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콩깍지가 이렇게 무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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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화. 콩깍지가 이렇게 무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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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화. 콩깍지가 이렇게 무섭습니다
2022.11.11.
“그렇습니다, 레이디. 황후가 되신다면 저도 부족하나마 힘껏 돕겠습니다. 제국이 레이디가 바라는 곳이 될 수 있도록.”
레이디 페의 조언을 곁에서 듣던 밤비도 거들었다.
“아니지! 밤비 경은 이만 북부로 돌아오라니까. 제국에서 미용 사업에 대해 감을 익혀 오라니까, 왜 여태 미적거리면서 남의 나라 황위 다툼에까지 끼어들어? 내가 속상해서.”
레이디 페가 불만 가득한 눈초리로 투덜거렸다.
“그것이, 좀 곤란합니다. 황위 교체에 제가 깊숙이 관여했던 터라 뒷일도 당분간 도와드려야 할 것 같고…….”
“거긴 사람이 없어? 기사가 전쟁에 이겼으면 할 일 다 한 거지. 뭘 더 도와?”
“실은, 교제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뭐? 이런! 어떤 놈이야?”
올 것이 왔다. 밤비의 ‘골치 아픈 보고’란 이것이었구나.
“내가 그랬지? 제국 놈들은 조심해야 한다고. 남자는 그저 속 깊고 우직한 북부 남자가 최고라니까. 겉만 번드르르하고 가벼운 데다 느물거리기까지 하는 제국 남자가 뭐 좋다고.”
연인이 생겼다는 밤비의 보고에, 레이디 페가 잔뜩 흥분해서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예정된 운명을 착실히 밟아 밤비와 말보르크는 이번 생에도 서로에게 빠져들었다.
생사가 오락가락하는 전쟁터에서도 어떻게든 짬을 내 연애도 하고 할 건 다 했네.
“대체 어떤 작자야? 연애 숙맥인 밤비를 꼬드긴 족제비 녀석이!”
“진 폐하의 친우이자 최측근인 말보르크 백작입니다.”
“흥, 하라는 전투는 안 하고 연애를 했어? 참모와 기사단장이 연애하느라 정신이 빠졌는데 전쟁에서 승리한 게 용하네.”
“그래서 더 열심히 싸웠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으세요? 서로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뭐야? 나 참 기가 막혀서. 이것 봐 봐. 그 호랑말코 같은 인간이 밤비까지 망쳐 놨잖아. 이래서 어떤 남자를 만나는지가 중요하다는 거야.”
아무래도 레이디 페는 말보르크를 마음에 안 들어 하기로 작정한 듯싶었다. 말보르크, 앞날이 험난해 보이네.
그나저나 제국 남자 욕을 계속 듣다 보니, 조금 거북하기도 했다.
말보르크는 그런 가볍고 느글거리는 부류가 맞지만, 우리 진은 제국 남자라도 전혀 그렇지 않은데 말이다.
레이디 페의 잔소리는 계속됐다.
“백작? 백작이라고 했나? 원래 하던 일은 뭐고? 가문은 건실한가?”
“원래는 폐하께서 즉위 전에 이끌던 정보 길드의 동업자였습니다. 주로 법률 쪽 일을 맡았고요.”
“정보 길드의 법률 전문가였어? 완전 사기꾼이었겠구먼. 그런 치들 뻔하지. 기생오라비처럼 희멀겋게 꾸미고 다니면서 버터같이 느끼한 눈웃음이나 치고. 말은 또 얼마나 유들유들 간지러운 말만 하겠어.”
레이디 페가 혹시 말보르크를 이미 알고 있나? 귀신이네, 귀신. 레이디 페의 얼굴에서 친언니의 모습을 보았다.
“혹시 바람둥이는 아니니?”
레이디 페가 눈을 희번덕거리면서 소리쳤다.
“여자들한테 인기가 좋은 스타일이긴 해요. 하지만 과거가 중요한가요? 지금 저한테 충실하면 됐죠.”
“뭐어? 아무리 남자 보는 눈이 없기로서니 바람둥이랑 인기 좋은 걸 구분 못 해? 우리 메 전하를 봐. 좋다며 들러붙는 여자가 한둘이 아니었는데도 눈길 한번 안 주셨잖아.”
“그랬나요? 무뚝뚝한 편이시라 영애들 사이에서 인기는 별로 없으셨던 것 같은데.”
“어머, 뭐래니? 말 한마디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절로 빛이 나는 분인데. 전하의 별호가 ‘푸른 불꽃의 고결’이었던 거 몰라? 메 전하 반만 되는 남자를 찾으라니까. 하긴 전하 같은 사람이 어디 흔하겠어.”
밤비가 너무 궁지에 몰리는 것 같아서, 또 말보르크와 모르는 처지도 아닌 데다 같은 제국 남자를 연인으로 둔 입장에서 계속 모른 척할 수만은 없어 한마디 거들기로 했다.
“밤비는 말보르크 백작의 어떤 점이 좋았어요?”
어서 잘 좀 어필해 보라고요, 그의 장점을.
“음, 재미있고 다정다감한 면이요. 북부 남자들한테선 보기 힘든 부드러운 면에 끌렸나 봐요.”
밤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레이디 페가 반박했다.
“밤비, 그건 아니지. 북부 남자들이 얼마나 다정한데. 오직 자기 여자한테만 다정해서 다른 여자들은 그 사실을 모를 뿐이지. 메 전하만 해도 얼마나 나를 애지중지하시는데.”
“네, 전하는 점잖고 다정한 분이시죠. 아랫사람들에게도 깍듯하시고, 큰소리 한번 내시는 법이 없으시고요. 하지만 솔직히 재미는 조금…… 없으시잖아요?”
“어머, 하하, 그건 밤비가 잘 몰라서 그래. 전하가 얼마나 재미있으신데. 글쎄 나를 재미있게 해 주시겠다고 세계 유머집 같은 책도 구해서 열심히 보신다니까.”
흠, 책을 보고 유머를 연구하실 정도면. 얼마나 재미가 없는 분이신지 짐작이 가는군요.
“말보르크 백작이 재미있고 다정한 사람이긴 하죠. 제국 남자들이 대체로 그런 편이랍니다.”
내가 웃으며 한마디 끼어들자 레이디 페가 물었다.
“진 폐하께서도 그러신가 보지요? 아, 말보르크 백작과 비슷한 스타일이시려나? 같은 제국 남자이신 데다 백작과 친우 사이시라니.”
“어머, 아니요!”
내가 대답하고 내가 놀랐다. 너무 정색했지?
실은 나도 말보르크 같은 스타일은 영 별로였다.
내가 아끼는 밤비가 하필이면 말보르크처럼 느끼한 기생오라비를 사귄다는 점이 이전 생부터 죽 탐탁지 않았던 사람 중 하나였고.
본인이 좋다니 차마 나쁘게 말하진 못했지만, 늘 밤비가 아깝다고 생각하며 잠깐만 교제하다 다른 남자를 만났으면 한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렇게 숨겼던 속마음이 불시에 튀어나오고 만 것이다. 진에게 말보르크 따위를 갖다 대니 나도 모르게 그만.
그런데 여기서 잠깐. 더 기가 찬 건 ‘아니요!’라고 외친 사람이 나만이 아니었다는 사실.
나야 충분히 그럴 만하지만, 밤비 당신은 왜 정색을 하고 아니라고 말한 건데?
“같은 제국 출신이고 친우 사이라도 많이 다르신가 보네.”
“폐하는 좀 다르시죠. 아무래도 부드럽고 다정한 쪽과는 거리가 있으시잖아요? 물론 속정이야 깊으시지만 겉보기에 조금 까칠한 면이 있으시죠. 일단 미간을 늘 이렇게 찌푸리고 계시잖아요.”
밤비, 그렇게 나온단 말이지.
“어머, 아니에요. 얼마나 다정하고 애교가 많으신데요. 폐하가 알고 보면 완전 사랑꾼이라니까요. 그에 비하면 내가 오히려 무뚝뚝한 편이랄까.”
내 말에 밤비가 벌레 씹은 표정을 지었다. 밤비, 두고 봐.
“아까 레이디 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한 여자에게만 다정하고 재미있으면 되는 거거든요. 그런데 말보르크는 좀, 모든 여자에게 다 친절하달까. 물론 인류애가 있는 게 나쁜 건 아니지만…….”
내 말에 밤비는 당황하고, 레이디 페는 옳다구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안 돼! 다른 건 몰라도 바람둥이는 안 된다고! 그건 불치병이라 못 고치는 거야. 밤비, 제발 정신 좀 차려. 바람둥이랑 사귀는 여자들은 착각하지. 그 남자가 나한테만은 다를 거라고. 천만에! 밤비만 상처받고 마음고생 하느라 빼빼 말라 갈 거라고!”
동의해요, 레이디 페. 나도 그 점이 정말 걱정된단 말이죠. 말보르크가 지난 생에도, 이번 생에도 진과의 의리를 지킨 걸 보면 나쁜 사람은 분명 아닌데.
나쁜 사람은 아닌데 나쁜 남자인 경우가 있단 말이죠!
나와 레이디 페가 한마음으로 눈을 번뜩이자, 밤비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하시는 바가 뭔지 저도 잘 알아요. 실은 그 점 때문에 말보르크의 구애를 처음엔 거절했거든요.”
“잘했네. 그런데 왜 마음이 약해진 거야?”
“그랬더니 말보르크가…….”
-나는 내가 만났던 여자들이 다른 남자를 만났거나 만날 것에 대해 유감을 품어 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나도 아무 거리낌 없이 많은 여자와 교제를 나누었던 거죠.
-어떻게 그래요? 그 여자들을 사랑하긴 한 건가요?
-그땐 사랑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봅니다.
-그럼, 나도 다른 남자를 실컷 만나고 와야겠네요. 그래야 공평하죠.
-안 됩니다.
-뭐라고요? 당신은 수두룩하게 만나고 다녀도 되고 나는 안 된다고요? 그건 무슨 심보죠?
-도둑놈 심보. 당신이 다른 남자와 만나고, 그 남자 앞에서 웃고, 그 남자가 당신을 끈적한 눈으로 바라보는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오장육부가 뒤틀릴 정도로 괴롭습니다.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내겐 충분히 잔인한 천형이에요. 그러니 제발 좀 봐주십시오, 밤비.
이렇게 느끼한 멘트를 날렸다는 게 아닌가.
정말 앞뒤도 맞지 않고 우습지도 않은 수작이었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또 흔들리네, 우습게도.
내가 이렇게 물렁해서 십수 번의 생을 프러너스에게 바보같이 당했나 보다.
레이디 페도 잠시 주춤하는 것 같더니, 이 정도로는 어림없다는 듯 마지막 카드를 내밀었다.
“나도 나지만, 메 전하와 원로 3두께서 가만히 계시겠어? 나도 밤비를 아끼지만, 메 전하는 밤비를 친여동생처럼 생각한다는 거 알고 있지? 또 전하가 오라버니 놀이를 얼마나 좋아하시는지도.”
레이디 페의 말에 밤비의 낯빛이 금세 굳어졌다.
“저도 실은 그 점이 걱정이에요. 워낙 유난스러운 분들이라.”
“누구보다 연애에 보수적이신 대현자님과 밤비의 검술 스승이신 기사단장님, 밤비의 양아버지이신 정보단장님. 이 세 분이 제국 출신 바람둥이를 허락하실 것 같아? 그분들 어떻게 할 거야?”
무서운 친정 오빠가 하나도 아니고 넷! 밤비, 무시무시한 사랑을 받고 있었군요.
“만일 그 호랑말코인지 말미잘인지의 바람기가 발각되는 날엔, 어떤 무서운 일이 일어날지.”
“…….”
“그 어느 해인가, 네 분이 몰려가서 못 쓰게 만들어 버린 사건 기억나? 재기 불능으로 만든 사건 말이야!”
말보르크 백작, 삼가 당신의 명복을 빕니다.
* * *
제도에도 오랜만에 눈이 내렸다.
진은 테라스에 우두커니 선 채 눈을 맞으며 북쪽 하늘을 속절없이 바라보았다.
“폐하, 오래 눈을 맞으면 건강에 해롭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뒤에서 지켜보던 플록스가 말했다.
“북부 왕국에선 아직 소식이 없나?”
“실은 방금 밤비로부터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플록스가 서신 내용을 고하자 진이 서늘한 얼굴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
당장은 귀국할 수 없다니. 그게 무슨…….
“레이디께도 그곳에서의 신변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시지 않겠습니까?”
“아니야, 그런 뜻이 아닐 거야. 그녀는…… 설마 내게서 달아나려는 걸까?”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혹시 로제트가 진을 버리고 영영 달아날까 봐 누구보다 마음을 졸였던 플록스였지만,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 어영부영하다가 그녀를 영영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조급하게 생각지 마십시오. 돌아오지 않겠다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 같다는 말씀 아닙니까.”
“로제트와 다시 만날 날만을 손꼽아 기다려 왔는데. 조급하다는 말은 억울하군.”
진은 다시 테라스로 나가 머리 위에 눈이 쌓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북쪽을 쏘아보았다.
로제트, 그곳에도 같은 눈이 내리나? 당신은 왜 내게서 멀어지려는 거지? 내가 뭘 잘못한 건지 말이라도 해 주면 좋겠는데.
한참이 지난 후에야 진은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플록스에게 되돌아왔다.
“안 되겠어. 나는 더 이상 기다릴 수는 없겠어. 어떻게든 로제트를 당장 만나야겠어.”
“폐하, 원래 이런 성정이셨습니까? 원래는 무엇에도 무심하셨던 분이? 황제가 되시더니 성정도 집요하게 변하신 겁니까?”
플록스의 입바른 소리에 진이 미간을 좁히고 조용히 노려보다 말했다.
“경은 짐과 함께한 세월이 그렇게 긴데도 아직 짐을 모르는구나. 나는 핏줄부터 집착 쩌는 인간이었다. 다만 로제트가 이제야 내 앞에 나타난 것뿐이지.”
플록스는 새파래진 황제의 눈을 보며 그만 입을 다무는 게 신상에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못 말린다, 저건.
“아무래도 내가 직접 북부 왕국으로 가야겠다.”