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화. 그것참, 위험한 녀석 (80/110)


#80화. 그것참, 위험한 녀석
2022.09.05.



 
쿠엔티노, 그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내였다.

그리치 뒷골목에서 태어나 자랐고, 그곳의 다른 아이들처럼 자연스럽게 뒷골목의 승냥이가 되었다.

남다른 비정함을 인정받은 그는 그리치의 3대 정보 길드로 꼽히는 스콜피온스에 해결사로 발탁되었다.

또래보다 이른 나이였고, 나름 실력도 좋아 그 바닥에서 순조롭게 자리를 잡아 가는 듯했다.

쿠엔티노의 목표는 돈, 오직 돈이었다.

어차피 제국에서 귀족의 푸른 피를 타고나지 못했다면, 기댈 것은 돈밖에 없었다. 원한다면 돈으로 신분도 살 수 있는 세상이니.

하지만 쿠엔티노는 돈을 긁어모은 뒤 망할 제국을 뜰 생각이었기에 신분 세탁 같은 건 안중에 없었다. 한 번 떠난 후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작정이기에, 그는 더욱 무자비하고 잔인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일생일대의 위기에 직면하고 말았다.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것만이 아니라 그의 목숨까지도 앗아갈 수 있는 무시무시한 덫이 그의 눈앞에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위험한 사랑. 쿠엔티노는 사랑에 빠졌다.

그는 결코 사랑해서는 안 될 여인을 사랑하게 되었다.

자신 같은 뒷골목 잡배가 귀부인에게 연정을 품다니. 더욱이 의뢰인이 감시를 명한 대상을. 스스로 생각해도 미친 짓이었고, 해결사로서도 실격이었다.

게다가 그 의뢰인이 보통 의뢰인인가.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제국 최고의 권세가, 카를슈테인 공작이 아닌가.

공작은 그가 속한 조직인 스콜피온스의 가장 중요한 고객이기도 했다. 그런 만큼 조직에선 가장 치밀하고 실력 있는 해결사 중 하나인 쿠엔티노를 특별히 이 일에 배정한 것이었다.

이렇듯 종착지가 파멸밖에 없는 사랑임을 알면서도 그는 멈출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의 마음에 조금씩 젖어 들었다.

처음엔 쿠엔티노도 그녀를 따분한 귀족 부인이겠거니 생각했다. 듣기로 공작이 바람이 나 이혼을 당했다지 않은가.

귀족들의 결혼은 어차피 이익을 위한 정략결혼이라는데, 얼마나 매력이 없고 뻣뻣한 여자면 불륜녀에게 공작부인 자리를 빼앗기겠는가 말이다.

그는 화려한 보석과 귀한 옷감으로 치장했지만 덕장에 널린 생선처럼 생기 하나 없이 뒤틀어진 귀족 부인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하루하루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보고하면서, 잘못된 건 그녀가 아니라 공작, 아니 자기 자신이라는 걸 쿠엔티노는 알게 되었다.


‘더러운 놈.’

제국 최고의 권세가는 개뿔. 공작 그놈이 돼먹지 못한 놈이었다.

애초에 제가 바람나서 이혼까지 해 놓고, 이미 남이 된 여자한테 왜 감시까지 붙이냔 말이지.

물론 지금껏 쿠엔티노가 해 온 일이 대개 그처럼 어이없는 일들이기는 했다. 원래 해결사는 의뢰의 도덕성이나 합리성을 따지지 않는 법. 자신들의 존재 자체가 부도덕하고 불합리한 것을.

하지만, 그래도, 감시 대상이 저렇게 사랑스러울 수는 없는 일이잖아?

쿠엔티노는 자신의 뺨을 스스로 후려쳤다. 미친 새끼, 사랑? 사랑스러워?

그녀는 오늘도 정원에 나와 하늘거리는 풀꽃과 어린 딸기에게 인사를 건네고, 새로 발견한 버섯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다. 가끔 귀여운 입술로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했다.

왜 버섯이나 풀꽃 따위에게 이름을 지어 주는 걸까. 왜 그것들에게 햇살 같은 미소를 보내는 걸까.

그녀가 내게도 이름을 지어 준다면, 내게도 미소를 건네준다면…….

이게 돌았나? 더러운 놈은 공작이 아니라 네놈이다, 쿠엔티노!

이렇게 쿠엔티노는 자신이 두 개로 분열되는 희한한 경험을 했다. 오로지 돈을 좇아 한 길을 달려온 그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오후가 되자 그녀는 야외 테이블에서 차를 마셨다. 함께 차를 마시는 상대는 하녀인 듯 보이는 과묵한 여자밖에 없었다.

특이하게도 그녀는 케이크나 푸딩, 쿠키를 먹을 때마다 허공에 윙크를 하곤 했다.

한번은 이상하게도 감시 중에 눈이 마주친 듯한 느낌이 들었고, 순간 그녀의 윙크가 화살처럼 날아와 쿠엔티노의 심장에 박혔다.

그 화살은 치명적이었다. 쿠엔티노는 심장을 움켜쥐었다.

제국 최고의 세도가이자 최고로 찌질한 작자인 공작의 전 부인, 감시를 의뢰받은 대상, 자신과는 사는 세상이 다른 귀부인, 햇살처럼 환하고 봄꽃처럼 아름다운 그녀를.


‘지저분한 뒷골목의 더러운 날파리인 내가 사랑한다!’

쿠엔티노는 바닥을 알 수 없는 심연으로 발을 들이고 말았다. 이토록 파괴적인 감정이라니.

그녀는 늘 똑같은 집에서 평소처럼 정원을 관찰하고 심심한 티타임을 가졌지만, 쿠엔티노는 남보다 예리한 해결사의 감각으로, 그리고 사랑의 힘으로 매일 매 순간 다른 그녀를 알아챌 수 있었다.

그녀가 흥얼거리던 노래가 개구리에 관한 것임을 알게 되자 개구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문득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쓸쓸한 미소를 보고 가슴이 무너졌다.

오늘은 독버섯 세 개에 이름을 붙여 주었고, 희고 조그만 손을 움직여 그것들을 그리기까지 했다. 우리 레이디는 그림도 잘 그렸다.

그렇게 어제와는 완전히 다른 그녀를 관찰한 쿠엔티노는 다음과 같이 써서 탈라리아 메신저로 조직에 보고했다.


‘평소와 다름없이 저택에 머무름. 오전 정원 산책, 오후 티타임. 일과에 변동 없음. 방문객 없음. 특이사항 없음.’

 

* * *



“시아, 뷰글라스, 좀 쑤시지 않아요?”

원래 그들이 돌보려 했던 소녀 유령들이 플럼 하우스에 그림자도 얼씬하지 않자, 소일거리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심령사 부부. 그들에게 로제트와 진이 께름칙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놀면 뭐 해요. 재능이 아깝잖아요?”

두 사람, 악당 같은 웃음이 어느새 닮아 있었다.

분명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이라고 했는데. 시아와 뷰글라스는 로제트와 진을 수상하게 바라보았다.

악당 커플이 사기꾼처럼 생긴 커플에게 부탁한 것은 진짜 로제트가 그리치에 간 사이 토버마리에서 가짜 로제트 행세를 해 달라는 것.


“카를슈테인 공작이 로제트에게 감시를 붙였거든.”

시아와 뷰글라스의 의문 어린 시선에 진이 답변했다. 공작이라면 이미 한 번 속인 적 있는 비열한 귀족 나리.

공작이 붙인 감시자에게 로제트가 토버마리의 컨트리 하우스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여야 한다는 설명이었다.

그저 정원에서 얌전히 화초를 돌보고 티타임을 갖는 등 딱히 눈에 띌 것 없는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듯 비쳐야 한다는 것.

그사이에 진짜 로제트는 몰래 그리치로 가서 중요한 일을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 즉 감시자와 공작을 안심시키고 시간을 벌 눈속임이 필요하다는 얘기.


“돌볼 유령이 없으니 직접 유령이 되란 말씀이시군요. 그런데 어떻게……?”

“마침 두 사람의 특기에 꼭 맞는 일이지 뭐예요.”

“저희 둘의 특기요? 이미 파악하고 계시군요.”

“시아는 퇴마사이자 뛰어난 버섯 헌터고, 뷰글라스 당신은 영매사이자 뛰어난 연기자고 성대모사의 달인이잖아요, 후후.”

칭찬은 고맙습니다만, 왜 자꾸 불길하게 악당같이 웃으시죠, 레이디?


“시아, 환각을 보여 주는 버섯을 잘 알고 있겠죠?”

로제트가 이번엔 하말린어로 물었다.


“물론이죠, 레이디. 환각 버섯을 이용할 계획이시군요.”

“그런데 환각 버섯을 이용하면 보여 주고 싶은 환각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는 게 사실인가요?”

“맞습니다. 실력 있는 버섯 헌터의 주술이 있어야 하지만요.”

“그렇다면 걱정 없겠네요. 당신은 내가 아는 가장 뛰어난 버섯 헌터니까.”

환각 버섯, 이 독버섯을 먹은 사람이 환각에 빠지게 된다는 건 세간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런데 버섯을 잘 다루는 버섯 헌터나 정령사의 손을 거치면 그 환각의 방향을 바꿀 수 있었다. 버섯을 먹은 사람이 보여 주고 싶은 환각을 불러 낼 수 있는 것.

예를 들어 환각 버섯을 먹은 사람이 로제트로 보이기를 원하면, 다른 사람들은 그가 로제트로 보였다.

다만 말 그대로 환각에만 국한된 것이기에, 소리까지 바꿀 수 없다는 한계는 있었다.


“그럼, 누가 버섯을 먹을지는 결정 났군요.”

“그렇습니까? 저는 잘 모르겠는데…….”

로제트의 말에 뷰글라스는 불안한 눈빛으로 발뺌해 보았지만, 모두의 눈이 자신에게 무언의 압박을 가하고 있는 현실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지난 생에 열세 살 소녀의 목소리도 똑같이 재현해 냈으니, 내 목소리 연기쯤은 식은 죽 먹기겠죠?”

그렇게 가짜 로제트 역할이 뷰글라스에게 떨어졌다. 시아는 환각 버섯의 이능을 조종하면서 로제트의 하녀 역할을 맡기로 했다.


‘뭐, 하기로 마음먹으면야 또 완벽하게 해내지.’

뷰글라스는 피할 수 없으면 즐기자고, 인생 역작 한번 만들어 보자고 의욕을 다졌다.

.
.
.



“시아, 저 청년 날 보는 눈이 이상하지 않아요?”

“레이디, 목소리 낮추세요. 들키면 어쩌려고.”

오늘도 정원에서 산책하고 티타임을 가지는 등 평소대로 가짜 로제트 연기를 하던 뷰글라스가 하녀로 분장한 시아에게 속삭였다.


“감시하는 사람이 그럼 고운 눈으로 보겠어요?”

“그게 아니라…… 뭔가 기운이 끈적끈적한 게, 여하튼 이상야릇해요.”

“흠, 실은 나도 당신한테 쏟아지는 야릇한 시선을 느꼈어요. 설마…….”

“후후, 또 하나 빠져들었나? 나의 수렁 같은 매력에?”

“혼날 소리 말고 정신 똑바로 차려요. 엉뚱한 데서 들통 나면 큰일이니.”

“레이디 돌아오시려면 아직 멀었죠? 하긴 보통 사안이 아니니…….”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라도 재주를 보태야죠.”

“후, 저 감시인 청년의 눈빛이 웬만큼 뜨거워야 말이죠. 부담스러워라.”

 

 

* * *

가짜 로제트가 감시자를 현혹하는 동안, 나와 진은 야간 마차를 타고 그리치로 향하고 있었다.


“레이디 M 어때요? 레이디 머시룸의 줄임말.”

내가 새로운 신분의 별호를 고심하자 진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쳐다보다 좌석 시트에 몸을 깊숙이 묻고 눈을 감아 버렸다.


‘흥, 레이디 M을 무시해? 두고 보라지.’

나는 입을 불퉁하게 내밀고 자는 척하는 진을 쏘아보았다.

저렇게 눈을 감고 있으니 저 남자가 이번 생의 진인지, 지난 생의 내 남편 진인지 경계가 흐물흐물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아침마다 저 예쁜 모습을 실컷 봤는데……. 너무 쏘아봐서 투시력이라도 생긴 건지, 옷 안의 절경까지 선명하게 보이는 듯했다.

물러가라, 눈치 없는 음란마귀!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음란마귀가 사라지기는커녕 조금 더 가까이서 진을 샅샅이 보고픈 마음만 커져 갔다.


‘정말 잠들었나? 살짝 볼까?’

나는 살금살금 다가가 목을 죽 빼고 진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휴우, 예쁜 속눈썹이랑 잘난 이목구비는 어디 안 가네.

나의 진, 내 사랑 진……. 날 못 알아보고, 너무해. 잘생기면 다야? 응?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진의 앞머리를 손끝으로 살랑 건드리려는 순간, 커다란 손이 내 손목을 덥석 잡아 저지했다.

놀라서 흘끔 아래로 내려다보니 진의 눈동자가 이글거리며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맞다, 잘 때 건드리면 큰일 나지!

마차 창문 밖으로 날아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지난 생에 암살을 사주받아 진을 해치려다 괜히 설렁줄만 끊어 놓고 기차 밖으로 내던져진 그 이름 없는 살수처럼 말이다.

진은 내 손목을 꽉 쥔 채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나를 노려보기만 했다.

어쩌다 보니 자세가 좀 요상하게 된 것 같아 손목을 빼려고 버둥거리는데, 진이 잠꼬대 같은 소리를 했다.


“지금 여기서 당신한테 키스하면 어떻게 되지?”

낮게 가라앉은 잿빛 눈동자가 농담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당신한테 키스하면 많이 달라지나, 우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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