 것도 당신이고. 그러니까 당신이 책임져 주면 좋겠어.”
그놈의 책임. 부서지기 직전인 내 몸은 누가 책임져 줄 건데?
“아프면 마사지해 줄까?”
피도 눈물도 없는 진이 돌연 다정하게 물었다.
“마사지를 할 줄 알아?”
“지금은 할 줄 모르지만, 대신 모르는 게 없는 직원들을 보유하고 있지.”
“안 돼! 물어보지 마.”
마사지 한번 받으려다 엄청난 입방아에 오르내릴 걸 생각하니 머리가 다 어질어질했다.
그냥 약초 주머니로 찜질이나 좀 하고 있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저쪽에서 플록스가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결혼 축하연에서 오열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라 나는 웃음을 꾹 참고 인사를 건넸다.
“좋은 오후예요, 플록스 경.”
“아, 레이디, 잘 쉬셨습니까?”
하지만 플록스는 급한 용무가 있는지, 나와 짧은 인사만 나눈 뒤 목소리를 낮춰 진에게 무언가 보고했다. 그의 얼굴이 평소와 달리 굳어 있었다.
“로제트, 방에서 좀 쉬고 있겠어? 저녁 식사 전까지 갈게.”
* * *
페가수스 본부로부터 비보가 날아들었다.
내 지시로 제도 근방에서 하말린 왕세자의 행적을 좇던 부하 중 한 명이 무언가의 공격을 받고 목숨을 잃었다는 참담한 소식.
시신에 남은 상흔이 흡사 덩치 큰 들짐승에게 당한 듯 기괴한 모습이라는 보고에 불길한 예감이 점점 사실로 드러나는 듯했다.
이미 짐작한 바대로, 로제트에게 썼던 정령석의 이능에 착안해 마수를 만들어 내는 것은 이론적으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대체 무엇을 위해 사라진 마수를 부활시킨단 말인가.
도무지 그 이유를 납득할 수 없는 짓을 제국의 황제와 공작이 벌이고 있었다.
하말린 왕세자의 행방불명도 이 일과 분명 연관이 있다고 나는 확신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곧 마수를 조련하기 위한 정령석을 하말린에 요구할 것이다. 제국의 사절단이 이곳으로 향한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이겠지.
하말린을 압박하기 위한 카드로 왕세자까지 납치했다면, 그들은 꽤 과격하고 극단적인 계획을 세우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왕세자 다음으로 노리는 것은 아마.
나, 진 시더우드이리라.
* * *
마침내 제국의 사절단이 하말린 왕궁에 입궁했다.
그들은 예상대로 친선과 교류를 빙자한 위협을 늘어놓았다.
페트룸을 비롯한 하말린의 천연 자원과 제국의 첨단 기술을 교환하자는 겉만 번드르르한 제안.
자원의 반출에 대해 하말린 왕이 난색을 표하자 사절단의 대표인 카를슈테인 공작이 점잖게 웃으며 말했다.
“물론 저는 평화주의자입니다만. 잔혹한 전쟁 없이 누구보다 평화로운 대화로 해결을 보고 싶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황제 폐하께서는 생각이 많이 다르시지요. 성정도 불같으시고.”
웃으면서 하는 협박이었다.
“참, 그리고.”
카를슈테인 공작이 또 다른 용건이 있다는 듯 좌중을 한 바퀴 돌아본 뒤 말을 이었다.
“개인적으로 사람을 찾고 있는데, 혹시 왕실에서 도움을 좀 주실 수 있습니까? 내 아내가 이곳 하말린에 있다는 소문을 들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