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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화. 비운 후에 남은 것 (97/110)


#97화. 비운 후에 남은 것
2022.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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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이 시끌시끌한 걸 보니 또 앤과 그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벌써 두 달이나 부대꼈으면 둘 중 하나는 지겨워서 나가떨어질 만도 하건만. 매일 처음 만난 사이처럼 지지고 볶는 두 사람의 정성이 참으로 대단했다.

언제나처럼 앤이 불만 가득한 얼굴로 고해바치러 뛰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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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그 거머리가 또 왔습니다. 우리 쿠키를 축내는 식충이가요!”

앤, 그 식충 거머리가 장차 하말린의 왕위에 오를 왕세자 저하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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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 아까운 걸 한입에 몇 개씩! 팔려고 만든 걸 왜 맨입으로 쓱싹하냐고요!”

앤은 아깝고 분하다는 듯 발까지 동동 굴러 댔다.

숲에 버섯을 그리러 갔다가 우연히 모텝 왕자와 마주친 그날 이후, 이상하게도 가는 곳마다 그와의 우연한 만남이 이어졌다.

결국 정원 한쪽을 헐고 길을 향해 낸 쿠키 가게에도 그는 우연히 찾아왔고, 쿠키 맛에 반해 버렸다는 이유로 가게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기 시작했다.

설상가상 내 하말린어 실력이 유창하다는 걸 알게 된 그는, 너무나 감격스러워하며 말동무가 되어 줄 것을 애원했다.

편하게 대화할 사람 하나 없는 타국에서 그간 너무 외로웠다며.

내가 보기에 그는 이미 넘칠 정도로 수다스러웠는데 말이다.

하여간 앤은 유독 모텝을 싫어해서 늘 도끼눈을 뜨고 그를 구박했다.

멋대로 쿠키를 덥석덥석 집어 먹는 것도 싫고, 그러면서 자기한테 느끼한 윙크를 날리는 것도 싫고, 무엇보다 나한테 치근덕거리는 것이 꼴 보기 싫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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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사람 아닙니까? 모르는 이가 보면 모텝이 아기님들 아빠라도 되는 줄 알겠습니다.”

앤이 이렇게 치를 떨 만도 했다. 모텝의 언행은 확실히 과한 면이 있었으니. 예를 들어 아무렇지 않게 이런 말을 한다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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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트의 부군이 가장 부러워할 사람이 내가 아니겠소. 아이를 품은 로제트의 모습을 곁에서 본 행운아는 나이니. 아마 질투가 나 죽을 것이오.」

괴상하게 점잖은 말투와 전혀 그렇지 못한 말의 내용. 그는 제국어가 서투르다는 점을 십분 이용하고 있었다.

모텝 역시 하말린 사람이었다. 감정에 솔직하고, 오지랖이 제국과 하말린 사이에 있는 케링 해만큼 넓었다.

더욱이 그는 모얌 왕녀와 친남매. 외모만 쏙 빼닮은 것이 아니었다. 성격이나 취향도 아주 판박이였다.

나는 지난 생에는 모얌 왕녀에게, 이번 생에는 모텝 왕자에게 시달려야 할 운명인가.

모텝은 내가 램프를 디자인한다는 걸 알고는 내 조수를 자처했다.

디자인은 나 혼자 머릿속으로 해도 됐지만, 그 디자인을 구현하려면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긴 했다. 진흙으로 거푸집을 만들거나 나무나 대리석 등을 깎아 내야 했으니.

내게는 그럴 만한 힘도, 손재주도 없었다.

처음엔 물론 모텝의 조수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여전히 내게 껄끄럽고 불편한 사람이었으니. 그리고 내게는 손힘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쿠엔티노가 있으니까.

하지만 쿠엔티노가 그렇게 똥손이었을 줄이야. 그는 힘만 무지막지하게 세서 진흙을 곤죽으로 만들어 놓거나 나무나 돌을 걸핏하면 박살 내 버렸다.

하루는 어쩔 수 없이 속는 셈 치고 모텝의 손을 한번 빌렸는데, 그에게 이런 기가 막힌 손재주가 있었을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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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트, 나는 말이오, 어릴 적 꿈이 조각가나 공예가가 되는 것이었소. 영혼이 깃들 둥지를 만들어 주는 일 말이오.”

제국 황자의 꿈은 과자 가게 주인, 하말린 왕자의 꿈은 공예가. 두 사람의 꿈을 이뤄 주기 위해 내가 이 고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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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트 그대는 영혼을 만들고, 나는 그 영혼을 담을 그릇을 만들고. 우리는 정말 잘 맞는 동업자요.”

이렇게 슬그머니 눌러앉으려는 모텝을 떼어 내기 위해 보수를 지불할 형편이 못 된다고 했더니, 그는 자두 쿠키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앤과 저런 앙숙 관계가 되고 만 것이다.

아니, 정말로 애가 타고 속이 끓는 건 앤뿐인 듯했다. 모텝은 겉으로는 앤과 티격거려도, 분명 재미있어하는 눈치였다.

그는 내 조수도 조수지만, 누군가와 말하고 참견하고 싶어서 온 거니까.

대체 모텝이 뭘 믿고 저렇게 다짜고짜 나와 내 주변에 엉겨 붙는 건지 궁금해 돌려서 물어본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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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하말린 사람들은 영혼을 읽는 재주가 있다오. 나는 왠지 그대의 영혼에 빚을 지고 있다고 느꼈소.」

모텝이 무언가 눈치챈 걸까? 혹시 전생을 기억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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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느 세상, 어느 시간에 내가 그대에게 빚을 졌을지 모르지. 혹시 그대가 나를 짝사랑했나? 내게 사모한다고 매달리는데도 내가 냉정하게 내친 걸까? 그때의 죗값을 치르는 걸지도.」

모텝이 아까운 자두 쿠키를 와작거리며 말하자, 그때도 앤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도끼눈을 떴지. 쿠키 반죽을 밀던 롤링 핀을 슬쩍 들어올렸던 것 같기도.

휴, 당신과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면, 저렇게 입방정을 떨지 못할 텐데. 자두 쿠키로 따귀를…….

참, 아이들이 있었지. 안정, 안정. 태교에 좋지 못해. 훌륭한 귀리가 되려면 좋은 생각만 하자.

고귀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타국에서 구박만 받는 모텝 왕세자는, 그래도 손재주 하나는 뛰어났다. 어릴 적 꿈이 공예가였다는 건 빈말이 아니었다.

이쯤 되니 나도 정말로 그가 필요해졌다. 이렇게 내 의도를 찰떡같이 알아듣고 섬세하게 모양을 뽑아낼 장인을 다시 찾아내긴 아마 힘들 것이다.

북부 사람들은 우직하긴 하지만 섬세함이 조금 떨어지는 게 사실이었다. 특히 사치품이나 예술품과는 거리가 멀었다.

신기술을 입힌 마도구나 무기, 중장비 쪽으로는 훌륭한 장인이 많았지만.

모텝은 감수성이 풍부한 하말린 사람인 데다, 왕족으로 살며 어려서부터 수준 높은 예술 작품이나 명품들을 많이 접해 와 안목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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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트, 우리가 만난 건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오. 우리를 그날 숲으로 이끈 건 분명 영혼의 전언일 것이오.」

북부의 겨울은 일찍 찾아왔다.

우리의 자두 쿠키는 겨울이 되자 더 잘 팔렸다. 북부에서만 나는 사탕 당근을 첨가했더니 더 깊은 맛이 났다.

이곳 사람들은 춥고 혹독한 기후에서도 잘 자라는 이 식물에서 설탕을 얻었다.

원래는 눈토끼의 먹이이던 야생 사탕 당근을 농부들이 개량한 것이라고. 귀리와 함께 북부의 대표적인 작물이었다.

밤비는 이곳의 겨울을 매서우면서도 아름다운 계절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었다.

너무 추워서 입김을 내뱉거나 말을 하면, 그대로 투명한 얼음 결정이 되어 톡톡 떨어질 정도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을 당시엔 쉽게 상상이 안 됐지만, 무척 예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긴 했다.

밤비는 어렸을 때 동네 아이들과 입김으로 모양 만들기를 하며 놀았다고도 했다. 능숙해지면 원하는 모양의 얼음 결정을 자유자재로 만들 수도 있다고.

겨울이 오자 대자연은 정말로 눈과 얼음의 나라라 불리는 북부의 위용을 아낌없이 떨쳤다. 어디를 봐도 하얀 눈과 얼음이었다.

이 어마어마한 눈 더미가 램프를 만드는 데 생각지 못한 도움을 주었다. 거푸집에 비싼 유리나 금속을 녹여 넣지 않아도 됐으니까.

그 비싼 재료 대신 사방에 널린 눈을 거푸집에 꼭꼭 눌러 넣었다 조심스레 떼어 내면 거의 유리나 금속으로 만든 것 같은 결과물이 나왔다.

질감이라든가 광택 등도 흡사해서 실제 느낌을 가늠해 보기도 좋았다.

더욱이 지금 내가 만드는 것들은 본격적인 제품도 아니고, 실수가 고스란히 담길 예정인 시제품 아닌가.

눈 덕분에 재료비가 무서워 덜덜 떨지 않고 마음껏 이런저런 디자인을 시도해 보고 실패작도 왕창 만들 수 있었다.

이렇게 머릿속에 그린 것과 실제 결과물이 어떻게 달라 보이는지도 조금씩 감을 잡아 갔다. 시행착오를 통해 그 간격을 좁혀 가는 방법을 나름대로 터득해 나갔다.

그러다 보면 몇 밤에 한 번쯤은 감동적인 결과가 나오는 순간이 오기도 했다.

모텝이 거푸집에서 조심스레 떼어 낸 모형을 탁자 위에 올려놓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난방용 마도구의 불빛이 버섯 모양의 눈 램프에 닿아 신비롭게 반짝였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모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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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트, 그대에게 존경의 키스를 바쳐도 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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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어요.”

오가는 대화는 시답잖아도 우리가 느낀 뿌듯함과 기쁨은 같은 종류의 것이리라.

버섯 램프를 디자인하면서, 한 가지 깨닫게 된 것이 있었다. 버섯 세밀화를 그릴 때는 요소를 하나씩 더해 갔다면, 디자인을 할 때는 하나씩 빼 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

군더더기를 조금씩 빼 나가는 것은 더해 가는 것보다 오히려 더 어려운 일이었다.

거품을 빼고, 과욕을 버리고, 남겨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구분하는 일. 비우고 비워서 아름다움의 본령만 남겨 놓는 일.

이러다 어느 날 이치를 터득하고 대현자가 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공작부인 시절, 가끔 대단한 장인들을 만나면 세상사에 해탈한 듯한 느낌을 받곤 했는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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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트, 오늘 것은 누가 봐도 명작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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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보네요. 아이들도 감동해서 발길질을 하니 말이에요. 오늘은 유독 힘찬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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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오, 벌써부터 대단한 심미안을 갖추었다니. 역시 날 닮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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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왜 닮아요! 포프리차(하말린어로 거친 욕)!”

제국의 황위 쟁탈전은 끝이 날 줄 몰랐다. 황궁의 탈환과 재탈환이 이어졌고, 곳곳에서 학살이 자행됐다.

이제 북부 왕국에서도 제국의 황위 쟁탈전이 가장 중요한 화젯거리가 될 정도였다.

이처럼 전쟁이 길어지자 진을 사지로 떠민 것이 조금씩 후회되려 했다.

이러다 우리 아이들이 태중에 있을 때는 고사하고, 아이들이 태어나는 순간에도 진이 함께할 수 없게 되는 건 아닐까.

인생의 큰 기쁨을 진에게서 앗아 가게 되는 걸까?

모텝의 입방정처럼, 진이 모텝을 질투할 날이 정말로 오게 되는 건 아닌지.

만일 그렇게 되더라도, 무사하기만 해요, 진.

다른 건 다 늦게라도 만회할 수 있을 테니. 당신만 또 내 손을 놓고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래요, 나도 당신의 바람대로, 사라지지 않을게요. 이곳에서 램프를 밝히며 당신을 기다릴게요.

우리 제발, 사라지지 말아요. 서로에게서 서로를 빼앗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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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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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자 진 시더우드가 왔다!”

카이저 16년이 저물던 그해, 황궁을 완전히 점령한 반란군의 수장 진이 마침내 황좌에 올라 포효했다.

진의 발아래 끌려 나온 폐 황제 카이저 바카리스는 충혈된 눈으로 빈정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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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진짜께서 오셨는가? 고귀한 혈통을 가진 분이 오셨으니 이 악취 나는 피를 가진 가짜가 응당 자리를 내어드리는 게 도리지.”

진은 차가운 눈으로 자신의 옛 형제를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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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취가 나는 게 자신의 피라고 생각하는가? 핏줄 때문에 황위를 빼앗긴 거라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진의 말에 카이저는 분노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감정에 휩쓸린 채 거친 숨을 씩씩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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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군주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저 소국의 평범한 왕 정도만 됐더라도, 나는 기꺼이 너에게 황위를 떠넘겼을 것이다. 평생 골치 아플 너를 동정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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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겨운 수작 부리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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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저 바카리스, 너의 어리석음 때문에 너 자신과 나, 둘 다 불행해졌다는 것만은 알아 두어라. 아니, 수많은 사람이 무의미한 슬픔을 겪어야 했다는 것을.”

제국이 반란군의 손에 넘어가기 직전, 카이저 바카리스의 편에 섰던 귀족과 관료들이 그에게서 재빨리 돌아섰다.

그의 최측근이나 수족으로 불리던 이들도 그를 버리고 제국을 떠나 피신하기 바쁘던 그때. 황제의 곁에 최후까지 남은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황후였다.

두 사람은 황궁이 점령당한 순간에 실은 침대에서 발견되었다. 조금의 동정도 얻을 수 없는, 마지막까지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방자한 모습이었다.

성난 반란군과 백성들은 두 사람을 발가벗긴 채 목을 매달고 싶어 했지만, 그런 처참한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었던 진의 만류로 그나마 옷은 입은 모습으로 황궁의 성문에 나란히 내걸렸다.

비록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었지만, 아리스타타, 알펜시아 바카리스는 최후의 순간에서야 가장 황후다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고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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