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5화. 버섯은 알고 있지 (95/110)


#95화. 버섯은 알고 있지
2022.10.28.



 
레이디 페의 원칙. 사업적인 흥미를 끄는 곳이라면 어디든 본인이 직접 찾아간다.

요리든 공예품이든 어떤 환경에서 탄생한 것인지 확인하는 걸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라고 했다. 레이디 페는 그걸 ‘공기를 맡으러 간다’고 표현한다고.

또 주방이든 작업장이든 본인이 몸을 움직여 찾아가는 것이 장인을 대하는 예의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일국의 군주가 왕도 근교의 이 작은 집까지 쿠키를 먹으러 온다는 건 좀. 쿠키는 갓 구운 쿠키가 진리라지만, 그래도 좀.

무엇보다 바쁘신 분께서 그럴 짬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대신 아무리 화려한 곳이라도 가치가 없다 판단하는 곳엔 가지 않으시지요. 꼭 가야 할 자리에만 가고 꼭 만나야 할 사람만 만나면, 시간은 얼마든지 충분하다고 하시더군요.”

아이언스가 내 의문을 풀어 주었다.

어찌 됐든, 위대한 레이디 페께서 이곳까지 갓 구운 따끈한 쿠키를 맛보기 위해 오신다니.


“이건 기회예요, 레이디!”

앤이 팔을 걷어붙이며 소리쳤다. 솔직히 나는 기대 반, 걱정 반이었는데 이 아이는 기운이 팔팔하기도 하지.

사실 내가 할 일은 많지 않았다. 레이디 페를 응대하고 윙크 자두 쿠키에 담긴 이야기를 그럴싸하게 들려주는 것뿐.

그래도 레이디 페가 그런 배경 이야기에 흥미가 많으시다니 아주 드라마틱하게 한번 준비해 보련다.

* * *



“브라보, 브라보! 정말이지 판타스틱하고 유니크하고 파워풀한 맛이에요.”

쿠키를 먹고 윙크와 웃음을 연발하던 레이디 페가 감탄과 찬사의 박수를 보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악녀, 시장의 독재자, 천박한 장사치 등 악명도 높은 그녀는 내 예상과는 매우 다른 모습이었다.

그녀의 명성을 생각하면 연배도 좀 있고, 계략가다운 인상을 지니고 있을 줄 알았다.

의중을 파악할 수 없는 눈빛, 그러면서도 순간순간 번뜩이는 날카로운 안광. 뭐, 그런 것들 말이다.


“으랴랴랴, 흣흐 흣흐! 정말이지 끊을 수 없는 새콤달콤함이야!”

의중이 너무 파악된다.

나이도 나와 같은 연배이거나 오히려 조금 어린 것 같았다. 꼭 말괄량이 소녀, 아니 소년 같은 인상을 풍겼다.

저런 천진한 모습으로 상대를 방심하게 만드는 것이 그녀의 전략인가?

다행히도 레이디 페는 우리 자두 쿠키가 매우 마음에 든 눈치였다. 쿠키를 만든 앤을 불러서 이것저것 물어도 보고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정말 여한 없이 맛있게 먹었네요. 레이디 가문의 명물 쿠키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답니다.”

레이디 페는 흡족한 얼굴로 내게 인사를 건네더니, 돌연 정색한 얼굴로 아이언스를 노려보며 말했다.


“내가 여기저기 윙크를 남발했다는 사실이 전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입단속 철저히 시키게.”

그러고서 나를 의식한 건지, 어색하게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전하께서 투기가 심하셔서 말입니다. 다른 덴 욕심이라고는 없는 청렴한 분인데, 나한테만 유독 그러시니, 참. 하여간 윙크 얘기가 새어 나가면 아주 큰일이 날 거랍니다. 그러고 보니 이 쿠키가 참으로 위험한 물건입니다, 하하하.”

여기나 저기나 사랑이 꽃피는 왕국이구나.


“참, 아이를 가지셨다고요? 참고로 우리 왕국은 부인들이 사업을 하면 지원을 많이 해 준답니다. 양육 제도도 잘되어 있는 편이고요. 예를 들면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아이를 돌봐 줄 국선 유모 제도를 운영하고 있기도 해요.”

“굉장히 세심한 배려네요! 국가가 보증하는 유모이니 믿고 맡길 수 있겠고요.”

“어린 시절 양육 환경이 한 사람의 일생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지 아시죠? 전문적인 유모 인력 양성은 국가의 미래인 아이들의 행복에 기여하고 여성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정책이랍니다.”

어머, 이런 제도는 제국에도 꼭 도입해야 해.


“그만큼 부인들이 지닌 잠재력을 높이 산다는 것이니, 레이디도 이곳에 계신 동안 재능을 꽃피우시길 바랄게요.”

이 말을 끝으로 레이디 페가 슬슬 자리를 파하려는 듯해, 나는 얼른 그녀를 붙잡았다. 급한 마음에 하마터면 그녀의 소맷자락을 잡을 뻔했다.


“저, 전하. 실례가 아니라면 조언을 좀 구해도 될지요. 전하께선 사람의 가치를 찾아내는 안목을 지니고 계시다 들었습니다. 제게도 쓸 만한 것이 있을까요?”

레이디 페는 자그마한 입술을 새 부리처럼 내밀었다. 뭔가 골똘히 생각할 때의 버릇인 것 같았다.


“흐음, 솔직히 말해 자두 쿠키는 당신의 가치는 아닙니다. 무엇보다 레이디는 음식에 진심인 부류가 아니랄까. 같은 족속끼리는 딱 감이 오거든요.”

“저도 먹성이라면 어디 가서 뒤지지 않는 편인데요. 지금은 입덧 때문에 그렇지.”

나의 반박에 레이디 페는 거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물론 레이디는 자두 쿠키를 진심으로 좋아하겠지만, 그건 아마도 추억의 맛이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 같은 냉정한 맛 사냥꾼은 아니란 거죠.”

쿠키 하나 좋아하는 데 그렇게까지 복잡한 자격이 필요합니까? 혹시 북부식 농담인가 싶었지만, 레이디 페의 얼굴은 진지하기만 했다.


“어떤 사람들은 나를 사기꾼이라고 부르더군요. 별것도 아닌 걸 대단한 것인 양 부풀려 팔아먹는다고. 내가 사업을 할 때 판단 기준으로 삼는 게 진심이라는 걸 알면 그 사람들 뭐라고 하려나.”

나라도 좀 의아할 것 같은데요? 진심?


“사업 성공의 비결은 진심으로 좋아하는 걸 진심으로 하는 거랍니다. 진심으로 하지 않으면서 성공하길 바란다? 그거야말로 사기꾼 심보 아닌가?”

레이디 페가 들려준 것은 의외로 올곧은 성공 비결이었다. 그녀는 내게 물었다.


“레이디 앰브로시아는 무엇에 진심인가요? 관심 있는 게 뭐예요?”

“버섯이요.”

“깜짝이야. 그렇게 곧바로, 그렇게 특이한 걸 말할 줄은 몰랐네요.”

“부끄러운 솜씨지만, 제가 그린 버섯들을 좀 보여 드려도 될까요?”

“정말로 버섯에 진심이군요. 좋아요, 보고 싶네요.”

지난 생에 사교계를 주름잡았던 독버섯 그림들을 레이디 페에게 펼쳐 보였다. 그녀는 한 장, 한 장 성의 있게 들여다보았다.


“매우 흥미롭군요. 독버섯이 이토록 아름답고 매혹적이라니. 당신, 이제 보니 그림 실력이 상당한 버섯 부인이었군요.”

레이디 페의 통찰력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세상에, 저 별호를 이번 생에 다시 듣게 될 줄이야.


“레이디 앰브로시아, 뭘 고민하는 거예요? 당신은 버섯을 그려야 할 사람이잖아요.”

“그런가요?”

“내 조언을 원한다면, 한마디 보탤게요. 순수 회화도 좋지만 디자인 쪽으로도 생각을 넓혀 보면 어때요. 우리 북부의 풍부한 자원이나 기술과 접목해 보라는 거예요. 수준 높은 예술과 결합된 사치품은 귀족들 사이에서 언제나 잘 팔리니까요.”

버섯 모양의 무언가를 구상해 보라는 뜻일까? 새로운 도전이지만 재미있을 것 같았다.


“조언 값으로 그림 한 점은 얻어 갈 수 있겠죠? 그림에 서명하는 거 잊지 말고요.”

 

* * *

황위 쟁탈전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장기전이 되어 가고 있었다.

황궁 탈환과 재탈환이 이어졌고, 생각지 못한 순간에 배신과 함정이 불쑥 덜미를 잡았다.


“그 망할 폰트만 백작 놈은 내 손으로 허리를 꺾어 버릴 테니까 아무도 끼어들지 마라.”

말보르크가 이를 갈며 말했다.


“어차피 눈치채고 매복에 걸려든 척한 것 아닙니까. 차라리 잘됐습니다. 이제 배신자가 명확해졌으니까요.”

체력이 약한 플록스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채 말했다.

폰트만 백작이 황제 쪽 첩자인지 아닌지 밝히기 위해, 우리 반란군은 제도 근처의 숲에서 매복에 걸려든 척하는 작전을 펼쳤다.

아무리 대비했다 해도 우리 쪽 피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전투 과정에서 반란군의 수장인 나도 작은 부상을 입었으니까.

부상도 부상이지만, 나를 지지했던 귀족들이 손바닥 뒤집듯 돌아서는 모습이 씁쓸했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 아니었음에도.

갑자기 모든 것이 덧없이 느껴졌다. 이 길을 계속 가야 할까? 무엇을 위하여?


“보스, 괜찮으십니까?”

플록스가 바닥에 뻗어 있는 나를 들여다보며 물었다. 이 난리 통에도 파란 하늘은 평화로워 보이기만 했다.


‘금방 끝내겠다고 로제트에게 약속했는데.’

숲 여기저기 잔뜩 돋아난 버섯들을 보고 있자니 그녀 생각이 절로 났다.

로제트는 북부에서 잘 지내고 있을까. 어디 아픈 데는 없을까. 거기서도 버섯을 그리고 있을까. 그녀도 나를 생각하고 있을까.

전투가 아주 길어질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몇 달, 아니 몇 년이 걸릴지도. 그럼 그녀와 나는 점점 멀어지게 될까.

멀어지고 멀어져서 서로를 향한 마음도 희미해질까.


 
배신자에게 뒤통수를 맞고도 정신을 못 차리고 누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플록스 녀석이 수상쩍고도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많이 보고 싶으시죠? 저도 보고 싶습니다.”

“누구?”

“에이 참, 보스가 보고 싶을 사람이 그분밖에 더 있습니까. 보스의 반쪽, 저희들의 형수님 말입니다.”

“자네, 전투 때 머리를 다쳤군.”

“아, 보스도 너무하십니다. 우리끼리 있을 때는 괜찮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 내 사랑이다, 내 아내다, 왜 말을 못 하십니까. 제가 어디 가서 밀고라도 하겠습니까!”

플록스가 눈을 똑바로 뜨고 대들었다. 저기 수통에 담긴 게 혹시 술인가?


“너, 그게 무슨 소리야?”

“저도 다 압니다. 보스와 레이디 M이 성혼하셨다는 거. 레이디께서 처음 페가수스에 오셨을 때 저한테만 말씀해 주셨습니다.”

“뭐? 그 얘길 왜 지금 하는데?”

“하!”

기가 차고 황당한 걸 애써 누르고 물었더니, 플록스는 제가 더 기가 차고 억울하다는 듯 대들었다.


“보스가 딱 잡아떼시는데 그럼 어쩝니까. 이제 와서 말씀드리는 거지만 그때 정말 서운했습니다. 저희한테 어쩌면 그러실 수가.”

“뭘 잡아떼? 나한테 얘길 했어야 잡아떼든 말든 하지. 왜 네 맘대로 비밀이야?”

“저는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보스가 출타 중이실 때 보스와 성혼했다는 레이디가 찾아오셨다고요.”

나는 손으로 이마를 짚을 수밖에 없었다.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레이디도 다른 사람들에겐 비밀로 해 달라고 부탁하셨고요. 거사를 앞두고 두 분이 성혼 사실을 숨기시려는 뜻을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사랑하니까! 지켜 주고 싶으니까! 그러신 거잖아요.”

하, 정말, 이런 미친.

로제트가 내 혼전 순결 결심을 알고 있는 걸 보고 전생의 진 시더우드와 성혼했거나, 적어도 그가 로제트에게 청혼했으리라 짐작은 했지만.

로제트, 왜 그 사실을 내게 숨긴 거야? 왜 처음부터 말하지 않은 거지?

그리고…… 왜 그 사실을 저 주정뱅이 자식한테는 말해 준 거야?

갑작스레 진실을 알게 된 탓인지, 가벼운 두통이 몰려왔다.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듯하고 왠지 눈앞이 황금빛 속에 잠겨 드는 듯했다.

언젠가 맡아 본 적 있는 듯한 흙냄새 같은 것이 부드러운 미풍에 실려 와 콧속을 파고들었다. 버섯, 버섯들이었다.

버섯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기묘한 느낌을 받은 순간, 환청인 듯 낯선, 아니 낯설지 않은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세상의 독버섯으로 지탄받아 온 두 사람이 이제 떨어질 수 없는 하나가 되어 더 크고 아름다운 독버섯이 되려 합니다.”

“버섯들이여, 서로 다른 것을 이어 주는 이능이여. 어떤 일이 있더라도 우리 두 사람의 마음이 이어지기를.”

“잠시 우리의 시간과 세상이 달라지더라도 두 사람의 마음은 변함없이 이어지기를.”

로제트 앰브로시아와 진 시더우드는 버섯들을 증인 삼아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다.

하하, 멍청한 진 시더우드. 그 사실을 이제야 깨닫다니.

그녀를 한눈에 알아보지 못하다니.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