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싫은 것만 주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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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싫은 것만 주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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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싫은 것만 주고 싶었어
2022.08.08.
“프러너스, 당신께 드릴 말씀이 있어요.”
나는 복도에서 기다렸다 지나가는 남편을 겨우 붙잡아 사정했다.
내 남편, 카를슈테인 공작은 제국에서 가장 유능하고, 그런 만큼 가장 바쁜 사람 중 하나였다.
그의 얼음 조각 같은 얼굴에 당장이라도 나를 무시하고 지나가고 싶은 빛이 역력했다. 그 파란 눈동자에서 멸시의 감정이 비수처럼 쏟아져 내게 꽂혔다.
그럴 때마다 그의 황금 같은 시간을 내 하찮은 용무로 허비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위축되고는 했다. 그래서 가능한 한 그를 귀찮게 하지 않으려 노력해 왔는데.
하지만 오늘은 어쩔 수 없었다. 그를 귀찮게 할 수밖에 없는 위급한 일이 생겼기에. 말 그대로 삶 전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는 위급한 사안이었다.
“저, 이상한 소문을 들었는데…… 아니지요?”
평소에는 들을 일이 거의 없는 말들이 내 입에서 나오자 프러너스의 얼굴에도 평소와는 다른 표정이 떠올랐다. 물론 켕기는 게 있으니 더욱 그런 것이겠지.
“무슨 소문? 당신답지 않은 질문이군.”
“미안해요. 부인들의 시답잖은 험담인지 모르지만…… 너무 신경이 쓰여서요.”
여기까지 말한 나는 프러너스의 눈치를 흘깃 살핀 뒤 조심스레 뒷말을 이었다.
“워릭 백작 부부가 이혼한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런데 왜 우리 부부와 연결지어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니지요, 프러너스?”
나는 최대한 애절한 눈빛을 보내며 프러너스의 대답을 기다렸다. 프러너스는 도리어 수상쩍다는 눈초리로 나를 쏘아보았다.
“당신, 생각보다 소식이 빠르군. 그런 정보는 누가 물어다 주는 거지? 그 호텔 장사치의 아내 올랜도 웰츠인가?”
“역시 헛된 소문이지요? 불쾌하게 했다면 미안해요.”
프러너스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아니, 아젤리아가 이혼하는 건 맞아. 그리고…… 그녀의 거처를 곧 공작저에 마련할까 해.”
나는 숨도 멈춘 채 굳어 있다 휘청거렸다. 하지만 이내 억지웃음을 쥐어짜며 물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했지만 입가와 턱과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그래요, 아젤리아가 이혼한 직후에 의탁할 곳이 필요하긴 하겠네요. 아무래도 경황이 없을 테고, 혼자 살 준비도 필요할 테고. 생판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그녀의 어려움을 모른 척하기는 좀 그렇죠?”
내가 횡설수설하자 프러너스의 눈에 조소와 한심함과 경멸의 빛이 스쳤다.
“아니, 아니야, 로제트. 난 아젤리아를 동정하려는 게 아니라고.”
“그……럼요?”
“몰라서 묻는 건 아니겠지? 보아하니 당신 소식통도 꽤 쓸 만한 것 같은데.”
나는 얼른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매달렸다.
“설마, 그녀로 나를 대신하려는 건 아니죠? 우리 부부 그동안 잘 지냈잖아요? 나, 공작부인으로 나쁘지 않았잖아요? 나름 열심히 해 냈다고 생각해요.”
프러너스는 냉정한 눈빛과 침묵으로 내 말에 이견을 표했다.
그의 냉담한 반응에 나는 다급한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혹, 혹시 아젤리아를 첩으로 들이려는 건가요? 난 그 정도까지는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어요. 그래요? 그런 거예요?”
프러너스는 이 말에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내며 발끈했다.
“첩이라니. 말조심해. 아젤리아는 그런 저급한 소릴 들을 여자가 아니야. 당신, 언제부터 그렇게 품위를 잃었나.”
“지나쳤다면 미안해요. 하지만…….”
나는 필사적으로 프러너스의 소매를 잡고 늘어지며 애원하기 시작했다.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해요. 그녀에게 해 주고 싶은 만큼 해 줘요. 난 아무 불만 없어요. 그저 이혼만은 말하지 말아요. 이혼은 절대로 안 돼요. 제발, 프러너스!”
나는 간도 쓸개도 없는 여자처럼 최대한 비굴하게 굴었다. 심지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이번엔 프러너스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여하튼 잡을 수 있는 건 모조리 붙잡고 봤다. 눈물을 절절 흘리며 큰 소리로 저택이 떠나가라 빌기도 했다. 프러너스의 말대로 저급하고 품위 없게.
없던 혐오감도 솟구치게 만들 행태였다. 역시 프러너스는 나를 벌레 보듯 쳐다봤다.
“로제트, 그만. 지금은 대화가 안 될 것 같군.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있을 만큼 이성을 되찾으면 그때 다시 얘기하지.”
프러너스는 자신의 불륜이 예정보다 일찍 발각돼 일이 성가시게 된 것에 인상을 구기며 재빨리 내게서 멀어졌다.
‘도도한 제국의 신사도 발등에 불 떨어지니 아주 날아가는구나, 날아가.’
나는 잽싸게 달아나는 프러너스의 뒷모습을 보며 비웃어 주었다.
그건 그렇고, 너무 무리한 것 같았다.
“깨진 거 아니야? 아고, 무릎아, 정강이야.”
방으로 돌아온 나는 욱신거리는 무릎과 정강이를 손으로 주물렀다.
무릎까지 꿇을 필요는 없었지 싶다. 실감나는 연기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은 대가가 가혹했다. 앞으로 직접 몸 던지는 건 자제해야지.
물론 마음속에 꾹꾹 눌러 담은 울화와 분함에 비하면 이런 육체적 고통쯤은 별것 아니지만.
정말이지 프러너스의 저 역겨운 면상을 보면서 낯 간지러운 소리를 하자니 속이 울렁거리고 비위가 상했다.
게다가 매번 뭐가 그렇게 당당한데? 나쁜 짓이란 나쁜 짓은 제가 다 저질러 놓고서, 뻔뻔하고 가증스럽기는.
프러너스가 저지른 추잡하고 탐욕스러운 짓거리들을 돌아보면 불륜은 애교에 불과했다.
그래, 프러너스 넌 차라리 아젤리아랑 불꽃 튀는 불륜을 저지를 때가 그나마 인간 같았어. 너답지 않게 사랑에 눈이 뒤집혀 발정 난 수컷 흉내를 낼 때가 가장 용서해 줄 만했다고.
그나마도 얼마 못 갔지만. 누군가를 자신보다 더 아끼는 일은 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니까.
그런 주제에 쓸데없이 고상 떨기는. 하, 성질 같아서는, 진짜. 연기고 뭐고 저 거만한 콧대부터 콱 부러뜨려서 쌍코피를 쏟게 하고 싶었지만, 배우의 자존심을 걸고 꾹 눌러 참았다.
그래도 지난 생에 별별 연기를 다 하며 혹독하게 실력을 갈고닦았더니, 내가 봐도 내 연기력이 눈부시게 성장한 듯했다.
기가 막힌다, 완벽하다,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런 걸 뒷골목 표현으로는 뭐라고 하더라. 찢었다? 쩐다?
여하튼 혼신을 다한 연기가 스스로도 만족스러웠다.
그렇다. 나는 또 되돌아왔다. 그렇게도 피하고 싶었던 18회차 삶에 발을 디뎠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어느 회차보다 스스로 간절히 원해서.
그동안은 딱히 원한 것도 아닌데 영문도 모르고 되돌아왔기에, 간절한 목표도 없이 타성에 젖어 하던 대로 하다 허망하게 끝나곤 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간절한 바람이 있어서 스스로 선택해 되돌아왔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진을 위해서.
열여덟 번째는 처음으로 나 아닌 누군가를 위해 되돌아왔다.
17회차 삶을 내던지며 다시 깨어나지 못하면 어쩌나, 잠시 걱정도 했지만, 설령 그렇게 되었더라도 후회는 없었을 것이다. 어차피 진이 없는 세상에서 더는 살 수 없을 테니.
다행히 나는 공작저의 내 방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역시 아젤리아가 이혼하기 며칠 전이었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리치의 불꽃 축제가 시작되기 전에 모든 것을 깔끔하게 마무리 지어야 했다. 다시는 저 징그러운 거머리가 내게 달라붙지 못하도록.
마음 같아서는 다 집어치우고 당장 그리치로 달려가 진부터 만나고 싶었다. 아, 생각하자마자 또 진이 못 견디게 보고 싶잖아!
진을 떠올릴 때마다 마치 코를 깨물린 기분이다. 눈앞이 아찔하고 정신이 아득해진다. 그리움으로 어쩔 줄을 모르겠다.
진짜로 코를 깨물린 적은 없지만, 다른 곳은 누구한테 당해 본 적이 있어서 조금 안다.
보고 싶지만 참아야겠지. 한 발 한 발 내딛다 보면 언젠가는 진이 있는 곳에 다다를 수 있을 테니까. 그러므로 한 발 한 발 신중하게 내디뎌야 한다.
희망의 토양은 사랑이 아닐까. 사랑이 없는 희망이 존재할 수 있을까? 반면 사랑이 없는 사람의 희망은 어떤 모습일까?
‘진, 만나기만 해 봐. 정말 혼내 줄 거야.’
내 그리움만큼 혼내 줘야지.
내가 돌아오자마자 곧장 프러너스에게 이혼을 요구하지 않은 건 나름의 작전이었다.
카를슈테인, 그 가문은 세상에서 가장 의심 많은 피가 흐르는 족속이다. 지난 회차처럼 나름 인심 써서 시원스레 이혼 선언을 해 줘 봤자, 역효과만 불러일으킬 뿐.
프러너스가 스스로 이혼하지 못해 안달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러자면 먼저 그가 내게 진저리치게 만들어야지.
그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는 아직도 모르겠고 앞으로도 알 필요가 없지만, 그가 무엇을 싫어하는지에 관해선 나름 통달했다.
아젤리아가 그 까탈스러운 프러너스의 마음을 주무를 수 있었던 건 구차하게 굴지 않아서였던 것 같다. 이제 와 돌아보니 그녀는 밀고 당기기의 고수가 아니었나 싶다.
남편의 정부에게서도 배울 건 배워야지. 그러니까 나는 구차하고 구질구질하게 나가는 작전이다.
프러너스가 방금 내게 느꼈을 지긋지긋함을 극대화할 방안도 마련했다. 이번엔 두 가지를 동시에 노릴 생각이다. 제국법이 보증하는 확실한 이혼 서류와 더불어, 현실적인 이익도 조금?
카를슈테인 가문이 소유한 재산의 30퍼센트라든가, 그런 소박한 이익? 17회차에 겪어 보니 생각보다 자잘한 돈이 필요한 일이 꽤 있어서 말이다. 이번 18회차엔 지출이 더 늘어날 예정이기도 하고.
‘사람을 찾아 줘요. 가능한 한 빨리. 일찍 처리하는 만큼 할증료를 후하게 지불하죠. 비용은 공작 전하 앞으로 청구하면 돼요. 아, 내가 부탁한 일이 어떤 건지는 전하께 당분간 비밀로 해 줘요. 알죠?’
나는 평소 거래하던 정보 길드에 이렇게 의뢰 서신을 보냈다. 나를 호구로 알고 뜯어먹던 곳이다.
알지? 평소 하던 대로 공작 전하한테 조르르 가서 이르는 거?
그들은 당연히 프러너스를 더 중요한 고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며칠 후 정보 길드에서 사람을 찾았다는 전갈이 왔다.
‘부인께서 의뢰하신 것과 조건이 일치하는 사람들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신뢰할 만한 사람들인지 조금 우려된다는 의견을 첨부합니다. 만일 부인께서 원하신다면 같은 일에 종사하는 다른 사람들을 알아봐 드릴 수도 있습니다. 일단은 두 사람을 내일 저택으로 보내겠습니다.’
답신을 보고 나는 웃었다. 그렇지, 웬만해선 신뢰하기 힘들겠지. 그런 완벽하게 의심스러운 얼굴은 세상을 다 뒤져 봐도 없을걸?
* * *
다음 날, 약속한 사람들이 저택으로 찾아왔다. 남자 한 명, 여자 한 명.
나는 화사한 꽃이 피기 시작한 온실에 티 테이블을 준비해 놓고 그들을 기다렸다.
그들을 온실까지 안내한 집사와 티타임 준비와 시중을 위해 와 있던 하녀들 등 사용인들마저 방문객을 흘끔거리고 자기들끼리 몰래 수군거렸다.
이쯤 되니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내 계획을 위해 그를 구경거리로 만든 것 같아서.
“이분들과 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 다른 사람들은 모두 물러가도 좋아.”
나는 일부러 사용인들을 물렸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하말린어로 인사했다.
“뿌 모름 라이아 에슈(먼 길 와 줘서 고마워요).”
생각지 못한 인사에 두 사람의 눈이 커졌다. 남자 쪽이 나서서 말했다.
“부인께서 하말린어를 아실 줄은 몰랐습니다. 우선 인사드리지요. 저희는 부부 심령사입니다. 저는 뷰글라스, 이쪽은 제 아내 시아입니다. 시아는 하말린 출신인데, 혹시 알아보신 겁니까?”
한눈에도 딱 사기꾼처럼 생긴 뷰글라스가 사기꾼 같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다시 만난 두 사람이 너무나 반가워 와락 끌어안고 싶었지만, 나는 감정을 꾹 누르며 말했다.
“두 사람은 심령사이니 영혼이라든지 사후 세계에 대해 익숙한 만큼,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보다 잘 이해해 줄 것 같았어요.”
“아무래도 영혼의 문이 좀 더 열려 있는 편이지요.”
뷰글라스가 얇은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역시 웃으면 더 비열해 보인다니까. 불쌍해.
“사실 우리는 이미 만난 적이 있어요.”
“…….”
“희귀한 경험도 함께했죠.”
“지금보다 더, 희귀한 경험이었습니까?”
“음, 내 이야기를 듣고 직접 한번 판단해 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