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화. 기억은 사라져도 마음은 남아 (76/110)


#76화. 기억은 사라져도 마음은 남아
2022.08.22.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나는 주먹으로 진의 가슴을 꽝꽝 치면서 목 놓아 울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나중엔 때릴 힘도 없어서 진의 가슴을 쥐어뜯으며 흐느꼈다.

말없이 내 주먹을 받아내던 진이 그제야 기진맥진한 나를 감싸 안았다.


‘기억도 못 하면서 품 안은 왜 이렇게 따뜻한 건데.’

새로운 눈물이 눈가로 차올랐다. 눈물은 참 끝도 없이 나왔다.

하말린 전설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여인이 흘린 눈물이 모여 커다란 호수가 되었다는.

그 이야기가 결코 상징이나 은유가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는 걸 지금에야 깨달았다.

사람은 원래 호수 하나는 만들 수 있을 만큼의 눈물을 품고 있구나. 나 역시 내 눈물로 호수 하나는 너끈히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바다로 하고 싶다.

머리로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번 생의 진은 지난 생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번 생의 진에게 나는 당연히 처음 본 낯선 여자일 뿐이라는 걸.

그럼에도 나는 헛된 바람을 품었다. 그 모든 자연법칙과 신의 섭리를 뒤엎고 진이 나를 한눈에 알아볼 것이라고.

진과 내가 나눈 깊은 교감과 사랑이라면 모든 것을 뛰어넘을 수 있으리라고. 무모한 기대는 점차 확신이 되었고, 확신했던 만큼 나는 절망했다.

내가 사랑했고 나를 사랑했던 진은, 결국 영원히 사라져 버린 걸까. 아무리 삶을 되돌려도 그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걸까.


“미안.”

진이 느닷없이 사과했다.


“뭐가 미안한데?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잖아.”

나는 너무 울어서 작아진 눈으로 진을 째려보며 물었다.


“그냥, 당신 얼굴 보니까 미안하다고 말해야 할 것 같아.”

저런 말을 하는 걸 보면 내가 사랑했던 진이 맞는데!


“당신이…… 로제트?”

진이 조심스레 묻는 말에 내 심장이 또 한 번 곤두박질쳤다. 그러고 보니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여기 플럼 하우스에 와 있는 거지?

내가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진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저 미간도 분명 내가 사랑했던 그 미간인데!


“당신도 그런 것 같지만, 나도 사실 꽤 혼란스러워. 내가 여기 오게 된 건…… 오늘 새벽에 소녀 유령이 나를 찾아왔기 때문이거든. 나도 궁금한 게 많아. 일단은 내가 제정신인지부터 알고 싶고.”

소녀 유령이라면 미고? 미고가 진을 찾아간 걸까!

지난 생에 미고가 진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언젠가 자기가 한 번 더 진을 찾아갈 텐데, 그때 자기 말을 믿어 달라는 거였지.


“그 소녀 유령, 나도 아는 유령이니까 마음 놓고 얘기해 봐요. 그 아이가 뭐라고 했는데?”

“적어도 나만 미친 건 아닌 것 같아 안심이군. 그 아인 뭔가 간절히 말하고 싶어 했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 같았어. 그래서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거리다 손가락으로 내 손바닥에 쓰기 시작했지.”

아, 맞다. 산 사람은 영혼의 말을 들을 수 없었지. 그래서 뷰글라스 같은 영매의 입을 통해 영혼의 말을 전해 들어야 했던 것이고.


“뭐라고 썼어?”

“토버마리, 플럼 하우스, 가라, 급해, 로제트, 믿어, 연인, 키스해.”

하여간 그놈의 ‘키스해’는. 키스는커녕 네 형부는 나와 널 기억도 못 한다고!


“다 쓰고 나서 올리브색 눈동자로 나를 어찌나 간절히 바라보던지, 이곳에 오지 않을 수 없었지.”

진은 새삼 나를 찬찬히 뜯어보더니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 소녀랑 당신, 꼭 닮았는데? 눈동자 색이랑 머리카락 색도 같고, 생김새도 판박이군.”

진은 지난 생에 이어 이번 생에도 우리 둘 모두를 분노케 할 말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다시 말하지만, 미고와 나는 서로 자신이 더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아인 열세 살에 일찍 먼 곳으로 떠난 내 동생 미고.”

“그랬군. 미고의 그 간절한 눈빛 때문에 토버마리의 플럼 하우스를 찾아 급히 이곳으로 왔고, 아마도 로제트일 당신을 막 만난 참이지. 그 후로는 미고의 말과는 달리 키스가 아니라 구타였지만.”

어깨를 으쓱한 진은 내 눈치를 살피는 듯하더니, 미간을 잔뜩 좁히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미고가 또 쓰기를……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있다고. 그게 무슨 말인지 궁금해. 당신이 설명해 줄 수 있어?”

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시 흐느꼈다.


‘왜 당신은 늘 기억하지 못하는 건데? 왜, 왜?’

따지고 보면 이번 생에도 우리는 지금 말고 이미 오래전에 만난 적이 있었다. 어린 시절, 황궁 후원의 호숫가에서.

진짜 쿠키 소녀도 알아보지 못하고, 오직 당신을 만나기 위해 삶을 되돌아온 아내도 알아보지 못하고. 왜 아무것도 알아보지 못하는 건데!

진의 잘못이 아닌 걸 알면서도 또 울컥 치밀어 올라서, 나는 진의 단단한 팔뚝을 다시 주먹으로 팍팍 때렸다.


“때려. 이걸로 당신 마음이 풀릴 것 같으면 얼마든지 때려.”

진이 덤덤하게 말했다. 사실 근육질이라 때리는 내 손이 더 아팠다.


“그래? 그렇담 기왕이면 따귀를 때려도 될까?”

“뭐? 왜 하필 모양 빠지게 따귀야?”

“시원하게 따귀를 맞으면 뭔가 중요한 게 기억날지도 모르잖아.”

나한테 따귀를 세게 얻어맞은 일이 진의 전생을 통틀어 꽤 충격적인 사건이었을 테니, 혹시 이번에도 따귀를 맞으면 뭔가 각성하지 않을까, 하는 미신적인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진은 미간을 잔뜩 좁힌 채 거부하는 눈치더니, 잠시 후 슬그머니 내 쪽으로 자신의 뺨을 디밀었다. 이를 악문 채.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번엔 눈물과 웃음이 동시에 나왔다.

진, 당신이 나를 알아볼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겠어!

아무리 기다려도 내가 따귀를 날리지 않자 진이 고개를 바로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기억은 없어도 마음이 남을 수 있는 걸까?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어.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마음에 밟힌달까.”

진의 말에 나는 또다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상하기는커녕 오롯이 이해가 가는 말이었다.


“이곳만 해도 난생처음 와 보는 곳인데, 저 저택과 정원을 바라보고 있으면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프지?”

기억은 없지만 마음이 남았다니……. 나만 괴로운 것이 아니었다. 진의 영혼도 홀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래, 진이 나를 기억하지 못해도 그가 나를 사랑했던 마음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야. 내가 그의 기억을 놓지 않는 한.’

울 만큼 울고, 투정 부릴 만큼 부린 나는 눈물로 호수를 만드는 것 대신 다른 일을 서두르기로 했다. 내가 18회차로 넘어온 건 분명한 목적이 있어서였으니까.


“진, 당신이 한 말보다 훨씬 더 이상한 말을 지금부터 내가 할 거야. 하지만 미고가 당신에게 당부했듯이 나, 로제트의 말을 믿으려고 노력해 줘.”

 

 
나는 진과 함께 다시 돌아온 플럼 하우스에 발을 들여놓았다.

지난 17회차 때 나와 진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던 모습과는 달리, 18회차의 플럼 하우스는 저택 건물과 정원 모두 정성스럽게 관리돼 있었다.

이 단정한 풍경을 보고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나는 헷갈렸다.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실했다.


‘이번엔 미고가 여기 오지 않았구나.’

쓸쓸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 *

집사 프랭클린과 요리사 한스, 하녀장 마델 등 반가운 얼굴을 비롯한 사용인들이 나와 진을 따뜻한 미소로 맞아 주었다.

먼저 이곳에 와 있던 뷰글라스와 시아 부부도 나를 반갑게 맞았다. 그들은 내게 슬쩍 귀띔했다. 이 집에서 아직까지는 떠도는 영혼을 만나지 못했다고.

이렇듯 17회차 때와는 조금씩 달라져 있었지만, 그때와 같은 것도 있었다.

식사를 앞에 두고 진과 요리사 한스가 벌이는 신경전은 변함이 없었다.

진은 어김없이 품에서 은 스푼을 꺼내 정성껏 차려 놓은 음식들을 인정사정없이 헤집었고, 진의 만행에 한스는 또 얼굴이 벌게진 채 부들부들 떨어야 했다.

하녀장 마델이 조용히 한스의 팔을 잡으며 말리고, 집사 프랭클린이 한 발짝 뒤에서 왠지 고소해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까지는 같았다.

한바탕 요란하게 저녁 식사까지 마친 후, 나는 마침내 응접실에서 진과 마주 앉았다.

그리고 길고 긴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진과 황제의 출생에 얽힌 비밀. 황위 계승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음모와 암투. 황태자 바꿔치기에 가담한 세 귀족 가문. 그 가문들이 얻은 대가와 곧 닥칠 그들의 미래.

황제와 카를슈테인 공작이 꾸미고 있는 무시무시한 흉계. 정령의 돌과 마수의 부활. 그로 인해 제국은 물론, 하말린 왕국과 왕세자에게 미칠 비극.

어린 시절, 자두 쿠키를 가져다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이유까지, 나는 차분하게 모두 설명했다.

그리고 믿기 힘들겠지만, 내가 이 모든 걸 아는 이유는 삶을 되돌아왔기 때문이라는 것까지 털어놓았다.

진은 시종일관 무표정하게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아무런 감흥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마 어떤 표정을 짓기도 힘들 만큼 듣기에 벅찬 이야기였을 것이다.

이야기를 마친 나는 준비해 온 회심의 한 방, 로안나 선황후의 초상화를 진에게 건넸다.

무표정하던 진의 얼굴이 마침내 허물어졌다.

진은 건네받은 초상화를 손에 든 채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형언하기 힘든 감정의 파도가 그의 얼굴에 솟았다 가라앉았다 하며 물결쳤다.


“어머니, 내 어머니는 이렇게 생긴 분이셨구나.”

“당신이 그분을 너무 닮아서, 누가 봐도 모자 사이란 걸 금세 알 수 있어.”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로 다시 초상화를 들여다보던 진이 문득 내게 말했다.


“고마워, 로제트.”

이 순간만은 나도 여한 없이 기뻤다.


“그래, 그 인사는 내가 사양하지 않고 기꺼이 받을게.”

진이 어머니와 만난 기쁨을 만끽할 수 있도록 충분히 기다린 나는, 이제 진을 향해 조심스레 운을 뗐다.


“진,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야? 그러니까, 황위를 되찾는 일 말이야.”

“황위 따윈 관심 없는데?”

“당신은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지난 생에도 똑같은 선택을 했고. 당신의 마음이 어떤 건지 알 것 같아서 나도 당신의 선택을 지지했지.”

“그런데 이번엔 지지하지 않을 생각이군?”

“그래. 누구에게나 감당해야 할 운명의 몫이 있다는 걸 깨달았거든.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고, 피해서도 안 될 잔인한 운명.”

이 말에 미간을 좁힌 채 생각에 잠겼던 진이 물었다.


“내가 운명을 피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지?”

“당신 자신을 잃게 되는 건 물론, 당신이 사랑한 모든 것들을 지킬 수 없게 돼.”

“운명이란 녀석, 잔인한 놈이 맞군.”

“당신이 자신의 운명을 모른 척하면 제국민은 황제의 폭정과 마수의 공격으로 고통의 지옥 속으로 떨어지고, 당신이 사랑하는 하말린과 그곳 사람들도 전쟁의 화염에 휩싸이게 돼.”

“당신도 운명 못지않게 잔인하네.”

미안해, 진. 잔인해지는 게 이번 생의 내 운명이거든.


“진, 당신이 사랑하고 지키고 싶은 것들이 있다면, 그들을 위해서라도 운명을 외면하지 마.”

자기 자신의 희생은 감내해도,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이 희생되는 건 두고 보지 않을 진이기에, 나는 일부러 이런 말로 일격을 날렸다.

일격이 제대로 먹혔는지, 진은 또다시 미간을 좁힌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이제 운명을 받아들일 결심이 섰겠지?

그런데 한참 뒤 그의 입에서 나온 건 뜻밖의 질문이었다.


“혹시, 내가 지난 생에 당신을 지키지 못했나?”

“…….”

“내가 가장 궁금하게 여기는 점에 대해서는 아직 설명을 듣지 못한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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