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나도 귀리 부인이 되었다
(94/110)
94화. 나도 귀리 부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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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화. 나도 귀리 부인이 되었다
2022.10.24.
“두 달 정도 거르긴 했지만, 원래도 워낙 불규칙하고 거를 때가 많았던지라. 그리고 나는…….”
왕실 주치의가 달거리를 묻는 뜻을 알아챈 나는 얼른 내 특수한 상황을 설명하려 했지만, 그는 기쁜 목소리로 내 말을 가로챘다.
“제 소견으로는 잉태하신 것이 확실합니다. 생명의 귀리가 되신 걸 경하드립니다, 레이디.”
“생명의 귀리……?”
“아, 저희 북부에서는 새 생명을 품은 여성을 그렇게 부릅니다. 북부에서 가장 소중한 곡식이 귀리거든요.”
혹독한 기후와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귀리는 이곳 북부의 주식이라고 했다. 북부인들은 귀리를 먹고 그 힘으로 살아가는 귀리의 자식들이었다.
“아기들이 가장 많이 먹는 음식도 부드러운 귀리죽과 귀리유입니다. 뽀얀 빛깔이 꼭 모유 같지요.”
귀리, 참 고마운 곡식인 건 알겠는데, 나는 귀리가 될 수 없었다.
이야기를 더 끌었다간 서로 민망해지기만 할 것 같아, 나는 분명히 밝히기로 했다.
“브라운 경의 실력을 의심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그럴 리는 없습니다.”
내가 너무 단호하게 말하자, 멈칫한 브라운이 당황한 얼굴로 내 말을 곱씹었다.
“그럴 리가 없다는 말씀은…… 그럴 만한 일이 없었다는…… 이런, 실례를 범했습니다, 레이디!”
브라운은 얼굴이 빨개진 채 고개를 숙였다.
음, 아무래도 설명이 많이 부족했던 것 같다. 그럴 만한 일이야 많았지요. 특히 북부로 떠나오기 직전엔 많아도 너무 많았습니다.
“아니에요, 브라운 경의 잘못이 아닙니다. 내게 특별한 사정이 있어요. 주술로 몸이 망가져서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거든요.”
카를슈테인 공작가가 내게 행한 흑마술과 그 부작용에 대해 브라운에게도 설명해 주었다.
내 사연에 귀를 기울이던 그는 한동안 고심하는 표정이더니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그동안 많이 힘드셨겠습니다. 그래서 말씀드리기 더욱 조심스럽습니다만, 20년 넘는 왕실 주치의 경험이 자꾸만 미련을 갖게 만드는군요. 허락하신다면 몇 가지 더 여쭙고 한 번 더 맥을 짚어 보고 싶습니다.”
브라운이 저렇게 나오니 나도 자꾸만 희망이 생기려 해 두려웠다. 어설픈 기대를 품었다 아니면 실망감이 클 테니까.
실은 지난 생에 몇 차례 상상 임신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프러너스는 조금도 기대를 비치지 않았는데, 당시엔 그저 아이를 갖고 싶지 않거나 내게 관심이 없어서라고만 생각했다.
내가 상상 임신을 하고 호들갑을 떨 때마다 프러너스는 얼마나 가소로웠을까. 내가 임신할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테니.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나 속이 쓰렸지만, 브라운의 눈빛이 너무 간절해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럼, 외람된 질문이지만, 우선 확인하고 싶은 점이…….”
내 허락을 얻은 브라운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듯이 조심스레 물었다.
“주술 외에 또 다른 장벽은 없으신 거지요? 그러니까…… 아이의 생물학적 아버지로 지목할 만한 분이 계신지…….”
딱 한 사람, 매우 의심 가는 사람이 있긴 하죠. 물론 아이가 있고 난 다음의 문제지만.
내가 고개를 까딱하자, 브라운은 그제야 안심했는지 한층 의욕적인 태도로 진찰하기 시작했다. 맥도 여러 군데 짚었다.
“레이디, 사람의 몸은 여러 이유로 다시 좋아지기도 합니다. 자연 치유력이라는 것도 있고요. 혹시 지금까지와는 다른, 생활의 변화가 있었는지 생각해 보시겠습니까? 아주 사소한 것도 좋습니다.”
몸이 좋아질 만한 변화라…….
나는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지난날뿐 아니라 지난 생과 다른 점까지 더듬어 보았다.
북부로 온 것? 질 좋은 마정석도 잔뜩 묻혀 있다니, 땅 기운이 유독 좋을지 모르잖아?
이동 마법 때문에 흑마술의 영향력이 줄어든 걸까? 독으로 독을 다스린다는 말도 있잖아?
뭐니 뭐니 해도 18회차 만에 처음으로 제대로 이혼했잖아? 위자료도 넉넉히 챙기고. 묵은 체증이 내려가면서 혈액 순환이 좋아졌나?
아, 생전 처음 버섯 포션을 어마어마하게 먹었지. 마치 내 안에 포션 먹는 하마라도 사는 것처럼. 혹시 배 속에…… 버섯이 자라고 있는 거 아니야?
나는 이것저것 생각난 것들을 브라운에게 말해 주었다.
“너무 허무맹랑한 얘기들인가요?”
“아닙니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들입니다. 정확한 이유가 뭔지는 몰라도 들을수록 확신이 갑니다. 다시 맥을 짚어 봐도 그렇고요. 잉태하신 것 같습니다.”
머릿속이 멍해졌다. 아이가 생기다니, 그런 일이 내게 일어나다니……. 내가 귀리가 되다니!
한때는 그토록 바랐던 일인데, 지금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진과 나의 아이라니…….’
내가 넋이 나가 있는 모습이 미심쩍어하는 걸로 비쳤는지, 브라운이 재빨리 덧붙였다.
“다행히 우리 북부 왕국은 의료용 마도구 기술도 상당한 수준입니다. 임신 여부나 태아의 상태 등도 정밀하게 진단해 내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저 역시 진맥만으로는 불확실한 부분이 있는데…….”
“……?”
“실은 쌍생아의 기운이 감지되는데, 그 부분이 확신이 가지 않아서……. 왕실 주치의로서 자존심이 조금 상하지만, 정확한 진단을 위해 기술의 힘을 빌려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뭐……라고요?”
하나도 아니고 둘이라고!
“레이디, 북부로 오시길 잘하셨습니다. 우리 왕국이 양육 지원도 빵빵하고…… 레이디 페께서 이혼 여성과 미혼모를 지원하는 일에 특별한 관심이…… 아이들에게 신분 차별 없는 교육 환경을…… 귀리죽과 귀리유도 국가에서 무상으로…….”
아아, 내 귀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기 시작했다.
.
.
.
너무 큰 불행과 너무 큰 행복은 유사한 점이 있다. 시간이 좀 지나야 제대로 음미할 수 있다는 것.
브라운이 곧장 보고를 했는지, 겨우 정신을 추스르고 손님들을 배웅하러 나갔더니 아이언스의 표정이 볼만했다.
얼굴에 또 ‘당신은 대체 누구십니까?’라고 선명하게 쓰여 있었지만, 더 이상 캐묻는 것은 무례라고 생각했는지 별다른 추궁 없이 축하한다는 말만 전했다.
모두가 돌아가고 밤이 깊어 내 방에 홀로 남게 되었을 때, 비로소 내 감정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방금까지도 대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기쁜 소식인지 슬픈 소식인지 생각할 여력도 없었다.
임신이라니, 아이라니.
나는 진과의 유일한 기념품으로 챙겨 온, 말린 솜꽃 한 송이를 꺼냈다. 나는 그 꽃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진, 우리한테 아이들이 생겼대.”
나도 모르는 사이 무슨 의미인지 모를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사실 임신이 그리 간절한 일이 아니게 된 지는 좀 되었다. 돌아보니 지난 생에 내가 임신을 바란 건, 그릇된 욕망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기에.
나는 아이를 프러너스와의 어긋난 관계를 회복하려는 도구로 생각한 것이다. 터무니없는 짓이었다.
이제 와 생각하면 프러너스와 부부였을 때 불임이 된 건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만일 그때 아이가 태어났다면, 그 아이는 아마도 불행했을 것이다. 도구의 도구였을 테니.
진이 임신 소식을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당황한 그의 미간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지난 생의 진은 아이를 원치 않았다. 자신과 같이 불행한 아이가 또 생겨나는 것이 싫어서라고 했지. 세상에 아무런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다고도 했고.
내가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한 말일 수도 있지만.
지난 생과 마찬가지로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낸 이번 생의 진도 같은 생각일까?
어른들의 욕심으로 짓밟히고 얼룩진 어린 시절을 보낸 진과 내가 과연 우리 아이들을 지켜 낼 수 있을까.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땐, 진을 닮은 아이만 가질 수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거라고 상상했다.
하지만 생각지도 않은 순간 그 소원이 실현되니, 마냥 감격스럽지만은 않다는 점이 나를 당황스럽게 했다.
진과 나에게 와 준 아이들이 너무나 고맙고 소중한 건 분명한데. 나는 아직 귀리가 되기엔 모자란 사람인 걸까.
* * *
나의 주인, 레이디 앰브로시아가 아이를 잉태했다.
나까짓 게 뭐라고 기분이 이상했다. 아직 그녀에게 충성 서약도 하지 못한 견습 기사 주제에.
단순히 그녀의 신변이 걱정돼서 이러는 건 아닐 테고. 이봐, 주제도 모르는 쿠엔티노, 좋은 말로 할 때 정신 차려라.
그나마 다행인 건, 그 빌어먹을 카를슈테인이 아이 아빠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모두가 궁금해하지만 차마 묻지 못한 질문. 나는 그 질문의 답을 알고 있었다.
어느 날 밤, 시름시름 앓다 잠든 그녀가 잠꼬대처럼 중얼거린 이름을 나는 들었다. 매우 작은 소리였지만 해결사로 단련된 나의 귀에는 또렷이 들렸다.
‘진…….’
진이라면, 나도 아는 유명한 진이 있었다.
내가 속했던 스콜피온스와 더불어 그리치의 3대 정보 길드로 꼽히는 페가수스의 수장이자, 반쪽짜리 시더우드, 방탕 황자로 불리던 그.
진 시더우드를 그녀의 이야기에 끼워 넣으니 지금까지의 의문이 모두 풀렸다.
대체 왜 황제와 황후가 자신의 암살단을 이혼 후 시골에서 조용히 살고 있던 레이디에게 보냈는지. 그녀가 어떻게 그토록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었는지.
내가 막 제국을 떠나 북부로 향할 무렵, 황위 쟁탈전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진 시더우드가 선황후가 남긴 진짜 핏줄이라고 했던가. 이미 많은 귀족 가문이 그에게 돌아섰다던가.
그녀는 황후가 되거나 반역자의 아내가 될 운명이었다. 더욱이 그의 후계까지 잉태한 몸이니.
아아, 당신은 어째서 또다시 그런 험난한 길을 선택한 건지.
그녀와 아이의 정체를 무조건 숨겨야 했다. 그녀의 안전을 책임지려면 내가 더욱 능력 있는 호위 기사가 되어야 했다. 능력이 모자라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제국이 뒤집어지든 폭삭 망하든, 아무도 그녀를 건드리지 못하게 하리라.
* * *
하루의 절반은 진을 그리워하며, 절반은 진을 원망하며 보냈다.
사랑하는 이의 아이를 갖는 건 감상이지만, 아이의 어머니가 되는 건 현실인 걸까.
북부 왕국의 최첨단 의료용 마도구는 내 안에서 두 개의 작은 심장이 뛰고 있다고 진단했다.
내 부모님도 나를 키울 때 이렇게 두렵고 걱정이 많으셨을까. 어머니, 아버지, 미고…… 지금은 세상에 없는 가족들이 괜히 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이 두려움이 결국 나를 지탱하고 움직이는 힘이 되겠지.
나는 멀쩡한 어른들도 몇씩이나 책임지려고 했던 오지랖 넓은 사람이잖아. 미고 같은 말썽꾸러기도 잘 돌봤고. 요 콩알만 한 진 주니어들을 책임지지 못할 이유가 없지.
이렇게 스스로 의욕을 불어넣었다.
진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그는 그의 전장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을 테니 이곳에서의 전쟁은 내가 감당해야겠지. 나의 참모 앤과 용사 쿠엔티노와 함께.
그렇다. 쿠엔티노는 이미 내게 발목이 잡혔다. 양심의 가책이고 뭐고, 고양이 손도 빌려 와야 할 상황이었다.
일단은 북부인의 입맛에도 합격인 자두 쿠키를 어떻게 잘 굴려서 군자금을 마련하고…….
의욕을 일으키기가 무섭게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소식이 날아들었다.
북부 왕국의 공동 군주이자 황금알을 낳는 사업의 귀재, 레이디 페가 직접 나를 방문할 것이라고.
“왜요?”
바짝 긴장한 내가 아이언스에게 물었다.
“자두 쿠키를 시식해 보시겠답니다.”
“네? 그런 이유라면 저희가 만들어 보내 드리면 될 것을…….”
“갓 구워 따끈한, 쿠키를 말입니다.”
쿠키에 진심이다, 이 사람.
“그렇더라도 저희가 왕궁으로 가서 구워 드리는 편이…….”
“레이디, 저희 군주께서는 반드시 고수하시는 원칙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