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아직 시작도 안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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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아직 시작도 안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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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아직 시작도 안 했어
2022.08.12.
“한눈에 봐도 사기꾼이더란 말이지? 그자들을 저택에 들인 이유는?”
보좌관인 레이놀 백작에게 보고를 받은 카를슈테인 공작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세상물정 모르는 공작부인이 사기꾼에게 걸린 것 같아 걱정돼서 보고했더니, 웃어?
공작이 의외의 반응을 보였지만, 레이놀은 내색하지 않고 묻는 말에 대답했다.
“그들은 심령사라고 합니다. 아무래도 부인께서 영매술이나 주술 같은 데 관심이 있어 부르신 게 아니겠습니까. 귀부인들 사이에선 흔한 일입니다.”
귀족 부인들이 심령사를 불러 답답한 일을 상의하거나 해법을 묻는 일은 종종 있었다. 아마 공작부인도 답답한 심사를 털어놓고 싶었겠지.
공작의 외도와 곧 닥쳐올 일들을 알고 있는 레이놀은 그와 같이 짐작했다. 즉 공작부인은 그런 자들이 이용해 먹기 딱 좋은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 여자는 참,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군. 백작, 내가 그자들을 좀 만나 봐야겠다. 물론 로제트는 모르게 말이야.”
“예?”
“자네 말대로 그자들이 사기꾼이면 곤란하잖은가. 게다가 아젤리아와 태중의 아이에게 해코지라도 하면? 아무리 시답잖은 주술이라도 찜찜하지. 카를슈테인의 미래가 달린 일인데.”
이제야 공작이 자신의 우려를 받아들인 것 같아 레이놀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의 입가에 여전히 감도는 미소가 그야말로 찜찜했지만.
‘잘하면 생각보다 수월하게 로제트를 떼어 낼 수 있겠어.’
공작부인 자리보다 훨씬 더 좋은 게 있다는 걸 로제트에게 알려 줄 은인들이 나타났으니.
프러너스는 굴러들어 온 사기꾼들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 *
“공작이 당신을 따로 불러 그렇게 지시하더란 말이죠?”
“예, 이혼 쪽으로 마음이 움직이도록 바람을 잡으라고 하더군요. 레이디의 예상대로요.”
프러너스에게 은밀히 불려 갔던 뷰글라스가 내게 보고했다.
“흠, 위자료는 어느 정도로 생각하고 있던가요?”
“구체적으로 언급하진 않았지만, 부르는 만큼 줄 수 있으니 저더러 걱정 말고 마음껏 부추기라고는 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웃음으로 적당히 화답해 주었습니다.”
“웃음으로? 아주 잘했어요.”
확실한 사기꾼 인상을 남겼겠네. 믿지 못할 인상으로 확실한 믿음을 샀다는 것이 좀 아이러니한 상황이지만.
물론 내가 뷰글라스의 생김새를 사알짝 이용했다는 건 차마 털어놓기 힘들었다.
이번 생에 다시 뷰글라스와 시아를 만난 나는 지난 생에 있었던 일들을 하말린어로 얘기해 주었다.
이 부부도 처음엔 반신반의했지만, 내가 두 사람의 결혼 스토리라든가 하말린의 나비 계곡에 대해 말하자 내 말을 믿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나와 진의 이야기도 들려주었고, 두 사람에게 간절하게 부탁했다.
우선 공작과 깔끔하게 이혼하고 이 공작저를 떠나야 하는데, 그러자면 두 사람의 도움 없이는 안 된다고.
특히 시아의 강력한 주장으로 부부는 나를 돕기로 했다. 우리는 매일같이 온실에서 티타임을 가지며 뭔가 속이고 속는 척했다.
시아에게 그동안 배우고 싶었던 마법진 그리는 법도 배우며 프러너스가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사흘 만에 입질이 왔다. 뷰글라스가 그와 막 만나고 온 터였다.
내가 프러너스를 한껏 진저리나게 만들어 뒀으니, 지금쯤 그는 이혼하고 싶어 환장할 노릇이겠지. 하지만 내가 이혼만은 안 된다고 막무가내로 매달리니, 마침 등장한 사기꾼들을 이용해 나를 돈으로 꾀려는 것.
위자료가 탐이 나 이혼을 수락하도록 유도하라고, 심지어 내가 받은 위자료를 두 사람이 등쳐먹어도 눈감아 주겠다고 했단다. 저 공작 스끄가.
그래, 얼마든지 돈에 유혹당해 주지. 돈이나 많이 찾아 놔. 스케일 좀 크게 갈 거니까.
아무리 큰돈을 불러도 수락하도록, 협상 전에 좀 더 지긋지긋하게 만들어 줄까? 프러너스, 네가 싫어하는 거라면 수만 가지는 알고 있으니까.
의심 많은 프러너스가 제 손으로 이혼 서류에 기쁘게 서명하고, 위자료도 못 안겨 줘서 안달하게 만드는 것이 이번 18회차의 내 계획이다.
* * *
“좀 더 애를 먹을 줄 알았습니다만. 공작부인께서 갑자기 마음을 바꾸시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레이놀이 이혼 서류를 한 번 더 꼼꼼히 살펴보며 말했다. 이제 위자료 조건과 서명만 기입하면 법적으로 완벽한 증서가 될 터였다.
가능하면 오늘 중으로 서류를 마무리하고 신전과 법원에 등록까지 마칠 계획이었다. 감정적인 공작부인이 갑자기 마음을 바꾸기 전에 빠르게 일을 처리할 심산이었다.
“우매한 여자가 어디서 무슨 소릴 들었는지, 위자료가 탐이 난 모양이더군. 어디 투자하고 싶다나. 사기꾼들이 들락거리더니, 그자들이 기름칠을 아주 잘한 모양이야.”
공작이 조소 띤 얼굴로 말했다. 하여간 이혼에 관해 이야기할 땐 어떤 식으로든 공작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고, 레이놀은 생각했다.
“저, 위자료는 어느 정도까지 허용하실 생각이십니까? 이 부분은 협의가 좀 더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웬만하면 로제트의 요청대로 수락할 생각이야. 전 공작부인에게 그 정도 예우는 해 줘야 카를슈테인의 면이 서지.”
그 여자 얼굴만 안 보고 목소리만 안 들을 수 있다면 그깟 위자료 얼마든지 주지. 제까짓 게 불러 봐야 얼마나 부르겠어.
겉으로는 로제트를 배려하는 척하며 속으로는 이렇게 진저리를 치는 카를슈테인 공작이었다.
“혹시 내가 늦었나요?”
드디어 약속 시각보다 10분 늦게 로제트가 나타났다.
“아니야, 준비된 서류부터 한번 읽어 보겠나?”
프러너스가 곧장 이혼 서류를 가리키며 물었다.
“뭐, 서류야 어련히 알아서 잘 준비하셨겠어요. 레이놀 백작이야 일처리가 확실하잖아요.”
“그럼 괜히 시간 끌지 말고 위자료 협의로 넘어가지. 얼마면 되겠어?”
“30퍼센트 줘요.”
“뭐?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는 아는 건가?”
“이상해요? 그럼 40퍼센트 줘요.”
프러너스가 인상을 팍 구기며 짜증을 한 번 삼켰다.
“로제트, 자신이 말한 숫자가 무얼 의미하는 건지는 아나?”
“응? 그걸 알아야 하는 건가요? 나야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좋은 거잖아요.”
정답이네. 옆에 서 있던 레이놀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다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권유했다.
“부인, 그간의 관례를 보면 위자료는 역대 최고액도 20퍼센트를 넘은 적이 거의 없습니다.”
“제국법에 그렇게 정해져 있나요?”
“예? 그건…….”
제국법에는 액수 제한이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로제트는 그 빌어먹을 제국법의 덕을 볼 때가 다 있구나 싶어 쓴웃음을 지었다.
“뭐, 좋아요. 곤란하신 것 같으니 25퍼센트 정도로 낮춰 보죠. 더 이상은 양보하기 힘들어요. 공작부인으로 살던 때와 비슷한 생활 수준을 유지하려면 그 이상은 필요하다고 봐요. 갑자기 초라하게 살 순 없잖아요. 그러면 카를슈테인의 이미지에도 좋지 않죠.”
로제트의 설명에 프러너스가 직접 제시했다.
“20퍼센트.”
로제트는 탐탁지 않은 듯 대답을 미루다 이렇게 흥정했다.
“그럼 20퍼센트로 하고, 대신 가문의 소유지라도 줘요.”
“좋아. 어디로 하고 싶은지 골라 봐.”
고민하는 듯한 얼굴이던 로제트는 마침내 지명 하나를 말했다.
“에인절스 딤플이요.”
“뭐?”
멍청한 여자가 뭘 알고 그곳을 골랐을 리는 없는데? 프러너스는 일이 번거롭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로제트가 다른 곳을 고르도록 유도했다.
“거긴 폐광이야. 좀 더 돈이 되는 다른 곳을 골라 봐.”
프러너스가 로제트를 생각해 주는 척하며 말했다.
“다른 델 고르는 것도 귀찮고, 어차피 거기 이름이 예뻐서 고른 걸요. 버섯이나 심을까 하고요. 폐광에서 버섯이 잘 자란대요.”
“아니, 다른 델 골라. 카를슈테인의 체면이 서는 곳으로. 좋아, 다른 곳을 고른다면 세 곳을 주지.”
어지간히 마음이 급한가 보네, 로제트는 속으로 웃었다. 그리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미적거리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세 곳을 골랐다.
“그럼 레미오, 다이아몬드 힐, 나프탄으로 할게요.”
모두 제도에서 먼 구석진 지역이거나 퇴락한 곳이라, 프러너스는 잠시 고민하는 척하다 로제트의 요구를 모두 수락했다.
레미오에선 반년 후에 질 좋은 페트룸이 발견된다. 무분별한 채굴로 이미 전 영토에 걸쳐 페트룸이 고갈되다시피 한 제국에서 매우 특이한 사례였다. 그곳에서 나는 페트룸은 부르는 게 값이란 얘기.
다이아몬드 힐은 소규모 다이아몬드 광산이 있던 곳으로, 워낙 매장량이 적어 금세 폐광이 되었다.
하지만 일 년 후, 과거 발견됐던 다이아몬드는 빙산의 일각이었음이 밝혀진다. 열 배가 넘는 다이아몬드가 다른 지점에 매장돼 있었던 것.
나프탄은 농사가 잘 안 되는 황무지가 많은 지역이었다. 개발할 여지는 있었지만, 아직은 버려지다시피 한 땅. 일곱 달 후에 이곳에 운석이 무더기로 떨어진다.
이 운석 조각을 얻기 위해 전 세계 국가들이 돈을 짊어지고 와 줄을 서게 된다.
이 모든 걸 돈으로 환산하면, 사실 로제트는 위자료로 카를슈테인 가문이 소유한 재산의 20퍼센트가 아니라 50퍼센트 이상을 가져가는 셈이었다.
이혼 조건과 위자료 조건이 명시되고, 각각의 서명과 가문의 인장이 날인된 이혼 서류 4통이 작성되었다. 이제 이 서류들이 법원과 신전에서 날인을 받고 등록되면 이혼 확정.
프러너스는 자신의 권력을 십분 휘둘러 이 절차들이 초고속으로 진행되도록 압력을 넣을 것이다.
* * *
마침내 나는 네 개의 날인과 서명이 박힌 완벽한 이혼 서류를 손에 넣었다. 복잡한 감정들이 끝없이 밀려왔다.
‘진작 똑똑하게 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난 생을 헛되이 낭비한 것을 후회하다, 문득 이렇게 스스로를 위로했다.
‘아니야. 그런 어리석은 과정이 있었으니 소중한 인연들을 새로 만들고, 무엇보다 진과 만날 수 있었겠지.’
진은 한심하고 모자란 나를 있는 그대로 좋아해 주었으니까.
그런 나를 좋아해 준 진이라서, 그런 진을 나도 좋아하게 된 것이겠지.
나는 지체하지 않고 이혼과 재산 관리에 관한 모든 법률적 처리를 마무리한 후 공작저를 나섰다.
지난 17회차와는 완전히 다른 감회를 안고 이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17회차였다면 프러너스와 성공적으로 이혼한 것만으로 만족했을 것이고, 그와는 다시 볼 일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이혼만으로 만족할 수 없게 됐다. 프러너스와의 볼일이 아직 남아 있었다.
프러너스, 잘 살아남아 보도록 해. 물론 그 누구보다 알아서 잘하겠지만. 나도 최선을 다할 거야.
나는 아침 일찍 간단히 짐을 챙겨서 공작저를 나섰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공작저를 돌아보았다. 이곳은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변하게 될까. 아마 이곳도 무사하기는 힘들 것이다.
역으로 가는 마차 안에서 비로소 내가 새로운 삶에 발을 내디뎠다는 실감이 났다.
이제 곧 진과 만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기쁘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뷰글라스와 시아에게는 토버마리의 플럼 하우스로 먼저 가 달라고 부탁했다. 혹시 미고가 다시 찾아와 줄까 싶어서.
만약 미고가 없더라도 그 집을 찾아오는 영혼이 있거든 잘 대접해 달라고 부탁했다. 집사 프랭클린에게 두 사람을 잘 맞아 달라는 편지도 썼다.
마차가 제도의 기차역에 도착했다. 나는 이곳에서 기차를 타고 그리치로 갈 것이다.
이번엔 날짜도 다르고, 타야 할 기차를 헷갈리지도 않을 테니 근육질 선반 귀신을 만날 일은 없겠지.
역사로 들어서니 수많은 눈이 재빨리 움직였다.
그렇다. 이곳은 가십지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는 곳, 그야말로 뱀의 아가리 속으로 제 발로 들어온 것이다.
그걸 알면 피해 갔어야지, 왜 또 이곳으로 왔느냐고?
피하긴 왜 피하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제대로 온 것이 맞았다. 이번엔 이 독사들을 알뜰하게 이용해 먹을 계획이니까.
“각 신문사에서 나온 기자 여러분?”
나는 목청을 돋운 뒤 역사 한가운데서 소리쳤다.
“내게 궁금한 것들이 많죠? 지금부터 나, 로제트 앰브로시아가 기자 회견을 열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