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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화. 대체 불가 당신 (96/110)


#96화. 대체 불가 당신
2022.10.31.



 
버섯을 많이 들여다보고 그린 만큼, 버섯의 아름답고 신비한 순간도 누구보다 많이 엿보았다고 자부한다.

그 수많은 순간 중에서도 내 기억 속에 가장 아름답게 새겨진 장면이 있었다.

지난 생에 하말린의 숲에서 진과 조촐한 결혼식을 올린 후 보았던 그 광경. 우리는 버섯들을 증인 삼아 결혼 서약을 했다.


「잠시 우리의 시간과 세상이 달라지더라도 두 사람의 마음은 변함없이 이어지기를.」

분홍빛 노을에 물든 그의 얼굴, 맹세의 말을 담던 그의 눈과 입술.

서약이 끝나자 숲에 어둠이 깃들었고, 버섯들이 오묘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앞길을 인도하는 별처럼, 우리의 앞날을 축복하는 풍등처럼.

그 따스하면서도 놀라운 광경은 몇 생을 더 반복해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때의 감동을 되살려 보기로 했다.

그때 본 버섯들의 모습을 본떠 램프를 디자인해 보기로 한 것이다. 버섯과 디자인을 접목해 보라는 레이디 페의 조언을 듣고 떠올린 아이디어였다.

버섯의 매력적인 형태와 우아한 선, 독버섯들의 신비로운 빛깔을 살려서 램프를 디자인하면 매우 실용적이면서도 아름다운 물건이 탄생할 것 같았다.

전통과 신기술이 혼재된 제국에는 다양한 연료를 쓰는 램프들이 있었다. 양초나 기름을 쓰는 것부터 값비싼 광물인 페트룸이나 마정석을 쓰는 것까지.

값비싼 연료를 쓰는 램프는 귀족들 사이에서 격조 높은 사치품으로 여겨졌고, 가문의 권세를 자랑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더욱이 그 모양새마저 아름다우면 예술품이나 보석처럼 사교계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만약 버섯 램프와 북부 왕국의 마법식 기술이 결합된다면? 제국 사교계에 엄청난 유행을 불러올 것 같았다.

누가 더 빛나는 존재인지, 누가 더 눈부신 존재인지를 겨룰 때 말 그대로 빛, 조명을 과시해야 하는 시대가 올지도.

그런 원대한 사업 구상도 해 보았지만, 사실 그보다는 버섯 램프를 디자인하는 일이 재미있을 것 같았다.

작은 것이라도 내가 하고 싶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다행이었다.


“레이디, 오늘은 몸이 좀 어떠십니까? 아기님들은 잘 계신지요?”

“응, 오늘은 괜찮네. 앤, 입학하는 날이지?”

“예, 공부할 수 있게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봐야 열흘에 네 번인 걸. 쿠키 가게랑 집안일도 돌봐야 하고.”

“전 그게 더 좋습니다. 공부만 하면 좀이 쑤시거든요.”

“하여간 기운이 넘쳐. 그래도 포션 하나 먹고 가.”

앤은 오늘부터 ‘마사 스쿨’에 다닌다.

그곳은 원래 이혼하거나 사별한 부인이나 미혼모, 형편이 좋지 못한 소녀들의 자립을 돕기 위한 곳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초기엔 주로 생계에 도움이 될 만한 기술을 가르쳤다고.

하지만 갈수록 학생들의 요구가 다양해져 지금은 경영이나 예술, 어학, 군사학, 마법식, 의학 등 폭넓은 수업이 개설되었다.

앤은 기왕에 마법식이 발달한 북부까지 왔으니 마법식 코드를 만드는 ‘마딩’을 배워 보고 싶다고 했다. 새롭고 낯선 분야에 도전하는 것이 적성에 맞다고.


‘그래, 열심히 익히렴. 나중에 내 버섯 램프에도 마법식을 주입해 보게.’

이렇게 사심도 한껏 부풀려 보았다.

황위 탈환을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을 진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나는 이곳에서 열심히 잘살아 볼 생각이다.

실은 임신 사실을 알고 한동안 마음이 불편했다.

너무나 감사한 일을 두고 왜 이런 기분일까, 심란한 며칠 밤을 보낸 끝에 나 자신이 낡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진을 떠나려고 결심한 건, 진의 옆에 서기에 스스로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황후로서는 말할 것도 없고.

부족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중 큰 부분이 후사를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귀족 여성의 가장 큰 책무가 가문의 후계를 잇는 것이었고, 그건 황후도 예외일 수 없었기에.

나 역시 세상의 그런 기준을 별 저항이나 의문 없이 받아들여 왔다.

그런데 두 아이가 내게 와 준 후,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그럼, 나는 이제 자격이 충분한 건가? 아이들을 품은 배를 자랑스럽게 내밀고 당당하게 진에게 가면 되는 건가?

알 수 없는 환멸감이 몰려왔다. 지금껏 전혀 이상하다고 생각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들이 나를 괴롭혔다.

아이를 낳지 못하니 황후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 것도, 아이를 가졌으니 황후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모두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틀에 나를 가두는 일이었다.

지금껏 내가 당해 온 부당한 대우를 기꺼이 인정하는 꼴이었다.

이런 생각도 순전히 북부 왕국에 왔기에 할 수 있는 것일 테지. 제국에만 있었다면 지금도 여전히 이상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이곳에서 자기만의 기준을 만들어 가며 악명을 떨치는 레이디 페와, 새로운 꿈과 배움을 향해 가는 학생들을 보니, 내 안에서도 갖가지 의문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왜? 왜? 왜?

나는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내 삶은 아마 더 피곤해지고 더 흥미진진해지겠지.

그렇다고 내가 갑자기 레이디 페처럼 크고 거창한 일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지는 않는다. 그저 내가 선택한 작은 일에서 만족을 맛보고 싶다.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의 인정을 받게 되었을 때, 그때 진의 옆에 나란히 설 것이다.


‘얘들아, 준비됐니? 나는 좀 나쁜 엄마가 될지도 모르겠구나.’

 

* * *

북부의 여름과 가을은 매우 짧으니 숲에서 버섯을 관찰하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며 만류하는 이가 많았지만, 이때를 놓치면 긴긴 겨울 동안 먼 기억이나 도감에 의지해 램프를 디자인할 수밖에 없었다.

기왕이면 숲에서 생생한 영감을 받고 싶었다. 북부의 버섯은 어떻게 다를지 궁금하기도 하고. 한동안 침대에만 누워 있었더니 신선한 공기를 쐬고 싶기도 하고.

며칠간 암살자들이 또 들이닥칠까 걱정도 했지만, 다행히 잠잠했다. 황위 쟁탈전의 불길이 거세지며 아마 다른 데 신경 쓸 여력이 없는지도.

왕국의 출입국 경계를 더욱 삼엄히 하고 있다고 아이언스가 전하기도 했고, 내겐 그림자 기사, 쿠엔티노도 있으니까.

아마 지금도 근처 숲으로 향하는 내 뒤를 조용히 좇고 있을 것이다.

휴, 오랜만에 몸을 움직여서 그런지 금방 숨이 찼다. 이제 겨우 요만한 아이들 때문에 그럴 리는 없고.

나는 얕은 골짜기에 자리를 깔고 숨을 돌렸다. 오늘은 이쯤에서 버섯을 그려야 할 것 같았다.


“실례하겠습니다, 레이디. 갓의 자태가 매우 우아하시군요. 빛깔도 요염하고요. 당신의 초상화를 그려도 될지요? 정중히 요청드립니다.”

버섯이 우주에서 온 이종족, 이능을 지닌 마물일 수도 있다는 얘길 들은 후로 왠지 찜찜해져서, 나름대로 정한 나만의 절차였다.

그림을 그리기 전에 모델이 될 버섯에게 인사를 하고 허락을 구하고.


“푸흡.”

설마 쿠엔티노가 웃었나? 웃음이 나오고도 남을 모양새겠지만, 그는 그럴 사람이 아닌데?

혹시 몰라 옆에 있던 팔레트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순간, 언젠가 있었던 비슷한 상황이 떠올라 엉뚱한 기대를 품게 만들었다.

내가 숲에서 버섯을 그릴 때마다 주변을 서성이다 불쑥 나타나던 사람. 내가 버섯 그리는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보는 걸 좋아하던 사람.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알면서도 주책없이 가슴이 두근거렸다.


“누구……?”

마침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웃음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북부에서는 보기 드문 구릿빛 피부에 상냥한 미소를 띤 유순한 인상. 나는 그를 보자마자 얼어붙고 말았다.

실제로 그를 본 건 스치듯 짧은 순간에 불과했지만, 나는 그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떠올리지 않으려 애써 온 얼굴. 하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얼굴.
 

 


“이런, 놀라게 해 드려 죄송하오, 레이디. 하지만 나 역시 바위 위에 누워 있다 갑자기 당한 것은 마찬가지 입장으로…….”

하지만 그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어디선가 튀어나온 쿠엔티노에게 제압당해 팔이 뒤로 꺾이고 머리를 나무줄기에 처박고 있어야 했으니.

아마 쿠엔티노는 그를 본 내 얼굴이 사색이 되자 뭔가 이상한 낌새를 채고 모습을 드러낸 것일 터였다.


“아 부토 하이 로움(나 나쁜 사람 아니오)!”

급하니까 그의 입에서 하말린어가 튀어나왔다. 그제야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쿠엔티노를 말렸다.


“괜찮아요, 쿠엔티노 경. 그냥 조금 놀란 것뿐이에요.”

“정말로 괜찮습니까, 레이디?”

“그럼요. 숲에서 다른 사람과 마주칠 거라고 생각지 못해서.”

“그러니까 말입니다. 숲에서 어슬렁거리다니, 수상한 자가 아닙니까?”

쿠엔티노에게 제압당한 그가 몸을 틀면서 다급히 끼어들었다.


“저, 대화 중에 미안하오만, 나는 전혀 괜찮지가 않아서 말이오. 이 팔 좀 놔주겠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쿠엔티노는 마지못해 그의 팔을 놓으며 위협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숲에서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요?”

쿠엔티노에게 풀려나 목과 팔을 주무르던 남자는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치더니 말했다.


“숲의 주인 행세를 하려는 건 아니오만, 나는 지난 한 달 동안 거의 매일 이곳을 찾았소. 오늘만 해도, 내가 여러분보다 먼저 여기 와 있었던 것 같소만.”

듣고 보니 틀린 말이 아닌지라, 쿠엔티노는 조금 누그러진 기세로 중얼거렸다.


“매일 숲에서 빈둥거리다니, 대체 뭐 하는 작자인지. 말투도 이상하고.”

“그런 말은 보통 속으로 하지 않소? 나는 자연과 교감 나누는 것을 좋아하오. 방금 레이디께서 버섯을 대하시는 모습이 나 못지않으시던데 말이오.”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고 있는 동안도 솔직히 나는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렸다.

미워할 수도, 동정할 수도, 용서할 수도, 용서를 구할 수도 없어 억지로 머릿속에서 지워 버린 남자.

그 남자를 이곳에서 맞닥뜨리게 될 줄이야. 잔인하구나, 운명이여.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서로 인사라도 나누겠소? 나는 하말린에서 온 모텝이라고 하오. 북부엔 아는 곳이 많지 않아 앞으로도 이 숲에 와야 할 것 같은데, 서로 평화롭게 지냅시다.”

그는 바로 하말린의 왕세자, 백성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앵무새, 모텝 오쿨루스였다.

수행인 없이 혼자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견문을 쌓는 ‘후계자 여행’이 하말린 왕가의 오랜 전통이었으니, 아마 그는 승계 여행 중이리라.

제국에 납치돼 마수가 되는 비극이 이번 생엔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 계획대로 북부 왕국에도 들러 견문을 쌓고 있는 것일 테지.

키가 훤칠하고 체격이 더 좋은 것만 아니면, 그의 누이인 모얌 왕녀가 남장을 했다고 해도 믿을 만큼 두 사람은 쏙 빼닮았다.

인상을 봐도 모얌처럼 따뜻하고 오지랖 넓은 사람일 것 같았다.

그래서 그를 보고 있으면 더 괴로웠다. 그 웃음이 너무 선해서.


“저는 제국 출신인데 사정이 있어 북부로 온 거라 더는 말씀드리기 어렵군요.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저희가 다른 숲을 찾아볼 테니 마음 쓰지 마시고 평화로이 지내시기를.”

나는 얼른 그를 피하고 싶어 돌아섰다.


“아, 그러실 필요까지는…… 나도 진심으로 바라오. 레이디의 평화를.”

그가 멀어지는 내 등 뒤에 대고 소리쳤다.

따지고 보면 그도, 아니 그야말로 희생자였다. 제국의 검은 야욕에 어처구니없이 희생당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괴물이 되어 무고한 사람들을 해치고 허망한 죽음을 맞이한 모텝 왕세자.

그의 부고를 받고, 오쿨루스 왕과 모얌 왕녀가 얼마나 큰 슬픔에 잠겼을까.

그의 마지막이 어땠는지 알고 또 얼마나 가슴이 무너졌을까. 그걸 헤아려 보는 나 역시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나에게 그는 원망스러운 사람이기도 했다.

마수로 변한 그에게서 나를 구하기 위해, 마수로 변한 그의 명예를 지켜 주기 위해.

진, 나의 진이…….

세상엔 결코 대체될 수 없는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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