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너를 닮은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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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화. 너를 닮은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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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화. 너를 닮은 선택
2022.11.07.
마침내 진이 로센보르 제국의 새로운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황위 탈환전이 시작된 지 1년 5개월 만이었다. 내가 북부 왕국에서 두 번째 겨울을 맞이했을 때였다.
처음엔 솔직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정말로 모든 것이 끝났다는 사실이.
소식을 접한 바로 다음 날, 밤비가 직접 내 거처로 찾아왔을 때야 나는 비로소 밤비를 부둥켜안고 반가움과 안도의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승전을 기뻐할 시간도 안 주시고, 제 엉덩이를 걷어차시지 뭡니까. 당장 모셔 오라는 황제 폐하의 명이십니다.”
“정말 너무하셨네요. 탈환전의 주역인 기사들의 공을 여러 날 치하해도 모자랄 텐데. 이런 일이 뭐 급하다고.”
“그런 말씀 마세요. 폐하께서 전투 중에 뛰쳐나가시지 않은 것만도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좀 지체됐어야죠.”
“아무리 그래도 막 황위에 올랐으니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일 텐데. 내 문제는 천천히 의논해도…….”
“큰일 날 말씀이시네요. 레이디께서 행여 그러실까 봐 폐하께서 전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폐하의 전언?”
“참을 만큼 참았으니 나에게 더 이상의 인내를 요구하지 말라, 고 하셨습니다.”
“…….”
밤비는 아기 침대에서 탈출을 시도하고 있는 진 주니어 둘을 감격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다 물었다.
“더욱이 아기님들 소식을 언제까지 비밀로 하실 생각입니까. 하루빨리 폐하께 알리는 것이 좋을 듯한데요. 보기보다 서운함을 잘 느끼시는 성정이라…….”
은근히 잘 삐치는 성격이란 말이겠지. 하긴 아이들에 관해 숨긴 건 충분히 서운하게 여길 만도 한 일이었다. 나로서는 어쩔 수 없었지만.
황후가 보낸 암살단을 호되게 겪은 후로 정신이 번쩍 들었으니까. 내가 처한 상황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깨달았고 말이다.
“물론 레이디께서 아기님들을 철저히 숨기신 뜻을 알기에 저 역시 함구했습니다만. 폐하께서 저리 조급하신 걸 보니 레이디를 향한 마음이 제가 헤아린 것 이상이라, 이제 와 조금 걱정이 되는 게 사실입니다.”
밤비는 아이언스가 은밀히 귀띔해 준 덕에 내 임신 사실과 아이들의 탄생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고.
“막 황위에 오르신 폐하께서 황궁을 비우는 건 위험한 일입니다. 그래도 아마 레이디께서 제국령 안에만 계셨어도 직접 오시고도 남았을 겁니다.”
반면 타국에 직접 행차하는 건 외교적인 문제로 번질 수 있어, 북부 왕국 출입이 자유로운 밤비가 대신 오게 됐다는 설명이었다.
꽤나 시달렸는지, 밤비는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을 완전히 감추지 못했다.
“폐하께선 황제와 황후의 대관식을 함께 치르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더욱 서두르시는 이유도 있고요.”
황후의 대관식. 올 것이 왔구나.
“폐하의 뜻은 잘 알겠지만, 난 그렇게 곧장 떠날 수는 없어요.”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여기서 벌여 놓은 일도 있고, 나와 내 사람들의 사정이란 것도 있어서.”
“하시던 일은 저나 다른 사람이 수습해 드릴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천천히 귀국하거나 계속 이곳에 머무르더라도, 레이디와 아기님들은 서둘러 귀국하시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진이 너무나 보고 싶었다. 진과 아이들이 만나는 순간을 몇 번씩이나 머릿속에 그려 보기도 했다.
나 홀로 아이들을 품고 키우고 세상에 내놓고 부대꼈던 시간들에 대해 진에게 마음껏 투정을 부리고도 싶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내 마음은 다른 생각으로 복잡하기만 했다.
“솔직히 내가 황후가 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어.”
내 말에 밤비가 안 그래도 커다란 밤색 눈을 더 크게 뜨더니 목소리를 낮추어 심각하게 물었다.
“설마 아기님들의 아빠가…… 폐하가 아니었습니까?”
“…….”
밤비가 이상하게 보는 것도 당연하겠지. 이런 상황이라면 보통은 기를 쓰고 황후가 되려고 하는 게 아무래도 자연스러운 일일 테니.
아이들의 장래를 생각해서라도 말이다.
내 기색을 살피던 밤비가 멋쩍게 웃으며 자신의 말을 거두어들였다.
“실언을 용서하십시오. 아기님들이 저렇게 폐하와 똑 닮았는데, 다른 사람이 아빠인 게 더 기적일 것 같습니다. 그냥…… 폐하를 조그맣게 축소해 놓은 느낌인 걸요.”
그렇긴 했다. 두 녀석은 유난히 진을 쏙 빼닮았고 나와는 그다지 닮지 않았다.
성격은 어떤지 몰라도 생김새만 놓고 본다면 말이다. 차라리 내가 친엄마가 맞는지 의심을 살 형편이었다.
“밤비, 참 이상한 고집을 부리고 싶어져. 설명하기 힘들지만.”
“폐하를 향한 마음과는 별개로, 황후 자리가 본인의 것이 아닌 듯 느껴지신다는 말씀입니까? 왠지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역시 밤비는 이해하는구나!”
“예전에 레이디 페께서도 당시 메 공작 전하와의 결혼을 두고 비슷한 고민을 하셨거든요. 자신이 과연 공작부인이 될 만한 자격이 있는지 망설이셨죠.”
“레이디 페께서 그런 걱정을?”
“솔직히 공작부인이 되는 것보다 더 재밌는 일이 많다는 걸 일찌감치 눈치챈 탓도 있다고, 나중에 털어놓으셨지만요.”
역시 레이디 페답다며 웃었지만, 속으로 뜨끔했다. 실은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진을 사랑한다. 진과 나의 아이들이 목숨처럼 소중하다. 진의 아내가 되고 싶고, 진과 함께 이 아이들의 부모가 되고 싶다.
그 모든 마음이 진심임과 동시에 황후가 되는 건 싫었다.
나로서는 겨우 공작부인이라는 새장에서 벗어나 몇 생애 만에 처음으로 인생의 진정한 재미를 맛보려던 참인데.
도로 황후라는 새장으로 끌려 들어가는 기분이랄까.
“내일 레이디 페를 찾아뵐 예정인데, 혹시 함께 가시겠습니까? 인사도 드리고 골치 아픈 보고도 드려야 해서요.”
“골치 아픈 보고……?”
“가신다면 레이디의 신분에 대해서 미리 말씀드려 놓겠습니다. 이미 알고 계실 수도 있지만요.”
내 귀국 이야기가 한차례 오간 후, 밤비는 전쟁이 불러온 갖가지 결말과 다른 이들의 최후에 대해서도 전해 주었다.
바카리스 황제와 황후의 마지막은 좀 충격적이었다. 황후를 그렇게 보내고 진이 괜찮았는지도 걱정이 됐다.
이번 생엔 황후와 마주친 적도 없고 황후가 보낸 암살단을 겪은 것이 전부였지만, 지난 생에 극장에서 만나 한바탕 촌극을 벌이기도 한 사이이니 기분이 이상했다.
한때 진과 황후를 갈라놓기 위해 플록스와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던 시간이 얼마인지. 플록스의 술주정 사건도 다 그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고.
지난 생의 일들을 떠올리자니 황후의 죽음이 더욱 허무하게 느껴졌다.
진이 황제가 되는 일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무서운 일이었다는 것도 뒤늦게 깨달았다.
황후가 황제의 곁에 끝까지 남았던 것과는 달리, 황제의 편에 섰던 대부분의 귀족이 숙청을 피해 해외 각지로 도피했다.
황제의 최측근이자 진압군의 수장이었던 프러너스는 그 누구보다 일찍, 철저하게 도망갈 준비를 해 왔다고 한다.
외교를 전담했던 장기를 살려 타국으로 망명하기 위한 교섭을 오랫동안 은밀히 추진해 왔고, 가문의 재산도 말끔히 빼돌렸다고.
다만 그는 혼자 떠나야 했다. 아젤리아가 함께 가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아젤리아는 카를슈테인과 자신은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자신은 공작부인 작위를 받기는커녕 정실로 인정받지도 못했으며, 아이 또한 가문에 정식으로 입적되지 못했다는 이유였다.
아젤리아는 전남편인 워릭 백작에게 돌아갔다고 한다.
워릭 백작은 바카리스 황제와 프러너스에게 전부터 불만을 품고 있었기에 황위 탈환전이 시작되자마자 즉시 반란군에 가담했다.
전투에서도 누구보다 용맹을 떨쳤던 영웅이자 공신인 워릭 백작이었으므로, 아젤리아와의 재결합을 승인해 달라는 백작의 청원을 진도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어쨌든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 만큼 극심한 변화와 위기 앞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선택을 했다.
그 선택이 아름답든 아름답지 못하든. 남들 눈에 현명해 보이든 어리석어 보이든.
아마 가장 자기다운 선택을 했을 것이다.
이번 생에 황후와 아젤리아가 새로운 선택을 한 것을 보며, 누구보다 궁금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올랜도 웰츠.
이번엔 그 부부와 엮이지 않기 위해 일부러 멀리하며 근처에도 가지 않았는데. 내가 프러너스와 이혼하고 카를슈테인 가문을 나온 후에 그들은 어떻게 됐을까?
나의 또 다른 모습처럼 느껴져 늘 마음 쓰이던 올랜도가 이번 생엔 어떤 선택을 했는지 몹시 궁금했다.
* * *
“그동안 마음고생이 많았겠군요. 지금까지 잘 헤쳐 온 것처럼 부디 귀국하셔서도 잘 지내길 바랄게요.”
밤비가 귀환 인사 겸 ‘골치 아픈 보고’를 하는 자리에 동행한 내게, 레이디 페가 작별 인사인 듯한 말을 건넸다.
“북부 왕국에 온 것이 제게는 행운이었습니다. 이곳에서 많은 것을 깨닫고 얻었거든요. 그래서 실은, 조금 더 머물다 천천히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있습니다.”
“그래요? 우리 북부 왕국을 좋게 봐 준 것은 고맙긴 한데, 정말 그래도 괜찮나요? 내가 밤비에게 듣기로…….”
레이디 페의 시선이 재빨리 밤비에게 갔다가 다시 나를 향했다.
“새로운 황제를 추대하는 데 레이디가 누구보다 큰 공적을 세웠다던데요? 즉위 후의 일을 돕지 않아도 되나요? 더욱이 황후로 즉위할 거라고…….”
“그게…… 어떻게 하면 그 사람을 황제로 만들지만 생각했지, 제가 황후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거든요.”
“하하, 정말 재밌네요. 남은 황제가 되라고 등 떠밀고 자신은 황후가 되기 싫다? 언제부터 황제와 황후가 서로 떠넘기는 천덕꾸러기 같은 역할이 됐죠?”
레이디 페는 웃다가 먹던 자두 쿠키가 목에 걸려 급히 차를 들이켜야 했다.
“아, 물론 당신의 그 고민, 나는 이해할 수 있고말고요. 누가 뭐라고 해도 내가 싫은 건 싫은 거죠.”
“역시 레이디 페께서는 이해하시는군요.”
“내가 먼저 경험하고 깨달은 걸 얘기해 볼까요? 나와 맞는 곳, 내가 행복을 느끼는 곳, 나를 환영해 주는 곳으로 가는 건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에요. 레이디가 우리 북부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이겠죠.”
“맞아요. 이곳에 왔고, 이곳에 머문 것만으로 저절로 얻게 된 게 많다고, 저는 생각해요.”
“그렇지만 다른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에요.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갈 수도 있지만, 내가 있는 곳을 내가 원하는 곳으로 만들 수도 있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 레이디 페는 마치 천진한 소녀처럼 웃었다.
“원래의 북부도 좋은 점이 많은 곳이었지만, 이곳의 부족한 점들을 채우고 더 좋게 만들기 위해 내가 바꾼 것들도 꽤 된답니다. 지금의 북부 왕국은 그런 꿈들이 어우러진 결과예요.”
“맞아요. 레이디 페께서 과거 이곳의 공작부인이 되신 후, 북부가 더 살기 좋은 곳이 됐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당신은 마음먹으면 황후도 될 수 있잖아요? 뭔들 못 하겠어요. 이곳에서 마음에 들었던 것들이 있다면 제국에 도입해 봐도 되고요. 특허권이나 지적 재산권의 사용료는 아주 저렴하게 받을게요.”
공은 공, 사는 사. 역시 레이디 페 사전에 공짜는 없군요.
“돌아보면 나도 당시에 공작부인이란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었던 것 같아요. 물론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낸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인 거였죠. 아마 황후는 어떠해야 한다고 지껄이는 무리가 분명 있겠죠. 그런 욕심만 있고 의미는 없는 말에 지지 말아요.”
레이디 페는 정말 헷갈리는 인물이었다. 어느 때는 앞뒤 가리지 않고 코뿔소처럼 저돌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고, 어느 때는 식은땀이 날 만큼 깊고 신중한 것 같고.
솔직히 나는 그간 삶을 수차례 반복했기에, 내가 하는 생각들이 세상 사람들이 보통 하는 것과는 좀 다를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레이디 페를 보면 그런 나보다 더 예사롭지 않으니.
단순히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말하기엔 부족한 감이 있었다. 아무리 탁월한 천재들도 시대의 완고한 틀을 뛰어넘기는 쉽지 않으니까.
혹시 그녀에게도 나와 같은 비밀이 있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