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황궁의 매운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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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화. 황궁의 매운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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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화. 황궁의 매운맛
2022.07.18.
제국 사절단이 하말린에 머무는 동안, 나와 진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작정이었다.
우리 때문에 하말린 왕실이 난처한 입장에 놓이는 일은 원치 않았으니까.
그래서 나비 계곡에 있는 뷰글라스와 시아의 오두막에서 며칠 신세를 지기로 했다.
덕분에 나는 침대의 황제로부터 잠시 휴가를 얻을 수 있었다. 또 진과 둘만의 결혼식을 올렸던 고요의 숲에서 오랜만에 버섯을 그릴 여유도 생겼다.
하말린의 숲에는 제국에서 보지 못한 신기한 독버섯이 잔뜩 자라고 있었다.
버섯이 이종족이란 생각을 하니, 그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기분이 들었다. 모델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도록 좀 더 조심하게 됐달까.
내가 버섯을 그리는 동안, 진은 자주 그랬듯 버섯 그리는 나를 구경했다. 신경이 쓰인 나는 그림을 그리다 말고 자주 그에게 심심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때마다 진은 심심할 겨를이 없다고 대답했다.
나는 시아를 졸라서 버섯 사냥을 따라가기도 했다. 시아는 퇴마사이자 유능한 버섯 헌터였는데도 정령의 돌을 포획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래도 버섯 사냥을 따라다닌 덕분에 작은 정령의 돌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내가 온몸이 쑤신다고 투덜대자 시아는 통증을 먹고 산다는 초록 해마의 정기를 거기 담아 건네며 몸에 지니고 있으라고 했다.
하지만 이렇게 소소하고 평화로운 일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제국 사절단의 대표로 온 프러너스가 결국 나를 들먹이며 하말린 왕실을 난처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진과 나는 어쩔 수 없이 프러너스와 대면해야 했다. 어릴 적 봉인당한 기억이 돌아온 것이나 프러너스와 카를슈테인 가문이 내게 해 온 짓거리를 안다는 사실은 숨기기로 했다.
우리가 가진 패를 굳이 적에게 보여 줄 필요는 없으므로.
스카프도 크라바트도 하지 않고, 우리는 손을 꼭 잡고서 프러너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만남은 주인이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 왕자궁에서 이루어졌다. 하필 왕자궁을 내어 준 오쿨루스 왕의 심정을 알 것도 같아 마음이 가라앉았다.
“카를슈테인 공작 전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부인의 산달이 가까워졌을 것 같은데요? 건강한 후계자 탄생을 기원하겠습니다.”
나는 아젤리아와 아이의 안부를 물었다. 여기서 괜한 시간 낭비 말고 부인과 아이 곁에나 있어 주라고, 프러너스.
“그 아이가 가문의 후계자가 되려면 입적해 줄 공작부인이 필요한데. 그녀가 타국에서 도통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아서 말이야.”
프러너스가 멀쩡한 얼굴로 헛소리를 지껄였다.
대체 왜 저러는 걸까? 주도면밀한 냉혈한이니 내 쓸모가 다했다고 판단해 나를 버린 것일 텐데. 무언가가 바뀐 걸까?
“공작도 이미 알겠지만, 나와 로제트는 성혼을 했어. 이제 그만 서로의 가정을 축복해 주는 게 어떻겠나.”
진이 최대한 호의적인 태도로 프러너스에게 말했다. 그러나 프러너스는 그 호의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당신도 이미 알겠지만, 나와 로제트는 이혼하지 않았어. 법적으로 여전히 부부지. 내가 알기로, 축복받을 수 있는 가정은 하나밖에 없어. 안타깝지만 당신의 그 신성한 불륜을 인정해 줄 순 없겠어.”
프러너스가 더는 제국 최고의 신사가 아닌 건 알았지만, 정말이지 기대 이상으로 한심한 작태가 아닐 수 없었다.
“공작의 인정은 불필요하군. 이곳은 하말린이라 제국의 법도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여 놓은 종잇장에 불과하지. 아니, 법 이전에 당신이 로제트에게 한 짓을 생각해 봐.”
진이 애써 감정을 삭이며 말했지만, 프러너스는 오만한 태도로 무시하고 내게 말했다.
“내 잘못을 인정하지. 내가 실수했어. 이제 그만 돌아가자, 로제트. 그동안의 일은 아무것도 묻지 않기로 하지.”
내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그는 천연덕스럽게 지껄이며 심지어 내게 자비라도 베푸는 양 굴었다. 나는 결국 짜증을 참을 수 없어 소리쳤다.
“대체 왜 이러는 건데? 이유가 뭐냐고!”
갈등을 부각시켜 그가 얻으려는 게 뭘까. 두통이 일어 손으로 이마를 짚는데, 진이 나와 깍지 낀 손에 힘을 주었다.
“대화는 끝났어, 공작. 나의 로제트에게 그간 함부로 대한 것도 모자라 지금도 여전히 기만하려 들다니. 당신을 로제트의 전남편은커녕 제대로 된 인간으로도 대우해 줄 수 없겠어.”
진이 결국 프러너스를 향해 날을 세우자, 프러너스가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진작 솔직하게 나오지 그랬어. 그랬으면 나도 두 사람의 불륜이 나를 비롯한 얼마나 많은 이에게 상처를 줬는지 허심탄회하게 얘기했을 텐데. 아, 두 사람. 황후에 관한 이야기는 충분히 나눈 건가?”
프러너스는 상황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것 같지 않자, 우리의 행복에 재라도 뿌리기로 마음을 굳힌 듯했다.
아무리 그래도 다른 사람도 아닌 프러너스 카를슈테인이 불륜과 상처를 운운하다니.
그 뻔뻔함에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왔다. 느닷없이 황후 얘기를 꺼낸 건 진의 심사를 어지럽히려는 의도이리라.
“아는 사람은 다 아는 황궁의 비밀이 있지. 그런 건 아무리 쉬쉬해도 은밀하게 퍼져 나가는 법이니, 당신도 당연히 알고 있겠지. 황제와 황후의 합방 일마다 황후가 폭행을 당한다는 소문.”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누가 누굴 폭행한다고? 정말이지 추잡한 소문이었다.
지난번 극장에서 본 황후의 이미지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절대로 맞고 살 사람으로는 안 보였는데. 정신상태가 좀 불안정해 보이기는 했지만.
“원래도 우울증이 심한 황후가 과연 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신하 된 자로서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군. 부디 극단적인 선택은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는데.”
프러너스는 나와 진의 사이에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었지만, 적어도 기분을 망쳐 놓는 데는 성공했다.
유쾌하지 않은 만남을 다소 거칠게 끝낸 우리는 왕자궁을 나섰다. 프러너스와 헤어진 후에도 그가 한 말들이 마음을 어지럽혔다.
찜찜하고 뒤숭숭하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만인의 위에 군림하는 당당하고 우아한 황후가 실은 가혹한 일을 당하고 있었다니. 정말로 그렇다면 가난한 평민 아낙보다 나을 게 없는 삶이었다.
진도 그 모든 사실을 알았기에 그녀의 횡포를 감내하면서도 차마 그녀를 떠날 수 없었던 걸까. 진은 누구보다 인간에 대한 연민이 많은 사람이니까.
더욱이 그런 식의 폭력 행사는 진이 가장 참을 수 없어 하는 일이었다.
우리는 함께 식탁에 앉았지만, 포크와 스푼을 접시 위에서 공허하게 놀릴 뿐이었다. 진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나도 아까 프러너스의 한심한 모습을 보며 마음이 좋지 않았다. 프러너스에 대한 마음은 눈곱만큼도 남아 있지 않지만, 그래도 그가 웬만큼은 사람답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한때 내 삶의 한 부분이었던 사람이 너무 추한 모습이면 나도 마음이 좋지는 않으니까.
“괜찮아?”
나는 포크를 내려놓고 진의 손등에 내 손을 포개며 물었다.
“안 괜찮아.”
진이 미간을 좁히며 의외로 순순히 인정했다.
“그렇지, 이해해.”
“솔직히 생각했던 것보다 더 불쾌해. 당신을 생각해서라도 가능하면 나쁜 말은 꺼내지 않으려 했는데.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뻔뻔함이야.”
“으응?”
뭔가 위화감을 느낀 내가 확인 차 물었다.
“누구 얘기? 혹시 프러너스 말이야?”
진이 더 의아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봤다.
“그럼 누구겠어.”
“아…… 그, 그러게 말이야. 대체 왜 그러는 걸까? 다 끝난 얘길 가지고 이 먼 하말린까지 와서 그런 추태나 부리고. 무슨 꿍꿍이일까?”
“뻔하지. 그자, 당신한테 마음이 있어.”
마침 주스를 마시던 나는 그대로 뿜고 말았다.
“진, 뭘 마시고 있을 때는 장난치지 마!”
“괜찮아? 미안. 하지만 장난은 아니야.”
“뭐?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헛다리를 너무 심하게 짚었어.”
“아니, 분명해. 본인조차도 자기 마음을 모를 뿐. 원래 그런 건 다른 사람 눈에 더 잘 보이는 법이지.”
“어휴, 소름 끼치니까 그만해.”
진의 말이 처음엔 황당했지만 생각할수록 귀여워서 나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다 자기 같은 줄 아나.
그나저나 기분이 저조해진 이유는, 그게 다?
황후는? 황후는 걱정되지 않는 거야?
“저, 아까 황후 얘기 말이야, 마음이 좀 안 좋지?”
“그다지.”
어째서? 진이 갑자기 매정한 인간이 된 것도 아닐 텐데. 나조차도 마음이 이렇게 안 좋은데.
“황후가 걱정되지 않아?”
내가 의아한 얼굴로 묻자, 진이 미간을 좁힌 채 잠시 고민하는 눈치더니 딱 잘라 말했다.
“황후는 무서워해야 할 사람이지, 걱정할 사람이 아니야.”
“……?”
무슨 뜻일까. 내 눈에도 황후는 좀 그래 보이긴 했지만.
“그렇지?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 돼. 대체 그런 악질적인 소문은 누가 만드는 거지? 듣자마자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어. 프러너스, 그 치사한 인간.”
그러자 진이 또 미간을 좁히고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난처한 듯한 얼굴로 입을 뗐다.
“그 소문에 대해서라면 황궁에 살았던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순진한 당신에게 그 얘길 해 주어야 할까 지금도 고민이 되지만, 당신이 자꾸 엉뚱한 오해를 하는 것 같아서 말해 두는 게 좋겠어.”
“나 그렇게 순진한 사람 아니야. 걱정 말고 말해 봐.”
인생 17회차를 뭐로 보고.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리 뜸을 들여?
“황제와 황후의 합방 일마다 폭행이 벌어지는 건 사실이야. 그 소리가 바깥까지 새어 나가니 소문이 나지 않을 수 없지.”
“세상에…… 그게 정말이야? 어떻게 황궁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어?”
“하지만 소문과 다른 점은, 가해자가 황제가 아니라 황후라는 사실이야.”
“네?”
17회차의 따귀를 가차 없이 후려치는 진실의 괴팍함이여. 폭군 황제가 실은 매 맞는 남편이었다니.
너무나 엄청난 사실에 얼이 빠져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진이 조용히 다가와 나를 자기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이렇게 순진한 아기 같은 당신이니 내가 어떻게 걱정이 안 되겠어. 그에 비해 공작이나 황제, 황후 같은 이들은 미쳐도 웬만큼 미친 자들이 아닌데. 당신을 지키려면 내가 정신 바짝 차려야지.”
그때 만난 황후가 그렇게 무시무시한 사람이었다니. 진실을 알게 된 지금에야 뒤늦게 몸이 후들거렸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죽을 뻔했어.
황궁이 그렇게 무섭고 잔인한 곳이라더니. 제국의 황궁 살이는 역시 보통 사람은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매운맛이었다.
“그런데 프러너스 말이야, 다른 건 몰라도 머리는 좋은 줄 알았는데. 똑똑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대체 제대로 아는 게 뭐야?”
* * *
로제트와 진의 비웃음을 샀던 프러너스는 하말린 왕에게도 추궁을 당하는 중이었다.
비록 불평등한 조약이었지만 자원의 반출량에 대한 조항이 분명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사절단이 정령의 돌을 더 많이 빼돌리려 한 정황이 포착된 것이다.
“이유를 듣고 싶소, 카를슈테인 공작.”
오쿨루스 왕이 엄한 목소리로 프러너스에게 해명을 요구했다.
“아랫사람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 점 사과드리지요. 정령의 돌이 제국의 황족과 귀족들 사이에 영원한 젊음을 가져다주는 영약으로 인기가 높아 생긴 촌극일 뿐입니다. 개인적으로 부탁받은 자가 욕심을 좀 부린 모양입니다.”
분명 하말린의 상인들에게 뇌물을 먹여 손을 써 놓았다고 보고받았거늘. 이 하말린의 야만인 놈들 같으니라고.
프러너스는 일이 발각돼 체면을 구긴 것에 화가 치밀었지만, 겉으로는 별일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둘러댔다.
하말린 왕의 집무실에서 물러나 사절단의 숙소로 돌아가는 길, 프러너스는 심사가 뒤틀렸다.
이번 하말린행에서 프러너스가 목표한 것은, 표면적으로는 사절단의 대표로서 불평등 조약을 성사시키고 하말린의 자원을 갈취하는 데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 놓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진짜로 노린 것은 마수를 육성하는 데 필요한 다량의 정령의 돌이었다. 그 모든 계획이 지금 엉망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이번 일과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었지만, 어제 로제트와 다정한 모습을 하고 나타난 진 시더우드, 모든 게 다 그자 탓인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하말린의 모든 것이 이토록 자신에게 적대적일 수 있단 말인가.
“잠깐, 저건?”
분노에 찬 프러너스의 눈에 무언가가 이질감을 주는 것이 포착됐다. 저건 분명 제국의 전령인데?
사절단 대표인 자신이 모르는 전령이 왔다?
프러너스는 심상치 않은 일임을 직감하고 그 전령을 잡아들였다.
프러너스 앞에 잡혀온 전령에게서 나온 건 하말린 왕에게 보낸 황제의 전언이었다.
전언의 내용을 확인한 프러너스는 분노로 눈앞이 하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